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러나 빈은 오스만제국 군대의 포위 공격을 견뎌냈다. 성벽을 더 튼튼하게 쌓아 1683 년 오스만제국의 두 번째포위 공격도 물리쳤다. 알프스의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해 철수한 적군의 요새에서 청동 대포를 3백 개 넘게 노획한 빈 사람들은 그것을녹여 18톤짜리 종을 만들었다. 그게 빈의 대표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품메린(Pummerin)이다. - P27
그러나 굴복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페스트에 맞선 이들이 있었다. 의사와 가톨릭 봉사단체회원들이었다. 그들은 시신을 치우고 거리를 청소했으며 격리병원을 만들어 환자를 치료했다. 프라하로 피신했다가대유행이 지나간 후에 돌아온 레오폴트 1세는 희생자를 애도하고 페스트가 다시는 찾아들지 않기를 신에게 빌면서, 시신을 무더기로 던져 넣었던 그라벤에 ‘성삼위일체‘를 조각한 기둥 형태의 조형물을 세웠다. 페스트조일레였다. - P29
커피는 고대부터 전쟁과 관련이 있었다. 밤낮없이 깨어 있어야하는 군인들한테 커피는 ‘전투용 마약‘이 될 수 있다. - P32
사람도 도시도 첫 만남이 중요하다. 내가 간직한 빈의 첫인상은 ‘비현실적 화려함‘이었다. - P35
빈은 대성벽을 해체했을 때 새로 태어났다. 엄청난 건설붐이 일어났고 19세기 후반 유럽 최고 수준의 건축기술과 대량의 공적 자금과 민간 자본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중심은 링슈트라세였다. 대성벽은 존재(存在)함으로써 중세도시 빈을 지켰고 ‘부재(不)를 통해 재탄생의 길을 열어주었다. - P36
모두 링 주변에 있고 건축양식은 제각각이다. 그래서 빈의 건축양식을 ‘비엔나 스타일‘ 또는 ‘링 양식‘이라고 한다. 뭐라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잡다한건축양식의 집합이라 다른 이름을 붙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 P38
하스하우스는 이 도시가 광대한 지역의다양한 민족과 종교와 문화를 가진 인간집단을 하나의 질서로 통합한 제국의 수도였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빈은 문화적 포용성이 대단한 도시야, 슈테판 광장에 이런 집을 짓는 파격을 받아들일 정도로가슴이 넓었지. 지금의 빈도 그래. 시간을 내서 훈데르트바서하우스를 봐. 내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알게 될 거야.‘ - P39
혁명의 진원지는 19세기 후반 생긴 빈 외곽의 노동자 밀집 구성이었다. 1920년대 이후에는 시정부가 주택난을 해결하려고 조성된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정치적 변화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그 지역은노동자의 권리와 시민의 자유, 복지 확대를 주도한 사회민주당의 강력한 기반이었고 1934년 2월 사회당이 주도했던 반독재 무장봉기의발화점이 되었다. - P44
키 큰 여인이 두 팔을 앞으로 모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클림트의 <해바라기>는 <키스>와 <물뱀>을 비롯한 다른 작품을 떠올리게 했다. - P49
조각 전시실에서도 마음을 빼앗는 작품을 만났다. 원래 일부만채색했는지 일부만 색깔이 남았는지 모를 대리석 흉상이었다. 작품명은 <여자 흉상>(weibliche Biiste)‘, 제작 시기는 15세기 말, 작가는 프란체스코 라우라나(Francesco Laurana, 1430-1502)였다. - P49
제체시온은 공 모양의 황금색월계수 장식을 지붕에 올려놓아서 ‘황금양배추‘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시장입구 위에는 "시대에는그 시대의 예술, 예술에는 예술의 자유를(Der Zeit ihre Kunst, der Kunstture Freiheit)"라는 구호를, 전면 외벽에는 "Ver Sacrum"이라는 잡지 이름을 붙여 두었다. 제체시온의 ‘슈퍼스타‘는 초대 이사장이었던 클림트가 1902년의 제14회 정기 전시회 때 그린 벽화 <베토벤프리스(Beethovenfries)‘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이 작품을 보려고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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