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어거지로 쑤셔 넣어야 할 지식이 너무 많아서 책이라면 꼴도 보기 싫었다. 이후 한 번 멀어진 책은 내게로 잘 다가오지 않았다. 그 이유 중에는 노안도 한 몫 했다. 원래 있던 난시에 노안까지 오니 책을 보면 머리가 아프고 집중이 어려우며 피곤한 날은 눈 앞이 부옇다. 알라딘에서 오래 알았던 언니가 이제는 노안으로 피곤하여 블러그 활동을 못 하겠다고 할 때는 그다지 와닿지 않고 서운함만 가득하더니, 이제 내 차례가 되니 도돌이표처럼 나도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사람이 그렇다. 타인이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줄 때,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길이라고 흘려듣다가 나중에 똑같은 일을 당하고 나서야 지혜를 나누어준 그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아무튼

 

책이나 알라딘 서재 글쓰기 대신 반려식물에 빠져 있는 중이다.

 

워낙 정 붙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관심이 있을 때의 몰입력도 상당한 편이다. 덕분에 우리 집은 온실이나 화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엄청난 식물들이 여기저기 있다. 집에서 동물 키우기를 싫어하여 대신 반려식물을 반기던 옆지기는 이제 자리가 없다고, 그만하라고 하소연한다. 거기다

 

우연히 아파트 재활용품 쓰레기장에 버려진 식물을 보게 된 것이 더 큰 집착의 시작이었다.

버려진 식물을 냉큼, 매우 즐겁게 짚으로 가져와서 새 흙과 다른 동의 재활용품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화분에 심었다. 잘 자란다. 그렇게 한 번 눈을 뜨고 나니, 매주 버려진 식물이 보인다. 버려지는 반려동물이 워낙 많아서 무책임하고 잔인하다고 했더니, 버려지는 반려식물은 더더욱 많다. 어느 집이 이사했다 싶으면 영락없이 버려진 식물들이나 나뒹구는 화분이 있다. 오늘은 뿌리채 뽑혀서 버려진 녹보수를 보았다. 대체 화분은 어디 간 건지, 녹보수 외에도 대란이나 이름 모를 다른 화초들도 뿌리가 뽑혀서 화단에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나뒹굴고 있다. 이렇게 버려진 식물들을 구제하다 보니 집안이 더욱 북적인다. 결국 1미터가 훨씬 넘는 녹보수는 데려오기를 포기했다, 누군가 데려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며 뒤로 물러난다.

 

스스로 너무 과하다 싶다. 버려진 모든 식물을 구할 수는 없다. 

이런 현실과의 타협 속에서 약간의 혼란과 갈등, 죄책감에 이어 슬픔이 살짝 어린다. 

함께 사는 삶,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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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8-08-05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사람들이 식물도 버리는 군요!!ㅠㅠ 제 친정엄마도 그러고보니 아파트 근처 지나가시다가 버려져 있는 식물 데려오시거나 아파트 정원에 심어주거나 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마녀고양이 님이나 우리 엄마나 오지랖도 넓고 착한 사람들.
노안을 이제 경험하시는 군요!!! 저는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는 것 같아요. 책을 많이 안 읽게 되었는데 또 어떻게 적응해서 읽게 되더라고요. 시간이 해결해 줄거에요. 그런데 님은 난시까지 있으시다니 저보다 더 힘드시겠다. 화이팅!!

마녀고양이 2018-08-08 10:35   좋아요 0 | URL
저도 노안을 한 5년 전부터 경험하고 있는데, 요즘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요.
언니는 저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노안과 함께 하셨는데 그렇고 공부도 하시고!

어제 며칠째 버려진 화분에 담긴 산세베리아를 모른 척하면서 흘끔흘끔 보는 중인데
내일도 가져가는 분이 없으면 아무래도 가져와야겠다 싶어요. ㅎㅎ
 

오랜만에 알라딘 서점을 들렀다.

그동안 바빴다. (그래도 책은 꾸준히 구매하여 여전히 플래티넘 회원이다. ㅠㅠ. 읽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동안 알라딘은 (내 입장에서는) 가장 좋은 기능이라고 여겼던 책의 중고 등록 여부 정보 창을 없앴다.

덕분에 개인 간에 책을 살 때도 책을 팔 때도 불편해졌다.

소소한 재미가 있었는데.

 

거기다 내 돈 주고 산 신간을 출간 이후 6개월동안 알라딘 중고로 팔 수 없다는 소식도 들었다.

음.............. 음............... 책도 많이 쌓였는데, 앞으로는 6개월 지난 구간(?)만 골라 사야 할까 싶다.

 

알라딘도 그 나름의 정책이 있는 거고,

나도 내 나름의 정책이 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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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8-07-28 0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용한 정보 감사합니다. 앞으로 신간은 출간된지 6개월 지난 후에 사야겠어요. 당장 되팔고 싶은 책이 간혹.. ^^;;

마녀고양이 2018-07-31 23:17   좋아요 1 | URL
네, 저도 당장 되팔고 싶은 책이 간혹 있어서... ^^
사놓고 읽지 못할 때가 많아서 6개월 정도 늦게 구매해도 저는 크게 상관이 없더라구요.

cyrus 2018-07-29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알라딘 서재에 접속하셨네요. 잘 지내고 계시죠? ^^

마녀고양이 2018-07-31 23:18   좋아요 0 | URL
ㅎㅎ, 오랜만에 들어와서 투덜대고 있어요. 사이러스님도 이 더운 여름, 잘 지내시나요?

cyrus 2018-07-31 23:23   좋아요 0 | URL
제가 대프리카 토박이라서 불가마 안에 있다는 느낌으로 버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ㅎㅎㅎ
 
[세트] 오리진 - 전2권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과학과 종교는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두 개의 언어일 뿐이야. - 25p, 1권

 

댄 브라운의 책은 거의 다 읽은 사람으로 신작 '오리진'이 나온다고 했을 때 열광하며 잽싸게 살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신과 과학 그리고 미래에 대한 대담한 질문" 이라는 책 뒤의 부제는 내 호기심을 부채질하면서 밀려있는 책들 사이에서 제일 먼저 손이 가도록 하는 동기 부여에 충분했다.

 

역시 댄 브라운의 명성에 걸맞게 책의 소재는 흥미로왔고, 흐름은 매끄럽게 빨랐다. 특히 죽은 미래과학자의 연구 발표를 통하여 댄 브라운이 인간 세상의 기원과 미래에 대해 어떤 답을 내놓을지 매우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실은 이런 종류의 낚시(!)는 베르나르 베르베르 때도 매번 당하고 있다. "신"이라는 소설 6권 엔딩을 읽고 벽에 던져버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정도로 나의 실망은 매우 컸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바람은 정말 어이가 없다. 그도 나와 같은 인간일테니 비슷하거나 조금 나은 한계를 지니고 있을 것이 자명하건만 늘 이런 종류의 열광은 버리지 못하고 반복하고 반복한다. '실존'이라는 개념에서 본다면 우리는 결코 내가 태어나기 전과 후의 세계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지만 내 마음은 한결같은 호기심을 지닌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지닌 장점이겠지 싶다. 

 

이것이 우리 뇌의 기본 프로그램입니다. 에드먼드가 말했다.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어디로 이끌리는지를 정확하게 대변합니다. 혼돈에 반대하고, 질서를 선호하죠. (..) 여러분은 우리의 근원(origin)과 우리의 운명(destiny)을 물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질문에 컴퓨터는 이런 답을 내놓겠지요. 데이터가 부족해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없음. 별 도움이 안 되죠. 커시가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정직한 대답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이 작은 생물학적 컴퓨터(인간의 뇌)를 향해 똑같이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라고 물으면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하느님, 진흙으로 최초의 인간을 빚어내는 프로메테우스, 자신의 다양한 신체 부위를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는 브라흐마. (..) 인간의 뇌한테는 어떤 대답이든 내놓는 것이 아무 대답도 안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우리는 데이터 부족이라는 반응에 극도의 불안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의 뇌는 적어도 질서의 환상을 제시할 수 있는 데이터를 창안하죠. 그 결과 무수한 철학과 신화와 종교가 등장해 마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질서와 구조가 실재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 134~136p, 1권    

 

어느 책(일반 과학 서적이었는데)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다음 진화는 무기물이 대상일 거라는 가설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유기물에 의한 진화, 인류의 대체들을 두려워했고, 이로 인해 진화의 대상은 당연히 유기물 생물이라는 암묵적인 기본 개념을 세워왔다. 하지만 발전하는 AI를 보고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수많은 SF 소설과 영화를 보며 "정말 이럴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물스물 기어들어오기 시작한다. 현재도 당연하게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옆에 놓인 스마트폰을 홀끔 보며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마시고 스탠드에 불을 켜면서 우리가 만든 움직이는 대상들을 우습게 여긴다. 

 

판타지나 SF, 스릴러의 매력은 내가 직접 마주하는 현실의 한계에서 벗어나 가능성의 세계를 탐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상상이 현실로 될 때를 종종 목격하게 된다.

 

우주학자들은 과거나 미래의 어떤 주어진 시간, 즉 T에 우주가 어떻게 팽창하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근사한 공식을 찾아냈어요. 하지만 빅뱅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 즉 T가 0인 시점을 돌아보려하면 계산은 온통 엉망진탕이 되지요. 무한한 열과 무한한 밀도를 지닌 신비한 작은 알갱이 하나를 설명해야 하는 형국이니까요. (..) 랭던의 엄격한 물리학 교수 하나는 '우주의 기원'이라는 자신의 강좌를 들으러 온 철학 전공자들에게 넌더리가 난 나머지 강의실 문에 다음과 같은 쪽지를 붙였다.

 

내 강의실에서 T>0.

T=0와 관련된 모든 질문은 종교학과를 찾아갈 것.

 

- 288~289p, 1권

 

나는 이 책에서 바로 위의 두 줄을 읽으면서 가장 매력을 느꼈다. 간단하지만 명료하고 깊은 메시지. 아름답다.

여전히 신의 존재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조심스러워진다. 

 

수학의 정확성, 물리학의 신뢰성, 우주의 대칭성을 목격할 때마다 나는 차가운 과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발자국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곳에 숨어 있는 더 큰 어떤 힘의 그림자라고나 할까요. 암브라는 랭던의 말에 실린 힘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교수님처럼 생각하면 좋겠네요. 암브라가 말했다. 마치 우리가 신을 두고 싸우는 느낌이에요. 모두가 저마다 다른 형태의 진실을 품고 있고요. - 314~315p, 2권

 

친애하는 주인공 랭던 박사와 신부 암브라의 대화는 댄 브라운의 결론을 대변하는 느낌이다.

그러게, 이렇게 큰 그림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렇게 싸울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인간 사회의 곳곳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투쟁, 전쟁들은 정말 신앙과 진실의 문제일까, 아니면 결국 '돈'과 '권력'의 문제일까. 슬그머니 후자라고 결론짓는 내 자신을 바라본다. 힘을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결국 반복일 뿐이다. 그래서 책 속의 미래과학자 에드먼드 커시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볼 수 있는 과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세상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했으나, 자신의 언어에 힘을 갖기 위해 결국 힘을 동원하는 부조리하고 불명확하고 일관성이 부족한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리뷰를 쓰면서 돌이켜보면 이 책은 참으로 풍성한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그러나 막상 책장을 덮었을 때는 아무런 감동도 없고 뒤에 남는 여운도 없다. 이유를 곰곰히 따져보면, 책 자체가 너무 담백하고 지나치게 스토리 중심으로 흘러가서 인간의 정서를 크게 자극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이번 작품에서는 주인공 랭던 교수가 그다지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국내 영화의 모든 장르에서 가족애나 인간적인 슬픔을 조금씩 담아내는 것은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성공의 필수 요인 같기도 하다. ㅎ. 이 부분으로 인해 별 하나 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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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주인간 - 우리의 생각을 조종하는 내 몸속 작은 생명체 이야기
캐슬린 매콜리프 지음, 김성훈 옮김 / 이와우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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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해서 무언가를 했다는 것을 깨닫거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뜻대로 어떤 것을 해야만 할 때 정말 불쾌하고 부당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어릴 때부터 비교적 독립심이 강한 나는 이런 상황을 매우 싫어하고, 어떤 상황에 있어 스스로 숙고하고 판단하여 선택하는 시간을 가지는 편을 선호한다. 예상한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과 나에게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상당히 오랜 나이의 소모가 필요했고, 그런 상황에 있어 예전보다 다소 유연해졌으나 아직도 뒤 끝에는 심란함과 불안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은 내 몸 안과 밖에 살고 있는 기생생물까지도 나의 '자유의지'를 조종할 가능성이 있다고 제기한다.

 

기생생물로 산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물론 밥은 거저먹는다. 하지만 기생생물은 하나나 둘, 흡충류의 경우라면 세 종류의 숙주 안에 들어가 각각의 환경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른 서식처들은 지구와 달만큼 환경에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뿐인가. 한 숙주에서 다음 숙주로 어떻게 이동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생각만 해도 악몽이다. (..) 이 개미는 순진한 양이 제 발로 찾아와 자신이 매달린 풀잎을 뜯어먹어 마침내 기생충이 양의 뱃속에 들어가게 되는 날까지, 밤마다 풀잎에 오르내리기를 반복하게 된다. - 21~23p

 

기침은 우리의 몸이 병원체를 몸 밖으로 몰아내려는 행동이면서 동시에 기생생물이 자신을 더 멀리 전파하기 위해 유도하는 행동일 수 있다. 적 사이에서도 서로의 목적이 맞아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 29p

 

생물학자 로버트 폴린은 많은 조작자들이 어쩌면 숙주의 정상적인 행동에 아주 미약한 변화만을 야기할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 이를태면 기생생물은 숙주가 어떤 장소를 찾아가는 빈도에 살짝 변화를 주거나, 숙주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간대에 변화를 주거나, 정상적인 행동이지만 엉뚱한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기생생물에 감염된 새는 동료들이 모두 날개를 펴고 날아갈 때 혼자만 땅바닥을 쪼는 행동을 보일 수 있다. 포식자들은 먹잇감이 조금이라도 두드러지는 행동을 보이면 거기에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적응돼 있습니다. - 42p

 

이즈음 되니 책을 읽고 있던 손바닥과 발바닥이 슬슬 근질거리면서 내가 이제까지 인지하지 못하던 미생물이나 균류의 존재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한 환촉이 시작된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본능적인 공포 반응들, 즉 동그랗게 연결된 것들을 볼 때의 등허리에 느껴지는 섬뜩함이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층계 세모꼴을 보면서 혀끝이 근질거리는 느낌들과 마찬가지로 진화하는 동안 인간은 본능적으로 곤충이나 미생물 류에 대한 경계심이 뇌 안쪽 어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을 재확인하는 마음이다.

 

제기랄,   

그러니까 안 그래도 나의 심리는 온갖 것(선택권이 전혀 없는 유전자, 기질, 병, 사고, 나이 듦, 허리 아포!, 사고 체계, 감정 체계, 대처 패턴, 부모, 배우자, 자식, 친구, 지랄맞거나 친근한 동료, 내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는 사회적 환경, 늘 부족한 경제적 영향, 널뛰는 국제 정세 등등)에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고 있어서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가 상당히 많은데, 거기에 기생생물까지 추가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우기 진화심리학적인 입장에서 기생생물이 다른 것들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론을 수용하기가 별로 편안하지 않다. 하지만

 

책 자체는 매우 흥미롭다. 미생물들의 숙주 행동 조작질이라는 신기하고 위험한 소재는 그 이론에 대한 찬성 여부를 떠나서 나의 뇌세포를 자극하고 정보를 취득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어찌 생각하면 이러한 태도 역시 위험에 대비하고자 하는 인간의 생존 전략일지도 모르겠다.) 기생생물이 숙주가 되는 동물들을 어떻게 조종하는지에 대한 최근의 증빙을 소개하던 책은 드디어 쳅터 4장이 되면 그 놈들이 인간을 어떻게 조종하고 있는지에 대한 최근 연구(가설, 실험 중인)들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기생충과 관련해서 자살과 조현병이 증가한다는 이 보고서들을 저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기생충은 밑바닥에 잠재돼 있던 정신질환을 악화시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두 조현병의 스펙트럼 위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기생충 비감염자가 이미 조현병의 미약한 증상들을 나타내고 있는 경우, 기생충에 감영되면 증상이 악화될 수 있죠. 감염된 사람들은 성격 변화를 경험하고, 충동적인 행동을 많이 하게 되고, 두려움은 줄어들고, 잠재적으로 위험한 상황에서도 판단력이 저하된다는 등등의 보고가 있는데, 이것 역시 사람마다 톡소플라스마 낭종의 분포가 모두 다르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119p

 

만일 이런 실험 연구가 진실로 밝혀진다면 우리는 우리 행동의 '책임'이라는 범위를 어디까지 짊어져야 할까?

책에서도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대부분의 사람은 진통제나 마약이 우리의 행동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생각에는 별 거부감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평생 자기 뇌에 들어와 있을 수백, 수천 마리의 작은 단세포 기생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이 기생충들은 없앨 수 없을뿐더러 그것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면, 이 기생충이 미치는 영향력은 어디서부터 나의 본질로 자리 잡는 걸까요?" "당신은 우리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법척으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 121p

 

실은 사회적으로 떠들썩한 범죄를 볼 때마다 이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이미 사회적으로 함께 책임져야 할 부분도 지나치게 개인의 잘못과 통제의 문제로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그렇다고 모든 잘못된 행동을 외부 탓으로 돌리는 것 역시 사회의 안전을 침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행동을 다른 누군가가 조종한다는 개념이 책의 말미에서 든 예처럼 "재판관님, 강간도 다 제 유전자가 시켜서 한 일이라고요! (322p)" 라는 변명거리를 제공할지 모른다는 사회 구성원들의 염려는 일리가 있기도 하고, 그렇다고 이런 사실을 점점 증명되고 있는 시점에서 완전히 무시하기도 어렵다는 심리적인 혼란이 든다.

 

책은 7장까지 숙주를 조종하는 기생생물에 대해 주로 다루지만, 이후 8장부터 11장까지는 '기생생물 스트레스'로 인해 인간이 어떤 방어 체계를 갖추고 사회에 적용하는지를 주로 다룬다. 이 역시 충분히 흥미롭고 읽어볼만 하지만, 서문에서 인간을 조종하는 기생생물를 주제로 저작했다는 저자의 말과 맥락이 다소 다르게 흐르면서 용두사미라는 기분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아마 현재까지 진행된 기생생물과 관련된 실험이 미미한 수준이라서 그럴 수 있겠다. 책의 뒷부분을 읽을 때 다소 흥이 빠진 나는 기생생물이 인간 사회 흐름에 미친 영향을 좀 더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차라리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저서 '총, 균, 쇠'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의 중반부까지 읽을 때 흥미 진진함으로 100자 평에는 별 다섯개를 주었으나, 끝까지 다 읽은 지금은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으로 별 하나를 뺀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 자유의지란 무엇일까, 인간의 영혼은 어떤 개념일까.

불가지론자(不可知論, agnosticism)인 나는 여전히 노력 중이다,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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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8-02-07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이러스는 생물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기생하니까 기생 생물에 저자가 바이러스를 포함했는지 궁금하네요. 암튼 저도 미생물 수업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답니다. 여러가지 기사를 찾아보기도 하고. 혹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에드 용의 <내 안에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인가? 한글 제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책을 추천해요. 함 읽어보세요. 이 책을 읽으셨으니 그 책은 훨씬 수월하실 거에요. 그리고 무지 재밌어요. ㅎㅎㅎㅎ

마녀고양이 2018-02-07 18:16   좋아요 0 | URL
네네, 언니, 지금 그 책을 찾아보러 갑니다.
미생물 수업을 들으시는군요? 진짜 생각 많으시겠다. 저는 문외한이다가 정말 생각이 많아졌어요. 바이러스를 크게 다루지는 않았지만, 포함되는 것으로 여겨져요. 참으로 배워야할 지식이 많네요. 그래서 세상이 흥미진진해요. 아하하.

언니가 말씀하신 그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출간되었네요~

cyrus 2018-02-08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몸 속의 미생물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배탈나기 쉬워요. 이틀 전에 음식을 잘못 먹어서 그런지 뱃속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지금은 좀 나아졌는데 처음에는 식중독에 걸렸을까 봐 조마조마했습니다. ^^;;

마녀고양이 2018-02-21 12:40   좋아요 0 | URL
저는 실제로 작년에 한 번 식중독도 걸렸는데, 제 몸이 제 몸 안에서 나쁜 음식을 빼내기 위해 무지하게 애쓰는 과정을 목격했습니다. 구토, 설사. 면역기제가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을 아픈 와중에 했어요. ㅋㅋ

프레이야 2018-02-08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에도 여러 잔 마셔대는 커피는 내가 마시는 게 아니군요. 리뷰 좋아요 백 개 누르고 싶어요. 추운데 감기 조심하고요~^^

마녀고양이 2018-02-21 12:41   좋아요 0 | URL
언니, 제 답글이 너무 늦었네요.
설 잘 지내셨을까요? 리뷰 칭찬 감사드려요.
이제 봄이 올까 기대 중이예요, 올해 경기도는 너무 추웠어요.

프레이야 2018-02-08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장바구니 직행이에요. 감사~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뿐이다.

 

정체성에 대한 인정은 특정한 서사 내용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서사와 편집권에 대한 인정이다.

 

네가 레즈비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네가 오늘은 레즈비언이라고 고백하고 내일은 그것을 부인해도 상관없다.

나는 너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너 자신임을 인정한다.

 

- 215p, 사람, 장소, 환대 중에서, by 김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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