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영하 10도가 열흘 가까이 지속되고 있고 앞으로 일주일은 계속 그럴 거라고 한다. 뒷베란다에 있는 세탁기를 동파 위험에 사용하지 말라는 아파트 방송이 연일 나오고 있고, 지난 추위에 얼어버린 세탁기를 억지로 가동시켰다가 모터가 홀랑 나가버린 기억이 있어서 어제와 오늘 밀린 손빨래를 했다. 아주 힘.들.어. 죽을 것 같다. 올해는 너무 춥다, 영하 18도는 처음 겪는 듯하다. 쪽문을 통해 집으로 오는 길에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의 좁은 틈새 바람을 마주하면 뺨이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느낌이 들 정도로 춥고, 이 겨울의 추위에 새들과 길고양이는 어디에서 칼바람을 피하고 있나, 서울역 동파 소식을 들으며 거기 거주하던 수많은 노숙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든다. 가족의 일주일치 빨래를 욕조에 집어 넣고 세제를 푼 후에 발로 밟고 손으로 짜는데 안 쓰던 허벅지 근육을 쓰려니 이곳저곳이 쑤신다. 

 

 

1. 

 

겨울은 사람을 가라앉게 한다.

오늘처럼 낮게 드리운 하늘, 추운 날씨에 나는 움츠러 든다. 

곰처럼 겨울잠을 자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2.

 

추위에 약한 식물들을 거실로 옮겼더니 집 안이 벅적벅적하다. 요즘 공중 식물인 틸란드시아에 홀랑 반하여 집안 여기저기에 녀석들을 매달고 비치해 놓았다. 햇볕이 크게 들지 않아도, 화분에 심지 않아도 하루 한 번 뿌려주는 물과 일주일에 한 번 물에 담가주는 정도로 잘 자라서 예쁘다. 손가락처럼 여기저기로 뻗어나가는 틸란드시아의 이파리들은 이국적인 묘한 매력이 있다. 건조한 중앙아메리카 출신인 이 녀석들은 과습에 약하고 몸체와 잎의 솜털을 통해 수분과 유기물을 섭취한다고 하니 그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제 자리에 놓는다. 가끔은 넋 놓고 멍하니 녀석들만 쳐다봐도 참 재미있다.

 

 

 

3.

 

알라딘의 베스트셀러를 살펴본다.

 

1위가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7위는 '신경 끄기의 기술' 이고, 37위는 '불행 피하기 기술', 43위는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48위는 '말이 칼이 될 때' 이다. 이렇게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는 방법들을 많은 사람들이 찾을 정도로 사람들이 타인의 무분별한 간섭이나 비난으로 많은 상처를 받고 있구나 싶어진다. 이런 종류의 책들을 많이 쓰고 출판하고 베스트셀러로 선택되는 경향을 통해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세요, 존중해 주세요." 라는 많은 이들의 소망을 본다.  

 

사람은 주로 두 가지 욕구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 같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와 자유롭고 싶은 욕구. 유아동기에는 사랑받고 의지하고 보살핌을 받고 싶은 욕구가 주를 이루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대로 잠재력을 형상화하고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커진다. 3살 때 호기심을 가지고 자신의 힘을 조금씩 시험해본다면, 청소년기가 되면 이러한 자유에 대한 욕구가 더욱 커지면서 성인에 대한 도전과 일탈을 실험한다. 동시에 부모에게 여전히 보호받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렇게 우리는 한 명의 성인이 된다. 그런데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와 자유롭게 성장하고 싶은 욕구는 서로 상충되는 면이 있어서

우리는 서로 수억개의 패턴으로 얽히고 사랑하고 상처를 주고 받게 된다. 사랑과 자아 실현, 늘 고민인 주제이다.

 

 

4.

 

지난주 시사인에서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부모가 된 이들의 비극적인 되물림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아직 부모가 될 준비가 안 된, 실은 어린 아이와 비슷한 심리 상태인 이들이 부모가 되었으니 책임감과 의무를 다할 의지와 끈기가 부족할 수 밖에 없다.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이 따뜻한 보살핌을 주어야 하는 입장에 서니 그게 가능하기 어렵다. 가족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어렵고 정보도 부족하고 취업을 제대로 할만한 기술이나 교육 수준도 안 되니 자녀를 방치하고 PC방이나 술집으로 도망친다. 모른 척 한다. 때로는 영유아 살인을 한다.

 

힘든 환경에서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심리적으로 매우 취약한 사람들도 있다. 이런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뉴스나 기사, 인터넷 글들을 보면 매우 염려스럽다. 사회가 함께 해결하고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고 나 역시 많은 생각을 해왔던 부분인지라 '구할 수 있었다 그 아이들' 이라는 제목의 시사인의 기사에 공감이 갔다. '고립된 아빠는 보호자가 아니었다', '몰랐거나 무기력했거나 철없거나'.

 

쉬쉬 하던 친부모에 의한 폭력, 학대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어떤 이들은 예전의 사회는 이렇게 흉악하지 않았는데 라면서 지금 사회가 잘못된 것처럼 말하지만, 나는 이런 문제를 개방할 수 있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상담했던 수많은 성인들, 특히 부부 갈등에서의 폭력의 뿌리를 본다면 그 이전에 또다른 폭력 행사가 있었다. 두렵다고 끔찍하다고 무섭다고 눈 감고 모른척 하던 일들을 우리가 이제는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생겼다. 백설공주의 계모는 실은 친모였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5.

 

어제 어떤 TV 프로그램을 보니 인터넷 게임 방송 크리에이터의 최고 연봉이 8억이었다고 한다. 유튜브나 아프리카 TV와 같은 인터넷 방송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았고, 기성 세대들에게는 생소한 직업이 많이 생기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 불안하다. 세상이 내가 모르는 어떤 것으로 흘러가는 느낌이 드는 두려움이랄까. 또한 인터넷 속의 친밀감을 위장한 단절감, 피상적인 관계, 시각적인 자극으로 인해 흥분 수치가 점점 높아지는 부분에 대한 염려. 그들만의 세계, 그들만의 리그. TV가 처음 나왔을 때 기성 세대가 바보 상자로 부르면서 염려했던 것과 유사한 마음이랄까. 그렇게 생각하면 문제점도 많지만 좋은점도 많이 있겠지 싶기도 하고.

 

그런데 사회적으로 정말 필요한 일들, 사회적 약자나 취약 계층을 돕거나 실질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들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페이는 너무나 형편없고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는 점에서 불만족스럽기도 하고. 요즘은 상담심리사라는 직업에 대해 학생들이 공부(최소 석사)는 길고 투자해야 하는 돈(평생 수련 필수)도 많지만 부자가 되기는 커녕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3D 업종이라 기피한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뭐, 사실이니 뭐라고 반박도 못하고 헤헤 웃기만 한다. 의사나 사회복지사에 밀리고 상담 업계 내부에서도 의견이 달라서 국가 자격증으로 인정도 못 받는 상황이니. ㅎㅎ. 

 

 

6.

 

투덜 페이퍼 끝. 이런 부정적인 기분은 겨울 날씨 탓일거야. 

 

 

추신.

 

지금 진짜 웃기는 심리상담사 구인 공고를 봤다.

모 대학에서 하루 근무 파트 상담원을 모집하는데 조건이 한국상담심리학회 1급이다. 1급이 되려면 석사 졸업 후의 경력이 최소 4년이다. 즉, 회사로 치면 석사 졸업 후 경력 5년차인 셈이고 1급이 현재 상담심리사 최고 급수이다. 그런데 8시간 근무, 10만원 준다고 한다. 이러니 다들 자기 자식이 같은 전공을 한다고 하면 말리겠다고 하는 걸까. 열정 페이. 칫.틱.뿡. 진짜 투덜 페이퍼 제대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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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8-01-31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춥긴 엄청 추웠어요. 그래도 오늘 낮에 영상기온이라 밀린 빨래 했어요.

저희 조카 심리학과 전공한다고해서 말렸는데 그래도 하고 싶다고 심리학과 가더라구요.

마녀고양이 2018-01-31 16:40   좋아요 0 | URL
조카분이 심리학과에 갔군요. 심리학과 자체는 워낙 분야가 방대해서 학부에서는 잘 전공하는 거 같네요.
통계나 경영이나 다양한 분야에 심리가 들어가니까요. 그리고 혹시 세부 전문가가 되려면 대학원에 진학할 때 세부 전공을 정하게 되니 괜찮을 거 같아요. 사실 학과 자체는 흥미있어요, 전. ^^

정말 정말 추워요. 오늘도 손 빨래 하고 이제 드러눕겠어요. ㅠㅠ

순오기 2018-01-31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의 문제는 사실 사회의 문제인데 책임을 개인에게 한정하는 듯...ㅠ
우리 사회는 인건비에는 엄청 인색해요.ㅠ 인건비를 적정하게 주어야 경제도 돌아가는데, 가진 자들의 욕심이 너무 커서 상생을 모르는지도...

마녀고양이 2018-02-01 11:17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언니.
너무 많은 것들을 개인의 일탈이나 문제로 돌리고 있어요. 지나치게 흥미 위주로 보도하고, 그러면 사람들도 그렇게 반응하고. 마음이 답답하더라구요. 그리고 인건비, 빈익빈 부익부의 전형이예요. 얼마 전에 최저 임금 올린 것으로 기관 산하의 복지센터들이 예산이 모자르다고 사업을 포기한다는 기사를 읽으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조금씩 나아지기를 바래봅니다.

2018-01-31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8-02-01 11:20   좋아요 1 | URL
그니까요, 영상이 잠시 되어도 세탁기는 아직 녹지 않았을 거 같아서 사용하지 못하겠더라구요.

개인 상담센터는 보험이 안 되니까 상담비가 비싼데, 센터에서 떼는 부분도 상당하구요. 상담비가 저렴하거나 무료인 기관은 상담사에게도 거의 돈을 주지 않아요. 그냥 떠넘기는 느낌이랄까. 그러니 경력이 많은 상담사들은 저렴한 기관에서 일하지 않으려고 하겠지요. ㅠㅠ

너무너무 춥네요. 따뜻한 하루가 되시기 바래요. ^^

라로 2018-02-0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거꾸로 넣으신 거지요? 처음 보고 기괴하다 생각해서 다시 보니 거꾸로 인듯? ㅎㅎㅎㅎ
암튼 진짜 인건비 너무 심하네요!!! 공부를 하기 위한 그 노력과 시간을 어쩌라고. ㅠㅠ

마녀고양이 2018-02-01 11:2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언니, 아니예요. 저 녀석이 바로 된 거예요. 사실 어떻게 놔도 상관없어요. 뿌리라는 개념이 거의 없거든요.

인건비, 진짜 심하죠. 일종의 밥그릇 싸움도 하고 있고. ㅠㅠ

라로 2018-02-01 15:51   좋아요 1 | URL
아항 ~~~그래서 공중식물 이라고 하셨구나!!! ㅎㅎㅎㅎ 처음 봤어요!!! ㅎㅎㅎㅎ 마고 님 식물 사랑하시는 것 기억나네요. ^^
저 사진이 바로된 사진이면 위는 어떻게 생겼나요? 궁금해요.
그래도 여기는 인건비는 괜찮은데 경쟁이~~~
거긴 인건비도 그러면서 경쟁이!!! ㅠㅠ
좋은 해결 방안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마녀고양이 2018-02-07 14:08   좋아요 0 | URL
언니, 저 사진이 바로 된 사진이에요. ㅋㅋ
아래가 뿌리 부분 맞아요. 물이 있으면 가늘게 뿌리가 나온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보통 줄기처럼 생긴 이파리로 수분과 양분을 흡수해서 뿌리가 거의 없어요.

매력있는 식물이랍니다.

페크(pek0501) 2018-02-0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특히 소방대원들의 봉급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밖에서 일하는 분들을 생각하게 되네요.

‘신경 끄기의 기술‘ 에 마음이 끌리네요. ㅋ

마녀고양이 2018-02-07 14:06   좋아요 0 | URL
목숨 걸고 일하시는 소방대원들이 제대로 된 처우를 받는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또한 인건비를 줄이고자 지나치게 인력을 줄인 다양한 분야, 특히 리스크가 크거나 도움이 필요한 곳에 꼭 필요한 분야에 대한 인력을 정상화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시스템의 효율성은 엉망인데, 인건비만 줄인다는 발상 자체가 참으로 탁상 행정 그자체인 것 같아요. ㅠㅠ

타인에게 신경을 쓰는 것과 신경을 끄는 것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해요.
참 어려운 일이에요. ㅎㅎ
 

 (확실한 스포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읽지 마셔요.)

 

영화를 봤을 때 느꼈던 전율을 코알라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1999년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식스 센스'를 케이블 방송에서 결재하여 함께 관람했다. 예전에 코알라에게 슬쩍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야" 라는 강력한 스포를 흘린 부분이 마음에 걸렸지만, 영화 관람 후의 반응을 보니 미리 흘리기를 잘 했다 싶을 정도로 코알라는 엄청 놀라기도 하고 슬프고 감동적이라고 펑펑 울었다. 다시 영화를 보면서 마지막의 호러 반전이 너무나 강력한 나머지 이 영화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휴머니즘과 성장 스토리, 가족애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다시 보아도 참으로 좋은 영화였다. 

 

요즘 들어 옛날 영화 중에 좋았던 영화, 좋다고 하는데 놓쳤던 영화를 다시 찾아 보게 된다.

 

정신과 의사인 크로우 박사(브루스 윌리스)가 자신이 과거에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던 빈센트라는 아동에 대한 자책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사족으로 영화나 책을 보면 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의사가 상담 치료를 병행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우리나라의 정신과 병원은 대부분 약물치료와 짧은 면담으로 끝나는데.) 크로우 박사는 빈센트의 괴로움을 충분히 동참하지 못했고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았으나, 나중에 그와의 면담 녹음 테이프에서 귀신 소리를 접하게 된다. 눈에 보이고 실제로 접하는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편견을 알아차린 크로우 박사는 유령이 보인다는 8살 소년 콜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어주고, 그의 입장에서 문제 해결책을 제시하고 곁에서 두려움을 이겨내도록 돕는다.

 

늘 이 부분이 어렵다.

그러니까 균형을 잡고 선택과 판단을 해야 하는 부분이 늘 어렵다. 늘 고민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인간중심치료의 로저스가 주창했던 "공감적 이해",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과 수용"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인간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닌 자신이 지각하는 경험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누구도 동일한 입장에 설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서 인생의 '정답'이었던 부분을 타인에게 '정답'이라고 강요할 수 없다. 그렇다고 사회성이 주요 특징인 인간 종족으로 태어난 이상 상식이나 사회적 통념에서 지나치게 벗어난 행위들을 방치하는 것 역시 그 사람의 적응에 있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고민 속에서

 

'식스 센스'를 보면서 그래도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 사람이 인식하고 있는 현실에서 가지게 되는 고민, 정서, 생각들을 진지하게 이해하고 함께 나누는 것이겠구나 싶었다. 8살 소년 콜이 보는 유령이 실재하든 아니든 간에, 그 소년에게 "유령은 없다." 라는 사실을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하는 강요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본인의 눈에 실제로 나타나는 것들을 가짜니까 무시하라고 하는 충고가 얼마나 유용하겠는가, 아마 무시할 수 있었다면 이미 무시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고, 역시 아무리 상식 선에서 터무니 없더라도 그 마음을 진지하게 받아준다면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신뢰하면서 변화를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지 않겠나 싶다. 우리는 주관적인 존재인 동시에 함께 사는 존재니까.

 

크로우 박사의 신뢰 속에서 마음을 열었던 경험이 있는 콜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는 용기를 가진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까, 떠나가지 않을까,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진짜 고민과 불안을 개방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불안정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홀로 지키고 힘든 마음을 혼자 처리했던 경험을 주로 가진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두 번째 본 '식스 센스'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소름끼치게 생긴 유령이라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게 느껴졌고 감동이 있었다. 

 

콜의 성장은 크로우 박사의 성장과 스스로에 대한 용서 및 화해로 이어진다. 어찌 보면 이 이야기는 콜의 성장 스토리기도 하지만, 크로우 박사의 성장 스토리이기도 하다. 조부모에게 맡겨져 양육되면서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 크게 애착을 지닌 아이들이 있다. 그런데 내가 만난 청소년들 중에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정도의 나이에 조부모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동안 부모는 너무나 바쁘고 정신 없는 나머지 자녀들에게 거의 신경 쓰지 못하고 방치되는 경우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은 유일한 애착의 대상이자 보호자인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또는 병약해지고 사라지는) 두려움과 공포를 홀로 삭히고 알아서 처리해야만 했고, 이러한 심리적인 어려움은 일그러진 공포의 형태(환각, 환청, 가위 눌림, 악몽, 왜곡된 사고, 대인관계 단절 및 피해망상 등)로 나타나기도 했다.

 

콜의 상처를 크로우 박사가 어루만진 것처럼 충격적인 경험을 소화할 때 누군가의 애정과 신뢰, 지지는 크게 도움이 된다. 하지만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은 매우 취약한 상태이므로 더욱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기 싶다. 마치 고슴도치처럼 등에 곤두선 가시를 보면서 속살의 상처입기 쉬운 연약함을 떠올릴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 따뜻함을 주고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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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순사랑 2019-02-08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출판사에 재직중인 편집자인데 제가 만든 책에 서평을 남겨주셨고 관련 분야에서 종사하시는 분 같아서 호기심에 들어와 댓글을 남깁니다.

식스센스는 저도 아주 인상적이었던 영화인데 칼 로저스의 인간중심치료 이론의 관점에서 영화를 해석하신 글 내용이 정말 흥미롭네요. 한편으로는 소년 콜 역시 크로우 박사에게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과 수용‘의 태도로 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부터 크로우 박사가 유령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잘못된 인식을 직접적으로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 깨닫게 해 준 셈이니...

블로그에 올리신 글 하나하나가 정말 재미있고 새로운 책에 대해서도 알게 해주네요. 앞으로 종종 들르겠습니다.^^
 
숙주인간 - 우리의 생각을 조종하는 내 몸속 작은 생명체 이야기
캐슬린 매콜리프 지음, 김성훈 옮김 / 이와우 / 2017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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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식을 위해 인간을 비롯한 숙주의 심리와 행동을 조종하는 기생충에 대한 가설과 연구 과정이 재미있고 흥미롭다. 자유의지라는 자아에 대비하여 무의식이라는 단어로 퉁 쳐지는 여러 요인에 나를 조종하는 기생충도 고려해야 할 듯. 내 마음대로 되는게 많이 없구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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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아이와 작은 방에서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뒤를 홀깃홀깃 바라본다. "선생님, 뒤에서 자꾸 뭐라고 그래요. 나에게 죽어버리라고 해요. 소리가 들려요."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호소하는데 맞은 편에 앉은 내 등에는 소름이 돋는다.

 

영화 뷰티플 마인드를 이제야 보았다. 조현병이 발병하기 시작한 대학원 시기부터 노벨경제학상을 받는 노년까지 천재 수학자인 존 내쉬가 병을 이겨내는 과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영화이다. 이 영화는 조현병이라는 병에 대한 묘사와 극복 과정,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을 거의 바이블 수준으로 그려낸다.

 

영화 속 정신과 의사는 설명한다,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일과 사람들이 사라지거나 이별하는 것이 아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환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의 두려움에 대해서. 그때부터 나는 조현병으로 투병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난 번에 만났던 그 아이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어디서든 불쑥불쑥 나타나는 미지의 존재로부터의 위협에 더불어 그것을 누구에게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으며, 네 정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얘기까지 들어야 할 상황이라면. 나는 그 마음을 충분히 알아주지 못했었다.

 

현실의 두려움을 도저히 직시할 수 없을 때 마음은 최후의 보루로 환상과 환영을 만들어내어 스스로를 보호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특별하게 만드는 천재성을 부러워하지만, 생각해보면 천재란 지적장애의 반대축인 개념이다. 즉, 통계로 본다면 정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하나의 분야에 극단적인 몰입과 집중, 번득이는 창의성을 보이는 천재들은 자폐 스펙트럼 상에 있는 경우가 종종 있고 이로 인해 인간 관계에 있어 고립되고 소외되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기는 커녕 위축되고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며 자기효능감을 느끼지 못한다. 존 내쉬 역을 맡은 러셀 크로우는 영화 초반부에 집게 손가락으로 이마를 슬쩍 슬쩍 건드리는 행동을 반복하고, 타인과의 대화에 있어 맥락에 맞지 않는 답변을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하는 연기로 그러한 느낌을 잘 살린다.  

 

만일 그를 지탱하는 아내의 힘이 없었더라면 그가 재기할 수 있었을까.

 

결국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안정적인 애착 관계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누군가에게 있어 자신이 소중한 존재이고 가치 있는 존재이며, 그 대상이 내 곁에 남아서 기다려주고 지지해줄 거라는 믿음은 사람을 안정시키고 성장시킨다. 존 내쉬는 가족 곁에 남기 위하여 단순하고 평범한 일상생활을 선택한다. 힘들 때마다 자신을 지지해주던 환영 속의 친구를 모른 척하고, 위축되어 있는 자아가 특별해지는 환상들을 버리면서 노력한다. 그의 환상은 실은 자아의 절실한 소망이었다. 그는 그 소망을 단번에 이루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대신,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천천히 적응적인 방식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대처 방법을 영화에서는 늘 곁에서 바라보는 세 사람의 환영으로 표현한다.

 

소중하고 특별해지고 싶다는 존재의 절실한 소망과

혼자가 될지 모른다는 존재의 마지막 두려움을 내려놓고

한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영화에서 묘사된 내쉬의 용기와 아내의 헌신에 마음이 짠하다.

 

 

- 추신. (워낙 유명한 영화이니 완전 스포를 해도 괜찮겠지.)

 

영화에서 환상 속 존재로 표현된 세 사람은 내쉬의 중요한 소망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대학원 친구는 필요할 때마다 곁에서 그를 격려하고 편을 들어주는 지지 기반의 표상으로, 정부 요원은 국가 기밀을 책임질 정도로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인정 욕구의 표상으로, 그리고 마지막에 나타난 여자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따뜻하게 보살핌을 받으며 마음대로 뛰어놀지 못한 유아적인 자아의 표상으로 말이다. 여자아이는 내쉬의 중요한 깨달음을 위해 나타난 장치일 수도 있으나,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내면 아이의 슬픔과 상실, 애도일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이 소망들은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한 소망들이 아닐까, 적어도 내 마음에는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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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1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11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8-01-11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봤던 영화인데, 당시엔 조현병에 대한 이해없이 그냥 봤었나봐요. 이 글 읽으니 다시 보고 싶네요.

요즘 고독, 외로움, 가족 등 단어와 내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마녀고양이 2018-01-12 19:25   좋아요 0 | URL
예전 좋았던 영화들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영화나 책이나, 좋은 작품들을 또 보고 또 봐도 새로운 것 같아요.

감은빛님, 삶과 가족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시네요.
저도 요즘 인생의 진짜 소중한 것들에 대해 많은 것들을 깨닫는 중이랍니다.
고독과 외로움도 생각하신다니, 다소 걱정이 되긴 합니다만, 필요한 시간을 가지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상담자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편견과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이 쓰고 있는 색안경으로 인해 내담자에게 어떤 덧칠을 하는지 인식하고 경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상담자는 기계적인 중립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시시각각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인지하고

기울어진 측면이 있다면 그 부분을 감안하여 내담자를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 

 

자신의 편향성을 인식하는 과정은 불편감을 동반한다.

이제껏 자신이 구성해 온 세계와 불일치되는 부분들을 발견하면서 이질감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그 불편감은 기꺼이 맞이 해야 할 건강한 불편함이다. 

그래야 개인으로든 상담자로서든 성장을 이룰 수 있다.

 

- 상담심리사들의 톡방에서 성소수자 토론으로 올라온 글 중에서 일부 발췌 (by 변상우 선생님)  

 

 

불편하다고 피하고 모른 척 할 일이 아니라,

그 괴리감과 이질감을 점검하면서 내 세계에 통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다르다는 사실은 불편할 수 있지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늘 시사인에서 영화 '원더'의 소개를 읽었다. 얼굴 기형을 갖고 태어나 스물일곱 번의 성형수술을 했던 아이가 구년 동안의 홈스쿨링을 중단하고 열 살에 학교에 보내기로 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라고 한다. 

 

"외모는 바뀌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의 시선을 바꿔야죠." 라는 문장이 남는다는 이 영화를 나도 봐야겠다.

 

  

 원더, 책으로도 나왔다는 사실을 방금 알았다. (원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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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1-10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편함을 너무 오래 방치하면 편향성을 고치기 힘들어져요.

마녀고양이 2018-01-10 17:36   좋아요 1 | URL
네, 그렇죠.
불편함을 무조건 수용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랍니다. ^^

2018-01-10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8-01-10 17:55   좋아요 1 | URL
제 댓글에서 오해를 낳지 않을까 싶어서 지우고 다시 쓰려고 했는데 이미 답글을 다셨네요.
지금처럼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제 글과 다소 다른 느낌의 댓글이라서, 저 역시 제 생각에 취해 있다가 약간 당황했답니다.
사이러스님의 댓글 자체를 그 자체로 바라보기 어려웠던 점은 저 역시 반성해야 할 것 같네요.

2018-01-10 1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8-01-10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인용하신 마지막 문장 ˝외모는 바뀌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의 시선을 바꿔야죠.˝ 이 좋은데요.
시선이 바뀌면 이전과는 달라지는 것이 많을 것 같아서요.
마고님, 오늘 저녁이 많이 추워요. 따뜻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마녀고양이 2018-01-11 10:14   좋아요 1 | URL
오늘 아침은 너무너무 춥네요.
시선이 바뀌면 좀 더 따뜻한 우리가 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무조건 이해만 하자는 의미는 아니지만요. ^^

페크(pek0501) 2018-01-11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을 배려하려는 생각과 자신을 성장시켜야겠다는 생각. 이 두 가지를 우리 모두 갖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녀고양이 2018-01-12 19:26   좋아요 0 | URL
네네, 둘 다 적정선에서 균형을 맞춰야 할 것들 이네요.
우리 모두 잘 가지고 가면 좋겠어요. 오늘 날이 너무 춥네요. 따뜻하게 입고 다니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