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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처음 본 건 대학 시절 책방에서다. 당시 남자친구와 책방을 기웃기웃하다, 뭔가 그 애에게 주고싶어 선물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난감한 주파수를 흘려대는 표지와 알 수 없는 제목이었는데도 무엇 때문인지 난 이 책을 선물했다. 그리고 2008년 이 책을 읽게 된다. 때문에 굉장히 멀리 돌아서 온 편지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더 친근감도 들었고.
내용은 초반에 산뜻하다. 진보적인 성격의 '가족'을 가진 주인공은 20대 초반 특유의 발랄함과 호기심, 그리고 매력적인 나태함을 동시에 가졌다. 하지만 우연한 사고로 머리를 다치게 되고, 그 이후로 주변에서 혹은 본인에게 일어나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스포일러형 서평은 쓰고 싶지 않아 자세한 이야기는 감추겠다.
중요한 사건만큼이나 이 책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주변과 주인공의 감정 묘사다. 일본 문학 특유의 성격이라고 여겨 한때 싫어하던 특징인데, 이상하게도 이 책은 그런 묘사들의 나열이 구질구질한 듯 생각되면서도, 한 장의 스냅사진을 보는 것 같은 편안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아마도 그건 작가가 죽을 것같은 우울함과 맑은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낙천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인상깊은 문단을 소개한다.
- 요코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같은 남자애를 좋아하여, 잠시 서먹서먹한 사이가 된 일도 있고(끝내는 내가 이겼지만), 내가 그녀 집에 놀러 가서 밤새도록 수다를 떤 적도 있었다. 이름이 좀 이상한 덩치 큰 개를 집 안에서 기르면서, 곧잘 배를 쓰다듬어주곤 하기도 했었다. 돌아오는 길은, 종종 남동생이 차로 데려다주었다. 요코의 어머니가 만든 명란젓 스파게티는 상큼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리고 놀러 가면 언제나 요코는 책상 너머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손재주가 좋아서, 그녀가 아무리 고민에 빠져 있고 아무리 심심한 표정을 지어도, 그 손은 청아하고 유연하게 일정한 질서에 따라 마술처럼 움직였다. 성당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마리아 상의 손처럼 매끄러운 손이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때면 그녀는 노골적으로 무뚝뚝한 표정을 짓는다. 더구나 집에 있을 때면 콘택트 렌즈를 끼지 않고 낡은 은테안경을 썼다. 그 당돌하기까지 한 못생긴 얼굴이 오히려 귀여웠다. 그 풍경 속에는 영원으로 통하는 억센 힘이 있었다. 멍하니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본인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않았지만,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