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의 작은 정원들 - 무너진 나를 다시 세우는 골목 정원 이야기
최윤선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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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북스 신간, 최윤선 지음 <북촌의 작은 정원들>은 치열한 의료 현장에서 타인을 돌보며 정작 자신은 방치했던 한 간호사가 도심 속 식물에게서 치유를 얻고 써 내려간 생명력의 기록이다. 저자 최윤선은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병원 중환자실과 응급실에서 사투를 벌이던 의료인이었다. 팬데믹 시절, 번아웃을 겪으며 동네 천변을 걷다 길가의 풀꽃에 눈길을 주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산림치유지도사이자 숲해설가로 변신하여 현재 북촌에서 '비퀠 도심숲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저자는 식물을 알아가는 과정이 일종의 자기 돌봄이었다고 고백하며, 멀리 있는 울창한 숲이 아니더라도 출퇴근길 골목에서 만나는 자연이 회복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이 책은 속도전에 지쳐 마음이 닳아버린 현대인들, 타인에게 에너지를 내어주느라 내면이 고갈된 이들에게 건네는 맞춤형 초록색 처방전이다.


아스팔트 틈새와 낡은 담장이 품은 비움의 길

작가는 북촌을 단순히 예쁜 카페가 늘어선 관광지, 핫플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가 안내하는 첫 번째 정원 '비움의 길'에서 독자는 안국역 주차장 갈라진 아스팔트 틈을 비집고 자라난 오동나무와 조우한다. 옛사람들이 딸을 낳으면 심었다는 오동나무를 바라보며, 저자는 척박한 도시의 문법을 조용히 거부하는 단단한 생명력을 읽어낸다. 국립현대미술관 교육동 앞을 180년 넘게 지켜온 비술나무 세 그루에 얽힌 감상은 진한 잔상을 남긴다. 조선 시대 종친부부터 일제강점기, 기무사 터로 이어지는 곡절 많은 근현대사를 침묵 속에서 지켜본 이 거목들이 땅속에서 뿌리를 맞대고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는 통찰은, 수잔 시마드의 산림 생태학 연구와 맞물려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연대의 가치를 일깨운다. 종친부 옥첩당 뜰에 핀 우리나라 특산 희귀종 미선나무의 향기를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학계에 보고된 식물학적 사료까지 꼼꼼히 짚어내며, 지식과 감성이 융합된 독창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인내와 회복을 말하는 골목길의 식물 생태학

<북촌의 작은 정원들>에는 병동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환자들을 지켜보며 벼려진 남다른 생사관이 녹아 있다. 창경궁 명정문 앞 돌 틈에 핀 작고 소박한 꽃다지를 보며 섣부른 위로를 건네는 대신,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기어이 개화하고 마는 끈기를 찬양한다. 넓고 비옥한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고 해서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꽃다지의 생태는 번아웃에 빠져 무너져 내렸던 작가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굳건한 동력이다. 삼청공원에서 천천히 자라는 회양목을 향해 느린 성장은 정체가 아니며 응축이라고 전하는 메시지 역시 끝없는 효율을 강요당하는 현대인들의 조급증을 단숨에 녹여낸다. 원서동 좁은 건물 틈새의 쉬나무가 묵묵히 결실을 맺는 모습에서 스스로를 다잡는 작가의 태도는 타인을 돌보는 자에게도 반드시 자기 돌봄이 필요하다는 명징한 진실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소소한 발견이 건네는 위로와 구원의 정원

서울의 오래된 동네를 산책하며 병꽃나무, 황매화, 꽃마리, 미스김라일락 등 이름조차 정겨운 식물들을 천천히 오래 바라보는 저자의 눈길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이 책을 넘기다 보면 행복은 우연하고 소소한 발견에서 자연스레 묻어나는 것임을 짐작하게 된다. 무너진 마음을 구원하고 부축하는 대상이 화려한 풍경이 아니라 사람 냄새나는 소박한 뒷골목과 작은 정원 이야기라는 점이 흥미를 유발한다. 거창한 격려 대신 길가에 피어난 여린 생명들에 눈길을 맞추는 다정한 행위가 일상을 회복하는 든든한 지지대로 작용한다.


나만의 궤적을 긋는 실천, 산책 노트의 의미

책에 부록으로 제공되는 <북촌 산책노트>는 독자를 단순한 관찰자에서 적극적인 기록자로 안내하는 매력적인 장치다. 저자가 안내한 길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조그만 수첩을 챙겨 문밖을 나서서 자신만의 산책길을 새롭게 개척해 보기를 권한다. 매일 무심코 스쳐 지나가던 보도블록이나 이름 모를 잡초, 계절마다 색을 바꾸는 가로수를 유심히 바라보고, 그 곁에 머물며 피어나는 독자적인 감상을 적어 내려가는 행위는 그 자체로 건강한 마음 챙김이 된다. 타인의 시선이나 화려한 수식어에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식물과 교감한 흔적을 남기는 과정은, 팍팍한 일상 속에서 잃어버린 주체성을 회복하고 단단한 평안을 다지는 소중한 의식으로 자리 잡는다.


섬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식물 산책기

저자 최윤선의 문장은 차분하고 정갈하며, 대상을 향한 시선은 따스하다. 자연의 위대함을 막연히 칭송하기보다, 보도블록과 담벼락 아래 서식하는 식물들의 치열한 생존 투쟁을 과학적인 식물학 지식과 결합해 서술한다. 식물형태학과 수목학을 파고든 이력이 묻어나는 정확한 명칭과 생태 묘사는 글의 신뢰도를 한층 끌어올린다. <북촌의 작은 정원들>의 두드러진 장점은 거창한 명산이 아닌, 우리 주변의 일상적 공간인 창덕궁, 계동길, 삼청동 골목을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누구나 당장 문밖을 나서면 자신만의 치유 공간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부여하고 호기심을 끌어올린다. 식물의 침묵에서 인간 존재의 이유를 길어 올리는 이 기록은, 한 개인이 소진을 딛고 일어서는 서사를 넘어 식물과 공간, 사람이 어떻게 교감하며 서로를 살리는지 증명하는 생태 인문학의 본보기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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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골 책방이 있다고? - 엉뚱하고 자유로운 남편과 함께 꾸려가는 시골 책방 생존기
이정희 지음 / 푸른향기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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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속도를 떠나 다정한 연대를 배우다_이정희 에세이 <이런 시골 책방이 있다고?>

푸른향기 신간, 이정희 작가 지음 <이런 시골 책방이 있다고?>는 30년간 유아교육자로 헌신한 저자가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 끝자락에 책방 '봄길'을 열고 겪은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MBTI 'T' 성향을 가진 엉뚱하고 자유분방한 남편 이규대와 꼼꼼하고 추진력 강한 아내가 서로 다른 속도를 맞추며 시골 마을에 정착해 가는 과정을 유쾌하면서도 진솔하게 그린다. 정호승 시인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봄길' 책방을 중심으로 북스테이, 심야 독서 모임, 플리마켓 등 마을의 문화 사랑방을 만들어가는 부부의 행보가 흥미롭다. 귀촌을 꿈꾸거나 동네 책방 창업을 동경하는 이들에게 현실적인 지침서가 됨과 동시에 삶의 속도를 늦추고 온전한 휴식을 찾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따뜻한 공감과 위로를 선사하는 에세이다.


낭만과 현실의 경계에서 피어난 발칙한 제안

"나 대신 시골 책방 주인이 되어주면 안 될까?" 남편에게 던진 이 질문 한마디가 모든 여정의 시작이었다. 저자는 이도우 작가의 소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속 '굿나잇 책방'을 보며 전원생활의 로망을 품는다. 하지만 아내의 낭만 가득한 계획은 첫 단계인 건축부터 삐걱거린다. 강화도의 산등성이와 유유히 흐르는 염하강이 한눈에 보이는 배산임수의 명당을 찾았으나 집 짓는 과정은 험난하기만 하다. 살던 아파트에서 짐을 빼고 좁은 관사 오피스텔을 전전하며 군에서 제대한 아들까지 합세해 난장판 같은 나날을 버틴다. 우여곡절 끝에 입주한 뒤에도 시련은 이어진다. 매일 저녁 붉은 노을을 보기 위해 세모 지붕에 통창을 냈지만 염하강 철책 너머 군사 지역의 엄격한 통제 탓에 촬영한 사진을 지워야 하는 서글픈 현실을 마주하기도 한다. 아내는 지독한 잡초와의 전쟁에서 관절의 아우성을 견디며 정원을 가꾸고 남편은 호텔 같은 품격을 고집하며 중고 물품을 싣고 나른다.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의 좌충우돌 생존기가 쉴 새 없이 펼쳐지며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속도가 다른 부부가 만들어가는 다정한 변주곡

<이런 시골 책방이 있다고?>의 가장 큰 매력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부부의 캐릭터와 그들이 엮어내는 불협화음 속의 조화다. 당찬 여행자이자 추진력이 돋보이는 아내 이정희와 달리, 남편 이규대는 스트레스 제로를 무기로 삼으면서도 마음먹으면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드는 기분파다. 배롱나무꽃을 보고 싶어 하는 아내를 위해 당진까지 내려가 반나절 동안 땀 흘려 나무를 캐오고, 대책 없이 이웃의 밭을 빌려 낡은 관리기로 돌덩이 밭을 갈아엎으려는 '게으른 농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계획형 인간인 아내가 공간의 밑그림을 그리면 천하태평 베짱이 같은 남편은 커다란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를 누비며 '할리 한량'이라는 별명으로 마을 사람들과 허물없이 어울린다. 무인 책방을 지키고 하모니카를 부는 남편의 모습은 처음에는 아내의 애를 태우지만 결국 시골 마을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가장 현명한 방식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길 끝에서 길이 되는 공간, 사람을 잇다

봄길 책방은 단순히 책을 파는 소매점이 아니다. 1부에서 무모하게 땅을 구하고 집을 짓는 과정을 그렸다면.. 2부와 3부에서는 북스테이를 열고 독서 모임과 플리마켓을 통해 마을의 문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아가는 눈물겨운 정착기를 담아낸다. 부부는 '판매용 서가'와 '책방지기 서가'를 분리하여 누군가의 눈물과 밑줄이 남은 헌책의 가치를 정성스레 지켜나간다. 명절 연휴에는 SNS를 통해 '일일 책방지기'를 구하며 사람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고 정성스레 꽃씨를 심어 화단을 가꾸며 치열한 노동의 결과물을 일구어낸다.

4부 '책방을 닮은 사람들'과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책방을 찾아오는 다양한 이웃과 여행자들의 사연은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산타가 되어주는 이웃, 김포 뻐꾸기, 히말라야로 떠나는 그녀 등 사람과 사람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서로를 응원하는 모습은 진정한 연대의 가치를 일깨운다.


배추적처럼 소박하고 다정한 연대의 가치

도시의 맹렬한 속도에서 벗어나 시골 마을에 정착한 부부의 삶은 우리에게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아등바등 매달리던 김장 프로젝트를 단숨에 해결해 준 동네 아주머니들의 거침없는 손길과 외로운 날 꺼내 먹는 배추적의 담백한 맛은 잊고 지냈던 이웃 간의 정을 환기한다. 은퇴한 방송국 PD 부부가 독서 모임에 합류하고 플리마켓의 단골 셀러가 되는 과정 역시 낯선 이방인들이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는 방식을 보여준다. 효율성과 성과만을 좇던 도시의 문법을 버리고 때로는 상처 난 책 표지의 먼지를 털어내며 타인의 흔적을 껴안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진정한 휴식과 치유란 단절된 고립이 아니라 느슨하지만 다정한 연대 속에서 완성된다는 진중한 깨달음을 전한다.


서투름을 껴안는 유연하고 단단한 삶의 태도

시골 책방을 꾸려가는 부부의 일상에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들은 좌절하기보다 상황을 유연하게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철책선 앞에서 군인들의 제지로 애써 찍은 사진을 지워야 했던 억울한 순간에도 부부는 자연이 내어주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넉넉한 위안을 얻는다. 서가에 꽂힌 낡은 책에 먼지가 쌓였다는 손님의 날 선 지적마저 헌책방 지기의 숙명으로 겸허히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돌아본다. 무작정 남의 밭을 빌려 갈아엎으려는 남편의 무모한 시도나 죽어가는 식물들을 마당에 옮겨 심어 기어코 살려내는 끈기는 서투름마저 삶의 일부로 끌어안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흠결 없는 치밀한 결과를 기하기보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이웃과 함께 땀 흘리고 웃어넘기는 부부의 방식은 각박한 일상에 지친 마음을 다독여준다.


치열한 경쟁에 지친 이들에게 건네는 처방전

<이런 시골 책방이 있다고?>는 막연히 은퇴 후의 여유로운 전원생활을 꿈꾸는 예비 귀촌인에게 훌륭한 현실 길잡이가 된다. 낭만적인 환상 대신 척박한 땅을 다지는 공간 기획부터 지역 주민들과 융화되는 생생한 과정까지 오롯이 담겨 있어 동네 서점 창업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도 실질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성과 중심의 맹렬한 도시 속도에 치여 번아웃을 겪고 있는 3040 직장인들에게 이 책을 적극 권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매일 새로운 도화지에 자신들만의 궤적을 그려나가는 부부의 이야기는 묘한 해방감을 안겨준다. 남들의 기준에 맞추려 전전긍긍하던 독자들에게 잠시 멈추어 서서 온전한 나의 호흡을 되찾을 수 있는 따사로운 용기를 심어줄 것이다.


오지 않은 미래보다 오늘을 살아내는 용기

저자는 은퇴 후의 안락한 삶을 맹목적으로 찬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나 아름다운 노년을 계획하지만 삶은 결코 우리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냉정한 사실을 짚어낸다. 오지 않은 먼 미래를 붙잡고 망설이기보다 선물처럼 주어진 오늘을 열심히 살아내겠다는 저자의 다짐은 단단한 울림을 남긴다. 죽어가는 식물도 살려내는 볕뉘 가득한 정원처럼 시골 책방의 일상은 바쁘고 지친 뇌를 식혀줄 온전한 여백을 제공한다.

현실의 팍팍함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으려는 부부의 고군분투는 새로운 인생의 2막을 준비하거나 쳇바퀴 같은 궤도에서 벗어나고 싶은 독자에게 번득이는 영감과 따스한 위안을 던진다. 단지 전원생활을 동경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나만의 온전한 길을 일구어낼 것인가에 대한 정직한 해답을 엿볼 수 있는 뜻깊은 독서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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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켜쥐는 관계
전우진 지음 / 북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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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 신간, 전우진 작가 장편소설 <움켜쥐는 관계>는 제7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대상 수상작인 <관통하는 마음>과 후속작 <후려치는 안녕>을 잇는 이른바 소시민 초능력 유니버스의 연장선에 놓인 작품이다. 20대 시절 단편영화를 제작하고 30대에 영화 연출부에서 활동한 저자의 독특한 이력은 소설 속 공간과 인물들의 동선을 한 편의 영상처럼 치밀하게 구현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최근 제29회 눈높이아동문학상 우수상을 받으며 동화로도 창작 영역을 확장한 작가는 이번 신간 북다 출판사의 <움켜쥐는 관계>를 통해 보잘것없는 능력을 생존의 무기로 삼아 고군분투하는 현대인들의 초상을 특유의 시니컬한 필치로 그려낸다. 다수의 서평 블로그와 문학 매체들은 이 책을 팍팍한 현실의 부조리와 발칙한 판타지를 절묘하게 버무린 텍스트로 평가하며, 기발한 상상력과 쌉싸름한 현실 감각을 동시에 맛보고 싶은 2030 세대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예스24를 비롯한 주요 서점의 독자 리뷰 역시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전개와 B급 정서가 결합된 블랙코미디의 진수라며 호평을 아끼지 않는다.


현실과 환상의 기묘한 교차점

서문을 여는 에픽테토스의 문장, "인간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인간의 판단이다"라는 구절은 이 작품을 관통하는 거대한 뼈대와 같다. 주인공 이곤은 크리스마스이브, 안성종합버스터미널 내부에 위치한 '마음에그리다'라는 구형 카페에서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읽으며 등장한다. 낡고 바랜 검은색 패딩을 입은 이곤의 모습은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한 주변 인물들과 대비를 이루며 그가 처한 신산한 처지를 대변한다. 다니던 직장에 사직서를 던지고 부모님의 갈빗집으로 돌아가지도 않은 채 방황하는 그의 내면은 건조해 보인다. 회사 생활 당시 자신을 벌레 보듯 하던 나현이나 속물적인 성 과장과의 일화를 회상하는 대목에서 엿보이는 이곤의 태도는 세상에 대한 지독한 환멸에 가깝다.


하찮은 능력이 부여하는 씁쓸한 구원

<움켜쥐는 관계>의 가장 매력적인 지점은 초능력을 다루는 작가의 고유한 시각에 있다. 세계를 구원하는 영웅적인 힘이 아니라, 타인의 손을 잡아 자신의 DNA를 주입하여 감정을 조작하는 지난하고 하찮은 능력이다. 이곤이 카페 밖 흡연 구역에서 낯선 남자의 손을 덥석 잡는 기행을 저지른 후 "짧은 찰나였지만, 손에서 DNA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확실히 주입된 것 같았다"라고 독백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능력을 오직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치환하려는 이곤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현대인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능력의 낭만성은 거세되고 철저히 실용주의적인 목적만 남은 판타지는 독자에게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적나라한 현실의 민낯과 관계의 부조리

초능력이라는 비현실적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소설이 발을 딛고 있는 세계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제3장 '만남'의 에피소드가 이를 방증한다. 이곤은 화곡동 에덴오피스텔에 도착하여 자신이 부동산 사기를 당했다는 참담한 사실을 마주한다. 등기부 등본까지 확인하고 계약한 월세방에 낯선 여자가 살고 있는 상황은 오늘날 청년 세대가 겪는 주거 불안과 사기 범죄의 공포를 날것 그대로 재현한다.

이러한 현실의 난맥상은 또 다른 축을 담당하는 인물들의 이야기에서도 반복된다. 솔로바이오메디컬의 연구팀장과 당돌한 신입 사원의 일화는 기업 조직 내의 불합리한 알력 다툼과 세대 갈등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퇴직한 인사부장의 입김으로 채용된 요빈이 사장 앞에서 기한 연장을 태연하게 요구하는 장면은 조직의 위계질서를 비틀어버리는 묘한 쾌감을 주면서도.. 결국 얽히고설킨 밥그릇 싸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직장인들의 피로감을 전달한다. 소설 중반부에 안기정이 이요빈이 주도적으로 개발한 '인공 양수' 기술을 어느 게임 회사에 성인 도구용으로 몰래 팔아넘기고, 사익을 취하는 기막힌 배신이 그려진다. 이 과정에서 얽히고설키는 인물들의 군상은 각자의 이기심이 빚어낸 파국을 향해 쉴 새 없이 치닫는다.


에픽테토스의 경구로 바라본 인물들의 불안과 맹점

작가가 서두에 인용한 에픽테토스의 경구는 후반부로 갈수록 짙어지는 인물들의 혼돈을 설명하는 확실한 단서이자, 이 책을 읽는 내내 밀려오는 서늘한 감상의 원천이다. 인간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판단이라는 철학자의 말처럼.. 등장인물들은 객관적인 비극보다 스스로의 비틀린 욕망과 섣부른 오판 때문에 더 큰 수렁에 빠진다. 이곤은 돈을 벌겠다는 얄팍한 판단으로 타인의 감정을 조작하려 들고, 안기정은 자신의 탐욕을 정당화하며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지극히 세속적인 쟁투 사이에 변기를 뚫어주는 외계인 혹은 천사 안젤리나의 등장이나, 천사조차 사기꾼보다 나쁜 족속이라 비난하는 이야기꾼 전우진이라는 동명이인 캐릭터가 불쑥 난입한다는 사실이다. 신의 존재를 묻는 이곤에게 핀잔을 주며 국제 개발 협력을 전공했냐고 묻는 천사의 황당한 대화, 피비린내 나는 여관방의 참혹한 과거 기억 등 극단적인 현실과 기이한 환상이 충돌하는 전개는 파격적이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우리가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가치 판단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타인을 향해 뻗는 위태로운 손짓

전우진 작가는 거창한 서사 대신 미세한 일상의 균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결핍을 안고 살아가며 어떻게든 자신의 몫을 챙기기 위해 타인의 삶을 침범한다. <움켜쥐는 관계>라는 제목은 이기적인 목적으로 타인의 마음이나 재산을 탈취하려는 폭력적인 행위를 뜻하는 동시에, 절망적인 벼랑 끝에서 누군가의 옷자락이라도 잡고 싶어 하는 처절한 생존 본능을 은유한다. 다소 냉소적인 어조로 일관하던 이야기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인물들 간의 예상치 못한 연대와 충돌을 만들어내며 독자의 시선을 붙잡는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줄타기하는 인물들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을 향해 시선이 머물게 되는 낯선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파국과 구원이 교차하는 파격적인 결말

종반부로 치달을수록 인물들의 갈등은 극한의 혼돈을 마주한다. 시선을 끄는 대목은 요빈이 이야기꾼 '전우진 작가'를 직접 입에 올리며 제4의 벽을 허무는 순간이다. 작가 스스로를 작품 속에 투영하여 신의 계획과 악마의 시련을 논하는 장면은 기묘한 기시감을 안긴다. 결말부에 이르러 나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곤이 천사 안젤리나의 축도를 받으며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은 뭉클한 여운을 자아낸다. 타인의 감정을 조작하여 잇속을 챙기는 데 급급했던 그가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고, 평생을 감사한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은 비틀린 세상 속에서도 결국 관계를 회복하는 열쇠는 진심 어린 사랑에 있음을 역설한다.


확장되는 전우진 유니버스 & 전우진 작가의 고유한 작품 세계

전우진 작가의 소시민 초능력 유니버스는 작품을 거듭할수록 한층 넓은 스펙트럼으로 발전하고 있다. 첫 작품 <관통하는 마음>에서 정숙이 손을 관통시켜 15분 전 과거로 되돌리는 능력을 선보였고, <후려치는 안녕>에서 병삼이 따귀를 후려쳐 상대의 반성을 이끌어냈다면.. 이번 신간 <움켜쥐는 관계>의 이곤은 천사의 큐피드 능력으로 세상에 사랑을 전파한다. 특히 전작들이 주로 초능력을 본인에게 실용적으로 사용하며 가족 간의 갈등을 다루었던 것에 비해, 이번 신간은 타인을 위해 능력을 고차원적으로 활용하며 친구, 직장 상사, 신에 이르기까지 제3자와의 충돌로 서사의 스케일을 대폭 확장했다. 초능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스스로 공들인 노력과 고민만큼 삶의 보상을 얻는다는 메시지는 부조리극이라는 그릇을 통해 명료하게 전달된다.


이 소설을 지금 당장 펼쳐야 하는 이유..

고단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현대인들에게 이 책은 통렬한 위로를 건넨다.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서사는 페이지마다 헛웃음을 터뜨리게 만들지만 책을 덮고 나면 씁쓸한 현실 감각이 피부에 와닿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DNA를 움켜쥐어야만 했던 인물들의 비애는 결국 우리 내면에 숨겨진 이기적인 욕망과 맞닿아 있다. 불합리한 세상에 치여 무기력증에 빠진 독자라면 거침없는 서사 속에서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뻔한 위로나 교훈 대신 날것의 언어로 삶의 모순을 꼬집는 매력적인 소설을 찾는 이들에게 적극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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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미용실 ㅣ 미운오리 그림동화 26
야마다 마치 지음, 가와무라 후유미 그림, 봉봉 옮김 / 미운오리새끼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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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읽기 좋은 유아 그림책을 찾고 계신다면 가람어린이, 미운오리그림동화 신간 <과일 미용실>을 소개해 드릴게요. 이 책은 야마다 마치 작가가 글을 쓰고 가와무라 후유미 작가가 그림을 그린 작품이랍니다. 두 작가는 이전에도 <채소 이발소>라는 책으로 찰떡궁합을 보여주었는데 이번에는 새콤달콤한 과일들을 주인공으로 아주 기발한 이야기를 들고 왔어요.


새콤달콤 과일들의 변신 이야기

어느 동네에 자리 잡은 작고 예쁜 미용실이 이야기의 주 무대랍니다. 미용실 문에 달린 종이 딸랑딸랑 울리면 아주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와요. 바로 우리가 평소에 즐겨 먹는 과일들이랍니다. 덥수룩한 잎사귀를 기른 딸기부터 털북숭이 복숭아까지 다양한 과일 손님들이 각자의 고민을 안고 미용실 문을 두드려요. 미용사 선생님은 과일들의 요구에 맞춰 머리를 다듬어 주고 팩도 해 주며 예쁘게 단장을 해 준답니다. 과연 과일들은 미용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신해서 문을 나설지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해요.


상상력이 반짝이는 기발한 장면들

<과일 미용실>에서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부분은 과일들의 특징을 미용실이라는 공간에 절묘하게 녹여낸 장면들이에요. 특히 덥수룩한 초록색 꼭지를 길게 늘어뜨리고 찾아온 딸기 손님의 에피소드가 무척 인상적이랍니다. 미용사 선생님이 가위로 잎사귀를 싹둑싹둑 자르는 모습은 마치 사람의 긴 머리를 자르는 것과 똑같아서 절로 웃음이 나와요. 게다가 딸기의 오돌토돌한 씨앗 위에 구멍이 뚫린 맞춤형 얼굴 팩을 올려주고, 잎사귀에 구르프를 말아둔 장면은 작가의 세심한 관찰력과 유쾌한 상상력을 잘 보여준답니다. 쌍둥이처럼 꼭 붙어 와서 화장과 머리 손질을 부탁하는 앵두 손님들의 새침한 표정도 책을 읽는 내내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어요. 이에 더해 복숭아 손님이 솜털을 톡톡 쓰윽쓰윽 빗질하며 다듬는 장면이나, 길쭉한 초록 잎사귀를 멋지게 자르고 노랗게 염색까지 한 뒤 선글라스를 낀 파인애플의 모습은 보는 내내 유쾌함을 자아낸답니다. 바나나 원장님이 계단에서 내려오며 상큼한 사과 손님의 스페셜 변신 커트를 준비하는 장면도 놓칠 수 없는 재미 포인트!


과일들의 화려한 변신, 그 결말은?

미용실에서 저마다 멋지게 단장한 과일 손님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 화려한 무언가가 등장하는데.. 미용실에서의 꼼꼼한 관리가 사실은 준비 과정이었다는 결말이 무척 신선하고 놀라워요. 아이들이 마지막 장면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지고 흥미를 보이더군요.


과일과 친해지는 마법 같은 시간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다음에는 어떤 과일이 등장할지 저도 모르게 기대하게 되더라고요.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베어 물던 과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이렇게 아기자기한 캐릭터로 탄생시켰다는 점이 참 놀랍답니다. 과일들이 껍질을 깎고 씨앗을 다듬는 과정을 미용실에서 관리를 받는 것으로 표현한 발상이 무척 돋보였어요. 화려한 색감과 부드러운 색연필 질감의 그림체 덕분에 눈이 편안하고 이야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답니다.


자연을 사랑하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과 전작 <채소 이발소>

이 책의 마지막에 담긴 '작가의 말'을 읽어보면 가슴 한편이 뭉클해진답니다. 야마다 마치 작가는 어린 시절 포도 농사를 지으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 이야기를 지었다고 해요. 예쁘고 상품성 있는 과일은 시장에 내다 팔고, 가족들은 늘 못생긴 포도와 키위만 먹었던 애틋한 추억을 회상하는 대목이 시선을 끄네요. 만약 과일 미용실이 있었다면 우리도 예쁜 과일을 먹었을 텐데 하는 작가의 귀여운 상상력이 이토록 사랑스러운 이야기로 탄생했답니다. 농사짓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작가의 다정한 시선이 그림책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요.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두 작가의 전작인 <채소 이발소>도 함께 읽어보시기를 적극적으로 권해 드려요. 가지, 오이, 옥수수 등 채소들이 이발소에 가서 멋지게 이발을 한다는 설정 역시 아이들의 호기심을 한껏 끌어올려 준답니다. <채소 이발소> & <과일 미용실>을 연달아 읽어주면 과일과 채소에 대한 아이들의 친밀감이 훌쩍 자라날 거예요.


온 가족이 함께 즐기는 그림책

아이들은 <과일 미용실>을 통해 사물에 대한 관찰력과 풍부한 상상력을 기를 수 있어요. 평소 과일을 잘 먹지 않거나 편식하는 아이들에게 읽어주면 과일에 대한 흥미와 친근감을 높여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거예요.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집에 있는 과일들을 꺼내놓고 직접 미용실 놀이를 해보는 것도 훌륭한 독후 활동이 된답니다. 사과나 귤을 손님으로 모시고 엄마 아빠가 미용사가 되어 상황극을 하다 보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을 거예요.

창의력과 언어 표현력을 키워주고 싶은 부모님들께 자신 있게 권해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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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서 자랐고요 아직도 종로에 삽니다
심이안 지음 / 크루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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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 신간 <종로에서 자랐고요 아직도 종로에 삽니다>는 1999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한 심이안 감독의 첫 에세이다. 저자는 단편영화 <빼고>로 제16회 광주여성영화제 작품상, 제6회 서울 여성독립영화제 관객상 등을 수상하며 주목받은 신예 영화인으로, 현재 어머니인 김소연 감독과 자전적 장편 다큐멘터리 <자바커피 다이어리>를 제작하며 자신만의 솔직하고 담백한 작품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다. 카메라 렌즈 너머로 세상을 관찰하던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유년 시절을 보냈고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에서 6년을 지낸 뒤 다시 돌아와 14년째 정주 중인 종로라는 공간을 따스한 시선으로 포착해 낸다. 엄혜정, 남궁선, 오유경 등 문화계 인사들이 추천사를 남겼듯.. 이 책은 잊고 지냈던 자신의 동네를 새롭게 발견하고 싶은 독자나 부모와 자식 간의 끈끈한 유대감, 성장의 온기를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 충실한 길잡이가 되어 준다.


유년의 기억을 필름처럼 재생하다

책장을 넘기면 1999년생 저자 심이안이 어린 시절을 보낸 안국역 일대의 풍경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저자는 가회동, 계동, 소격동 등 창덕궁 주변의 여러 동네를 누비며 쌓은 기억을 하나씩 꺼내놓는다. 운현 초등학교로 향하던 등꿎길, 대동세무고등학교 앞 내리막길에서 눈을 감고 달리다 주차된 자전거에 부딪혀 입술을 꿰맨 일화는 미소를 자아내면서도 어린 시절의 무모한 용기를 돌아보게 만든다. 안국역 3번 출구 지하에 있던 드림디포 문구점에서 친구 유나, 동연과 함께 우정 반지를 맞추며 서운함을 달래던 장면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순수한 시절의 풋풋한 기억을 자극한다. 우리는 저자의 손을 잡고 종로의 좁은 골목을 함께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야기 도깨비가 자란 다정한 공간

가족과의 애틋한 일화는 책 전반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초등학교 시절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주최한 가을 음악회에서 가족과 남산에 올라간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앨범 <할머니 가방 (열 손가락의 신나는 나들이)>에 담았던 추억은 단연 흥미롭다. 충무로 방송국에서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온 아빠가 거실 양털 카펫 위에서 들려주던 이야기를 들으며 저자는 이야기 도깨비로 성장했다. 부모님의 헌신과 애정 덕분에 저자가 세상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영화감독이자 작가로 자라날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3학년 여름, 횡단보도를 혼자 건너지 못해 수영장 앞에서 멈춰 섰던 아이를 위해 엄마가 하던 일을 멈추고 데리러 온 대목은 애틋한 여운을 남긴다.


이방인에서 다시 단골이 된 학창 시절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에서 6년을 보낸 저자는 중학교 3학년 무렵 다시 종로로 돌아와 낯선 환경과 마주한다. 유명 드라마 <도깨비>, <겨울연가>, <여신강림>의 단골 촬영지일 만큼 고풍스러운 중앙중학교 교정에 서서히 적응해 나가는 과정은 잔잔한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후 중구 명동에 위치한 계성여자고등학교로 진학한 저자가 안국역과 낙원상가를 지나 등교하며 자신만의 일상을 개척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특히 학창 시절의 든든한 아지트가 되어준 정독도서관에서의 추억이 돋보인다. 어문학 족보실에서 옛사람들의 뿌리를 상상하며 단어를 외우고, 구내식당 소담정에서 돈가스와 우동으로 학업 스트레스를 달래던 장면은 입시를 거친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하다. 나 또한 소담정에서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고, 간식을 함께 나눈 추억이 있기에 그 추억을 소환할 수 있었다. 또한 아빠의 손에 이끌려 명륜2가로 자리 잡은 단골 LP 바 더 도어스 II에 방문해 분홍색 장식이 있는 초코 케이크를 받으며 생일을 축하하던 에피소드는 어느덧 부모와 취향을 공유하며 훌쩍 자란 저자의 성장을 실감케 한다.


카메라 렌즈로 재발견한 동네와 사람들

대학에 진학하여 영화를 전공하면서 종로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야는 한층 다채로워진다. 종로 일대의 오래된 사진 현상소 우성상사에서 일회용 필름 카메라 퀵스냅을 현상하고, 예지동 시계골목의 세기사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에 매료되는 대목은 아날로그 감성을 듬뿍 자아낸다. 영상 창작자로서의 열정은 2018년 초단편 영화 <아리에게 (Dear Ari)>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눈부시게 드러난다. 11월에 눈 덮인 창덕궁 후원을 배경으로 아리, 윤아, 예은, 혜원 등 동기들과 고군분투하며 촬영을 마친 뒤 엄마 김소연 감독의 옛 카세트테이프 목소리를 영화에 삽입하며 눈물을 흘렸던 일화는 찡한 감동을 선사한다. 나아가 고소공포증을 극복하고 인왕산에 오르거나 동대문역 근처 네팔 식당 뿌자에서 달밧과 모모를 맛보는 등 저자는 익숙한 동네에서 낯선 세계를 끊임없이 발견해 나간다.


낯선 곳에서의 성장과 다시 마주한 종로

혼자서 횡단보도조차 건너지 못하던 아이는 엄마의 결단으로 인도네시아 수라바야로 떠난다. 그곳에서 6년의 세월을 보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종로에 자리 잡은 지 어느덧 14년이 흘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하고 105킬로그램이 된 주인공을 다룬 판타지 단편영화 <빼고>로 다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저자는 이제 어엿한 프리랜서 감독이 되었다. 카메라를 들고 골목을 걷는 저자의 시선은 남다르다. 익숙한 동네에서 여전히 새로운 찰나를 발견하며, 엄마 김소연 감독과 함께 장편 다큐멘터리 <자바커피 다이어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장소와 사람이 맺는 끈끈한 관계성을 증명한다.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며 저자는 자신만의 단단한 뿌리를 종로에 내렸다.


나만의 동네를 묻는 단정한 에세이

이 책은 담백한 문장으로 자신의 삶을 차분히 기록한다. 과장된 감정 표현 없이 골목길의 변화와 사람들의 체온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점이 눈길을 끈다.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특별함을 길어 올리는 관찰력은 시각 매체를 다루는 영상 창작자 특유의 감각에서 비롯된 듯하다. 사라져 가는 가게들, 새롭게 들어선 한옥마을의 관광객 무리 등 변해가는 종로의 모습 속에서도 변치 않는 추억의 가치를 짚어낸다.

책은 단순히 한 개인의 향수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간이 인간의 내면에 미치는 영향력을 탐구한다. 엄마와의 관계 역시 이 책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유년 시절 딸의 교육을 위해 낯선 타국으로 이주하는 과감함을 보였던 엄마는 이제 딸과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든든한 동료가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길이겠지만, 저자에게는 매일매일 자아를 형성해 온 든든한 기반이다. 저자의 글을 따라 안국동 골목을 걷다 보면 어느새 독자 역시 자신이 나고 자란 동네의 풍경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 장소가 품은 기억이 어떻게 한 사람의 자아를 형성하고 성장시키는지를 보여주는 매력적인 글이다.


누구에게나 자기를 만든 동네가 있다

<종로에서 자랐고요 아직도 종로에 삽니다>는 한 사람이 한 동네와 오래 지내는 방법을 진솔하고 다정하게 안내한다. 바쁘게 쫓기듯 살아가며 자신이 속한 터전의 소중함을 잊고 지내는 모든 이들에게 이 에세이를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화려한 명소 이면에 숨겨진 소박한 골목길의 온기를 느끼고 싶은 사람, 바래지 않는 유년의 추억을 다시금 꺼내어 보고 싶은 분이라면 필히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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