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형량의 과중함을 애소(哀訴)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항소는 다만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진보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의 소산입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젊은 대학생들이 동 시대의 다른 젊은이들을 폭행하였다는 불행한 이 사건으로부터 “개똥이와 쇠똥이가 말똥이를 감금 폭행하였다. 그래서 처벌을 받았다”는 식의 흔하디 흔한 교훈밖에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건 자체보다 더 큰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크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 것 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1985년 5월 27일

유시민

서울 형사 지방 법원 항소 제5부재판장님귀하


어떻게 저렇게 날카롭고 빛나는 문장을 쓸 수 있는지. 그것도 한번에
지금같이 워드도 없는 시대에
초고와 퇴고 없이 원고지에 일필휘지로

나는 유시민 작가가 그때,
스물여섯의 기백이 오래도록 살아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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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8-29 20: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시스템이 공고화됐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착각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보며 마음이 참담할 따름입니다.

정치해야 할 사람들은 그 판을
떠나고, 정상배들이 판을 치니...

나와같다면 2023-08-29 20:20   좋아요 2 | URL
이 절망감. 패배감. 죄책감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참담하기만 합니다

다수의 의원석을 밀어준 민주당에도 실망하고 화가 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