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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나선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평점 :
영원한 이야기꾼, 히가시노 게이고를 기리며
2026년 7월 23일, 68세의 나이로 대장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미스터리 소설의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를 추모하며 글을 시작한다. 1985년 <방과 후>로 데뷔한 이래 <용의자 X의 헌신>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 100권이 넘는 작품을 남긴 그는 누적 판매 부수 1억 부를 돌파하며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 장르 문학을 이끌었다. 엔지니어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바탕으로 정교한 과학 트릭을 선보이던 그는 점차 사람의 감정과 인물 간의 관계성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작풍을 넓혀왔다. 넷플릭스 영상화 및 일본 종합 베스트셀러 1위 등 눈부신 성과를 기록한 그의 새로운 서사, 시리즈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몹시 비통하다.
시리즈의 전환점, <투명한 나선>
히가시노 게이고의 갈릴레오 시리즈 최신작 <투명한 나선>을 손에 들었다. 분량은 400여 페이지..
북다 출판사에서 김선영 번역으로 출간된 이 소설은 시리즈 열 번째 장편이라는 상징성에 걸맞게, 그간 베일에 싸여 있던 천재 물리학자 유카와 마나부의 개인사를 처음으로 수면 위에 올린다. 차가운 이성의 대명사였던 유카와의 내면이 드러나는 전개에 신선한 충격을 감출 수 없다. 작가 스스로도 갈릴레오 팬이라면 분명 놀랄 것이고 히가시노 팬이라면 더욱 놀랄 것이라고 공언했을 만큼, 이 책은 작가가 오랜 시간 가슴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비로소 꺼내놓은 의미 있는 결과물이다.
투명하게 얽힌 혈연의 미스터리, 그 시작점
지바현 미나미보소 앞바다에서 영상 제작자 우에쓰지 료타가 등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채 발견되면서 사건은 막을 올린다. 메구로 경찰서의 형사 구사나기와 가오루가 수사망을 좁혀가는 가운데.. 사망자의 동거인인 시마우치 소노카가 일하던 꽃집에 휴가를 내고 돌연 자취를 감춘다. 소노카는 교제 폭력을 일삼던 우에쓰지에게 지속적인 가스라이팅과 학대를 당하던 피해자였다. 옛 친구 오카타니 마키 등 지인을 만나는 것조차 통제당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던 소노카의 삶은 지옥과 다름없었다. 홀어머니 시마우치 지즈코마저 잃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노카를 돕기 위해, 평소 모녀를 챙기던 마쓰나가 나에가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나타나 그녀의 도주를 돕는다.
폭력의 사슬을 끊어내는 여성들의 연대
경찰이 흩어진 단서들을 추적하는 동안 사건 이면에 숨겨진 인물들의 비밀이 하나둘 형체를 드러낸다. 특히 고급 클럽을 운영하는 네기시 히데미의 서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히데미는 과거 자신이 버렸던 핏덩이가 아사카게 보육원에서 자란 지즈코였음을 수제 인형의 비밀을 통해 깨닫는다. 후에 진실은 다른 방향으로 인형의 진짜 주인을 가리키지만, 서사는 걷잡을 수 없이 격류를 탄다. 인형 옷 속에 적힌 비밀 이름은 끊어질 수 없는 혈연의 증표였다. 지즈코의 딸인 소노카가 자신의 친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히데미, 그리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음에도 기꺼이 소노카의 방패가 되어준 나에까지,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소노카를 구원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 핏줄이라는 원초적인 연결고리와 헌신적인 사랑이 어떻게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차가운 물리학자의 제일 뜨거운 고백
이 소설이 갈릴레오 시리즈의 전작들과 무엇보다 확연하게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탐정 유카와의 위치와 나이 듦이다. 서른넷 부교수였던 그는 어느덧 쉰이 넘은 정교수가 되었고, 작가는 유카와 부모님의 노환과 병간호 묘사를 통해 세월의 흐름을 현실적으로 조명한다. <용의자 X의 헌신>이나 <한여름의 방정식> 등에서 유카와는 철저한 외부자의 시선으로 얽힌 실타래를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데 주력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냉철한 학자의 표본이었다. 허나 이번 수사 과정에서는 뜻밖에 유카와의 이름이 등장하고, 그는 제삼자가 아닌 사건의 당사자로서 진실의 중심에 선다.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며 오랜 친구 구사나기에게 선을 긋던 그는 마침내 평소라면 절대 내비치지 않았을 출생의 비밀을 고백한다. 구사나기와의 대화에서 자신을 버렸던 마쓰나가 나에를 가리켜 "내 친어머니야"라고 밝히는 대목은 팬들에게 커다란 놀라움을 안긴다.
단 한 번도 흔들림 없던 유카와가 사건에 직접 개입하며 자신의 뿌리를 마주하는 과정은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히게 이색적이면서도 매력적인 변곡점을 만들어낸다.
보이지 않는 끈이 빚어낸 찬란하고 시린 결말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 가족이라는 존재는 때로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나선이 되어 서로의 삶을 강하게 옭아맨다. 이 작품은 살인 사건의 진상이나 트릭을 파헤치는 쾌감보다는 인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의 타당성에 집중하며 아스라한 감동을 선사한다. 논리와 이성으로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의 파동을 과학자의 시선으로 껴안은 이 소설은 인간 탐구 보고서에 가깝다. 본편 에필로그 이후 별개 사건을 다룬 스페셜 단편 <겹치다>가 최초로 수록되어 소장 가치를 더한다. 유카와 마나부, 너의 죄를 사하노라라는 상징적인 문구가 책장을 덮은 후에도 오랜 시간 머릿속을 맴돈다. 시리즈를 꾸준히 사랑해 온 독자는 물론이고 혈연과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갈릴레오 최후의 수수께끼, 한국에 출간될 유작 <영원한 기억>
고인의 부고와 함께 갈릴레오 시리즈가 이것으로 종결된다는 사실이 무척 애통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한국 독자들을 위해 최종적으로 출간될 진짜 유작이 하나 더 남아있다. 바로 일본에서 지난 2026년 8월 5일 출간된 시리즈 열한 번째 장편 <영원한 기억>이다. '갈릴레오, 마지막 수수께끼'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형사 우쓰미 가오루가 흉기에 찔리는 사건을 계기로 유카와가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을 담았으며, 교보문고 북다를 통해 조만간 국내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일생을 다해 흥미진진한 서사를 선물해 준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하며,
그가 남긴 106번째 서사가 도착할 날을 차분히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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