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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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이희영 작가의 새로운 세계

이희영 작가는 2013년 단편소설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로 제1회 김승옥문학상 신인상 대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2018년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페인트>와 제1회 브릿G 로맨스스릴러 공모전 대상을 받은 <너는 누구니>를 통해 현실의 날 선 단면을 환상적인 설정으로 버무려내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해 왔다. <나나>, <안의 크기>,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등 다수의 작품을 통해 꾸준히 독자들과 소통해 온 저자는 이번 신작 <이벤트> 출간을 즈음한 작가의 말에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페인트> 출간 이후 8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어른으로 성장한 당시의 청소년 독자들 그리고 현재 거친 세상의 파도 속에서 분투하는 모든 이들에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소박한 위로를 선물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집필 의도는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2030 세대와 청소년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은 타당한 이유가 된다.


과거와 미래가 조우하는 신비로운 공간, 담야

<이벤트>의 중심 배경은 고즈넉한 한옥 호텔 담야다. 손님이 뜸한 담야의 홍보 이벤트를 기획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띤 주인공 조슬목은 어느 날 원인 불명의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자신의 집에 모르는 이의 쪽지가 남겨져 있음을 알아채는데.. 매일 밤 침입자의 흔적을 느끼고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던 서른두 살의 조슬목은 화면 속에 찍힌 낯선 남자가 스무 살의 어린 자신임을 알게 된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마주한 두 슬목은 담야의 동료 직원인 승아와 함께 다채로운 사연을 품고 호텔을 찾는 이들을 위한 포근한 행사를 준비한다.


상처를 보듬는 따스한 시선과 반전의 감동

2장 방문객에 등장하는 어린 이모 모모와 시각 장애인 조카 조조의 에피소드가 눈에 띈다. 나이 어린 비장애인 이모가 험난한 과정을 거쳐 취업에 성공한 나이 많은 시각 장애인 조카를 위해 깜짝 축하 이벤트를 준비하는 과정은 우리가 은연중에 품고 있던 낡은 편견을 단번에 깨뜨린다. 타인의 아픔을 마음 다해 공감할 줄 아는 조카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이모의 영상 편지는 억지스러운 감동을 배제하고 인물들의 온기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더불어 3장에서 야간에 호출 당한 스무 살의 슬목과 승아가 엉성한 재료를 모아 떡 케이크를 만드는 호텔 주방 씬 역시 인상적이다. 쌀가루와 녹차 당근 즙만으로 정성스레 케이크를 찌며 '조어름'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두 사물이 맞닿은 곳을 의미한다고 담담히 고백하는 슬목의 모습은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기적적인 현재의 찰나를 절묘하게 구현한다.


섣부른 조언 대신 건네는 묵묵한 응원

이희영 작가의 전작들이 지닌 매력은 <페인트>에서 보여준 날카로운 사회적 상상력이나 <너는 누구니>의 치밀한 서스펜스에 있었다. 반면 이번 신작 <이벤트>는 판타지적 설정을 차용하면서도 한결 온화한 시선으로 인물들을 관조한다.

"인간이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시간을 줄여서 인생이라 한다잖아요(154p)"라는 승아의 대사는 이 소설을 관통하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미래에서 온 서른두 살의 슬목이 과거의 자신에게 섣부른 조언이나 결과를 발설하지 않는다는 규칙 역시 이러한 맥락과 닿아 있다. 결과를 미리 알면 실패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얄팍한 기대를 배반하고 스스로 부딪히며 살아내야 하는 삶의 고유한 가치를 긍정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만남을 기약하며..

스무 살의 불안, 미숙함과 서른둘의 피로와 정체감이 맞닿은 신비로운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단조로운 교훈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오늘을 견디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어깨를 내어줄 뿐이다. 마지막까지 정체를 밝히지 않고 홀연히 해외로 출국해 버린 미스터리한 담야 대표의 행보는 묘한 꼬리표를 남기며 자연스럽게 후속작을 예고하는 듯하다. 소설 중간에 담야의 존재를 모르는 (척하는..) 그와 마주치는 장면이 스쳐가는데, 대표인지는 확실치 않다. 향후 차기작이 출간된다면 고즈넉한 한옥 호텔 담야를 무대로 또 어떤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이벤트가 펼쳐질지 기다려진다. 팍팍한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속도를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이들이라면, 조슬목과 한승아가 정성껏 준비한 이 초대장에 기꺼이 응해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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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였던 날들
AJ 덩고 지음, 임슬애 옮김 / 미메시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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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 덩고가 쓰고 그린 <파도였던 날들>은 2019년 NPR 올해의 책 선정에 이어 2020년 미국 도서관 협회 알렉스상을 받으며 문학성을 입증한 그래픽 노블이다.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는 나이키, 스케쳐스, 비슬라 등 여러 브랜드와 협업하며 특유의 감각적인 선을 선보여 왔다. 이 작품은 전 세계 10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판매 수익금 일부가 암 치료 연구에 기부된다. 골육종으로 세상을 떠난 연인 크리스틴과의 찬란했던 시간과 하와이 서핑의 초기 역사를 교차 편집한 독창적인 구조를 띠고 있다. 상실의 아픔을 겪은 이들, 서핑을 사랑하는 이들, 그리고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독자 모두에게 권할 만한 작품이다.


상실을 예술로 승화한 작가와 영감을 준 영화

이 책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애도의 과정을 서핑이라는 독특한 매개체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AJ 덩고는 인터뷰를 통해 연인 크리스틴의 기억을 기리고 바다가 선사하는 치유의 힘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펜을 들었다고 밝혔다. 투박한 듯 섬세한 선 묘사와 담백한 화면 연출은 시각적 쾌감을 넘어 강렬한 울림을 남긴다. 책 속에서 크리스틴이 열광했던 영화로 언급되는 <블루 크러시>는 2002년 존 스톡웰 감독이 연출한 서핑 영화다. 하와이의 웅장한 바다를 배경으로 여성 서퍼들이 거친 물살에 맞서며 서핑 대회에 출전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담아냈다. 이 영화는 크리스틴에게 서핑을 향한 호기심을 불어넣었고 훗날 투병 생활의 가장 큰 버팀목이 되는 바다로 그들을 이끈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파도를 마주하는 두 가지 색채

작가는 세상을 떠난 연인 크리스틴과의 기억을 서늘하면서도 맑은 청록색 톤으로 그려낸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고 투병의 고통 속에서도 바다를 찾았던 순간들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책 속에 등장하는 영화 <블루 크러시>는 크리스틴의 여동생에게 열정을 불어넣은 매개체이자 이들이 바다로 향하게 된 작은 계기를 보여준다. "파도 밑으로 잠기면 잠시 서로를 잃어버렸다"라는 크리스틴의 일기장 구절처럼 질병은 예고 없이 이들의 일상을 덮친다. 작가의 삶의 파편들이 비로소 맞춰지는 듯싶던 찰나에 연인의 삶은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장면들이 가슴 아프게 절절하다. 크리스틴이 수술을 받는 동안 그 고통을 전부 짊어지고 싶어 했던 작가의 간절한 마음은 페이지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하지만 덩고는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연인이 파도 위에서 느꼈던 해방감과 벅찬 감동을 종이 위에 오롯이 복원한다. 거친 파도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던 연인의 모습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전설이 된 서퍼들의 궤적

개인적인 회고와 맞물려 하와이의 잊혀 가는 전통이었던 서핑을 전 세계에 알린 듀크 카하나모쿠와 톰 블레이크의 일대기가 아스라한 세피아 톤으로 전개된다.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이자 현대 서핑의 아버지로 불리는 듀크는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물의 인간으로서 묵묵히 파도를 탔다. 알로하의 땅에서 온 특사라는 찬사를 받으며 세계 전역에서 전시회를 열고 다음 세대에게 서핑을 알린 그의 발자취는 경이롭다. 1926년 캘리포니아 말리부의 파도를 개척한 톰 블레이크는 증기선을 타고 하와이로 향해 듀크와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두 사람의 우연한 첫 만남은 존경심 가득한 평생의 우정으로 이어졌다. 듀크의 길을 쫓아 속이 빈 서프보드의 혁신을 이끌어낸 톰 블레이크의 삶 역시 고독하지만 끈질긴 에너지를 뿜어낸다. 전혀 다른 시대와 공간에 놓인 듯한 이 역사적 기록들은 결국 파도라는 거대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숭고함으로 수렴된다.


절망 속에서 빛난 생의 의지와 자유의 공간

가혹한 암 투병의 순간에도 크리스틴은 삶의 끈을 놓지 않고 매 순간을 기꺼이 즐기며 사랑하려 애썼다. 곁에서 그녀를 변함없이 지켜주며 온 마음을 다해 아꼈던 저자의 시선에는 애틋함이 가득하다. 캄캄한 밤하늘의 별과 초승달 아래서 두 손을 맞잡고 "내가 죽으면, 네 그림을 통해 계속 살고 싶어"라고 말하는 연인의 당부는 커다란 슬픔 한가운데서도 스러지지 않는 영원을 약속한다. "서프보드에 올라가면 땅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라고 묘사하는 대목은 시선을 끈다. 이는 뼈아픈 상실을 겪은 후에도 삶의 물결은 어김없이 밀려온다는 진실을 일러준다. 육지의 근심을 잠시 잊고 파도라는 운명의 배에서 선장이 되는 찰나는 저자가 왜 그토록 서핑에 각별한 애착을 품게 되었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사랑을 기억으로 남기고 상실을 용기로 빚어낸 이 이야기는 뭉클한 감동을 전한다.


부서진 마음을 안고 다시 바다로..

서핑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맞서 몸을 맡기는 행위다. 파도에서 떨어지면 다시 보드 위에 올라타 헤엄쳐야 한다. 작가는 책 속에서 "우리는 모두 파도타기에 천착하고 바다를 깊이 숭배하며, 부서진 마음을 안고 살고 있다"라고 고백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과 거친 물결에 휩쓸려 넘어지는 서퍼의 모습은 절묘하게 겹쳐진다. 자정이 되기 직전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 고백을 끝으로 크리스틴은 영원한 안식에 든다.

작가의 독백처럼 삶의 공허함은 불변하며 상실의 고통에는 익숙한 패턴이 없이 그저 밀려왔다 밀려갈 뿐이다. 듀크와 톰이 바다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듯, 작가 역시 크리스틴이 남긴 궤적을 따라가며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는다.


미메시스 신간 <파도였던 날들>은 한 개인의 애절한 연가인 동시에 밀려오는 삶의 시련을 기꺼이 껴안으려는 용감한 선언문이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윤슬처럼 남겨진 이들의 삶은 계속 반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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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할매는 왜 다시 산티아고에 갔을까 - 두 번째 까미노, 포르투갈 길을 걷다
이윤 지음 / 푸른향기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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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교육과 명예교수로 정년퇴직한 이윤 작가는 평생을 강단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헌신한 꼿꼿한 학자다. 퇴직 후 발간한 푸른향기 신간 <까칠한 할매는 왜 다시 산티아고에 갔을까>는 출간 직후 다수의 대형 서점 도서 정보와 독자 리뷰에서 호평을 받으며 에세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거침없고 솔직한 문체, 삶을 관조하는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작가는 최근 인터뷰를 통해 칠십 대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십 년 만에 배낭을 멘 이유가 늙음과 상실에 대한 저항이자 긍정이었음을 밝혔다. 이 책은 신체적 한계를 겪는 시니어 세대뿐만 아니라 삶의 전환점에서 방황하는 청년층,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는 모든 도보 여행자에게 진한 위로와 긴 울림을 선사하는 지침서로 적극 추천된다.


무모한 도전의 유일한 이유

마흔 중반 어머니를 황망하게 떠나보낸 상실감을 안고 60대 중반에 첫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십 년이 흐른 뒤 포르투갈 길로 두 번째 배낭을 멨다. 십 년 전 첫 순례 이후 저자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3년 전 왼쪽 발목 골절, 5년 전 무릎 십자인대 파열을 비롯해 아킬레스 건염, 족저근막염, 골다공증 티스코어 마이너스 3.0, 위궤양까지 겹쳐 담당 의사조차 혀를 내두르며 만류하는 상태였다. 이토록 부실한 체력을 이끌고 다시 길을 나선 이유는 단 하나.. 어머니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점차 흐려지는 어머니의 기억을 붙잡고, 십 년 전처럼 꿈에서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그를 다시 까미노로 이끌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지금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걷지 못할 것이라는 절박함도 작용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례일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예감은 발걸음마다 비장함을 부여한다.


포르투갈 길의 여정과 무게

저자가 선택한 코스는 포르투갈 포르투 인근의 빌라 두 피녜이루를 시작으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거쳐 무시아에 이르는 길이다. 해안과 내륙을 오가는 까미노 포르투갈 길은 프랑스 길에 비해 비교적 거리가 짧고 고저 차가 적다고 알려져 있으나, 질퍽한 흙길과 발바닥을 괴롭히는 거친 돌길, 뜨거운 아스팔트가 쉼 없이 교차하여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트래킹 난이도를 지닌다. 총 21일간 이어지는 이 여정은 아름다운 풍광 이면에 가혹한 환경을 숨기고 있다. 첫날부터 6킬로그램으로 맞췄던 배낭은 어느새 8킬로그램으로 늘어나 어깨를 짓누르고, 몸살기에 타이레놀을 삼키며 걷는 고행이 시작된다. 돌길 위에서 아픈 다리를 끌고 걷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기진맥진하며 걷기를 열흘 남짓, 삼십 일 넘게 걸었던 십 년 전 첫 순례와 달리 체력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포르투갈의 고풍스러운 소도시 바르셀루스, 발렌사를 지나 스페인 국경을 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길 안내 표식을 놓쳐 헤매거나 시멘트 벤치에 주저앉아 오렌지주스를 들이켜는 순간들조차 포르투갈 길 특유의 거친 묘미로 작용한다.


길 위의 낭패, 비워내는 시간

순례길은 거창한 깨달음만 주어지는 곳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육체의 반란과 실수가 연발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15일 차 여정에서 저자는 극심한 배앓이와 궂은 비라는 이중고를 겪는다. 캄캄한 새벽 화장실을 오가며 잠을 설치고, 정로환을 삼키며 뱃속 사정을 다스려야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은 노년의 순례자가 감내해야 하는 신체적 한계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다음 날인 16일 차 포르텔라에서 칼다스 데 레이스로 향하는 아침에는 더욱 난감한 소동이 벌어진다. 숙소 본채에 필수품인 등산 스틱을 깜빡 두고 길을 나선 것이다. 스틱 없이는 한 걸음도 떼기 힘든 처지에 머릿속이 하얘진 저자와 달리, 일행인 엘피는 무심히 먼저 가겠다고 선언한다. 이 당황스럽고 이색적인 에피소드들은 헛웃음을 유발하면서도, 집착하던 물건이나 인간관계의 거리를 하나씩 놓아버리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는 순례의 묘미를 드러낸다.


낯선 인연이 건네는 위로

<까칠한 할매는 왜 다시 산티아고에 갔을까>에 등장하는 다채로운 에피소드는 순례길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증명한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묵묵히 걷는다. 바르셀루스 리조 아란테스 카페에서 만난 상냥한 여주인은 잊지 못할 인연 중 하나다. 막힌 세면대를 불평 없이 뚫어준 저자에게 닭 열쇠고리를 선물하며 미소 짓는 주인의 모습은 지친 순례자에게 뭉클한 위안이 된다. 덴마크에서 온 간호사 리나, 길 위에서 만난 씩씩한 스위스 할머니들, 온몸을 던져 조난자를 구하는 용감한 자매, 미국 이민자인 인도 여인 니루파까지.. 나이와 국적을 불문하고 길 위에서 맺어지는 연대는 따스하다. 육체의 고통이 극에 달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에서 비로소 잡동사니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마음의 공간이 비워지고, 웅크렸던 자아가 숨통을 틔우는 과정은 이 에세이의 단연 돋보이는 대목이다.


삶이라는 거대한 순례

<까칠한 할매는 왜 다시 산티아고에 갔을까>는 단순한 기행문이나 정보 전달을 위한 여행서가 아니다. 육체의 쇠락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노년의 자화상이자 먼저 떠난 이들을 향한 절절한 진혼곡이다. 이윤 저자는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매 순간 포기하고 싶었던 심정, 지독한 육체의 고통, 길 위에서 느낀 짜증과 환희를 날 것 그대로 쏟아낸다. 그 서늘한 솔직함이 오히려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

상처 입고 닳아버린 관절로 끝내 무시아 언덕에 당도한 저자의 뒷모습은 우리에게 삶이라는 고단한 순례를 끝까지 걸어낼 용기를 쥐여준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모든 이들의 서재에 꽂아두고 곁을 내어주고 싶은 소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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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마음 - 내 아이의 수학 정서를 높이는 초등부모의 대화법
강미선 지음 / 푸른향기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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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선 저자의 <수학의 마음>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수학교육학 박사학위를 받고 20여 년간 초중고 학생과 예비 수학교사를 지도해 온 교육 전문가의 통찰이 담긴 에세이이다. 국내 최초 수학 전문 서점인 '데카르트 수학책방'을 정유숙 대표와 함께 운영하며 수학교육 대중화에 앞장서는 저자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002년 출간된 <수학은 밥이다>를 전면 개정하여 도서출판 푸른향기에서 새롭게 펴낸 이 책은 점수나 경쟁 중심의 교육에 지친 학부모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저자는 수학을 문제 풀이의 도구가 아닌, 아이의 정서와 태도를 기르는 매개체로 바라보아야 함을 지속적으로 역설한다. <강미선 쌤의 개념잡는 분수비법>, <조선수학의 신 홍정하> 등 30여 권의 저서를 집필한 베테랑 저자가 전하는 현실적인 조언은 불안감에 시달리는 학부모들에게 확고한 나침반 역할을 한다.


다시 태어난 완전 개정판, 그 의미와 가치

<수학은 밥이다>에서 <수학의 마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이유는 명확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자녀의 수학 학습 문제로 고통받는 부모와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30대 중반, 대학원을 다니며 학생들을 가르치던 초보 엄마 시절에 쓴 초판의 열정은 그대로 유지하되, 긴 시간 축적된 교육 현장의 경험과 다듬어진 이론을 더해 더욱 단단한 에세이로 완성되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과거의 책이 절판되어 시중에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꼭 개정판을 내달라고 요청한 독자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팍팍한 학습 환경 속에서 아이들이 수학의 본질을 잃지 않고, 호기심과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를 바라는 저자의 진심이 책의 곳곳에 녹아 있다. 문제의 정답만을 쫓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중시하고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는 수학적 정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은 이 개정판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보여준다.


성적이라는 환상을 깨는 인상적인 에피소드

인상적인 대목은 단연 아이와 함께 방송에 출연했던 에피소드이다. 과거 담당 피디가 촬영의 재미를 위해 아이에게 100점을 맞고 싶다고 대답하길 요구했을 때, 아이는 단호하게 95점을 맞겠다고 고집을 부려 실랑이가 벌어진다. 저자는 당시 5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아이들을 다그쳤던 자신의 과거를 담담하게 고백한다.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아이의 숨통을 막는 일인지 깨달아가는 과정은 깨달음을 선사한다. 만점에 대한 강박을 버릴 때 비로소 삶의 여유가 생기고, 아이가 스스로 학교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통찰은 학부모의 불안한 심리를 찌르는 날카로운 조언이다. 부모의 과도한 기대가 아이의 수학적 호기심을 어떻게 짓밟는지 돌아보게 하며 진정한 학업 성취는 여유로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기다림의 미학을 증명하는 브라질의 실험

책의 중반부에 소개되는 브라질의 블록 쌓기 실험 역시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진다. 부모와 아이가 짝을 이룬 팀과 교사와 아이가 짝을 이룬 팀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판이하게 달랐다. 부모들은 시행착오를 경제적 낭비로 치부하며 아이에게 정해진 정답의 경로만 지시했다. 반면 교사들은 실수를 이해의 과정으로 여기고 아이의 의견을 물으며 충분히 기다려주었다. 이는 수학적 사고력이 마치 공장의 생산품처럼 단기간에 찍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효율성만 따지며 자녀를 다그치던 부모라면, 이 대목에서 아이가 생각할 시간을 빼앗았던 지난날을 반성하게 될 것이다.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스스로 왜라고 질문을 던지며 답을 정당화하는 태도야말로 평생을 살아가는 데 유용한 자산이 된다는 저자의 철학이 잘 드러난다.


부모의 기다림과 질문이 만드는 수학적 대화법

아이가 수학의 묘미를 느끼고 온전히 즐기게 하려면 부모의 조급함을 내려놓는 태도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새롭게 추가된 책의 여러 에피소드에서 엿볼 수 있듯, 아이가 문제의 해답을 곧바로 찾지 못할 때 정답을 다그치기보다는 최소 삼 분 정도 여유를 두고 스스로 생각할 틈을 주어야 한다. 단순한 계산 결과에 급급한 아이에게는 "왜 그렇게 생각했어?"라며 풀이 과정을 되묻거나, "그림으로 한 번 그려서 풀어볼까?"라고 제안하며 논리적 근거를 설명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 현명하다. 또한 수학은 무조건 답이 하나뿐이라는 낡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해결 방식을 탐구하도록 장려하는 대화가 필수적이다. 남들보다 선행학습을 서두르는 빠른 철학을 가진 부모가 무조건 성공하는 것도, 느린 철학을 가졌다고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

12년이라는 장기적인 교육과정의 안목을 둔 상태로 자녀의 성향에 맞는 학습 스케줄을 짜는 지혜가 요구된다. 맹목적인 암기가 아니라 억지스럽지 않게 개념을 납득하는 과정을 거칠 때.. 아이는 비로소 수학을 세상을 살아가는 든든한 무기이자 친구로 삼게 된다.


평생의 동반자로 자리 잡는 수학의 진정한 의미

책의 말미, 저자는 수학을 입시를 위한 단순한 점수 획득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세태를 꼬집는다. 시험 문제의 정답만을 맞추는 데 매몰되면 졸업과 동시에 수학과의 인연은 단절되며, 자칫 과목 자체에 대한 혐오로 이어질 수 있음을 짚어낸다. 저자는 수학을 일컬어 살아가며 마주하는 곤란한 상황에서 해결 과정을 귀띔해 주는 유익하고 다정한 친구라고 묘사한다. 보이지 않지만 늘 곁에서 자신을 돕는 든든한 학문이라는 믿음이 생길 때, 아이의 마음속 불안은 가라앉고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수학은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도구가 아니라, 삶의 도구 그 자체라는 에필로그의 통찰은 학부모의 뇌리에 강한 잔상을 남긴다. 대학 입시라는 좁은 관문을 넘어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동반자로서 수학을 대할 때.. 내 자녀의 첫 수학은 비로소 가정에서 올바른 닻을 내리게 된다.


편견을 깨는 실전 지침 & 총평

<수학의 마음>의 전체적인 구성은 부모의 성향을 진단하는 장부터 초등수학 가르치기의 실제, 선행학습과 자기 주도 학습의 허와 실까지 체계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수학은 반복 학습만이 능사인지, 답은 오직 하나뿐인지 등 부모들이 흔히 착각하는 선입견을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토파즈 효과를 조심하라는 경고나, 언어력이 탄탄할수록 수학적 사고도 높아진다는 조언은 실전에서 곧바로 적용할 수 있는 유용한 지침이다.

단조로운 문제 풀이 요령을 넘어 수학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 변화를 촉구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다른 실용서들과 궤를 달리한다. 푸른향기 개정판 <수학의 마음>은 아이의 수학 교육을 빙자하여 부모 자신의 불안을 달래고 있던 어른들에게 건네는 따끔하면서도 다정한 처방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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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나선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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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야기꾼, 히가시노 게이고를 기리며

2026년 7월 23일, 68세의 나이로 대장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미스터리 소설의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를 추모하며 글을 시작한다. 1985년 <방과 후>로 데뷔한 이래 <용의자 X의 헌신>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 100권이 넘는 작품을 남긴 그는 누적 판매 부수 1억 부를 돌파하며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 장르 문학을 이끌었다. 엔지니어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바탕으로 정교한 과학 트릭을 선보이던 그는 점차 사람의 감정과 인물 간의 관계성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작풍을 넓혀왔다. 넷플릭스 영상화 및 일본 종합 베스트셀러 1위 등 눈부신 성과를 기록한 그의 새로운 서사, 시리즈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몹시 비통하다.


시리즈의 전환점, <투명한 나선>

히가시노 게이고의 갈릴레오 시리즈 최신작 <투명한 나선>을 손에 들었다. 분량은 400여 페이지..

북다 출판사에서 김선영 번역으로 출간된 이 소설은 시리즈 열 번째 장편이라는 상징성에 걸맞게, 그간 베일에 싸여 있던 천재 물리학자 유카와 마나부의 개인사를 처음으로 수면 위에 올린다. 차가운 이성의 대명사였던 유카와의 내면이 드러나는 전개에 신선한 충격을 감출 수 없다. 작가 스스로도 갈릴레오 팬이라면 분명 놀랄 것이고 히가시노 팬이라면 더욱 놀랄 것이라고 공언했을 만큼, 이 책은 작가가 오랜 시간 가슴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비로소 꺼내놓은 의미 있는 결과물이다.


투명하게 얽힌 혈연의 미스터리, 그 시작점

지바현 미나미보소 앞바다에서 영상 제작자 우에쓰지 료타가 등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채 발견되면서 사건은 막을 올린다. 메구로 경찰서의 형사 구사나기와 가오루가 수사망을 좁혀가는 가운데.. 사망자의 동거인인 시마우치 소노카가 일하던 꽃집에 휴가를 내고 돌연 자취를 감춘다. 소노카는 교제 폭력을 일삼던 우에쓰지에게 지속적인 가스라이팅과 학대를 당하던 피해자였다. 옛 친구 오카타니 마키 등 지인을 만나는 것조차 통제당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던 소노카의 삶은 지옥과 다름없었다. 홀어머니 시마우치 지즈코마저 잃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노카를 돕기 위해, 평소 모녀를 챙기던 마쓰나가 나에가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나타나 그녀의 도주를 돕는다.


폭력의 사슬을 끊어내는 여성들의 연대

경찰이 흩어진 단서들을 추적하는 동안 사건 이면에 숨겨진 인물들의 비밀이 하나둘 형체를 드러낸다. 특히 고급 클럽을 운영하는 네기시 히데미의 서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히데미는 과거 자신이 버렸던 핏덩이가 아사카게 보육원에서 자란 지즈코였음을 수제 인형의 비밀을 통해 깨닫는다. 후에 진실은 다른 방향으로 인형의 진짜 주인을 가리키지만, 서사는 걷잡을 수 없이 격류를 탄다. 인형 옷 속에 적힌 비밀 이름은 끊어질 수 없는 혈연의 증표였다. 지즈코의 딸인 소노카가 자신의 친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히데미, 그리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음에도 기꺼이 소노카의 방패가 되어준 나에까지,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소노카를 구원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 핏줄이라는 원초적인 연결고리와 헌신적인 사랑이 어떻게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차가운 물리학자의 제일 뜨거운 고백

이 소설이 갈릴레오 시리즈의 전작들과 무엇보다 확연하게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탐정 유카와의 위치와 나이 듦이다. 서른넷 부교수였던 그는 어느덧 쉰이 넘은 정교수가 되었고, 작가는 유카와 부모님의 노환과 병간호 묘사를 통해 세월의 흐름을 현실적으로 조명한다. <용의자 X의 헌신>이나 <한여름의 방정식> 등에서 유카와는 철저한 외부자의 시선으로 얽힌 실타래를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데 주력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냉철한 학자의 표본이었다. 허나 이번 수사 과정에서는 뜻밖에 유카와의 이름이 등장하고, 그는 제삼자가 아닌 사건의 당사자로서 진실의 중심에 선다.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며 오랜 친구 구사나기에게 선을 긋던 그는 마침내 평소라면 절대 내비치지 않았을 출생의 비밀을 고백한다. 구사나기와의 대화에서 자신을 버렸던 마쓰나가 나에를 가리켜 "내 친어머니야"라고 밝히는 대목은 팬들에게 커다란 놀라움을 안긴다.

단 한 번도 흔들림 없던 유카와가 사건에 직접 개입하며 자신의 뿌리를 마주하는 과정은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히게 이색적이면서도 매력적인 변곡점을 만들어낸다.


보이지 않는 끈이 빚어낸 찬란하고 시린 결말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 가족이라는 존재는 때로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나선이 되어 서로의 삶을 강하게 옭아맨다. 이 작품은 살인 사건의 진상이나 트릭을 파헤치는 쾌감보다는 인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의 타당성에 집중하며 아스라한 감동을 선사한다. 논리와 이성으로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의 파동을 과학자의 시선으로 껴안은 이 소설은 인간 탐구 보고서에 가깝다. 본편 에필로그 이후 별개 사건을 다룬 스페셜 단편 <겹치다>가 최초로 수록되어 소장 가치를 더한다. 유카와 마나부, 너의 죄를 사하노라라는 상징적인 문구가 책장을 덮은 후에도 오랜 시간 머릿속을 맴돈다. 시리즈를 꾸준히 사랑해 온 독자는 물론이고 혈연과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갈릴레오 최후의 수수께끼, 한국에 출간될 유작 <영원한 기억>

고인의 부고와 함께 갈릴레오 시리즈가 이것으로 종결된다는 사실이 무척 애통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한국 독자들을 위해 최종적으로 출간될 진짜 유작이 하나 더 남아있다. 바로 일본에서 지난 2026년 8월 5일 출간된 시리즈 열한 번째 장편 <영원한 기억>이다. '갈릴레오, 마지막 수수께끼'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형사 우쓰미 가오루가 흉기에 찔리는 사건을 계기로 유카와가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을 담았으며, 교보문고 북다를 통해 조만간 국내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일생을 다해 흥미진진한 서사를 선물해 준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하며,

그가 남긴 106번째 서사가 도착할 날을 차분히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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