나는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뇌과학이 뒤바꾼 자폐의 삶
존 엘더 로비슨 지음, 이현정 옮김 / 동아엠앤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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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스릴러처럼 다음 장면을 갈구하게 만드는 놀랍고도 용감한 감동적인 이야기

자폐의 삶을 뒤바꾼 최신 뇌 치료법 회고록​ 

어느 날 마음 스위치가 켜졌다!>>


자폐의 삶을 뇌과학이 뒤바꾸어 놓았다는 문구에 호기심이 생겨서 읽게된 책이었다.

자폐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대부분 심한 지적장애를 동반한 자폐인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자폐인이 책을 썼고, 강연을 하러 다니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했다는 것이 가능한건가 싶어서 저자의 책이 궁금했다.

일단, 저자가 말하는 자폐와 내가 생각하는 자폐가 달랐다.

저자는 자폐의 한 분류인 아스퍼거증후군을 진단받은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자신이 남들과 좀 다르다는 것을 느꼈으나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할 정도의 장애는 아니었다.

저자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중퇴했지만, 뛰어난 음향 전문가로 성공했고 취미로 포토그래퍼일도 하면서, 자동차 수리 전문소를 세워 사업을 크게 일으킨 사람이었다. 가정도 있고 아들도 있고 친구도 있었다. 마흔이 되서야 자신이 아스퍼거증후군이라는 것을 진단받고 자신의 삶을 반추한 내용들을 통해 자신과 같은 증세를 가진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활발한 강연과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모든 활동들은 '자폐' 라는 단어를 떠올렸을때 가능한 활동들이 아니었다.


​저자는 책에서 계속 '자폐' 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외국과 국내 인식이 달라서인지 모르겠으나 국내 독자가 읽을 땐 용어를 구분해서 생각하며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폐의 70% 이상이 지적장애를 동반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폐도 있다고 한다. 자폐와 아스퍼거 증후군은 같은 뿌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엄연히 다른 병명을 가진 장애라고 한다.

지적장애를 동반하지 않은 자폐와 아스퍼거증후군 과도 다를 것이다.

저자는 자폐라고 계속 표현하지만, 자폐 라기 보다는 아스퍼거 라고 제대로 인식하고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자폐 라는 장애에 대한 이미지는 영화를 통해 좀더 쉽계 이해되는 것 같다.

예전에 "말아톤' 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 라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

이 영화속에 나오는 초원이는 지적장애를 동반한 자폐아였다. 자라지 않는 아이어른. 그때까지만 해도 자폐아에 대한 인식은 이랬다. 자라지 않는 아이.

최근 '증인' 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거기 나오는 여고생 자폐아는 지적장애가 없는 자폐아 였다. 감정표현이 안되고 엄마의 얼굴사진을 통해 다양한 감정표현을 외우는 소녀. 소리에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이상행동을 하지만, 고등학교 수업을 따라가는데 무리가 없고 퍼즐풀기를 좋아하고 변호사를 꿈꾸는 여고생. 자폐아에 대한 인식은 영화에서처럼 변화가 있는것도 같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자폐 도 아스퍼거 도 잘 모른다. 나또한 그렇다.


​이 두영화의 사이에 '아스퍼거' 라는 단어를 대중에 퍼트린 살인사건이 있었다. 두 여고생이 놀이터에서 초등학생을 꾀어 살해한 후 감옥에 갇히자 자신을 아스퍼거라고 주장하려 했던... 아스퍼거 라는 단어는 학계에서도 발견된지 얼마 안됐고, 국내엔 2005년에야 들어온 단어라고 한다. 아스퍼거는 지적능력엔 문제가 없으나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으로 싸이코패스와는 또다른 심리장애라는 것에서 논란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직도 정확한 진단이나 장애인 등록에는 쉽지 않은 과정이 있을 것으로 안다.


저자는 아스퍼거증후군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보면 로봇이 말하는 것 같다고 하는 것에 상처를 받지만 상처를 받은 것이 티가 나지 않고, 상대방의 기분도 읽을 수 없는, 공감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강연장에 뇌과학자가 찾아오고 TMS 라는 뇌파자극 실험에 대한 제안을 받는다. 그 실험에 참여하면서 느낀 자신의 변화를 기록한 책이 이 책이다. 자서전처럼 체험수기처럼 읽히는 논픽션이랄까.


아직 연구중이라서 치료법 개발이라고 할 순 없지만, 저자는 그 실험이후 자신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상대방의 기분을 공감하고 눈치챌수 있었던 순간의 경험은 저자가 늘 상상해오던 꿈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이 좋은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공감능력에는 우울증을 비롯한 슬픔, 고통 같은 안좋은 감정들도 처음으로 느끼게 됐고 그래서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을 느꼈던 시간의 경험이 저자는 너무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연구가 치료법으로 어서 자리잡기를 바라는 마음을 계속 표현하고 있었다.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툴고 공감능력이 떨어져서 무뚝뚝한 사람들은 의외로 참 많다. 장애라고 굳이 생각지 않고 그저 성격이라고 생각하며 살기 마련이다. 자폐라는 단어도 낯설고 아스퍼거라는 단어도 생소하지만,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일상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다. 더구나 AI와 비교하여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을 찾으려하는 이 시대에 공감능력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져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격과 장애의 구분은 여전히 좀 어려운 것 같다. 저자처럼 본인 스스로가 공감능력이 없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심하게 느끼면 장애라고 해야 하는 걸까 싶기도 하고...

 


저자의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고, 저자가 자폐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도 무리가 있다고 보지만, 공감능력이 없던 사람이 공감능력을 경험한 것에 대한 체험기 정도로 읽으면 새로운 관점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장애인들이 가정에 숨어살지 않고 사회에 나와서 함께 사는 사회가 되어야 하듯, 장애 에 대한 표현들이 점점 더 세상에 나오는 과정중에 이러한 책도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여하튼, 어려움을 극복한 이들의 경험은 늘 박수받아 마땅하다. 저자의 성공적인 경험은 박수받아 마땅하지만, '자폐' 극복은 아니었다. '자폐' 치료도 아니었다. 자폐 와 아스퍼거의 의미도 잘 인식되어 있지 않은 국내에서 읽히기엔 단어의 혼용에 아쉬움이 남는다.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 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고 한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닌가 봅니다'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늘 불행하기만 한 것도 행복한때가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자폐든 아스퍼거든 여튼 감정적 장애도 장애일진데, 장애를 가진 사람이 행복을 느끼고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다른 이를 돕기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행복도 불행도 다 거기서거기 이고 제각각인 사람들의 삶도 다 거기서거기 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의미있게 열심히 사느냐 그것이 제일 중요하달까.

저자가 자신의 삶을 switched on 시켰듯, 우리는 우리 삶에서 어떤 스위치를 켜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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