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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켜쥐는 관계
전우진 지음 / 북다 / 2026년 10월
평점 :
북다 신간, 전우진 작가 장편소설 <움켜쥐는 관계>는 제7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대상 수상작인 <관통하는 마음>과 후속작 <후려치는 안녕>을 잇는 이른바 소시민 초능력 유니버스의 연장선에 놓인 작품이다. 20대 시절 단편영화를 제작하고 30대에 영화 연출부에서 활동한 저자의 독특한 이력은 소설 속 공간과 인물들의 동선을 한 편의 영상처럼 치밀하게 구현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최근 제29회 눈높이아동문학상 우수상을 받으며 동화로도 창작 영역을 확장한 작가는 이번 신간 북다 출판사의 <움켜쥐는 관계>를 통해 보잘것없는 능력을 생존의 무기로 삼아 고군분투하는 현대인들의 초상을 특유의 시니컬한 필치로 그려낸다. 다수의 서평 블로그와 문학 매체들은 이 책을 팍팍한 현실의 부조리와 발칙한 판타지를 절묘하게 버무린 텍스트로 평가하며, 기발한 상상력과 쌉싸름한 현실 감각을 동시에 맛보고 싶은 2030 세대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예스24를 비롯한 주요 서점의 독자 리뷰 역시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전개와 B급 정서가 결합된 블랙코미디의 진수라며 호평을 아끼지 않는다.
현실과 환상의 기묘한 교차점
서문을 여는 에픽테토스의 문장, "인간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인간의 판단이다"라는 구절은 이 작품을 관통하는 거대한 뼈대와 같다. 주인공 이곤은 크리스마스이브, 안성종합버스터미널 내부에 위치한 '마음에그리다'라는 구형 카페에서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읽으며 등장한다. 낡고 바랜 검은색 패딩을 입은 이곤의 모습은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한 주변 인물들과 대비를 이루며 그가 처한 신산한 처지를 대변한다. 다니던 직장에 사직서를 던지고 부모님의 갈빗집으로 돌아가지도 않은 채 방황하는 그의 내면은 건조해 보인다. 회사 생활 당시 자신을 벌레 보듯 하던 나현이나 속물적인 성 과장과의 일화를 회상하는 대목에서 엿보이는 이곤의 태도는 세상에 대한 지독한 환멸에 가깝다.
하찮은 능력이 부여하는 씁쓸한 구원
<움켜쥐는 관계>의 가장 매력적인 지점은 초능력을 다루는 작가의 고유한 시각에 있다. 세계를 구원하는 영웅적인 힘이 아니라, 타인의 손을 잡아 자신의 DNA를 주입하여 감정을 조작하는 지난하고 하찮은 능력이다. 이곤이 카페 밖 흡연 구역에서 낯선 남자의 손을 덥석 잡는 기행을 저지른 후 "짧은 찰나였지만, 손에서 DNA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확실히 주입된 것 같았다"라고 독백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능력을 오직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치환하려는 이곤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현대인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능력의 낭만성은 거세되고 철저히 실용주의적인 목적만 남은 판타지는 독자에게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적나라한 현실의 민낯과 관계의 부조리
초능력이라는 비현실적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소설이 발을 딛고 있는 세계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제3장 '만남'의 에피소드가 이를 방증한다. 이곤은 화곡동 에덴오피스텔에 도착하여 자신이 부동산 사기를 당했다는 참담한 사실을 마주한다. 등기부 등본까지 확인하고 계약한 월세방에 낯선 여자가 살고 있는 상황은 오늘날 청년 세대가 겪는 주거 불안과 사기 범죄의 공포를 날것 그대로 재현한다.
이러한 현실의 난맥상은 또 다른 축을 담당하는 인물들의 이야기에서도 반복된다. 솔로바이오메디컬의 연구팀장과 당돌한 신입 사원의 일화는 기업 조직 내의 불합리한 알력 다툼과 세대 갈등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퇴직한 인사부장의 입김으로 채용된 요빈이 사장 앞에서 기한 연장을 태연하게 요구하는 장면은 조직의 위계질서를 비틀어버리는 묘한 쾌감을 주면서도.. 결국 얽히고설킨 밥그릇 싸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직장인들의 피로감을 전달한다. 소설 중반부에 안기정이 이요빈이 주도적으로 개발한 '인공 양수' 기술을 어느 게임 회사에 성인 도구용으로 몰래 팔아넘기고, 사익을 취하는 기막힌 배신이 그려진다. 이 과정에서 얽히고설키는 인물들의 군상은 각자의 이기심이 빚어낸 파국을 향해 쉴 새 없이 치닫는다.
에픽테토스의 경구로 바라본 인물들의 불안과 맹점
작가가 서두에 인용한 에픽테토스의 경구는 후반부로 갈수록 짙어지는 인물들의 혼돈을 설명하는 확실한 단서이자, 이 책을 읽는 내내 밀려오는 서늘한 감상의 원천이다. 인간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판단이라는 철학자의 말처럼.. 등장인물들은 객관적인 비극보다 스스로의 비틀린 욕망과 섣부른 오판 때문에 더 큰 수렁에 빠진다. 이곤은 돈을 벌겠다는 얄팍한 판단으로 타인의 감정을 조작하려 들고, 안기정은 자신의 탐욕을 정당화하며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지극히 세속적인 쟁투 사이에 변기를 뚫어주는 외계인 혹은 천사 안젤리나의 등장이나, 천사조차 사기꾼보다 나쁜 족속이라 비난하는 이야기꾼 전우진이라는 동명이인 캐릭터가 불쑥 난입한다는 사실이다. 신의 존재를 묻는 이곤에게 핀잔을 주며 국제 개발 협력을 전공했냐고 묻는 천사의 황당한 대화, 피비린내 나는 여관방의 참혹한 과거 기억 등 극단적인 현실과 기이한 환상이 충돌하는 전개는 파격적이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우리가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가치 판단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타인을 향해 뻗는 위태로운 손짓
전우진 작가는 거창한 서사 대신 미세한 일상의 균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결핍을 안고 살아가며 어떻게든 자신의 몫을 챙기기 위해 타인의 삶을 침범한다. <움켜쥐는 관계>라는 제목은 이기적인 목적으로 타인의 마음이나 재산을 탈취하려는 폭력적인 행위를 뜻하는 동시에, 절망적인 벼랑 끝에서 누군가의 옷자락이라도 잡고 싶어 하는 처절한 생존 본능을 은유한다. 다소 냉소적인 어조로 일관하던 이야기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인물들 간의 예상치 못한 연대와 충돌을 만들어내며 독자의 시선을 붙잡는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줄타기하는 인물들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을 향해 시선이 머물게 되는 낯선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파국과 구원이 교차하는 파격적인 결말
종반부로 치달을수록 인물들의 갈등은 극한의 혼돈을 마주한다. 시선을 끄는 대목은 요빈이 이야기꾼 '전우진 작가'를 직접 입에 올리며 제4의 벽을 허무는 순간이다. 작가 스스로를 작품 속에 투영하여 신의 계획과 악마의 시련을 논하는 장면은 기묘한 기시감을 안긴다. 결말부에 이르러 나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곤이 천사 안젤리나의 축도를 받으며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은 뭉클한 여운을 자아낸다. 타인의 감정을 조작하여 잇속을 챙기는 데 급급했던 그가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고, 평생을 감사한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은 비틀린 세상 속에서도 결국 관계를 회복하는 열쇠는 진심 어린 사랑에 있음을 역설한다.
확장되는 전우진 유니버스 & 전우진 작가의 고유한 작품 세계
전우진 작가의 소시민 초능력 유니버스는 작품을 거듭할수록 한층 넓은 스펙트럼으로 발전하고 있다. 첫 작품 <관통하는 마음>에서 정숙이 손을 관통시켜 15분 전 과거로 되돌리는 능력을 선보였고, <후려치는 안녕>에서 병삼이 따귀를 후려쳐 상대의 반성을 이끌어냈다면.. 이번 신간 <움켜쥐는 관계>의 이곤은 천사의 큐피드 능력으로 세상에 사랑을 전파한다. 특히 전작들이 주로 초능력을 본인에게 실용적으로 사용하며 가족 간의 갈등을 다루었던 것에 비해, 이번 신간은 타인을 위해 능력을 고차원적으로 활용하며 친구, 직장 상사, 신에 이르기까지 제3자와의 충돌로 서사의 스케일을 대폭 확장했다. 초능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스스로 공들인 노력과 고민만큼 삶의 보상을 얻는다는 메시지는 부조리극이라는 그릇을 통해 명료하게 전달된다.
이 소설을 지금 당장 펼쳐야 하는 이유..
고단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현대인들에게 이 책은 통렬한 위로를 건넨다.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서사는 페이지마다 헛웃음을 터뜨리게 만들지만 책을 덮고 나면 씁쓸한 현실 감각이 피부에 와닿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DNA를 움켜쥐어야만 했던 인물들의 비애는 결국 우리 내면에 숨겨진 이기적인 욕망과 맞닿아 있다. 불합리한 세상에 치여 무기력증에 빠진 독자라면 거침없는 서사 속에서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뻔한 위로나 교훈 대신 날것의 언어로 삶의 모순을 꼬집는 매력적인 소설을 찾는 이들에게 적극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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