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집단주의적 문화가 더 쉽게 ‘명예-수치‘ 문화로 인식되는가? 한가지 이유는 주어진 명예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not storey free라 "수치심도 집단주의 문화에서 더 많이 부각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규범이 더 일반적으로 공유되고 널리 시행되기 때문이다. - P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러나 빈은 오스만제국 군대의 포위 공격을 견뎌냈다. 성벽을 더 튼튼하게 쌓아 1683 년 오스만제국의 두 번째포위 공격도 물리쳤다. 알프스의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해 철수한 적군의 요새에서 청동 대포를 3백 개 넘게 노획한 빈 사람들은 그것을녹여 18톤짜리 종을 만들었다. 그게 빈의 대표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품메린(Pummerin)이다.  - P27

그러나 굴복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페스트에 맞선 이들이 있었다. 의사와 가톨릭 봉사단체회원들이었다. 그들은 시신을 치우고 거리를 청소했으며 격리병원을 만들어 환자를 치료했다. 프라하로 피신했다가대유행이 지나간 후에 돌아온 레오폴트 1세는 희생자를 애도하고 페스트가 다시는 찾아들지 않기를 신에게 빌면서, 시신을 무더기로 던져 넣었던 그라벤에 ‘성삼위일체‘를 조각한 기둥 형태의 조형물을 세웠다. 페스트조일레였다. - P29

커피는 고대부터 전쟁과 관련이 있었다. 밤낮없이 깨어 있어야하는 군인들한테 커피는 ‘전투용 마약‘이 될 수 있다.  - P32

사람도 도시도 첫 만남이 중요하다. 내가 간직한 빈의 첫인상은
‘비현실적 화려함‘이었다.  - P35

 빈은 대성벽을 해체했을 때 새로 태어났다. 엄청난 건설붐이 일어났고 19세기 후반 유럽 최고 수준의 건축기술과 대량의 공적 자금과 민간 자본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중심은 링슈트라세였다. 대성벽은 존재(存在)함으로써 중세도시 빈을 지켰고 ‘부재(不)를 통해 재탄생의 길을 열어주었다.  - P36

모두 링 주변에 있고 건축양식은 제각각이다. 그래서 빈의 건축양식을 ‘비엔나 스타일‘ 또는 ‘링 양식‘이라고 한다. 뭐라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잡다한건축양식의 집합이라 다른 이름을 붙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 P38

하스하우스는 이 도시가 광대한 지역의다양한 민족과 종교와 문화를 가진 인간집단을 하나의 질서로 통합한 제국의 수도였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빈은 문화적 포용성이 대단한 도시야, 슈테판 광장에 이런 집을 짓는 파격을 받아들일 정도로가슴이 넓었지. 지금의 빈도 그래. 시간을 내서 훈데르트바서하우스를 봐. 내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알게 될 거야.‘ - P39

혁명의 진원지는 19세기 후반 생긴 빈 외곽의 노동자 밀집 구성이었다. 1920년대 이후에는 시정부가 주택난을 해결하려고 조성된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정치적 변화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그 지역은노동자의 권리와 시민의 자유, 복지 확대를 주도한 사회민주당의 강력한 기반이었고 1934년 2월 사회당이 주도했던 반독재 무장봉기의발화점이 되었다.  - P44

키 큰 여인이 두 팔을 앞으로 모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클림트의 <해바라기>는 <키스>와 <물뱀>을 비롯한 다른 작품을 떠올리게 했다. - P49

조각 전시실에서도 마음을 빼앗는 작품을 만났다. 원래 일부만채색했는지 일부만 색깔이 남았는지 모를 대리석 흉상이었다. 작품명은 <여자 흉상>(weibliche Biiste)‘, 제작 시기는 15세기 말, 작가는 프란체스코 라우라나(Francesco Laurana, 1430-1502)였다.  - P49

제체시온은 공 모양의 황금색월계수 장식을 지붕에 올려놓아서 ‘황금양배추‘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시장입구 위에는 "시대에는그 시대의 예술, 예술에는 예술의 자유를(Der Zeit ihre Kunst, der Kunstture Freiheit)"라는 구호를, 전면 외벽에는 "Ver Sacrum"이라는 잡지 이름을 붙여 두었다. 제체시온의 ‘슈퍼스타‘는 초대 이사장이었던 클림트가 1902년의 제14회 정기 전시회 때 그린 벽화 <베토벤프리스(Beethovenfries)‘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이 작품을 보려고  - P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We can rest assured that the Lord is 
always with us and takes care of us.  - P142

 God guides us as we journey through this life, not leaving usto figure out the way to go but coming alongside us to help us walk inHis will.  - P142

Whether our circumstances are peaceful 
or tumultuous, let us adopt the same
 perspective of seeing God‘s provisionin the present, remembering His goodness in the past, and anticipatingour joy in His presence forever. - P1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슈테플 전망대는 파리 에펠탑 전망대처럼 도시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시내뿐 아니라 공항 관제탑처럼 보이는 외곽의 쓰레기소각장, 멀리북동쪽 강 건너편의 도나우 전망대, 남동쪽 변두리의 벨베데레 궁전도 훤히 보였다. 비너발트(Wienerwald, 빈 숲)가 넓게 펼쳐진 서쪽 외곽의 구릉지대 말고는 사방이 다 평지여서 그리 감탄할만한 경치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뜻밖의 배움을 얻었다. 대성벽을 왜 쌓았고 왜 헐었는지 알 수 있었다. - P22

제약 · 엔진 · 석유화학을 비롯한 제조업이 GDP의 30%를 생산하는 ‘강소국‘이며 금융 · 유통 · 의료·복지 등 서비스산업 선진국이다. 게다가 산과 호수, 도시의 화려한 경관, 높은 수준의 음악과 예술로 세계인을 끌어들이는 관광 대국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실만으로 베를린과 파리를 능가하는 빈의 화려함을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수백 년동안 거대한 합스부르크제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빈을 탐사하다보면 저절로 합스부르크제국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 P25

오스트리아 국민은 대부분 독일어를 쓰고 가톨릭을 믿는다. 고대독일어에서 ‘동쪽 땅‘을 의미했던 국명외스터라이히 (Österreich, 오스트리아는 이 단어의 라틴어 표기법에서 유래)는 이 지역이 옛날부터 독일어사용권의 동쪽 변방이었음을 시사한다.  - P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련 정부는 "사회주의 세계 전체의 이익이 개별 사회주의국가의 이익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유럽 사회주의국가의내정에 간섭했고 헝가리와 체코의 반소 민주주의혁명을 폭력으로 짓밟았다. ‘제한주권론(制限主權論)‘ 또는 ‘브레즈네프 독트린‘
으로 알려진 패권주의 논리였다.  - P339

고르바초프가 말한 대로 소련이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사실을 확인한 폴란드 정부는 1989년 6월 4일 선거를 실시했다.
현직 총리와 장관을 포함한 유력 후보가 대부분 낙선하는 등 공산당이 참패하고 자유노조가 압승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진짜 놀라운 일은 공산당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진실을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하고 선거 결과를인정함으로써 동유럽 민주화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 P342

고르바초프는 공산당 서기장직을 사임했다. 옐친은 소련공산당의 부동산과 자산을 국유화하고 공산당 활동을 금지했다. 우크라이나를 필두로 몰도바·아제르바이잔·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아르메니아·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포했다. 1991년 12월25일, 고르바초프는 이름만 남아 있던 연방 대통령직까지 사임했다. 그렇게 최초의 사회주의국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은 지나간 역사가 됐다.  - P3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