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들 환상하는 여자들 2
브랜다 로사노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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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싸웠던 전장에는 꽃을 가지고 가야 하는 법이야."

"아이 버섯은 지혜롭습니다. 지혜가 곧 언어이기 때문이지요. 지혜는 몸이 아닌 목소리입니다."


남미 문학의 신경향을 이끌 작가로 손꼽히는 '브렌다 로사노'의 <마녀들>이 은행나무 '환상하는 여자들' 시리즈의 제2권으로 출간되었다.

소설은 오악사카의 후예로서 치유자의 피가 흐르던 '팔로마'가 살해당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팔로마는 가스파르라는 이름의 소년으로 출생한, 사포텍 문화권에서 제3의 성으로 인정받는 '무셰'이다.

일종의 주술적 언어를 통해 길흉화복을 점치고 미래를 예지하는 전통 무속인인 듯하다.


팔로마의 살인 사건을 취재하는 젊은 기자 '조에'와 팔로마의 사촌이자 후계자인 '펠리시아나'가 번갈아 등장하고 또는 마주치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자신 혹은 주위의 여성들이 성장하면서 다양한 폭력에 노출되고, 위험에 처하는 장면이 연이어 묘사된다.


현대적인 도회지 멕시코시티와 호젓한 산골 마을 산펠리페에서 각각의 여성들은 신체적/정신적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딸에게 닥칠 위험을 예지하는 엄마의 기이한 능력 때문에 몇 번의 구사일생을 경험한 조에는 그 비결을 묻는다.

"여자들은 모두 자기 안에 마녀 같은 면을 조금은 품은 채로 태어난단다.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지."


여성들은 무법천지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신비한 능력을 일부 지니고 태어난다. 그 필살기는 후천적으로 습득될 수도 있다. 허나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홀로 생존하기는 불가능하다. 여성들은 연대와 협력을 통해 서로의 무사안녕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단단히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아야만 마녀사냥을 피할 수 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고립되어 반사회적인 이단으로 취급받는 마녀들을 불태우기 위한 제단이 높이 솟아 있다. 활활 불타오르는 화형대를 목전에 두고 여성들은 공동체 의식을 굳게 다지는 한편, 각자의 언어적 능력을 발휘해 연대할 필요가 있다. 마술적인 힘과 집단의식이 깃든 언어는 지혜를 발화시키며, 이를 통해 이질적인 세계와 진영은 조화를 이루고 평안을 되찾을 수 있다. 세대를 넘은 치열한 투쟁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을 때.. 생살이 타드는 고통이 멈추고 잿더미만 남은 전장에 검붉은 꽃무리를 수놓을 수 있는 것이다.


브렌다 로사노의 장편 소설 <마녀들>은 두 여성과 세계가 대립이 아닌, 언어적 치유와 연대를 통해 폭력의 상처를 회복하고 해소하는 이야기를 마술적인 필치로 그린다. 우리는 그녀의 소설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상처가 집단의 언어를 통해 회복되는 주술적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현실 사회의 편견과 무자비한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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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마지막 여름
지안프랑코 칼리가리치 지음, 김현주 옮김 / 잔(도서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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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로마'는 화려하고 북적이는 대도시지만, 그 이면은 황량하고 혼탁한 데다 퇴색되어 가는 그림자가 기울었다. 그 도시에 머무르는 이들은 수많은 군중들에 둘러싸여 정처 없이 표류한다. 그들은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관심과 사랑을 갈망하지만, 도시가 내뿜는 어둑한 그림자에 온몸이 물드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외로움과 고독은 떨어질 수 없는, 그들의 절친이었다.




1973년 첫 출간 이후, 절판과 재출간을 거듭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으로 남은 컬트 소설 <도시의 마지막 여름>이 출간되었다. 알음알음 입소문으로 이어진 명성답게, 로마의 명소를 묘사한 '지안프랑코 칼리가리치'의 문장들은 생동감이 넘치고 정교하기까지 하다. 커플의 애정 행위를 정밀 스케치한 문장들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에로틱하게 들끓는다. 책을 읽다 보면 밀라노에서 로마로 건너온 '레오'가 되어 핀초 언덕의 테라스, 캄포 데이 피오리의 쉼터, 움베르티노 지구 등 한여름 로마의 곳곳을 방랑하듯 거닐 수  있다. 레오는 완벽한 혼자가 아니었다. 로마 상류층에 속하는 어느 부부와 가까이 지냈고, 뜻이 맞아 함께 영화를 제작하려 한 절친 '그라지아노'도 외로움을 달래 주었다. 그와 사랑 비슷한 감정을 나누는 '아리아나' 또한 나비처럼 그의 곁에 머물다 사라짐을 반복하며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번잡한 도시 안에서 무의미하고 공허한 나날을 지속하던 레오는 곁의 모든 이들을 관찰한다. 어떠한 분석이나 냉철한 비판 없이 방관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끝 모를 고독의 중심으로 점차 끌려간다. 가혹한 운명은 무더운 도시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그를 놓치지 않았다. 진심으로 교류하던 그라지아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레오는 도시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 존재의 의미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애써 숨기고 부정하면서 아리아나 곁에 머물려 했던 그는 벼랑 끝으로 자신을 몰고 간다. 헛된 허영심과 사치에 잠식당한 그녀는 결국 레오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다. 레오는 하이에나처럼 타인이 남긴 음식을 먹어치우고, 사랑하는 애인을 독차지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절감하며, 도시에서 버림받고 추방당한 모든 이들을 받아주는 푸른 '바다'를 향해 다가간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영원을 향해 나아갔다.

 



50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이 대중들 사이에서 망각되지 않고 복간되는 데는 어떤 보편적 의미가 숨어있을 것이다. 우리는 각종 SNS로 촘촘히 연결된 인터넷/디지털 AI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레오가 느끼는 고독감과 허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인간관계는 이런 모순을 극대화하며, 무수한 팔로워에 둘러싸여 소외감과 외로움을 면치 못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정량적인 숫자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장기간 고립되어 끝내 고독사할 처지에 몰리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도심의 이면에 깔린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진심 어린 사랑과 우정을 나누지 못하는 '레오'들은 오늘날 대도시 어디에나 존재한다. 돛을 올리고 나아가야 할 뚜렷한 목적지 없이 떠도는 이들.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존재 의미를 숙고하지 않은 채, 부유하는 이들이 여러 도시에 남아있는 한, 이 책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보편성을 획득할 것이다. <도시의 마지막 여름>이 시대를 관통하는 영원한 고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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펫페페페
짐리원 지음 / 아작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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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작 신간, 짐리원 소설집 <펫페페페>는 다가오는 기후 위기와 비인간 생명체, 변형되는 인간의 신체를 낯설고 다정한 시선으로 조명하는 작품이다. 단편 <올림픽공원 산책지침>으로 2023년 제3회 문윤성 SF 문학상 중단편 부문 우수상을 받으며 역량을 입증한 작가는 <과학동아>에 <엔딩의 발견>, <여름농장의 비밀> 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기후 변화와 환경 오염 문제를 꾸준히 다루어 왔다. 저자는 소개 글을 통해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조금이나마 마음이 밝아지는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는 다짐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창작 배경은 멸망을 앞둔 세계 속에서도 일상의 평범한 순간들을 애틋하게 기록하려는 밀도 있는 문장으로 이어진다. 생태계의 붕괴나 신체 훼손 같은 디스토피아적 설정 앞에서도 거창한 영웅주의 대신 평범한 사람들의 작고 연약한 연대를 내세운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 파국 속에서도 희망의 단초를 발견하길 원하는 독자들에게 권유할 만한 책이다.


상실을 애도하고 생명을 돌보는 다채로운 서사

<펫페페페>에는 총 10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무기여 안녕>은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 공터에 서식하는 투명동네이무기를 지켜보는 노아의 고뇌를 다루며 폭력과 돌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짚어낸다. <올림픽공원 산책지침>은 기후 대격변 이후 서늘한 가을 날씨를 느끼기 위해 미래에서 온 여행자의 애틋한 여정을 그린다. <모든 코끼리가 아스팔트 길을 건너고 나서>는 과거 데니소바인이 지구 생태계 재구축을 위해 빌려 간 울리매머드 7만 마리와 털코뿔소 9만 마리를 호모 사피엔스에게 반환하려 하자 민지와 은수가 겪는 딜레마를 보여준다.

<목도리와 우주적 불행의 이야기>는 화재로 사망한 재현과 남겨진 견우, 아영의 사연을 통해 부분적 생명형 부정 상태의 영혼을 위로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특히 전생의 기억을 저장하는 'RnAD'라는 설정과 환생의 확률을 계산하며 다가오는 우주적 불행에 맞서는 인물들의 모습이 여운을 남긴다. 영혼이 풍선처럼 떠다니는 영혼철을 배경으로, 영혼을 곶감처럼 말려 먹는 기이한 식습관을 지닌 연우와 그를 지켜보는 해진의 이야기를 다룬 <연우의 레시피>는 기상천외한 설정 속에서도 십 대들의 불안한 심리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기억과 사회>는 살인적인 폭염 속에서 기후 우울증을 피하고자 과거의 감각을 지우는 딥클렌징 시술의 역설을 서늘하게 포착하며, <수면예찬>은 생태계 파괴를 멈추고자 인류 전체를 무기한 수면에 들게 하는 극단적 처방을 다룬다. 인간의 노동 효율,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연 손을 절단하고 칩을 삽입하여 자동 수작업을 구사하는 기괴한 미래를 그린 <손>은 인공 핸드에 적응하여 변모하는 선오의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의 비정한 이면을 비춘다. 몸에 돋아난 진짜 날개를 떼어내려는 영이와 이삭의 사투, 가짜 날개를 패션처럼 소비하는 '엔젤코어' 유행을 대비시킨 <날개주의보> 역시 타자의 신체를 규정짓는 사회적 폭력성을 통찰력 있게 고발한다.


통제를 넘어선 연대, 표제작 <펫페페페>의 공존 방식

단연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은 표제작 <펫페페페>이다. 거대 기업 영생 바이오의 비밀 실험으로 인해 주요 플라스틱인 PET와 폴리에틸렌 등을 녹이고 분해할 수 있게 된 오리(펫페 & 페페)들을 구출하려는 예나와 보현의 분투가 중심을 이룬다. 인간이 만든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생명을 도구화하는 어른들의 세계에 맞서 예나는 흰 오리 페페를 가방에 숨기고 달린다. 인간이 정해놓은 안전한 결말을 포기하더라도 새롭게 탄생한 생명체 스스로가 생존 방식을 결정짓도록 옥상 끝에서 오리를 하늘로 날려 보내는 선택을 한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통제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생명들을 기꺼이 놓아주는 두 소녀의 결단을 통해 드러난다. 안전한 실험실의 울타리를 벗어나더라도 오리가 직접 창공을 비행하도록 돕는 행위는 억눌린 자유를 되찾는 쾌감을 선사한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빚어진 참상 속에서도 타자를 향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려는 연대 의식이 잔잔한 파동을 남긴다.


종말의 문턱에서 마주한 눈부신 일상

아작 신간 <펫페페페>는 거대한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다루면서도 파괴적인 스펙터클에 의존하지 않는다. 뒤표지에 적힌 "세계는 끝나기 직전에도 아름답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세계를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오래된 이유다"라는 문장처럼 멸망의 과정 속에서도 여전히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과 남겨진 사람들의 체온에 집중한다. "이런 날씨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이상해"라는 대사는 기후 변화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무력감을 느끼기보다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사소한 친절을 건네는 힘을 믿는 작가의 태도는 굳건하다. 일상적인 공간인 서울의 골목과 아파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기묘하고 따뜻한 서사들은 서서히 끓어오르고 넘치고 무너지는 지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안이 되어준다. 투명한 이무기와 플라스틱을 먹는 오리들이 펼치는 도시생태 SF를 통해.. 사라지는 계절을 지나 아직 오지 않은 여름으로 향하는 짐리원의 세계를 직접 확인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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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핑크스의 왼쪽 눈동자
김유진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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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질문에서 출발한 매혹적인 세계관

북다 출판사에서 2026년 8월 출간한 김유진 작가의 장편소설 <스핑크스의 왼쪽 눈동자>는 제13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최우수상을 받은 화제의 SF 미스터리 스릴러다. 작가는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다 2024년 첫 장편소설 <센트 아일랜드>로 데뷔한 이후 하나의 질문을 파고들어 매력적인 서사로 확장하는 독특한 작품 스타일을 구축해 왔다. 이 책은 기억을 지우려는 자와 복원하려는 자의 팽팽한 대립을 통해 혈연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 진지한 메시지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특히 작가가 해당 공모전에 세 번 연속 도전하여 끝내 대상을 거머쥔 집요함이 작품의 완성도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기승전결 내내 서스펜스를 잃지 않아 촘촘한 복수극을 찾는 독자들에게 적극 권할 만한 소설이다. <살인자의 쇼핑몰>을 집필한 강지영 작가가 "작품을 읽는 내내 제발 지금 멈춰 줘, 라고 외치며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경험이 빈번했다"라고 격찬한 것처럼 미지의 진실을 좇는 지적 쾌감이 상당하다.


조각난 기억을 좇는 자들의 엇갈린 궤적

첨단 의술을 통해 타인의 기억을 임의로 매만질 수 있는 근미래를 무대로 삼은 서사의 짜임새는 도입부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브레인 임상연구센터의 연구원 김수오와 네스트 신경외과 소속 의사 주경재의 시점이 각 장에 걸쳐 번갈아 교차하는 방식은 쉴 새 없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산 자들은 기억이라는 형벌을 안고 눈을 뜬다."라는 프롤로그처럼 망각이 인간에게 내린 자비로운 축복인지 진실을 가리는 형벌인지에 대한 딜레마가 이야기 전반을 관통한다.

무엇보다 주경재의 충직한 비서인 차민철이라는 인물이 서사의 판도를 뒤흔드는 변수로 등장하여 극적인 몰입감을 선사한다. 수오는 네스트 신경외과에서 과거 수술을 받았던 어머니의 진료 기록을 캐내기 위해 차민철에게 은밀히 접근한다. 보육원 시절부터 주경재와 질긴 인연을 맺어온 차민철이 과거 화재 사건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결국 수오와 공조하는 장면은 짜릿한 반전을 선사한다. 수오가 징계를 무릅쓰고 석 달간 네스트의 임시 비서로 위장 잠입하여 불법 수술 녹화 파일이 담긴 USB를 찾아내려는 대목은 첩보물 못지않은 박진감을 부여한다.


은폐된 진실과 마주하는 쓰라린 순간

감춰진 과거의 실타래를 역추적하여 마주하는 숨 막히는 진실에 대한 묘사는 이 소설의 백미다. 수오가 앵커 로봇을 통해 어머니의 잃어버린 2년간의 뇌리 속 파편을 복원하는 수술실 대목은 잔상을 남긴다. 동료 의사 신진서가 망각은 필요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기억도 있는 것이라고 건네는 뼈 있는 조언은 소설을 관통하는 거대한 주제 의식을 대변한다. 특히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스핑크스의 왼쪽 눈동자 실체가 드러나는 대목은 충격적이다. 수오가 마침내 손에 넣은 스핑크스의 눈동자 블록 USB 중 오른쪽 눈동자에는 과거의 동거 흔적이 담겨 있었고, "이거 먼저 보여 주세요. 스핑크스의 왼쪽 눈동자."라는 수오의 말과 함께 재생된 영상에는 어머니가 골목에서 괴한에게 습격당하는 참혹한 진실이 녹화되어 있었다.

타인의 기억을 임의로 도려내며 자신만의 기형적인 성곽을 쌓아 올린 주경재의 비틀린 내면 묘사 역시 소름을 돋게 한다. 무정이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기르며 타인과의 좁은 울타리를 고집하는 그는 철저히 통제된 관계만을 원한다. 과거 차민철이 겪은 보육원 화재 사건의 진범이 다름 아닌 주경재였으며 "보육원이 불타면 엄마에게 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364쪽)라는 변명이 밝혀지는 순간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그의 오만한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인위적 망각을 뛰어넘는 복수의 카타르시스

북다 신간 <스핑크스의 왼쪽 눈동자>가 유독 돋보이는 이유는 기억 조작이라는 공상과학적 상상력을 복수극의 서사 안에 빈틈없이 녹여냈다는 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남겨진 기억의 유무에 따라 위태롭게 요동치고, 종국에 수면 위로 드러나는 흑막의 진상은 날 선 자극을 안겨준다. 네스트 신경외과 원장 자리에서 밀려나고 수오에게 재산을 뺏긴 채, 병실에 무기력하게 누운 주경재의 말로는 참담하다.

모든 진실을 깨달은 수오가 기억을 상실한 주경재를 향해 "오래오래 사세요! XX."라고 읊조리며 병실을 나서는 마지막 장면은 오직 피를 부르는 일차원적인 징벌을 넘어선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오히려 피로 맺어진 혈연의 굴레가 어떻게 변모하는지 날카롭게 통찰한다. 인간의 삶과 존엄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훼손되지 않은 기억이라는 진실을 밀도 있게 그려내어 다 읽고 난 후에도 오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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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다정한 대만이라니 - 숨겨진 매력을 찾아 떠난 17번의 대만 여행, 그리고 사람 이야기
이수지 지음 / 푸른향기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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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향기 신간, 이수지 작가 에세이 <이토록 다정한 대만이라니>는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무려 17번이나 대만을 찾은 자칭 '대친자'이자 여행 콘텐츠 크리에이터인 저자 리슈의 각별한 애정이 듬뿍 담긴 기록물이다. 이 책은 화려한 랜드마크나 유명한 미식 거리를 넘어, 가이드북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현지인들의 소박한 일상과 따스한 온기를 조명한다. 단기 여행에서 시작해 워킹홀리데이와 두 달 살기로 이어진 저자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다. 저자는 여러 채널을 통해 대만의 진짜 매력은 관광지가 아닌 현지인들이 건네는 넉넉한 미소와 다정함에 있다고 줄곧 강조해 왔다. 특유의 섬세한 관찰력과 포근한 시선으로 여행지에서 마주친 찰나의 인연들을 담백한 문장으로 엮어내며,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관광이 아니라 골목길의 풍경, 낯선 이가 건네는 조건 없는 친절,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미학을 촘촘히 기록하고 있다. 뻔한 일정에 지친 독자들에게 잔잔한 울림을 선사하며, 출국을 앞두고 있거나 한 달 살기를 꿈꾸는 예비 여행자는 물론, 타인의 진실된 온기가 그리운 모든 이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만한 책이다.


낯선 골목에서 마주친 다정함, 대만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여정의 묘미는 유명한 명소 앞에서 인증 사진을 남기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길을 잃고 헤매던 낯선 골목, 예기치 않게 쏟아지는 비를 피하려 들어간 작은 상점, 그리고 말은 통하지 않아도 기꺼이 손을 내밀어 주는 현지인의 미소 속에 진짜 얼굴이 숨어 있다. 이수지의 <이토록 다정한 대만이라니>는 바로 그 숨겨진 얼굴을 집요하면서도 다정하게 찾아낸 17번의 발자취다. 이 책은 타이베이 101타워나 화려한 야시장을 단순히 나열하는 정보서가 아니다. 신베이의 단수이, 핑둥의 컨딩, 타이둥의 뤼다오 등 구석구석을 누비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를 측정해 나가는 온화한 관찰기에 가깝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가 겪은 흥미롭고 다채로운 에피소드들에 자연스레 시선이 머문다. 직장 상사에게 휴가를 반려당한 뒤 홧김에 떠난 비밀 여행에서 저자는 단수이 워런마터우의 붉은 노을을 바라본다. 강변을 산책하며 버스킹 공연을 감상하고, 온통 붉은빛으로 물든 풍경 앞에서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던 불편함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경험을 털어놓는다.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충동적으로 떠난 발걸음이 어떻게 개인을 치유하는지 보여주는 솔직하고 매력적인 장면이다. 꾸밈없는 다정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들도 다수 포진해 있다.

가족 여행 중 현금만 받는 가게에 카드 한 장만 달랑 들고 75위안짜리 버블티를 사러 간 형부에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음료를 그저 선물로 건넨 점원의 일화는 이윤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넉넉한 인심을 보여준다. 핑둥의 컨딩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가오슝역 앞에서 홍콩인 세 명과 인당 350위안을 내고 택시를 쉐어하며 합승한 기억, 얼떨결에 일행이 되어 바다로 뛰어든 스노클링 에피소드가 무계획이 주는 짜릿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타이둥의 부속 섬 뤼다오에서의 경험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섬 전체가 자연보호구역처럼 조용한 그곳에서 저자는 낯선 전동 오토바이에 의지해 때 묻지 않은 해안 도로를 달리며 마주한 날것의 자연을 통해 독자에게도 탁 트인 해방감을 전달한다.


소도시의 낭만과 예기치 못한 온기

페이지를 넘기면 저자가 현지인들의 일상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간 흥미로운 순간들이 펼쳐진다. 핑둥 컨딩에서 즐긴 실내 새우 낚시는 해양 액티비티와는 전혀 다른 이색적인 문화를 보여준다. 1인당 2시간에 450위안을 지불하고 어설프게 낚싯줄을 드리운 장면은 혼자였다면 시도조차 어려웠을 로컬 문화 체험의 백미다. 또한 난터우에서의 반딧불이 에피소드는 이 책이 지닌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반딧불이 명소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해 헤매던 저자 일행에게 식당 사장님은 저녁 장사를 마치고 흔쾌히 자신의 차로 불빛 하나 없는 산길을 운전해 반딧불이를 보여준다. 환상적인 풍경보다 낯선 이방인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어준 사장님의 배려가 짙은 여운을 남긴다.

타이베이 지역의 색다른 시선도 돋보인다. 


넷플릭스 드라마 <투 시티 투 걸스 A Taiwanese Tale of Two Cities>를 통해 알게 된 디화제와 다다오청 일대는 붉은 실로 인연을 이어준다는 월하노인을 모신 사원과 독특한 건축물들이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려한 도심 속에서 옛 정취를 간직한 이 거리를 거니는 발걸음은 독자들을 새로운 시간 여행으로 안내한다. 자이시의 아리산 국가 삼림 공원에서는 비 오는 날의 싱그러운 숲 내음과 함께 아리산빈관에 위치한 50년대 카페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여유를 만끽하는 운치 있는 장면이 묘사된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 속에서 따뜻한 디저트를 맛보며 흘려보낸 조용한 시간은 비 오는 날의 휴식이 주는 특유의 차분한 매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미각의 호기심부터 자유로운 연대의 현장까지

현지에서만 맛볼 수 있는 기상천외한 미식 경험과 사회적 연대에 관한 성찰은 이 책을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든다. 미각을 자극하는 다양한 야시장 음식 외에도 대만 피자헛에서 선보인 과감한 메뉴 도전기는 시선을 사로잡는다. 취두부, 두리안, 고수, 그리고 돼지피떡을 토핑으로 올린 피자나 타피오카 펄 피자 같은 기상천외한 메뉴를 직접 맛보는 장면은 현지 트렌드를 온몸으로 흡수하려는 저자의 유쾌한 호기심을 증명한다.

이란 지역에 위치한 카발란 증류소 방문기 역시 흥미롭다. 고온 다습한 기후를 역이용해 짧은 숙성 기간에도 특유의 진한 풍미를 만들어낸 3년산 싱글몰트 위스키의 탄생 과정을 지켜보며, 한 잔의 술에서 시작된 취향이 어떻게 뚜렷한 목적지가 되는지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단순한 유희를 넘어 사회의 개방성과 포용력을 다룬 부분은 상당한 시사점을 던진다. 아시아 최초로 동성혼을 합법화한 국가답게.. 아시아 최대 규모로 열리는 대만 LGBT 프라이드 행사에 직접 참여한 저자의 기록은 무척 인상적이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축제처럼 즐기는 현지인들의 평화로운 연대는 고정관념을 깨고 열린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자이시 팸투어 중 만난 크리에이터와의 우정 여행 에피소드 역시 공통의 관심사가 어떻게 국경을 넘어 사람을 연결하는지 잘 보여준다.


기존 여행 가이드북과 차별화되는 매력 포인트

시중에 출간된 수많은 대만 안내서들은 대체로 최적의 이동 동선, 꼭 가봐야 할 랜드마크, 반드시 먹어야 할 맛집 리스트를 나열하는 데 집중한다. 반면 이수지의 에세이는 효율성과 판에 박힌 목적 달성을 과감히 내려놓았다는 점에서 기존 도서들과 명확히 궤를 달리한다. 책의 뒤표지에 적혀 있듯 특유의 눅눅한 날씨와 회색빛 건물, 어수선한 오토바이 행렬 속에서 저자가 발견한 것은 무심한 듯 정겨운 눈인사를 건네는 상인들과 느긋한 길고양이의 평화로운 일상이다.

에필로그에 담긴 글은 이러한 차별점을 선명히 드러낸다. 저자는 현지인 친구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이름 모를 골목길의 빛줄기를 감상하고, 단돈 200위안을 내고 들어간 조그마한 구관 노천탕에서 일행들과 웃음꽃을 피운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무리와 서슴없이 어울리며 101타워 새해 불꽃놀이를 함께 보거나, 일회성 언어 교환 모임에서 만난 인연을 오래도록 이어가는 서사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선다. 쫓기듯 유명 관광지를 소비하는 대신 사람과 교감하며, 자칭 대만민국인으로서 일상처럼 오가며 자신을 반겨줄 또 다른 세상을 개척해 나가는 진솔한 과정이 돋보인다.


속도를 늦추고 마음을 채우는 여유의 미학

<이토록 다정한 대만이라니>가 전하는 메시지는 속도에 반기를 든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많은 곳을 서둘러 찍고 돌아오는 쫓기는 여정을 권유하지 않는다. 대신 지우펀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인적이 끊긴 고요한 골목을 천천히 걸어보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르웨탄의 탁 트인 풍광을 오래도록 눈에 담으라고 속삭인다.

무려 10년 동안 하나의 나라를 열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찾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결코 화려한 볼거리 때문만이 아니다. 서툴게 길을 잃고 헤매도 어떻게든 너그럽게 감싸안아주는 특유의 포근한 공기가 저자를 끊임없이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과장된 찬사 없이 담담하게 써 내려간 문장들은 다정다감한 진정성을 띤다. 대만이라는 나라를 다채롭게 이해하고 싶거나 차가운 일상에 지쳐 조건 없는 친절함이 고픈 사람이라면 이 책을 펼쳐 보기를 권한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즈음이면 언젠가 나를 반겨줄 사람들이 존재하는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며 어느새 당장 항공권을 검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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