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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나간 생애가 너무 사소하고 볼품없어서, 그런 인생에 회한이 느껴져서는 아니었다. 사소하고도 사소한 일로 채워진 현실의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쩌면 영영 멀어지게 될지도 몰랐다. 그의 불행은 이처럼 사소하고 미세한 생활의 결을 다시 매만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이 그를 짓눌렀다. (p.168)
제약회사의 약품개발원으로 근무하는 주인공은 파견근무를 발령받고 C국으로 떠납니다. C국은 감기 유사 전염병(작년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신종플루를 떠오르게 함)으로 도시 전체가 마비 상태이고 쓰레기 천국입니다(특히나 주인공이 근무하는 Y시의 제4구는 쓰레기 더미 위에 건설된 재개발 도시라 악취가 더욱 심합니다). 위생 검열 강화로 주인공은 공항에 붙잡혀 출근을 제 때에 하지 못하고, 심지어 본사 담당자 '몰'에게서는 출근이 연기되었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주인공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거주하는 아파트는 경찰과 보건위생국의 감시를 받고, 본국에 살고 있는 전처는 그의 집에서 시체로 발견되며, 심지어 살해용의자로 지목받고 쫒기는 신세까지 됩니다. C국의 경찰은 주인공을 잡기 위해 아파트를 찾아오고, 주인공은 경찰들의 수사를 피해 4층 아파트에서 1층의 쓰레기 더미 위로 뛰어내려 도망치는 신세가 됩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도피생활이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21세기의 국가들은 과연 국민들을 어떻게 통치하고 감시를 할까요? 바로 생물학적인 질병인 전염병입니다(검역기관과 정부). 전염병만큼 국민들을 쉽게 통치하고 감시할 수 있는 수단도 없지 않을까 싶어요. 전염병에 걸렸다고 판단되는 인간은 직장에서 해고됩니다. 그리고 격리시키고 감시를 하기 시작합니다. 정부와 검역기관이 아니더라도 전염병에 걸리지 않은 인간들이 그들을 격리시키고 심지어 죽이겠죠?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만큼 인간 사회(도덕과 윤리조차)를 파괴시키는 무서운 것도 없지 않을까 싶어요. 편혜영의 <재와 빨강>에서는 그런 끔찍한 지옥도를 연상시키는 상상 아닌 현실이 아주 적나라하게 펼쳐집니다(예를 들면, 주인공은 경찰들의 눈을 피해 노숙자 생활을 합니다. 2번 노숙자가 전염병에 걸립니다. 나머지 노숙자들은 그를 비닐에 넣어 소각장에 태워 죽입니다). 악취 나는 쓰레기 더미 위에서의 생활, 전염병 공포 확산, 정부기관의 감시와 통제, SF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현재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인간의 생존력만큼 강한 생존력을 가진 쥐가 이 소설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주인공이 이런 끔직한 일을 겪게 되는 이유가 바로 '쥐를 잘 잡는 능력' 때문이거든요. 쥐를 잘 잡는 능력으로 인생의 시궁창에 빠진 주인공은 쥐와 별반 다르지 않는 생활을 합니다. 오히려 생존 능력에서는 쥐보다 떨어집니다. 쥐는 못 먹는 음식이 없는 반면 주인공은 못 먹는 음식(너무 부패하여 곰팡이가 썩은 음식)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본국에서의 삶 - (쥐를 잘 잡는 능력으로 인해 모두가 부러워하는 파견생활) C국 아파트에서의 삶 - 공원 노숙자로의 삶 - 지하 하수도에서 쥐보다 못한 삶 - (그 빌어먹을 쥐로 인해) 다시 지상에서 쥐 잡는 요원(?)으로의 삶 등 주인공의 삶은 항상 쥐와 함께 합니다. 왜 이 소설에서는 쥐 얘기가 징그럽게도 많이 나오는 걸까요? 이 소설에서 의미하는 쥐는 과연 무엇일까요?
주인공은 과연 전처를 죽였을까요? 그리고 왜 본국에서는 언어능력 및 업무능력이 떨어지는 주인공을 (단순히 쥐를 잡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해외 파견근무를 보낸 것일까요? 실제로 주인공이 본사로 부터 받은 메일은 그 누구도 보내지 않은 메일입니다. 주인공은 왜 이런 악몽과 같은 나날을 보내게 된 것일까요? 이름도 없는 무수한 존재들. 암튼 정통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미스터리적인 요소도 꽤 있고, 무엇보다 다양한 상징의 의미를 스스로 해석하는 재미가 꽤 쏠쏠합니다. 과연 이 소설의 마지막을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판단은 역시나 독자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