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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여행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50
로런스 스턴 지음, 김정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5월
평점 :
외부에서 내면으로 시선을 돌린 18세기의 문제작
영문학사에서 시대를 앞서간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칭송받는 로런스 스턴의 마지막 저작 <감성 여행>이 을유세계문학전집 150번째 도서로 출간되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스턴은 우리의 관심을 외부 세계에서 내면으로 옮겨 놓는다"라고 평했으며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아주 작은 사건 하나로도 인간 본성의 가장 은밀한 구석을 드러내는 비범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라며 찬사를 보냈다. 라블레와 세르반테스로 이어지는 희극 정신의 계보를 이으며 토마스 만, 제임스 조이스, 살만 루슈디 등 후대 거장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이 작품은 국내에 처음 번역되는 초역본이라는 점에서 출간 의의가 남다르다. 단순한 기행문을 넘어 인간 심리에 대한 탐구서로서 소장 가치를 증명한다.
불완전성을 긍정하는 희극 정신의 탄생
저자 로런스 스턴은 1713년 아일랜드 클론멜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한 후 요크셔 지방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평생 성공회 목사로 살았던 그는 1759년 <신사 트리스트럼 샌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를 발표하며 유럽 전역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다. 연속성 있고 결말이 정해진 기존 서사 구조를 해체하고 자아 패러디를 동원한 파격적인 스타일은 당대의 엄숙한 계몽주의를 전복시켰다.
평생 폐 질환과 사투를 벌였던 스턴은 생애 마지막 1년을 앞두고 자신을 구원할 저작이라 명명한 <감성 여행> 집필에 착수한다. 병마의 고통 속에서도 희극 정신을 잃지 않았던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찰나의 유머와 따뜻한 인간애를 원고에 새겼다. 총 4권으로 기획된 이 여정은 1768년 2월 제1권과 2권을 출판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작가가 세상을 떠나며 결국 미완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 미완의 상태는 오히려 삶의 유한성을 긍정하는 스턴의 철학을 역설적으로 대변한다.
충동적인 출발과 길 위의 다채로운 군상
소설의 서사는 즉흥적인 계기로 촉발된다. 주인공 요릭이 일상적인 대화 중 프랑스인들의 정리 방식을 칭찬하자 하인이 "프랑스에 가 보신 적이 있나요?"(p.9)라며 무심코 승리감에 차서 질문을 던진다. 자신이 도버 해협 너머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요릭은 하인의 말에 발끈하여 그 길로 셔츠 여섯 벌과 검은색 실크 바지 단 벌 만을 챙겨 도버행 역마차에 올라탄다.
이렇게 시작된 요릭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여정은 명승고적 감상에 치중하는 일반적인 그랜드 투어와 궤를 달리한다. 그는 매사에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여행자 스멜펑거스(Smelfungus, 당대의 여행 작가 토바이어스 스몰릿을 풍자, 저격한 인물)를 경계하며 외부 세계를 비판적인 잣대로만 재단하는 편협함, 옹졸함을 거부한다. 대신 길 위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타자들과의 우연한 만남과 감정적 교류에 주목한다.
타자를 향한 에로스와 연민의 시선
요릭의 여행은 인간의 이기심을 강조한 버나드 맨더빌의 냉소적 세계관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파리의 상점에서는 아름다운 부인 곁에 앉아 능청스레 맥박을 짚어보고 여권이 없어 곤경에 처했을 때는 어느 백작에게 자신을 셰익스피어의 어릿광대 요릭이라 소개하며 위기를 모면한다.
물랭에서 만난 소녀 마리아와의 일화가 눈에 띈다. 실연의 상처로 정신이 무너져 내린 채 반려견 곁에서 피리를 부는 마리아를 보며 요릭은 그녀의 슬픔에 동화되어 함께 눈물을 훔친다. 고통받는 타인의 삶에 스며들어 정서적인 연대감을 쌓아가는 그의 시선은 현대적인 감수성을 자랑한다.
시대를 초월한 가장 자유로운 작가의 멈춤
책을 읽다 보면 작가의 죽음으로 파생된 돌발적이고 묘한 결말에 다다르게 된다. 사보아의 한 작은 여관에서 방이 부족해 피에몬테 출신 숙녀, 그녀의 하녀와 부득이하게 한 방을 쓰게 된 요릭은 어둠 속에서 침묵을 약속하는 조약을 맺는다. 하지만 밤새 논쟁의 열기가 오르며 조약은 위태로워지고 혹여나 적대적인 상황이 벌어질까 두려워 좁은 통로로 기어 나온 하녀를 향해 요릭이 무심코 손을 뻗는다. "내 손에 닿은 것은 이 하녀의-"라는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문장을 끝으로 이야기는 돌연 마침표를 찍는다.
당초 계획했던 이탈리아에서의 행보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미완성으로 남겨진 이 절묘한 여백은 독자의 상상력을 무한히 자극한다. 역자 김정희의 해설처럼 이는 "완성도가 아니라 삶의 파편성을 수용하고 미완일 수밖에 없는 인생의 매 순간을 온전히 살아 내는 겸허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스턴을 가리켜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자유로운 작가라고 극찬했듯.. 인간 본성의 나약함과 따뜻함을 유쾌하게 그려낸 <감성 여행>은 진정한 소통, 여행의 의미를 묻는 고전 기록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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