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즈음 정하섭은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앞뒤를 분간하지 않는 아버지의 지나친치부욕 때문이었다. 해방이 되면서 어느 곳이나 다 그랬듯 벌교읍내도 일본인 재산을 서로 차지하려고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바로 그 선봉장이 된 것이다. - P153
비난하고 욕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뻔뻔스러울 만큼 당당한 태도로 양조장 사장 행세를 했다. 정하섭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학교를 가는 것마저 싫어졌다. 아버지의 더러운 치부욕에 환멸을 느꼈고, 그 뻔뻔스러운 태도가 증오스러웠다. 아버지는아무런 노력 없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 재산만으로도 읍내에서 꼽히는 부자 축에 들었다. - P154
적의 반격은 의외로 신속했다. 23일 아침부터 중심가를 향해 무차별 비행기 폭격을 감행하는것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지상군에 앞서 비행기 폭격이 감행되고있는 것은 미군의 본격적인 출동을 의미했다. 무고한 읍민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는 읍내전투를 피해 병력을 외곽으로 분산시키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 P156
길을 걸어 선암사를 찾아다녔던 것이다. 조계산 자락에서 화전을일구어먹은 것도, 벌교땅에서 그나마뿌리내리고살게 된 것도 모두 선암사 부처님의 가피 덕이라는 것을 하대치에게 일깨웠다. 니기미, 부처님 가피를 받아서 그리 알량하게 사는구만. 씨펄눔의것, 고런 가피라면 떡 해놓고 빌어도 싫다. 점심도 쫄쫄 굶고 먼 길을 걷는 것만 싫어서 하대치는 속으로 상소리를 내질렀던 것이다. - P158
황홀한 빛의 기막힌 조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 빛의찬란함으로, 저 빛의 황홀함으로 공산혁명의 아침이 열리는 줄 알았었다. 햇덩이 같은 뜨거운 열기로 혁명의 힘이 폭발해서 반동의세력을 일거에 재로 태워 없애고 혁명의 새 천지가 이룩되리라고 믿었었다. 남조선의 지하조직이 깃발을 올린 그 절호의 기회에 북조선의 주력은 정작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둠을 이용한 후퇴, 그건 후퇴가 아니다. 야음을 틈탄 패주다. 굴욕스러운 패주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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