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편견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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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홍규의 글은 참 정갈하면서 깊다.

군더더기 없는 글에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책을 읽는 내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부모님 생각, 그리고 내 생각, 때로는 떠난 사람의 생각, 혹은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생각 등등을 하게 만들어서 생각보다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지만 한 단락 한 단락이 많은 의미를 담게 해 주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아마도 글 쓰는 사람의 축약된 의미 전달 방식이 나에게 짧은 글에 많은 의미를 담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앞부분에는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비오는 날 흙탕물을 건너서 우산을 들고 오신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한 페이지에서 나는 잠깐 멈췄다. 부모가 된 지금 나도 가끔 아이들의 우산을 들고 학교에 가면서 내가 받아 보지 못한 부모님의 마음을 아이들은 알아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부모님 모두 일이 있었던 나에게는 우산을 들고 가지 않은 날은 비 맞는 날로만 여겼던 나에게는 내가 받지 못한 것을 줄 수 있어 아이들이 좋아 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각의 흐름이 갑자기 멈칫 해졌다.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을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을 이제 부모가 된 지금에야 느끼면서 갑자기 찡 해지는 것은 아직도 덜 큰 어른의 마음일까?

 

생트집을 잡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돌려서 말씀하지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작가가 라면을 끓일 때 지금도 계란을 넣어 먹듯이, 처음 운전 하는 날 옆자리에 앉은 아버지가 사이드를 꼭 움켜 잡의시면서 안전벨트 매라고 지청구를 늘어놓으시던 기억이 스쳐갔다. 브레이크가 조금이라도 늦는 것 같으면 말없이 사이드 브레이크를 당기시며 한 소리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지는 건 아마도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 비슷한 기억이 남아서 이지 않을까?

 

소소하고 짧은 문장 속에는 가족만 남아 있지는 않았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 누군가를 추모하는 자리에 참석한 그의 철없는 배고픔에 스스로를 책망하는 그의 글을 보면서 슬픔을 나누기 위해 참석한 자리에 차가 막혀서 끼니를 넘긴 시간에 도착하여 슬픔을 나누는 일 보다 내 위를 채우는 일에 급급했던 내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래서 같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작가의 마음과 내 마음이 어쩜 그렇게 같을까? 하는 질문도 같이 남았다.

 

어쩌면 우리는 마조히스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곧잘, 우리를 짓밟고 무시하는 자를 통치자로 뽑지 않던가. 그로 인해 고통을 겪으면서도 되풀이하지 않던가. 우리 시대가 진정으로 비극적인 이유는, 이 시대가 비극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 Page 83

 

손홍규가 세상을 보는 눈은 이렇게 보인다. 잊기를 잘하고 그리고 나뉘고 다시 그 실수를 반복하고, 선조의 파천이 한강 다리를 잘라내었던 한국전쟁과 겹쳐지는 기억이듯 우리는 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아마도 그의 한 탄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을 것이다. 다만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이 더 비극이라는 것에 더 참담함을 느낄 뿐이다. 하지만 절망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누가 나의 동료인지 모를 때 나는 이 한 줄을 기억하고 싶다.

 

어쩌면 삶이란 누구에게나 점조직 같은 것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동료가 누구인지 영원히 알 수 없는, 그러기에 누구를 만나든 허리를 꼿꼿이 세워야 하는. Page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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