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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말하지 않는 것들
임우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26년 10월
평점 :
당신이 걷는 거리가 다르게 보일 시간
을유문화사 신간, 건축가 임우진 지음 <도시가 말하지 않는 것들>은 우리가 매일 걷는 거리와 무심코 지나치는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사실은 수백 년의 욕망과 투쟁을 머금은 거대한 기록물임을 일깨워 준다. 홍익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한 뒤 프랑스로 건너가 르코르뷔지에의 흔적을 좇고, 파리 라빌레트 건축대학에서 프랑스 국가 공인 건축사 자격을 취득한 저자는 30년 가까이 유럽 현지에서 활동한 이방인이자 경계인이다. 도미니크 페로와 함께 이화여대 ECC를 설계하고 피렌체 국제현대미술비엔날레에서 디자인 부문 최고상을 2회 연속 수상한 그의 이력은 단단하다. 전작 <보이지 않는 도시>로 2023년 세종도서 교양 부문에 선정되며 대중과 호흡하는 글쓰기 능력을 증명한 그는 이번 신작에서도 특유의 예리하면서도 다정한 시선으로 건축의 역사를 바라본다. 학술서의 딱딱함을 벗어던지고 수십 년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의심하고 기록한 에세이라는 점에서.. 공간의 의미를 사유하고 싶은 모든 지적 방랑자들에게 적극 권하고 싶은 책이다.
권력의 풍경을 직조한 둥근 지붕과 뾰족지붕
책을 펼치면 서양 건축이 어떻게 세계의 지배적인 기준이 되었는지를 묻는 도발적인 질문이 독자를 맞이한다. 저자는 로마의 판테온으로 대표되는 둥근 돔과 프랑스 노르트담 대성당으로 상징되는 고딕의 뾰족한 탑이 단순한 미적 취향의 차이가 아님을 밝혀낸다. 이탈리아 학자들의 철저한 자기중심적 시각에서 파생된 로마네스크라는 용어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른바 야만족이라 불리던 노르만족이 어떻게 거친 기후와 재료적 한계를 극복하며 독창적인 건축 양식을 창조했는지 서술하는 대목은 흥미롭다. 도시는 정답을 말해주지 않지만 건축물의 형태 속에 권력의 이동과 인간의 두려움과 경외심을 은밀하게 숨겨두었다. 돌과 벽돌이라는 물질적 한계와 종교적 압력이 맞물려 탄생한 건축의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익숙했던 서구의 스카이라인이 낯설고도 경이롭게 다가온다. 저자가 세상에 순수한 고딕 건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하는 장면은, 우리가 맹신하던 역사적 분류법이 얼마나 허술한지 통쾌하게 꼬집는다.
제국주의의 욕망, 대도시 스카이라인의 탄생
파리, 런던, 뉴욕, 그리고 서울까지 거대한 대도시의 스카이라인에는 그 시대를 지배했던 욕망과 두려움, 권력과 기술, 그리고 각자의 믿음이 층층이 축적되어 있다. 저자는 워싱턴 D.C.의 백악관과 뉴욕 증권거래소가 왜 2천 년 전의 고대 그리스, 로마 양식을 차용했는지 예리하게 포착한다.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초라한 과거를 지우고 서양 문명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던 미국의 강박증이 만들어낸 족보의 비약인 셈이다. 서울의 풍경도 예외는 아니다. 일제가 지은 옛 조선총독부 청사와 고종이 매료되었던 영국 영사관의 신고전주의 양식 이면에는, 서구의 외형을 빌려 제국주의의 위엄을 과시하려던 일본과 근대화를 통해 제국의 영원함을 증명하려던 대한 제국의 처절한 생존 투쟁이 얽혀 있다. 19세기 말 에펠탑 건설을 두고 거센 비난이 일었던 파리와 달리, 다국적 이민자들이 모인 뉴욕은 문화적 진공 상태 덕분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나 시그램 빌딩 같은 마천루를 유연하게 쏘아 올렸다. 이렇듯 열강들의 치열한 건축 전쟁은 단순한 미학적 성취를 넘어 자본주의와 권력의 이동을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거대한 역사책으로 다가온다.
모더니즘의 환상을 넘어 한국 건축의 정체성 찾기
이어지는 2, 3부에서는 모더니즘의 등장과 현대 도시의 뿌리, 나아가 한국 건축이 직면한 정체성의 혼란을 집요하게 짚어낸다. 르코르뷔지에를 위시한 현대 건축의 거장들이 꿈꾸었던 이상향이 현실의 자본 및 탐욕과 부딪혀 어떻게 왜곡되고 희석되었는지 파헤치는 과정은 새로운 통찰을 안겨준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통제되는 빛나는 도시의 이면에 자리한 획일성의 그림자를 지적하는 시선이 날카롭다. 뉴욕 시그램 빌딩의 매끈한 미학이 1970년 서울 삼일빌딩으로 복제되며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승리를 상징하게 된 과정은 모더니즘의 환상과 씁쓸한 현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특히 1965년 부여에서 있었던 김수근의 시련을 언급하며 강요된 복제와 거대 기와지붕 속에 감춰진 불안을 조명하는 부분은 우리 삶의 터전을 뼈아프게 되돌아보게 만든다. 1973년 세종문화회관이 전통 기와를 씌우려는 권력의 압력에 맞서 현대적 언어로 타협점을 찾은 반면, 1982년 독립기념관은 반일 감정이라는 정치적 목적 아래 수덕사 대웅전을 모방하는 거대한 목조 건축의 형상을 띠게 되었다. 맹목적으로 서양의 잣대를 수용하거나 껍데기만 남은 전통을 고집하는 대신, 형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과 감각으로 공간을 재구성하려는 치열한 고민이 페이지마다 짙게 배어 있다. 조병수의 지평집이 굽이치는 지형에 겸허히 순응하고, 김승회의 롯데 부여 리조트가 한옥의 원리를 상상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시도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저자는 어느 시대든 특정한 건축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이면에는 뚜렷한 사회적 맥락이 존재함을 환기하며,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끝나지 않은 숙제를 독자 앞에 펼쳐놓는다.
이방인의 딜레마가 낳은 독창적 예술의 성취
에필로그에 수록된 파리 샹젤리제 한국 레스토랑 프로젝트 일화는 저자가 치열하게 고민해 온 정체성의 문제가 현장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보여주는 진귀한 기록이다. 파리 중심부에 가장 한국적인 공간을 만들고자 했던 저자의 시도는 현지인들에게 그저 이국적이거나 오리엔탈적인 풍경으로만 소비되는 한계에 부딪힌다. 이 뼈아픈 상대성 이론적 혼란 속에서 그는 무용가가 멈추면 관객이 움직이면 된다는 비범한 역발상을 끌어낸다. 반투명 금속 망과 빛의 굴절을 활용해 정지된 공간 속에 승무의 유려한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낸 이 작업은, 1년의 강제 휴업이라는 악재 속에서도 피렌체 국제현대미술비엔날레 레오나르도 다빈치상을 거머쥐는 쾌거로 이어진다. 이는 서구의 시선을 맹목적으로 좇거나 과거의 형태를 답습하는 대신, 비물질적인 감각과 움직임을 통해 한국의 고유한 미학을 번역해 낸 건축가의 눈부신 승리다. 더불어 감사의 글에서 흙과 나무의 질감이 지닌 목적한 가치를 되짚고, 공간을 이해하는 태도를 길러준 어머니와 타국 생활의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준 아내에게 바치는 헌사는 차가운 도면 이면에 박동하는 뜨거운 인간애를 짐작하게 한다.
익숙함의 장막을 걷어내는 두 권의 지적 안내서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의 신작 <도시가 말하지 않는 것들>은 전작 <보이지 않는 도시>와 짝을 이루어 읽을 때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된다. 2023년 세종도서 교양 부문에 선정되며 언론과 평단의 찬사를 받은 전작은 공간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그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신호등 하나, 거리의 의자 하나에 숨겨진 미시적인 삶의 철학을 이방인의 시각으로 건져 올렸던 저자는 이제 시선을 확장해 거대한 대도시의 스카이라인과 역사적 지층을 해부한다. 일상의 미시적 풍경을 다룬 전작과 제국주의, 권력, 모더니즘이라는 거시적 담론을 다룬 신작을 나란히 서가에 소장하고 읽는다면,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도시에 대한 입체적이고 충만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오만한 전문가의 언어를 버리고 다정한 에세이의 화법을 택한 이 매력적인 건축 교양서는 밋밋해 보이던 출퇴근길의 건물들이 각자의 치열한 서사를 품고 말을 걸어오는 경이로운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당연하게 여겨 온 질서에 질문을 던지고, 침묵하던 도시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두 권의 책을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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