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였던 날들
AJ 덩고 지음, 임슬애 옮김 / 미메시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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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 덩고가 쓰고 그린 <파도였던 날들>은 2019년 NPR 올해의 책 선정에 이어 2020년 미국 도서관 협회 알렉스상을 받으며 문학성을 입증한 그래픽 노블이다.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는 나이키, 스케쳐스, 비슬라 등 여러 브랜드와 협업하며 특유의 감각적인 선을 선보여 왔다. 이 작품은 전 세계 10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판매 수익금 일부가 암 치료 연구에 기부된다. 골육종으로 세상을 떠난 연인 크리스틴과의 찬란했던 시간과 하와이 서핑의 초기 역사를 교차 편집한 독창적인 구조를 띠고 있다. 상실의 아픔을 겪은 이들, 서핑을 사랑하는 이들, 그리고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독자 모두에게 권할 만한 작품이다.


상실을 예술로 승화한 작가와 영감을 준 영화

이 책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애도의 과정을 서핑이라는 독특한 매개체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AJ 덩고는 인터뷰를 통해 연인 크리스틴의 기억을 기리고 바다가 선사하는 치유의 힘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펜을 들었다고 밝혔다. 투박한 듯 섬세한 선 묘사와 담백한 화면 연출은 시각적 쾌감을 넘어 강렬한 울림을 남긴다. 책 속에서 크리스틴이 열광했던 영화로 언급되는 <블루 크러시>는 2002년 존 스톡웰 감독이 연출한 서핑 영화다. 하와이의 웅장한 바다를 배경으로 여성 서퍼들이 거친 물살에 맞서며 서핑 대회에 출전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담아냈다. 이 영화는 크리스틴에게 서핑을 향한 호기심을 불어넣었고 훗날 투병 생활의 가장 큰 버팀목이 되는 바다로 그들을 이끈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파도를 마주하는 두 가지 색채

작가는 세상을 떠난 연인 크리스틴과의 기억을 서늘하면서도 맑은 청록색 톤으로 그려낸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고 투병의 고통 속에서도 바다를 찾았던 순간들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책 속에 등장하는 영화 <블루 크러시>는 크리스틴의 여동생에게 열정을 불어넣은 매개체이자 이들이 바다로 향하게 된 작은 계기를 보여준다. "파도 밑으로 잠기면 잠시 서로를 잃어버렸다"라는 크리스틴의 일기장 구절처럼 질병은 예고 없이 이들의 일상을 덮친다. 작가의 삶의 파편들이 비로소 맞춰지는 듯싶던 찰나에 연인의 삶은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장면들이 가슴 아프게 절절하다. 크리스틴이 수술을 받는 동안 그 고통을 전부 짊어지고 싶어 했던 작가의 간절한 마음은 페이지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하지만 덩고는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연인이 파도 위에서 느꼈던 해방감과 벅찬 감동을 종이 위에 오롯이 복원한다. 거친 파도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던 연인의 모습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전설이 된 서퍼들의 궤적

개인적인 회고와 맞물려 하와이의 잊혀 가는 전통이었던 서핑을 전 세계에 알린 듀크 카하나모쿠와 톰 블레이크의 일대기가 아스라한 세피아 톤으로 전개된다.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이자 현대 서핑의 아버지로 불리는 듀크는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물의 인간으로서 묵묵히 파도를 탔다. 알로하의 땅에서 온 특사라는 찬사를 받으며 세계 전역에서 전시회를 열고 다음 세대에게 서핑을 알린 그의 발자취는 경이롭다. 1926년 캘리포니아 말리부의 파도를 개척한 톰 블레이크는 증기선을 타고 하와이로 향해 듀크와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두 사람의 우연한 첫 만남은 존경심 가득한 평생의 우정으로 이어졌다. 듀크의 길을 쫓아 속이 빈 서프보드의 혁신을 이끌어낸 톰 블레이크의 삶 역시 고독하지만 끈질긴 에너지를 뿜어낸다. 전혀 다른 시대와 공간에 놓인 듯한 이 역사적 기록들은 결국 파도라는 거대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숭고함으로 수렴된다.


절망 속에서 빛난 생의 의지와 자유의 공간

가혹한 암 투병의 순간에도 크리스틴은 삶의 끈을 놓지 않고 매 순간을 기꺼이 즐기며 사랑하려 애썼다. 곁에서 그녀를 변함없이 지켜주며 온 마음을 다해 아꼈던 저자의 시선에는 애틋함이 가득하다. 캄캄한 밤하늘의 별과 초승달 아래서 두 손을 맞잡고 "내가 죽으면, 네 그림을 통해 계속 살고 싶어"라고 말하는 연인의 당부는 커다란 슬픔 한가운데서도 스러지지 않는 영원을 약속한다. "서프보드에 올라가면 땅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라고 묘사하는 대목은 시선을 끈다. 이는 뼈아픈 상실을 겪은 후에도 삶의 물결은 어김없이 밀려온다는 진실을 일러준다. 육지의 근심을 잠시 잊고 파도라는 운명의 배에서 선장이 되는 찰나는 저자가 왜 그토록 서핑에 각별한 애착을 품게 되었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사랑을 기억으로 남기고 상실을 용기로 빚어낸 이 이야기는 뭉클한 감동을 전한다.


부서진 마음을 안고 다시 바다로..

서핑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맞서 몸을 맡기는 행위다. 파도에서 떨어지면 다시 보드 위에 올라타 헤엄쳐야 한다. 작가는 책 속에서 "우리는 모두 파도타기에 천착하고 바다를 깊이 숭배하며, 부서진 마음을 안고 살고 있다"라고 고백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과 거친 물결에 휩쓸려 넘어지는 서퍼의 모습은 절묘하게 겹쳐진다. 자정이 되기 직전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 고백을 끝으로 크리스틴은 영원한 안식에 든다.

작가의 독백처럼 삶의 공허함은 불변하며 상실의 고통에는 익숙한 패턴이 없이 그저 밀려왔다 밀려갈 뿐이다. 듀크와 톰이 바다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듯, 작가 역시 크리스틴이 남긴 궤적을 따라가며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는다.


미메시스 신간 <파도였던 날들>은 한 개인의 애절한 연가인 동시에 밀려오는 삶의 시련을 기꺼이 껴안으려는 용감한 선언문이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윤슬처럼 남겨진 이들의 삶은 계속 반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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