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불의 연회 : 연회의 준비 - 하 도불의 연회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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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는 실제의 시간 속에, 과거라는 허구의 시간이 통으로 들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11p, 상권

 

나처럼 그저 빈둥빈둥 억양 없는 생활을 보내는 자유업의 경우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부자유가 있어야만 자유가 있는 법. 구속 없는 해방은 있을 수 없는 노릇이라, 타율적 지배를 받지 않는 몸인 이상 자유를 획득하려면 모든 일을 자율에 맡길 수 밖에 없다. 그 경우 스스로에게 가해지는 중압은 압도적이다. 자유업이란 이름 뿐이다. - 21p, 상권

 

분명히 아주 약간만 균열이 가도 일상의 표면을 찢고 넘쳐날 것이다. 그 사실을 모두가 어렴풋하게는 알고 있다. 어디에선가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적어도 이 세상의 어둠은 남의 일입니다, 허풍입니다, 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리라. - 28p, 상권

 

하지만 빠진 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보충된다.

결락과 보완을 되풀이하면서, 기억은 수정되어 간다.

그것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 36p, 상권

 

일본인도 중국에서 악귀나 나찰 같은 짓을 저질렀지요. 아무리 전쟁이라고 해도 보통은 할 수 없는 짓입니다. 하지만 국체를 믿고 저질러 버렸어요. 꼭 그것만은 아니라고 해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부분은 있습니다. 의심하고 있었다면 그런 무도한 짓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도 자신들의 정의를 믿고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쨌든 그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건 진실이었던 겁니다-- - 107p, 상권

 

이 세계는 모두 진실입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것으로 되는 겁니다. 사람은 항상, 진실의 한 가운데에 있어요. 하지만 사람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지요. 왜냐하면,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세상을 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라는 좁은 거푸집에 세상을 끼워 넣으려고 하니까 알 수 없는 게 나오는 겁니다. 모든 것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시점에서 세계는 당신 거예요. 하지만 자신을 지키면서 세계를 알려고 한다면 --- 모든 수수께끼를 해명하려고 한다면 --- 그때는 자신이라는 그릇을 세계와 같은 크기로, 무한히 넓혀야 하지요. 이건 어려운 일이에요, 그러니까 ---- 진실을 향수하기 위해서 자아가 방해된다면, 그런 시시한 건 버려 버리는 편이 훨씬 편하답니다. - 138p, 상권

 

시간은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도 깨끗하게 떠나야 한다고, 아케미는 생각한다. 죽어서 나중에까지 뭔가 남기려는 것은 욕심이다. - 178p, 상권

 

소중한 것. 흔들리지 않는 무언가. 버릴 수 없는 것.

그런 무게나 단단함이나 크기를 가진, 무언가 훌륭한 것이 보통은 누구 안에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크면 클수록 그 사람은 행복할 테고,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안심이 되고,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안정되어 있는 걸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 제거되어 버린다면. 크면 클수록 구멍이 커진다.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상처는 깊어진다.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안정감은 사라진다. 그리고---

 

내 경우는 어떨까.

그렇다, 내 경우는 처음부터 그런 확고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마음에는 항상 구멍이 뚤려 있다. 내 머리는 텅 비어 있고, 나는 늘 부유하고 있다. 마음이 뻥 뚫리는 것이다. - 382p, 상권

 

인생에서 결론이니 결과니 하는 것은, 실은 통과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쯤에서 매듭을 지어 둘까 하는, 뭐 표시 정도의 것이겠지요. 인생에는 매듭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종착은 없어요. - 386p, 상권

 

돈만 내면 이 자그마한 남자는---,

--- 나도 구해 줄까.

속을 뿐이라고 해도---.

끝까지 속여 준다면---. -416p, 상권

 

 

논리에는 인정도 용서도 없다. 구부러지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슬품이나 재미도 없다. 있는 것은 선택의 여자기 없는 과정을 축적하는 기쁨과 정합성을 가진 결론에 다다랐을 때의 기쁨뿐이다. 한 치의 틈도 없다. 멋지다----고 생각한다. 현실은 그런 아름다운 형태로 결실을 맺을 수 없다. 현실의 세계는 불안정하고 비합리적이고 엉성하다. 논리나 개념 같은 것은 요컨대 경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개 순수한 사색에서 도출되는, 비경험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생활에 바싹 붙어 있는 것은 아니다. - 20p, 하권

 

그래, 믿고 있던 것을 믿을 수 없게 되면, 그 구멍을 메우듯이 다른 걸 믿는 거지. 또 속이는 놈들이 계속해서 나오거든. 그러니까 어디까지 가도 속게 되는 구조지. - 153p, 하권; 가끔은 내 직업이 약장수 같다는 생각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의사, 한의사, 최면술사, 점쟁이를 거쳐 내게 오기도 하고, 정답을 달라고 바싹 고개를 내밀었다가 한 방에 해결되는 특효약이 없음에 실망하며 떠나가기도 한다. 그것이 인생인데 말이다.

 

이제 괴멸적으로 나는 망가져 있었다.

이제 나라는 일인칭을 쓸 수 있을 만한 나는, 내 안에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줄줄 녹아 털구멍을 통해서 비어져 나와, 배수구를 통해 흘러가고 말았다. 지금쯤은 구정물에 섞여 어디까지가 나인지 알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행복하다. - 267p, 하권; 문득 "자아"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내게 묻는다, 자기의 "자아"가 정상적이냐고. 그런 분들은 대부분 자아가 단단한 땅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자아"라는 것이 풀썩 꺼지는, 얇은 살얼음 위에서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일을 할 수록 영유아기와 유년기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사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불필요하게 과잉된 환상이 사라지는 것 뿐이다. - 278p, 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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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밑줄 긋기를 하고 나니, 더욱 더 이 작품을 팔아버리기는 커녕 교고쿠 나쓰히코의 백귀야행 시리즈를 홀랑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이 굳어진다. 이로써, 읽고 싶은 목록이 더 추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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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8-0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더운 날입니다.
마고님 즐겁고 시원한 하루 보내세요.^^

마녀고양이 2016-08-05 10:00   좋아요 1 | URL
정말 더운 날이네요.
건강 챙기시고 즐거운 하루 되셔요. ^^

후애(厚愛) 2016-08-0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고님 즐겁고 행복한 8월 되시길 바랍니다.^^
늘 건강하시고, 더위조심하셔요~~

마녀고양이 2016-08-05 10:00   좋아요 1 | URL
후애님도 즐겁고 행복한 8월 되셔요.
너무 너무 덥네요... 에공
 

 

0.

 

사람들마다의 해석이 천차만별 다르다는 면에서 영화 곡성은 멋진 영화다. 훌륭하게 사람들의 내적 투사을 이끌어 내어 자신을 투영하게 만든다. 삶과 죽음, 선과 악, 신과 악마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주제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주제이지만, 한국 영화계에서 분명 색다른 충격을 안겨준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 영화를 인간이 어떻게 유혹에 무너지는가와 연관된 인간 역사의 에피소드 변주 중 하나로 해석하였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은 이후, 의심과 두려움(공포),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화는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꾸준히 반복되는 주제이다. 호랑이처럼 강한 발톱과 힘을 가진 것도 아니고, 토끼처럼 빠른 발을 가진 것도 아니며, 원숭이처럼 나무를 잘 타는 것도 아니고, 새처럼 날아다닐 수도 없으며, 물고기처럼 헤엄을 잘 칠 수도 없이 오직 사유할 수 있고 도구를 활용할 수 있는 이점으로 진화해 온 인간에게, 동굴 밖 세상은 수많은 시험을 거쳐야 하는 위험한 장소이다. 우리는 당연히 의심해야 하고, 당연히 반성해야 하며, 당연히 예측하려고 애써야만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고, 우리의 선조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런데 신화나 종교는,

 

무조건 믿으라 한다. 이는 참으로 모순적인데

 

환웅의 말에 따라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개를 받아 삼칠일 동안 햇볕을 보지 않고 버텨낸 웅녀를 보면서, 중간에 포기한 호랑이가 훨씬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의심하고 포기한 호랑이가 너무나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종교나 신화는 인간의 본성과 거리가 있는 무조건적인 신뢰를 강요하면서 충성을 맹세시키고 그 아래에는 강력한 통제의 의도가 숨어있다고 느낀다.

 

맹목적으로 믿으라, 의심하지 말아라.

 

이는 곡성에서 신을 대변하는 무명-이름 없는 자-가 인간에게 외치는 말이다.

 

 

1.

 

시험에 걸려 드느냐,

생존이라는 미끼를 걸어 낚시를 던지고 어떤 물고기가 잡히는지는 물고기의 선택에 따른다.

 

이름 없는 자가 지키는 마을에 "외지인"이 나타나서 낚시 줄을 드리운다. 이에 일광-하나의 빛-이라는 유혹이 나타나서 교묘하게 판을 흔든다. 저기 있는 악은 자명하다, 거기 가서는 안 된다. 그런데 여기 반짝이는 빛은 희망의 빛인지, 타락의 빛인지 혼란스럽다. 일광의 말과 무명의 말이 일치하지 않을 때, 무명이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이해시켜주지 않으며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할 때 더욱 그렇다.

 

짧게 한 컷 나오는 신부님은,

악마가 흔드는 미끼를 초연하게 무시한다. 그는 의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시험을 통과한다. 그러나 주인공 종구와 수련 신부는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공포에 다다르며 미끼를 문다.

 

선택은 온전히 물고기의 책임이다. 불공평하다. 불공정하다.

 

 

2.

 

인간에게 있어 공포의 영향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를 밀어내고 내 몸 속에 들어와 살고 있는 누군가에 대해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내 몸속으로 들어온 그 누군가는 원래의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은 끝에 결국 빈 껍질만 남겨 두었다. 차라리 죽여주기를 바랐지만 내 바람은 묵살되었다. 난 자비라는 감정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오래 전에 잊었다. 그날 이후, 나는 죽음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미 오래 전 그 음험하고 불결한 방에서 죽었지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살아남았다. 아니 내 대신 걷고 말하는 누군가가 다시 태어났다. - 8p, 마리오네트의 고백, by 카린 지에벨

 

직업을 컴퓨터 다루기에서 인간 대하기로 바꾼 이후, "정서"의 영향력에 종종 충격을 받게 된다. 인간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상드라는 그동안 철저히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파트릭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영혼은 파트릭에게 철저하게 장악되어 있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그의 명령을 따르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하는 듯했다. - 227p, 마리오네트의 고백, by 카린 지에벨

 

이겨내야지, 죽을 힘을 다 하면 이겨낼 수 있어, 제 정신이야, 미친 것 아니야,

도저히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낯선 타인에 의해 강간을 당할 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불쑥 올라 온 어린 시절에 대들었다가 매 맞은 공포로 인해 얼어붙고 그대로 끌려간다. 차라리 공부를 안 하면 될 것인데, 어린 시절 시험지에 틀린 갯수대로 혼났던 공포로 인해 죽으려고 한다. 해결되지 않은 공포, 즉 트라우마란 이렇게 무섭다. 죽음에 대한 공포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에게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든다.

 

 

3.  

 

곡성에서 들이미는 공포는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에게 불공평한 시험이다.

낚시밥을 무는 물고기의 탓을 하니, 억울하다.

 

(감독의 세계관이나 어떤 의도이기도 하겠지만 사회 시스템 전반에 불공평한 시험이 만연하다.)

 

 

4.

 

인간은 생존의 상황에서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얼어붙거나. Fight, Flight, Frozen.

 

어떤 이들의 인생은 이야기처럼 흘러가는 것 같다. 내 인생에는 마침표와 출발이 많았다. 트라우마가 그렇다. 줄거리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다. (...) 갑자기 일어나고, 삶이 다시 이어진다. 그 누구도 각오하라고 알려줄 수 없다. - 31p, 몸은 기억한다 에서 제시카 스턴의 거부:테러의 기억 인용구, by 베셀 반 데어 콜크

 

최근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뇌 과학과 진화심리학 분야는 트라우마와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인간의 뇌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자극을 경험하면,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기억 처리 과정을 끊어버리고 그때의 자극은 고스란히 해마에 남게 된다. 마음이 아예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호하고자 잊어버리기도 하고 묻어버리기도 하고 망상이나 꿈의 형태로 변형시키기도 한다. 생존을 위한 결함이다. 그것을 "악의"로 변형시키는 것은 정말 불공정하다.

 

성폭력 희생자, 전투 군인, 성추행을 당한 어린이 대부분은 자신이 경험한 일을 생각하면 너무 불안해서 그 일을 마음 속에서 밀어내려고 하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공포의 기억, 나약함과 취약함이 맞닥뜨려야 했던 수치심을 안고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하려면 실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누구나 트라우마를 이겨 내고 싶어 하지만, 뇌에서 우리의 생존을 담당하는 부분(이성적 사고를 담당하는 저 아래 깊숙한 부분)은 사실을 부인하는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 정신적 외상을 입은 경험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위험을 암시하는 실낱같은 단서만 주어지면 다시 활성화되고, 뇌 회로를 뒤흔들며 방대한 양의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시킨다. 이로 인해 불쾌한 감정은 신체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고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촉발시킨다. - 24p,  몸은 기억한다, by 베셀 반 데어 콜크

 

생존과 관련된 부분은 트라우마 이전의 본능적인 부분, 변연계에 저장되어 트라우마보다 더욱 극심한 반응을 야기한다. 이러한 인간의 공포와 두려움이 어쩌면 무조건적인 믿음과 진실, 선이라고 정의된 어떤 것을 이상화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현실이 아닌 인간의 소망이 아닐까.  

 

 

5.

 

모리 히로시의 "F" 시리즈를 좋아해서

출간될 때마다 사모으고 있다. 휴가를 맞이해서 마음 편하게 몇 달 전에 출간된, 출간되자마자 환호하면서 구매한 책을 이제야 읽는 중이다. 내가 이 책에 매료된 까닭은 이공계 출신의 작가가 이공계 교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상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을 거야. 차고 벽에 바깥 풍경이 비쳐 있었어. 그것도 위아래가 거꾸로.

모에는 순간 생각한다. 그리고 금세 알아차렸다.

아아, 바늘구멍 사진기 원리죠?

그래, 우편함의 틈새에서 새어든 빛이 반대쪽 차고 벽에 바깥 풍경을 거꾸로 새긴 거지. 차고 자체가 커다란 카메라가 됐고, 나는 그 안에 있었어. 재미있긴 했지만 무서웠다. 왜냐면 이유를 알 수 없잖아. 그때는 아직 이해할 수 없었지.

마법이라고 생각했나요?

아니, 내가 모르는 법칙이라고 생각했어. 사이카와는 빙긋 웃는다. 지금도 뭔가 이상한 일과 맞닥뜨리면 내가 모르는 법칙이라고 생각해려 해. 이 세상에 아무도 모르는 법칙이 있을지도 모른다.

멋진 이야기네요.  - 264p, 환혹의 죽음과 용도(F 시리즈 6권), by 모리 히로시

 

어제 이 문구를 읽는 순간 즐거웠다.

오늘 이 페이퍼를 쓰고 있는 동기이기도 하다.

세상을, 두려움과 의심과 공포가 아닌, 아무도 모르는 법칙을 발견하는 과정으로 살아가고 싶다.

 

 

6.

 

동시에 자각한다.

나는 세상과 타인과 이해를 넘어선 무엇을 많이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무서워하는구나. 간절한 바람은 늘 핵심적인 불안과 맞닿아 있다. 안전함을 갈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싶다.

 

영화 곡성을 연달아 두 번 보았다. 크게 재미있지 않았으나 

감독의 의도에 호기심이 일었다.

 

인간의 공포는 진화론적으로 자연스러운 부분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것을 진화론적으로, 그저 우연의 산물로, 공룡이나 곤충과 유사한 발달 과정으로 이해하기에는, 허무함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람들은 의미에 매달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존주의는 현재에 충실하게 만들지만,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한 공허함을 뿌리치지 못하며, 스스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빅터 프랭클의 말을 긍정하면서도 내면 깊숙히 주어진 자유와 책임에 불안하다. 그리하여 종교, 어느 편이 선이고 어느 편이 악인지를 누군가가 정의해 준 추상적 표상이 인간을 도리어 안심시켜 주는지도 모르겠다. 불안정 애착을 지닌 사람과 종교를 연관시킨 수많은 연구 논문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강화된다. 그래서 나는

 

범심론자와 불가지론 사이를 헤매고 있는 상태이다.   

역시 곡성은 고민을 던져 주는 멋진 영화다.

 

 

 

 

 

 

 

 

 

 

 

7.

 

빠진 부분은 어떤 형태로 보충된다.

결락과 보완을 되풀이하면서, 기억은 수정되어 간다.

그것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 37p, 도불의 연회 상권, by 교고쿠 나쓰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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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7-28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역시 마고님은 제가 모르는 책을 참 많이 알아요.
전 저 F 시리즈 오늘 첨 알아요.
이공계 교수 내세웠다니까 진짜 나두 궁금하네.
모을 정도라니. 저도 기회되면 함 읽고 볼게요.^^

마녀고양이 2016-07-29 09:52   좋아요 0 | URL
F 시리즈는 추리소설이예요,
언니가 좋아하실지 잘 모르겠어요.. ㅋㅋ
저는 장르 소설을 워낙 많이 모아서, 살짝 걱정이.

그래도 제 글을 읽고 그 책을 읽어봐주시겠다는 마음, 잘 받았습니다~~~~

땡순사랑 2019-02-08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댓글 쓰고 아직 블로그에 머물러 있는데 곡성 역시 정말 큰 충격을 준 영화였어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 글 잘 읽었습니다.^^
 

0.

 

올해 산세베리아가 꽃망울을 맺었다.

이 아이와 함께 한 지 10년만에 처음으로 산세베리아도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았다. 올 봄, 바쁜 와중에 새 흙을 보충해주고 비료를 뿌려주고 이 주에 한 번이라도 물을 주었더니 이렇게 보답한다.

 

 

 

워낙 꽃을 피우지 않는 아이라, 산세베리아의 꽃을 보면 복이 온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올해 우리 집은 평온하다. 감사한 일이다.

 

 

1.

 

과감하게 금주 일을 다 빼버리고 열흘의 황금 휴가를 얻었다.

텅 빈 시간, 실은 할 일은 너무나 많지만, 그래도 텅 빈 착각이 드는 이 시간에 나는 신나게 소설을 읽는 중이다. 카린 지엔벨의 "마리오네트의 고백"을 읽고, 교고쿠 나쓰히코의 "도불의 연회" 상하권도 읽고, 미미 여사의 "괴수전"도 읽고, 모리 히로시의 "봉인재도"도 읽고 있다. 완전 장르 소설 만세다.

 

교고쿠 나쓰히코는 "우부메의 여름"을 읽고 장광설에 질려서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수 세월이 지나 어떠한 작가인지 까먹고 최신작을 홀랑 샀다가 다시 장광설에 질리면서도 묘한 매력에 다른 작품도 읽어야 하나 고민 중이다. 어제 알라딘의 서평을 뒤적거리는데, 잘 아는 알라디너가 이 책의 장광설에 질려 다시는 안 읽는 사람이 많다, 호불호가 갈린다는 글을 써서 내 얘기 같아 픽 웃었다. 장광설에 담겨진 인생의 깊이를 느껴봐야겠다고 마음이 흘러가고 있다.

 

지금 나는,

황금 휴가 동안 어느 시리즈 물을 해치울까 생각에 잠겨 있다. 한 번 들면 밤 새어 읽고 정신 못 차릴까 싶어서 미뤄두고 미뤄둔 시리즈 물들, 왕좌의 게임, 파운데이션, 십이국기, 은하영웅전설, 대략 넉넉하게 열 권은 되는 시리즈 물을 읽으면 휴가가 다 지날 터인데, 마음 잡고 못다한 공부를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과감하게 핸드폰 게임과 TV 드라마를 끊어야 할 것 같기도 하다가도,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 뭣 하나 싶기도 하다. 인간은 생산성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닌 유희의 존재이기도 하지 않나. 유희를 통해서도 성장하지 않나.

 

 

 

 

 

 

 

 

 

 

2.

 

코알라가 고1이다.

학교 수행 평가로 만든 작품이 예뻐서 허락을 받아 알라딘 서재에 올린다.

 

제목 : 병 안의 소녀 (글, 그림 코알라)

 

 

 

어느 날, 기적적으로 병에는 문이 생겨났습니다.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소녀는 문을 열고 병 밖으로 나갔습니다.

 

 

 

소녀는 봄을 맞이했습니다.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봄. 새로운 생명이 한 아름 가득한 봄은,

병 밖의 세상에 막 나오기 시작한 소녀를 위한 것 같았습니다.  

 

 

 

또 걸어가,

소녀는 여름을 맞이했습니다. 푸릇 푸릇 초록이 가득하며 활기찬 여름은,

이 세상이 즐거워지는 소녀의 마음과 같았습니다.

 

 

또또 걸어가,

소녀는 가을을 맞이했습니다.

주황빛으로 쌀쌀해진 가을은, 소녀가 더워서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계속해서 걸어가,

소녀는 겨울을 맞이했습니다.

하얗게 모두가 조용해진 겨울은,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을 위한 쉬는 시간과 같았습니다.

 

 

 

소녀는 이제 병 밖에 있습니다.

병 안의 세계를 나왔고, 소녀는 병 밖의 아름다운 세계를 알았습니다.

소녀는 이제 병 밖에 있습니다.

 

 

 

3.  

 

아직 미숙한 코알라의 작품에서 싱싱함과 활기와 고민을 읽는다. 그리고

성장하고 있는 딸아이를 느낀다. 자신을 보호하고자 병 안에만 숨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딸아이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서 병 밖의 세상을 만나기 바란다.

 

그리고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4.

 

산세베리아가 일주일만에 만개했다.

 

 

 

산세베리아 꽃은 우아한 다크 초콜릿 향이다. 그윽한 난초 향도 닮았다. 아니,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향이 난다. 우리들처럼, 고유하고 독특하고 유일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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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6-07-26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알라의 작품이 훌륭하네요.

선인장류의 꽃은 매우 드물게 펴서 예전에 우리집의 선인장 꽃을 볼 때마다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녀고양이 2016-07-26 12:21   좋아요 0 | URL
저희집 선인장도 어떤 녀석은 매년 꽃을 피우는데 어떤 녀석은 사왔던 첫 해만 보고 그 다음에 한 번도 못 봤어요. 제가 생육 조건을 못 맞춰주고 있는 것 같은데, 어렵더군요. 있는 그대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 늘 고민입니다. ^^

코알라는, 공부가 최상위권은 아니지만,
열심히 성실하게 자율적으로 하는 예쁜 딸로 자랐네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성적보다 수행 평가 성적이 월등한 점이나 선생님들의 평가가 좋은 점을 저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답니다. 지금은 최상위가 아니지만, 여러모로 대기 만성할 거라고.. 그게 부모로서의 제 목표이기도 합니다.

waxing moon 2016-07-26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산세베리아 꽃향기 매우 향기롭죠. ^^

마녀고양이 2016-07-26 12:55   좋아요 1 | URL
꽃향기를 맡아보셨군요, 참 독특한 향기예요..
꽃망울에 맺힌 꿀도 참 맛나구요. ^^

서니데이 2016-07-26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이 그린 일러스트 예뻐요. 학교수행평가로 다양한 것을 하나봐요. 잘 보았습니다.^^

마고님 요즘 정말 더운데, 휴가에 마음에 드는 책도 읽고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

마녀고양이 2016-07-26 14:33   좋아요 1 | URL
네,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여 동화책 만들기 가정시간 수행 평가였답니다.
그런데 정작 코알라는 그림이 마음에 안 든다면서 투덜대는군요.
제가 보기에도 딸바보라서 그런가, 예쁘기만 한데.

서니데이님도 편안한 여름 되셔요~

자목련 2016-07-26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세베리아 꽃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귀한 꽃이네요.
거기가 꽃보다 더 귀한 따님의 작품까지. 예쁘고 사랑스럽고 단단한 그림이라고 전해주세요^^*

마녀고양이 2016-07-27 11:08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 봤어요. 기쁘더라구요.
그리고 코알라의 그림 칭찬, 꼭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blanca 2016-07-26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생일 때의 코알라 모습 기억나는데 벌써 여고생이라니... 게다가 수행평가물은 정말 사랑스럽네요. 아, 정말이지 너무 덥네요. 즐거운 휴가 되시기를 ^^

마녀고양이 2016-07-27 11:08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은 벌써 아이 둘 엄마잖아요.... ㅎㅎㅎㅎㅎ
너무너무 더운데, 지금 비가 쏟아지는군요. 건강 챙기세요.

보슬비 2016-07-26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페이퍼는 다 좋아요~
산세베리아 꽃도, 황금휴가도 무엇보다 코알라의 그림도~~~ 굿입니다용~~ ^^

마녀고양이 2016-07-27 11:09   좋아요 0 | URL
아유, 굿이라고 말씀해주시니 참 좋네요.
저는 칭찬을 낼름 받아 먹습니다. ㅋㅋ

cyrus 2016-07-26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알라 양이 벌서 고1이라니... 힝... ㅠㅠ 몇 년 전만 해도 중학생이었는데, 벌써 세월이 빠르게 흘러갔네요. ^^;;

마녀고양이 2016-07-27 11:09   좋아요 0 | URL
몇 년 전에는 초딩으로 여기 왔던 것 같은데... ㅋㅋ
세월이 어찌나 빠른지, 사이러스님도 곧 30대가 되겠네요. 아!하!하!

cyrus 2016-07-27 16:33   좋아요 0 | URL
8월이 오면 제가 진짜 서른살이 됩니다... ㅠㅠ

2016-07-28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8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8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8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16-07-26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산세베리아의 꽃과 코알라양의 그림을 보다니~~
횡재로군요^^

마녀고양이 2016-07-27 11:09   좋아요 0 | URL
아유, 책읽는나무님의 댓글이 제겐 더 횡재네요~ ^^

2016-07-27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8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6-07-28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이 벌써 고1?
초등학생일 때, 언제 엄마를 덜 찾고 독립적이 되나, 우리 그런 댓글 주고받은 적 있었는데...
그땐 제가 중1이 되면 독립한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ㅋ

따님이 마고 님을 닮아 재능 있네요. 앞으로도 기대하는 1인이라고 따님께 전해 주세요.
산세베리아와 함께 좋은 시간 가지시길... 흐뭇한 페이퍼입니다.~~

마녀고양이 2016-07-28 14:56   좋아요 0 | URL
넹, 고1.
내내 일하던 엄마로 인해, 한때 너무 엄마를 찾고 붙어있더니
어느 순간 떨어져서 자신의 공간을 주장하네요. 예뻐요.
언니 말씀이 딱 맞지 뭐예요. ^^

흐흐, 저는 그림 전혀 못 그려요. 하지만
기대한다고 하시니 너무 감사해요. 코알라에게 전하겠습니다. ^^

양철나무꾼 2016-07-28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쉬~~~^^
내가 코알라를 아는게 자랑스러운 그런 그림이네.

코알라 보고싶다~^^

근데 코알라 단발머리야?
나도 단발로 커트할까?

마녀고양이 2016-07-28 16:27   좋아요 0 | URL
자랑스러워해주어 고마와.
코알라에게 물어보니 상당히 심란한 표정을 보여서 이해해 줘, 사춘기잖아.

코알라의 머리 길이는 등과 허리 사이까지 옵니다.
미장원 가기를 엄청 싫어해서, 1 년에 한 번쯤 가려나... ㅠㅠ
(나도 예쁜 옷 입고 꾸미는 딸네미를 갖고 싶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16-07-31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어머나....코알라 너무 사랑스러워요. 글도 그림도 생각도...!!!!
그리고 벌써 고1이라니...그러니까요. 우리 딸이 고2니까...우리 늙는건 생각 안하구요. 애들만 커가는 것 같네요. 딸은...참 예쁘죠? 이러나 저러나 어쨌든 딸이 있다는건 축복이예요^^
마고님...너무 더운데 잘 지내시죠? 저 자주 올게요~

마녀고양이 2016-07-31 13:02   좋아요 0 | URL
그죠... 아이들 참 잘 크죠.
그만큼 우리의 인연도 오래가는 것 같구요. ^^

아후, 정말 늙는 것 같아요. 이제는 살도 안 빠지고 그냥 나 몰라라, 나는 아줌마다, 싶어지고.... 코알라가 아가씨 티가 나면 그냥 헤벌레 좋을 때다 싶고..

현맘님, 요즘 정말 너무 너무 덥네요. 건강 챙기시고,
자주 온다는 말씀이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기분 좋네요.

cyrus 2016-09-14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 스트레스 조심하고, 추석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0.

 

운빨로맨스라는 드라마의 류준열에게, 정확하게 말하자면 류준열이 연기하고 있는 제수호에게 필이 꽂혀 있다. 그는 현재 마음껏 사랑하고 있다. 심보늬에 대한 마음을 인정한 이후로 그는 직진을 거듭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 간에 흔히 볼 수 있는, 내가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내 이런 모습을 싫어하지는 않을까, 저 사람은 나와 다른 마음을 가진 것 아닐까, 실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등의 불안이나 의심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정말 마음껏 사랑하고 있고,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예쁘다.

 

의심이나 두려움 없이 누군가를 신뢰하고 사랑하고 사랑을 요구하고 사랑을 받으며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 그 모습이 범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과의 진정으로 안정된 애착이 없다면 저런 모습을 보이기 어렵다. 당연히 작은 다툼이나 갈등은 있을 수 있으나 그로 인해 헤어짐이나 버려짐을 상상하지 않는, 그저 함께 있는 시간을 기뻐하고 소중히 여기는 그 모습으로 인해 미소가 저절로 떠오른다.

 

 

 

(운빨 로맨스의 황정음과 류준열) - 꽁냥꽁냥 10계명 : 출처 TV리포트 : 다음연예

 

 

내가 그런 열정을 공유하면서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 만남을 행복과 기쁨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들은 참으로 짧았다. 정말 아름다운 가을의 한나절이었지 파아란 하늘 아래 그냥 기뻤었어 라는 느낌, 또는 아무 할 일 없이 멍하니 둘이 앉아 먼지 날리는 운동장만 바라보기만 하는데도 풍족했던 서너 시간, 아니면 지하철 모퉁이 복도를 돌 때 갑작스러운 스킨쉽의 짜릿한 찰나. 그리고 반드시 찾아오던 불안과 의심. 저 사람은 나를 사랑하나,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하나 라는. 그 시절 내 간절한 소망은 영원히 사랑하게 해주세요 였던 것 같다. 그리고 제수호의 사랑법을 통해 그 아련함을 떠올린다. 저 사람은 사람에 대한 의심이 없구나, 저 사람은 정말 0 아니면 1이구나 싶어서 그 단순함과 확신이 부럽다는 마음.

 

(그의 성장이나 첫사랑과의 이별 과정을 고려한다면 현실적으로 어림도 없다 싶지만.

 - 역시 난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면이 있는 듯 하다.)

 

 

1.

 

애착,

정서적으로 접촉이 잘 안 되는, 특히 이성이 발달하고 성장만을 위해 달려가는 부모들의 눈에는 아이의 정서적 불안정성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스스로의 공허감과 소외감을 애써 덮어버리고 달리기 때문에, 타인의 외로움이나 슬픔 역시 인지하기 어려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아무리 설명해도, 몸으로 체험되지 않는 것을 알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러니

 

왜 이겨내지 못하니 라고 닥달하고,

그럴수록 부모와 아이의 거리는 멀어지며 소외감은 깊어지고 일탈은 가속화된다.

 

애착은 세상을 신뢰하는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상은 안전한 곳이다, 나는 보호받을 수 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내 곁에 있을 것이다, 나는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이다 라는 기본적인 신념을 가지도록 돕는다. 유기 불안- 즉 내 곁에는 아무도 없고 나는 버려질 것 같다는 두려움에 떠는 아이를 만나면 나는 마음이 흐트러진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아이를 나의 확장처럼 여기고 상대 부모를 공격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내 미해결 과제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래도 이런 실수를 할 때

 

내 곁에 있는 사람은 내가 애쓰고 있음을 알아주고 내 슬픔을 이해해주고 이런 모습이 반복될 정도로 정서적 충격이 크다는 사실을 수용해주면 좋겠다. 콕 집어서 나도 알고 있는 잘못을 가르치듯 말해주지 말고. - 반대로, 나도 딸 코알라나 상대 부모들 모두 애를 쓰고 있으며 실은 자신의 잘못으로 괴로와하고 있으니 콕 집어서 말해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인지할 정도로 따뜻하고 여유있고 풍요로운 사람이면 좋겠다는 바람도 든다.

 

 

2.

 

카린 지에벨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다른 알라디너의 좋은 평가에 혹하여 네 권이나 한꺼번에 사놓고는 고민에 빠져 있다. (경고 : 너는 모른다 라는 소설의 완벽한 스포 있습니다.)

 

"너는 모른다" 라는 작품은 정말 스피디하고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새벽에 눈을 뜬 브누아 경감은 지하실 철창 안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젯밤 만난 리디아의 집에서 함께 스카치를 나눠 마신 기억이 난다. 그러나 여러 날을 갇혀 있어도 감금당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리디아는 철창 안에 갇힌 브누아에게 고문을 가하며 지난날 저지른 자신의 쌍둥이 언니에 대한 살해 사건을 자백하라고 강요하지만 그런 사실이 없는 브누아는 초인적인 힘으로 버텨내며 탈옥을 꿈꾼다. 이 작가는 확실히 등장 인물의 심리 묘사에 탁월했다. 오랜 기간 동안 쌍둥이 언니의 죽음으로 괴로워 한 리디아가 브누아를 바라보는 마음과 결혼 외도 외의 잘못을 저지른 기억이 없는 브누아의 답답함과 불안이 섬세하게 전개된다. 소설에서 그런 섬세한 묘사를 읽다 보면 주인공들이 상당히 가까운 사람으로 느껴지면서 어떤 예상과 기대를 갖게 되는데

 

당연히 이 작품에서는 브누아의 결백이 밝혀지고 구출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작가는 결백이 밝혀지는 순간, 우연을 가장하여 갑작스럽게 두 남녀를 죽여버린다. 툭! 하고 줄거리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실은 제 3자의 손에 의해 모든 상황이 조종된 사실을 밝힌다. 보통 다른 소설에서 조종자가 나오더라도, 주인공의 삶이 한 방에 소멸되지 않는다. 마음의 준비를 할 여운을 서서히 주면서, 이럴거야 라고 속삭여주는데, 이 소설은 마치 현실의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거대 재난처럼 주인공과 나와의 관계가 한 순간에 단절된다. 나는

 

이런 관계가 가장 싫다.

 

 

 

 

 

 

 

 

3.

 

덕분에 읽지 않은 나머지 세 권을 그냥 팔아야 하나 고민 중이다. 어찌 보면

너무나 현실 같은, 전혀 소설 같지 않은 그 엔딩 때문에 나머지 책들도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4.

 

계속 읽을까 말까 망설이는 또 한 권의 책은 "장진우 식당"이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그 공기와 분위기가 저마다 의외의 인연들을 데려오는데 기쁜 우연을 그저 즐기면 된다. 일기예보는 언제나 맑음이다. - 17p

 

나는 일상이 마구 지루해지기 시작할 즈음 여행을 떠난다. 좋은 여행을 위해서는 지루해지는 게 좋다. 나 스스로 너무 지루해질 때, 그 때 떠나버리면 거기서 보는 것들 하나하나가 반짝거린다. - 24p

 

스시는 너무 '깨끗하다'. 뭘 가미할 수도 없이, 오래 숙달된 손놀림과 요리사의 혼만이 얇게 저민 생선살처럼 투명하게 드러나는 음식. 그래서 스시는 한없이 어렵고 매혹적이다. - 33p

 

차곡차곡 무언가를 쌓아 올리는 것이 마치 우리의 관계와 같은 라자냐. 한 번 뜨거워졌다가 식은 다음에 다시 데워야 안 무너진다. 인간의 우정과 같은 음식이다.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끌렸다가, 격의 없이 어울리고, 그러나 어깨동무를 했던 시절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사소한 오해 때문에 소원해질 때도 있다. 그 멀어졌던 거리가 있기에 이 친구를 다시 만났을 때의 편안함이나 같이 웃는 순간들이 기쁘다. 식혔다가 다시 뜨거워졌을 때 먹는 라자냐가 진짜 맛있는 것처럼. - 41p

 

의도한 게 아니었는데 더 괜찮은 것도 있다. - 48p

 

지금은 시간이 지나 그들도 각자 어딘가에서 잘 지내겠지만, 몇몇의 사람과는 연락을 하지 않는다. 왜인지는 서로 아무도 모른다. 식당에는 여전히 간판은 없다. - 65p

 

 

이 책에는 스치듯 지나가는, 그러나 아주 반짝이는 문구들이 있다.

그래서 매혹적이다. 하지만

 

질투하면 지는 거다 싶지만, 너무 멋지게 산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이루면서. 나도 지루해질 때 여행을 가고 싶지만,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해야 할 일들도 많고 챙겨야 할 사람도 많다. 휙 떠날 수 없다. 저자 장진우님은 참으로 바람처럼 산다. 그래서 글을 읽는 내내 마음에 와닿기보다는 잘 닦인 고급 프랑스 접시를 보는 느낌이 든다. 대략 구십 페이지를 읽었는데, 더 읽어야 하나.

 

 

5.

 

비가 흠뻑 온 오늘, 내내 보고서를 썼다.

내일부터 나흘간 열심히 일해야 한다.

 

홀랑 누워서 교고쿠 나쓰히코의 "도불의 연회" 하권이나 읽고 자야겠다. 그런데 심적으로는 "가족 상담"과 관련된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들고, 이성적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하는데. 에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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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녀의 일기
옥타브 미르보 지음, 이재형 옮김 / 책세상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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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그놈의 관음증이 나를 이 소설에 이끌었다. 책 뒤 편의 "세상에서 가장 발칙한 하녀가 온다"는 문구는 계급 사회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당당함의 뉘앙스를 풍겼다. 내가 기대한 바는, 한 걸음 떨어진 거리에 서 있는 하녀가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과 인간의 이중성을 냉소적으로 풍자하는 것이었고, 나 역시 그 정도 거리에서 관찰하고 비웃어 줄 심산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세상에서 가장 발칙한 척하는 하녀가 온다"고 하는 편이 맞을 듯하다.

 

그리고

당당하고 도도하며 그들의 주인을 마음껏 평가하는 셀레스틴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에, 사치스러운 생활과 주변의 악덕에, 우리의 여주인들 자신과 그들이 자극하는 욕망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남자들이 우리를 사랑할 때 그들은 우리 속에 존재하는 여주인들의 작은 부분과 여주인들이 갖고 있는 신비의 많은 부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 20p

 

그녀는 인간의 가치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하녀일 뿐이다. 그녀는 부속물이다. 그녀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그녀는 쓸모 있는 동안에만 머무를 수 있다. 그녀는 모시는 주인을 통해 상류 사회를 공유하는 척 한다. 

 

 

1.

 

오! 인간 존재들의 외관만 보고 표면적인 형태에만 현옥되는 사람들은 사교계가, '상류 사회'가 더럽고 썩었다는 것을 짐작도 하지 못한다. 나는 부르주아 사회와 귀족 사회에서 오랫동안 생활했지만, 그들의 사랑에 사랑을 위대하고 성스럽게 만드는 것들인 고결한 감정, 열렬한 애정, 이상적인 고통과 희생과 동정심이 수반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 163p

 

주인들은 처음에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서로를 감시하지만 서서히 화장을 지우고 베일을 벗으면서, 자기들 주위에서 서성이고 귀 기울이면서 자기들의 결함과 마음의 혹, 자기네 삶의 은밀한 상처 등, 점잖은 사람들의 꽤 큰 뇌가 야비함과 비열한 꿈으로 인해 간직하기 된 모든 것을 기록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결전의 날에 그것들을 무시무시한 무기로 만들어 휘두르기를 기다리면서 이 같은 고백들을 그러모아 정리하고 기억 속에 분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직업이 제공하는 크고 강렬한 즐거움 중의 하나이며, 우리가 겪은 모욕에 대한 가장 값진 복수다. - 37p

 

내가 하녀로 일하면서 좋아하는 것은 오직 여주인들의 옷을 입히거나 벗기고, 머리를 손질해주는 일 뿐이다. 나는 잠옷과 장신구, 리본을 갖고 노는 걸 좋아하고, 속옷과 모자, 레이스, 모피를 만지작거리는 것도 좋아한다. 또 목욕을 마친 여주인들의 몸을 닦아주고, 그들의 몸에 분을 뿌려주고, 부석으로 그들의 발을 매끄럽게 문질러주고, 그들의 가슴에 향수를 뿌려주고, 그들의 머리칼을 탈색해주고, 그들의 슬리퍼 끝에서 틀어 올린 머리 끝까지 그들을 샅샅이 알고, 홀라당 벌거벗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기 좋아한다. - 56p 

 

이처럼 그녀는 자신이 자신의 주인들 우위에 서있는 것처럼 내려다보고 이런 저런 비평을 하지만, 이면에 숨어있는 동경이 은밀하게 나타난다. 그들을 더럽고 썩었다고 하면서도 주위를 맴돌고 아름다운 물건에 손을 뻗는다. 부르주아가 입었을 법한 비단 속옷을 시골 하녀들에게 으시대며 자신은 하녀 중에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위치는 하녀다.

 

이솝 우화의 여우처럼 저건 신 포도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2.

 

그처럼 그녀는 완전히 하녀로써 순종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한 개체로써 스스로 서지도 못한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구부정한 자세로 환경에 맞추어 굽신대면서 다른 얼굴로 투덜거린다. 자신이 우습게 여기는 나리와 마님들의 위선을 그대로 따라한다.

 

누가 내게 부드러운 목소리로만 얘기해줘도, 나를 다른 사람들의 밖에 있는 사람으로, 삶의 바깥쪽에 있는 사람으로, 개와 앵무새 중간에 있는 뭔가로 간주하지만 않아도 나는 즉시 감동한다. - 179p

 

 

그녀를 보면서 나는 현대 사회의 수많은 제 2의 셀레스틴을 떠올린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계급 사회가 분명 존재하던 그 시대의 하녀들보다는 계급 사회가 불분명하지만 암묵적으로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남녀를 상관없이) 수많은 노동자, 고용된 사람들과 유사하다. 나는 분명, 내가 소중하고 가치있는 존재라고 여기고 굉장한 자존심을 세우지만, 가끔은 (권력, 재력, 명예 어떤 형태라도)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 생각없이 조아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마 나를 대통령 앞에 세운다면, 뒤에서 열심히 비판을 하면서도 앞에서는 한 마디 못하고 넙죽 인사할 것이 틀림없다고 쓴 웃음을 짓는다. 그런 면에서 셀레스틴의 모습이 그다지 편안하지 않다.

 

 

3.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정말 모순적이게도, 그런 분명한 기회가 오면 걷어차 버린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한 귀족 청년의 죽음을 방관하고, 그 집을 나온다. 자기가 평소에 바라던 은퇴한 브루조아의 가정부이자 애인 자리 역시 거절한다.

 

그건 나의 야망이었다. 나는 내게 푹 빠진 노인을 이용해 빛나는 미래를 얻는 것을 수없이 생각했었고, 이제 내가 꿈꾸던 천국이 내 앞에서 미소 지으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토록 원했던 행복이 설명할 길 없는 인생의 아이러니에 의해, 나로서는 도통 이유를 알 수 없는 터무니없는 모순에 의해 드디어 내게 주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늙은 난봉꾼, 오, 싫어요! 나는 늙었든 젊었든 남자는 무조건 싫어요." - 449p

 

 

"내가 폴라-뒤랑 부인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그녀에게 모욕을 주고 싶은 유치한 마음, 너무나 건방지고 오만한 그녀가 내 앞에서 매춘을 알선했다가 창피를 당하는 걸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451p)" 라는 그녀의 독백처럼, 그녀는 모처럼 상류 사회로부터 주어진 좋은 기회(대우)를 거부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상류 사회로부터 억압받고 무시당한 자신의 울분을 갑작스레 분출한다. 이는 너희에게서 아무 것도 받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인 항변이고 최소한의 자존심이지만, 그 댓가는 꽤나 혹독하다. 그녀는 계속 상류 사회 언저리를 맴돌고, 상황은 좋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어리석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안타까왔다. 하지만, 과연 그녀가 어리석은 걸까, 적당히 받으며 맞추고 사는 내가 어리석은 걸까.

 

 

4.

  

다음 문구를 접하면서 위선덩어리로 느껴져서 거북했던, 어떤 의미로는 내 자신의 투영처럼 보여서 더욱 불편했던 셀레스틴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주인들을 비웃는 형태로만 반항하고 항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솔직했고 마음에 솔직했으나, 기본적인 생활 수급에 타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주인인 적이 없었던 삶을 모른척 하고 부인하고 억압했으나, 그 타협의 한계는 6개월이었다.

 

내게 일어나는 일은 과연 다 내 탓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단 한번도 주인인 적이 없었던 운명은 내 삶 전부를 무겁게 짓눌렀고, 내가 같은 집에 6개월 이상 머무르는 걸 원하지 않았다. 주인이 나를 해고하지 않으면 내가 더 이상 혐오감을 참을 수 없어서 떠났다. 이상하고 슬프다. 나는 항상 '다른 곳에 있기 위해' 안달했고, '이 가공의 다른 곳'에 있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희망을 근거 없는 시정과 먼 곳에 대한 환상으로 포장해 품고 살았다. - 224p

 

 

5.

 

나는 내가 뭘 찾으러 왔는지도 모른다. 또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하인은 정상적인 존재가 아니고, 사회적인 존재도 아니다. 하인은 서로 맞춰질 수도 없고 포개질 수도 없는 잡다한 토막들과 조각들로 만들어진 누군가다. 하인은 그보다 더 나쁜 그 무엇, 인간과 괴물의 잡종이다. 그는 서민 출신이지만, 그 계급에서 빠져나왔다. 또 그는 부르주아들 속에서 살고 부르주아가 되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르주아는 아니다. 그는 자기가 버린 서민들의 그 관대한 피와 소박한 힘을 잃어버렸다. 또한 그는 부르주아지로부터는 수치스러운 방탕함을 얻어냈으나 그것을 만족시킬 수단을 획득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비열한 감정, 비겁한 두려움, 범죄적 취향. 이 점잖은 부르주아 사회를 통과하는 가운데 그의 영혼이 완전히 더러워지며, 이 썩어가는 시궁창에서 올라오는 치명적인 악취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 그는 정신의 안전은 물론 심지어 자아의 형태 자체까지 영원히 잃어버린다. - 226p

 

 

1900년에 출간된 옥타보 미르보의 하인에 대한 묘사는 2016년 한국 사회에서 상위 1%로 올라가고자 기웃대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만나는 청소년마다 꾸는 꿈은 "부자가 되는 것"이고 "부자가 되기 위한" 수많은 책들이 출간되며 "성공=돈"으로 정의되는 우리 사회에서, 시간이 갈수록 빈과 부의 격차가 벌어지고 계급이 뚜렷하게 세습되는 우리 사회에서, 어쩌면 나는 정신의 안전은 물론이고 자아의 형태까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울과 같은 신경증 뿐만 아니라 조현병의 초기 증상인 정신증까지 빈번하게 만나게 되면서, 사회 적응의 스트레스와 좌절, 갈등에서 자기 보호를 하기 위해 움츠리는 단계가 우울이고, 그로 모자라 마음이 영원히 부셔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자기 보호 수단의 적극적인 다음 단계가 망상이나 환청, 환시, 관계 단절 임을 수긍한다. 그래서 앞으로 또 다른 형태로 이용당하겠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셀레스틴 자신의 선택에 의해 이용당하는, 때로는 적극적인 형태로 다른 사람을 이용할 수도 있는 엔딩을 지지한다.

 

책의 엔딩에서 셀레스틴은 새로운 시작을 한다.

그 시점은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기도 하다. 하나의 시대가 가고 하나의 시대가 온다. 그리고 그때는 하인과 주인의 역할과 위치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혼란과 변혁의 시대이니. 셀레스틴은 이제 주인이 되었을까, 되었다면 어떤 형태의 주인이 되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한편으로는 보고 자란 상류 사회가 그런 모습이니 얼마나 다를까 의문스럽기도 하고.

 

- 내가 쓴 마지막 문장을 보고 스스로 내뱉은 염세적인 말투에 당황했다. 누가 힘이 있는 자가 되든 사회는 똑같을 거라는 잠재 의식이 은연 중에 노출되었고, 이런 생각의 확장은 힘을 지닌 자가 힘을 놓지 못하게 하고 힘을 못 가진 자가 힘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경쟁 사회의 가속화로 연결된다. 가장 좋은 해결점은, 주인이든 하녀이든 단지 역할일 뿐, 인간이 가진 고유 가치와는 관련없다는 생각을 하며 서로를 대하는 것일 텐데, 내가 지쳤나 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리뷰를 쓰는 오늘도 부정적인 기분이 나를 지배한다. 아님, 작가 옥타브 미르보의 시선이 전염된 것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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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6-06-27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제 글 말미를 `세상에 인권이 있을까`라는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난 직후

마녀고양이 님의 서재에서 `그녀는 인간으로써의 가치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글을 읽고 갑니다.

마녀고양이 2016-06-27 13:36   좋아요 1 | URL
이런, 오늘 날씨 탓일까요? ^^

제 가장 밑에 덧붙인 글을 보였다면, 마립간님이 더욱 흥미있어 하셨을 것 같네요. ㅎㅎ

마립간 2016-06-27 13:49   좋아요 1 | URL
마지막 문장을 읽었습니다.

저는 스스로 내뱉은 염세적인 말투에 당황하지 않습니다. 제 스스로 비관주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Brexit와 같은 염세적인 제 가치관에 부합하는 사회 현상을 보고 당황하고 있습니다.

누가 힘이 있는 자가 되든 사회는 똑같을 거라는 잠재 의식이 은연 중에 노출되었고, 이런 생각의 확장은 힘을 지닌 자가 힘을 놓지 못하게 하고 힘을 못 가진 자가 힘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경쟁 사회의 가속화로 연결된다. ; 이 문장은 제가 사회를 보는 관점을 잘 서술했네요.


마녀고양이 2016-06-27 14:22   좋아요 1 | URL
제가 지난 번에 지도받는 교수님께 분석을 받는데 은연 중에 유사한 말투가 나왔어요. 그랬더니 그 분이 저를 지긋이 바라보면서 ˝선생님은 권위자를 믿지 않는군요? 좋은 일을 하거나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균형있게 볼 필요가 있어요.˝ 라고 하시더군요.

이후 권위자에 대한 부정적인 제 인식이 어디부터 기인하고 있는지
많이 고민했었답니다.

마립간 2016-06-27 15:26   좋아요 1 | URL
혹시 어디서 기인했는지 아시되면 (또는 아신다면)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균형 ; 이 균형이라는 것이 논리에서만 나오지 않고, 직관에서도 나온다는 것은 제게 가장 불리한 세상 여건이겠죠.

마녀고양이 2016-06-27 20:13   좋아요 0 | URL
일차적으로는 감성적이지만 욱하는 기질의 아버지입니다. 기분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기 때문에 예측이 쉽지 않았고 이런 잠재된 긴장이 성장 과정을 내내 지배했습니다. 또한 산후우울증이 있었던 어머니와 갑작스럽게 대두된 경제적 문제도 한몫 했죠. 영유아기의 제게 있어 ˝세상은 안전한 곳이 아니다˝ 라는 메시지가 강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지금도

스트레스나 피로, 부담감이 큰 상황에서는 그때의 사고와 정서가 툭 튀어나옵니다. 그렇지 않다는 균형을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입니다. 세상에는 좋은 분도 많고, 안전할 때도 많으며, 어른이 된 제 눈에 비친 아버지는 그렇게 위험한 분이 아닙니다. 그저 감정 기복이 있던, 매력적이기도 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소심하기도 한 아버지입니다. ^^

몸살 약을 먹고 한잠 자고 났더니 지금은 훨씬 긍정적인 상태입니다. ㅎㅎ

마립간 2016-06-28 07:47   좋아요 0 | URL
제 아버지는 정신지체도 있지만, 조울증(? 제 판단에) 발작 증상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경제적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가정 형편은 기복 없이 꾸준하게 어려웠구요. ; 이 정도가 마녀고양이 님과의 공통점이 되겠군요.

차이점은 ; 마녀고양이 님은 아버님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의지가 엿보이는데, 저는 제 아버지가 그저 안쓰럽고, 불쌍하게 느끼지만, 어떤 의지나 노력이 있지 않네요.

감당을 넘는 상황에서 부적절한 저의 대응이 나올 수 있지만, 평소에 신독을 통해 용기를 갖춰 감당하는 범위를 확장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균형점을 잡기보다 주지주의를 강화하는 현상으로 나오겠지요.

마녀고양이 2016-06-28 19:33   좋아요 0 | URL
지난 번 글에서 아버님께서 마립간님을 아껴주셨다는 언급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나요? 아버님께서는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애를 쓰셨겠네요.

균형점, 부친께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기 어려우셨겠지만, 다른 무엇을 주시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보아 온 마립간님의 아버님이시니까요. 물론 독립적으로 성장한 분들은 세상을 현실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다소 냉소적이거나 염세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서로 돕고, 나은 타협을 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마음도 인류에게는 분명 있다고 전 생각해요. 마립간님은 따님의 좋은 아버지구요. ㅎㅎ

2016-06-29 0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9 0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30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30 0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