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들 환상하는 여자들 2
브랜다 로사노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싸웠던 전장에는 꽃을 가지고 가야 하는 법이야."

"아이 버섯은 지혜롭습니다. 지혜가 곧 언어이기 때문이지요. 지혜는 몸이 아닌 목소리입니다."


남미 문학의 신경향을 이끌 작가로 손꼽히는 '브렌다 로사노'의 <마녀들>이 은행나무 '환상하는 여자들' 시리즈의 제2권으로 출간되었다.

소설은 오악사카의 후예로서 치유자의 피가 흐르던 '팔로마'가 살해당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팔로마는 가스파르라는 이름의 소년으로 출생한, 사포텍 문화권에서 제3의 성으로 인정받는 '무셰'이다.

일종의 주술적 언어를 통해 길흉화복을 점치고 미래를 예지하는 전통 무속인인 듯하다.


팔로마의 살인 사건을 취재하는 젊은 기자 '조에'와 팔로마의 사촌이자 후계자인 '펠리시아나'가 번갈아 등장하고 또는 마주치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자신 혹은 주위의 여성들이 성장하면서 다양한 폭력에 노출되고, 위험에 처하는 장면이 연이어 묘사된다.


현대적인 도회지 멕시코시티와 호젓한 산골 마을 산펠리페에서 각각의 여성들은 신체적/정신적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딸에게 닥칠 위험을 예지하는 엄마의 기이한 능력 때문에 몇 번의 구사일생을 경험한 조에는 그 비결을 묻는다.

"여자들은 모두 자기 안에 마녀 같은 면을 조금은 품은 채로 태어난단다.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지."


여성들은 무법천지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신비한 능력을 일부 지니고 태어난다. 그 필살기는 후천적으로 습득될 수도 있다. 허나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홀로 생존하기는 불가능하다. 여성들은 연대와 협력을 통해 서로의 무사안녕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단단히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아야만 마녀사냥을 피할 수 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고립되어 반사회적인 이단으로 취급받는 마녀들을 불태우기 위한 제단이 높이 솟아 있다. 활활 불타오르는 화형대를 목전에 두고 여성들은 공동체 의식을 굳게 다지는 한편, 각자의 언어적 능력을 발휘해 연대할 필요가 있다. 마술적인 힘과 집단의식이 깃든 언어는 지혜를 발화시키며, 이를 통해 이질적인 세계와 진영은 조화를 이루고 평안을 되찾을 수 있다. 세대를 넘은 치열한 투쟁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을 때.. 생살이 타드는 고통이 멈추고 잿더미만 남은 전장에 검붉은 꽃무리를 수놓을 수 있는 것이다.


브렌다 로사노의 장편 소설 <마녀들>은 두 여성과 세계가 대립이 아닌, 언어적 치유와 연대를 통해 폭력의 상처를 회복하고 해소하는 이야기를 마술적인 필치로 그린다. 우리는 그녀의 소설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상처가 집단의 언어를 통해 회복되는 주술적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현실 사회의 편견과 무자비한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서평단 #해외문학 #시리즈 #환상하는여자들 #마녀들 #화형대 #브렌다로사노 #은행나무 #환상독서단 #신작추천리뷰 #마술적집단언어 #조에 #팔로마 #펠리시아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시의 마지막 여름
지안프랑코 칼리가리치 지음, 김현주 옮김 / 잔(도서출판)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70년대 '로마'는 화려하고 북적이는 대도시지만, 그 이면은 황량하고 혼탁한 데다 퇴색되어 가는 그림자가 기울었다. 그 도시에 머무르는 이들은 수많은 군중들에 둘러싸여 정처 없이 표류한다. 그들은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관심과 사랑을 갈망하지만, 도시가 내뿜는 어둑한 그림자에 온몸이 물드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외로움과 고독은 떨어질 수 없는, 그들의 절친이었다.




1973년 첫 출간 이후, 절판과 재출간을 거듭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으로 남은 컬트 소설 <도시의 마지막 여름>이 출간되었다. 알음알음 입소문으로 이어진 명성답게, 로마의 명소를 묘사한 '지안프랑코 칼리가리치'의 문장들은 생동감이 넘치고 정교하기까지 하다. 커플의 애정 행위를 정밀 스케치한 문장들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에로틱하게 들끓는다. 책을 읽다 보면 밀라노에서 로마로 건너온 '레오'가 되어 핀초 언덕의 테라스, 캄포 데이 피오리의 쉼터, 움베르티노 지구 등 한여름 로마의 곳곳을 방랑하듯 거닐 수  있다. 레오는 완벽한 혼자가 아니었다. 로마 상류층에 속하는 어느 부부와 가까이 지냈고, 뜻이 맞아 함께 영화를 제작하려 한 절친 '그라지아노'도 외로움을 달래 주었다. 그와 사랑 비슷한 감정을 나누는 '아리아나' 또한 나비처럼 그의 곁에 머물다 사라짐을 반복하며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번잡한 도시 안에서 무의미하고 공허한 나날을 지속하던 레오는 곁의 모든 이들을 관찰한다. 어떠한 분석이나 냉철한 비판 없이 방관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끝 모를 고독의 중심으로 점차 끌려간다. 가혹한 운명은 무더운 도시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그를 놓치지 않았다. 진심으로 교류하던 그라지아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레오는 도시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 존재의 의미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애써 숨기고 부정하면서 아리아나 곁에 머물려 했던 그는 벼랑 끝으로 자신을 몰고 간다. 헛된 허영심과 사치에 잠식당한 그녀는 결국 레오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다. 레오는 하이에나처럼 타인이 남긴 음식을 먹어치우고, 사랑하는 애인을 독차지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절감하며, 도시에서 버림받고 추방당한 모든 이들을 받아주는 푸른 '바다'를 향해 다가간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영원을 향해 나아갔다.

 



50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이 대중들 사이에서 망각되지 않고 복간되는 데는 어떤 보편적 의미가 숨어있을 것이다. 우리는 각종 SNS로 촘촘히 연결된 인터넷/디지털 AI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레오가 느끼는 고독감과 허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인간관계는 이런 모순을 극대화하며, 무수한 팔로워에 둘러싸여 소외감과 외로움을 면치 못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정량적인 숫자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장기간 고립되어 끝내 고독사할 처지에 몰리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도심의 이면에 깔린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진심 어린 사랑과 우정을 나누지 못하는 '레오'들은 오늘날 대도시 어디에나 존재한다. 돛을 올리고 나아가야 할 뚜렷한 목적지 없이 떠도는 이들.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존재 의미를 숙고하지 않은 채, 부유하는 이들이 여러 도시에 남아있는 한, 이 책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보편성을 획득할 것이다. <도시의 마지막 여름>이 시대를 관통하는 영원한 고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학의 마음 - 내 아이의 수학 정서를 높이는 초등부모의 대화법
강미선 지음 / 푸른향기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미선 저자의 <수학의 마음>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수학교육학 박사학위를 받고 20여 년간 초중고 학생과 예비 수학교사를 지도해 온 교육 전문가의 통찰이 담긴 에세이이다. 국내 최초 수학 전문 서점인 '데카르트 수학책방'을 정유숙 대표와 함께 운영하며 수학교육 대중화에 앞장서는 저자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002년 출간된 <수학은 밥이다>를 전면 개정하여 도서출판 푸른향기에서 새롭게 펴낸 이 책은 점수나 경쟁 중심의 교육에 지친 학부모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저자는 수학을 문제 풀이의 도구가 아닌, 아이의 정서와 태도를 기르는 매개체로 바라보아야 함을 지속적으로 역설한다. <강미선 쌤의 개념잡는 분수비법>, <조선수학의 신 홍정하> 등 30여 권의 저서를 집필한 베테랑 저자가 전하는 현실적인 조언은 불안감에 시달리는 학부모들에게 확고한 나침반 역할을 한다.


다시 태어난 완전 개정판, 그 의미와 가치

<수학은 밥이다>에서 <수학의 마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이유는 명확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자녀의 수학 학습 문제로 고통받는 부모와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30대 중반, 대학원을 다니며 학생들을 가르치던 초보 엄마 시절에 쓴 초판의 열정은 그대로 유지하되, 긴 시간 축적된 교육 현장의 경험과 다듬어진 이론을 더해 더욱 단단한 에세이로 완성되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과거의 책이 절판되어 시중에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꼭 개정판을 내달라고 요청한 독자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팍팍한 학습 환경 속에서 아이들이 수학의 본질을 잃지 않고, 호기심과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를 바라는 저자의 진심이 책의 곳곳에 녹아 있다. 문제의 정답만을 쫓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중시하고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는 수학적 정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은 이 개정판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보여준다.


성적이라는 환상을 깨는 인상적인 에피소드

인상적인 대목은 단연 아이와 함께 방송에 출연했던 에피소드이다. 과거 담당 피디가 촬영의 재미를 위해 아이에게 100점을 맞고 싶다고 대답하길 요구했을 때, 아이는 단호하게 95점을 맞겠다고 고집을 부려 실랑이가 벌어진다. 저자는 당시 5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아이들을 다그쳤던 자신의 과거를 담담하게 고백한다.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아이의 숨통을 막는 일인지 깨달아가는 과정은 깨달음을 선사한다. 만점에 대한 강박을 버릴 때 비로소 삶의 여유가 생기고, 아이가 스스로 학교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통찰은 학부모의 불안한 심리를 찌르는 날카로운 조언이다. 부모의 과도한 기대가 아이의 수학적 호기심을 어떻게 짓밟는지 돌아보게 하며 진정한 학업 성취는 여유로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기다림의 미학을 증명하는 브라질의 실험

책의 중반부에 소개되는 브라질의 블록 쌓기 실험 역시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진다. 부모와 아이가 짝을 이룬 팀과 교사와 아이가 짝을 이룬 팀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판이하게 달랐다. 부모들은 시행착오를 경제적 낭비로 치부하며 아이에게 정해진 정답의 경로만 지시했다. 반면 교사들은 실수를 이해의 과정으로 여기고 아이의 의견을 물으며 충분히 기다려주었다. 이는 수학적 사고력이 마치 공장의 생산품처럼 단기간에 찍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효율성만 따지며 자녀를 다그치던 부모라면, 이 대목에서 아이가 생각할 시간을 빼앗았던 지난날을 반성하게 될 것이다.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스스로 왜라고 질문을 던지며 답을 정당화하는 태도야말로 평생을 살아가는 데 유용한 자산이 된다는 저자의 철학이 잘 드러난다.


부모의 기다림과 질문이 만드는 수학적 대화법

아이가 수학의 묘미를 느끼고 온전히 즐기게 하려면 부모의 조급함을 내려놓는 태도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새롭게 추가된 책의 여러 에피소드에서 엿볼 수 있듯, 아이가 문제의 해답을 곧바로 찾지 못할 때 정답을 다그치기보다는 최소 삼 분 정도 여유를 두고 스스로 생각할 틈을 주어야 한다. 단순한 계산 결과에 급급한 아이에게는 "왜 그렇게 생각했어?"라며 풀이 과정을 되묻거나, "그림으로 한 번 그려서 풀어볼까?"라고 제안하며 논리적 근거를 설명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 현명하다. 또한 수학은 무조건 답이 하나뿐이라는 낡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해결 방식을 탐구하도록 장려하는 대화가 필수적이다. 남들보다 선행학습을 서두르는 빠른 철학을 가진 부모가 무조건 성공하는 것도, 느린 철학을 가졌다고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

12년이라는 장기적인 교육과정의 안목을 둔 상태로 자녀의 성향에 맞는 학습 스케줄을 짜는 지혜가 요구된다. 맹목적인 암기가 아니라 억지스럽지 않게 개념을 납득하는 과정을 거칠 때.. 아이는 비로소 수학을 세상을 살아가는 든든한 무기이자 친구로 삼게 된다.


평생의 동반자로 자리 잡는 수학의 진정한 의미

책의 말미, 저자는 수학을 입시를 위한 단순한 점수 획득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세태를 꼬집는다. 시험 문제의 정답만을 맞추는 데 매몰되면 졸업과 동시에 수학과의 인연은 단절되며, 자칫 과목 자체에 대한 혐오로 이어질 수 있음을 짚어낸다. 저자는 수학을 일컬어 살아가며 마주하는 곤란한 상황에서 해결 과정을 귀띔해 주는 유익하고 다정한 친구라고 묘사한다. 보이지 않지만 늘 곁에서 자신을 돕는 든든한 학문이라는 믿음이 생길 때, 아이의 마음속 불안은 가라앉고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수학은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도구가 아니라, 삶의 도구 그 자체라는 에필로그의 통찰은 학부모의 뇌리에 강한 잔상을 남긴다. 대학 입시라는 좁은 관문을 넘어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동반자로서 수학을 대할 때.. 내 자녀의 첫 수학은 비로소 가정에서 올바른 닻을 내리게 된다.


편견을 깨는 실전 지침 & 총평

<수학의 마음>의 전체적인 구성은 부모의 성향을 진단하는 장부터 초등수학 가르치기의 실제, 선행학습과 자기 주도 학습의 허와 실까지 체계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수학은 반복 학습만이 능사인지, 답은 오직 하나뿐인지 등 부모들이 흔히 착각하는 선입견을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토파즈 효과를 조심하라는 경고나, 언어력이 탄탄할수록 수학적 사고도 높아진다는 조언은 실전에서 곧바로 적용할 수 있는 유용한 지침이다.

단조로운 문제 풀이 요령을 넘어 수학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 변화를 촉구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다른 실용서들과 궤를 달리한다. 푸른향기 개정판 <수학의 마음>은 아이의 수학 교육을 빙자하여 부모 자신의 불안을 달래고 있던 어른들에게 건네는 따끔하면서도 다정한 처방전이다.






#수학의마음 #강미선 #푸른향기 #수학은밥이다개정판 #초등수학공부법 #수학정서 #초등학부모필독서 #엄마표수학 #수학교육에세이 #데카르트수학책방 #수학잘하는아이 #자기주도학습법 #수학적사고력 #초등수학선행 #초등수학문제집 #초등수학개념 #문해력과수학 #부모교육서추천 #자녀교육도서 #수학불안증극복 #초등맘일상 #초등교육트렌드 #수포자예방 #수학도서추천 #초등공부습관 #부모자녀대화법 #느린철학 #기다림의미학 #서평단 #도서제공협찬 #에세이추천리뷰 #신간추천리뷰 #도서추천리뷰 #책추천리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투명한 나선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원한 이야기꾼, 히가시노 게이고를 기리며

2026년 7월 23일, 68세의 나이로 대장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미스터리 소설의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를 추모하며 글을 시작한다. 1985년 <방과 후>로 데뷔한 이래 <용의자 X의 헌신>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 100권이 넘는 작품을 남긴 그는 누적 판매 부수 1억 부를 돌파하며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 장르 문학을 이끌었다. 엔지니어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바탕으로 정교한 과학 트릭을 선보이던 그는 점차 사람의 감정과 인물 간의 관계성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작풍을 넓혀왔다. 넷플릭스 영상화 및 일본 종합 베스트셀러 1위 등 눈부신 성과를 기록한 그의 새로운 서사, 시리즈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몹시 비통하다.


시리즈의 전환점, <투명한 나선>

히가시노 게이고의 갈릴레오 시리즈 최신작 <투명한 나선>을 손에 들었다. 분량은 400여 페이지..

북다 출판사에서 김선영 번역으로 출간된 이 소설은 시리즈 열 번째 장편이라는 상징성에 걸맞게, 그간 베일에 싸여 있던 천재 물리학자 유카와 마나부의 개인사를 처음으로 수면 위에 올린다. 차가운 이성의 대명사였던 유카와의 내면이 드러나는 전개에 신선한 충격을 감출 수 없다. 작가 스스로도 갈릴레오 팬이라면 분명 놀랄 것이고 히가시노 팬이라면 더욱 놀랄 것이라고 공언했을 만큼, 이 책은 작가가 오랜 시간 가슴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비로소 꺼내놓은 의미 있는 결과물이다.


투명하게 얽힌 혈연의 미스터리, 그 시작점

지바현 미나미보소 앞바다에서 영상 제작자 우에쓰지 료타가 등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채 발견되면서 사건은 막을 올린다. 메구로 경찰서의 형사 구사나기와 가오루가 수사망을 좁혀가는 가운데.. 사망자의 동거인인 시마우치 소노카가 일하던 꽃집에 휴가를 내고 돌연 자취를 감춘다. 소노카는 교제 폭력을 일삼던 우에쓰지에게 지속적인 가스라이팅과 학대를 당하던 피해자였다. 옛 친구 오카타니 마키 등 지인을 만나는 것조차 통제당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던 소노카의 삶은 지옥과 다름없었다. 홀어머니 시마우치 지즈코마저 잃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노카를 돕기 위해, 평소 모녀를 챙기던 마쓰나가 나에가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나타나 그녀의 도주를 돕는다.


폭력의 사슬을 끊어내는 여성들의 연대

경찰이 흩어진 단서들을 추적하는 동안 사건 이면에 숨겨진 인물들의 비밀이 하나둘 형체를 드러낸다. 특히 고급 클럽을 운영하는 네기시 히데미의 서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히데미는 과거 자신이 버렸던 핏덩이가 아사카게 보육원에서 자란 지즈코였음을 수제 인형의 비밀을 통해 깨닫는다. 후에 진실은 다른 방향으로 인형의 진짜 주인을 가리키지만, 서사는 걷잡을 수 없이 격류를 탄다. 인형 옷 속에 적힌 비밀 이름은 끊어질 수 없는 혈연의 증표였다. 지즈코의 딸인 소노카가 자신의 친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히데미, 그리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음에도 기꺼이 소노카의 방패가 되어준 나에까지,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소노카를 구원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 핏줄이라는 원초적인 연결고리와 헌신적인 사랑이 어떻게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차가운 물리학자의 제일 뜨거운 고백

이 소설이 갈릴레오 시리즈의 전작들과 무엇보다 확연하게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탐정 유카와의 위치와 나이 듦이다. 서른넷 부교수였던 그는 어느덧 쉰이 넘은 정교수가 되었고, 작가는 유카와 부모님의 노환과 병간호 묘사를 통해 세월의 흐름을 현실적으로 조명한다. <용의자 X의 헌신>이나 <한여름의 방정식> 등에서 유카와는 철저한 외부자의 시선으로 얽힌 실타래를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데 주력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냉철한 학자의 표본이었다. 허나 이번 수사 과정에서는 뜻밖에 유카와의 이름이 등장하고, 그는 제삼자가 아닌 사건의 당사자로서 진실의 중심에 선다.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며 오랜 친구 구사나기에게 선을 긋던 그는 마침내 평소라면 절대 내비치지 않았을 출생의 비밀을 고백한다. 구사나기와의 대화에서 자신을 버렸던 마쓰나가 나에를 가리켜 "내 친어머니야"라고 밝히는 대목은 팬들에게 커다란 놀라움을 안긴다.

단 한 번도 흔들림 없던 유카와가 사건에 직접 개입하며 자신의 뿌리를 마주하는 과정은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히게 이색적이면서도 매력적인 변곡점을 만들어낸다.


보이지 않는 끈이 빚어낸 찬란하고 시린 결말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 가족이라는 존재는 때로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나선이 되어 서로의 삶을 강하게 옭아맨다. 이 작품은 살인 사건의 진상이나 트릭을 파헤치는 쾌감보다는 인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의 타당성에 집중하며 아스라한 감동을 선사한다. 논리와 이성으로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의 파동을 과학자의 시선으로 껴안은 이 소설은 인간 탐구 보고서에 가깝다. 본편 에필로그 이후 별개 사건을 다룬 스페셜 단편 <겹치다>가 최초로 수록되어 소장 가치를 더한다. 유카와 마나부, 너의 죄를 사하노라라는 상징적인 문구가 책장을 덮은 후에도 오랜 시간 머릿속을 맴돈다. 시리즈를 꾸준히 사랑해 온 독자는 물론이고 혈연과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갈릴레오 최후의 수수께끼, 한국에 출간될 유작 <영원한 기억>

고인의 부고와 함께 갈릴레오 시리즈가 이것으로 종결된다는 사실이 무척 애통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한국 독자들을 위해 최종적으로 출간될 진짜 유작이 하나 더 남아있다. 바로 일본에서 지난 2026년 8월 5일 출간된 시리즈 열한 번째 장편 <영원한 기억>이다. '갈릴레오, 마지막 수수께끼'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형사 우쓰미 가오루가 흉기에 찔리는 사건을 계기로 유카와가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을 담았으며, 교보문고 북다를 통해 조만간 국내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일생을 다해 흥미진진한 서사를 선물해 준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하며,

그가 남긴 106번째 서사가 도착할 날을 차분히 기다려본다.






#투명한나선 #히가시노게이고 #히가시노게이고별세 #히가시노게이고추모 #갈릴레오시리즈 #유카와마나부 #구사나기 #우쓰미 #추리소설추천 #일본미스터리 #북다출판사 #신간도서리뷰 #베스트셀러추천 #영원한기억 #히가시노게이고유작 #소설추천 #책리뷰 #독서기록 #서평 #가족소설 #반전소설 #넷플릭스원작 #도서추천 #휴일독서 #미스터리소설 #북다방 #신간추천리뷰 #책추천리뷰 #소설추천리뷰 #서평단 #도서제공협찬 #김선영옮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웃는 숲 - 제19회 중앙공론문예상 수상작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이소담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 문단을 대표하는 오기와라 히로시는 1956년 사이타마현 출생으로 세이조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활동하다 39세의 나이에 <오로로콩밭에서 붙잡아서>로 제10회 소설스바루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이후 알츠하이머에 걸린 중년 남성의 애환을 현실감 있게 그린 <내일의 기억>으로 제2회 서점대상 2위에 오르며 영화화까지 성공시켰고, 2016년 발표한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로 제155회 나오키상을 거머쥐며 대중성과 문학성을 동시에 입증받은 베테랑 작가이다.


2024년 출간된 신간 <웃는 숲>은 제19회 중앙공론문예상 수상 및 독서미터 올해의 도서 2024-2025에 선정되며 그의 식지 않은 필력을 다시 한번 증명한 소설이다. 한국에는 북다, 이소담 번역을 통해 최근 출간되었다.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인간 소외를 향한 따스한 시선이 문장 곳곳에 스며 있으며, 현대 사회에서 상처받고 고립된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자연 친화 & 휴먼 미스터리 드라마로 손색이 없다. 복잡하고 메마른 현실에서 벗어나 타인과의 진정한 연결을 갈망하는 성인 독자들에게 강력히 추천하는 작품이다.


실종된 5세 자폐 아동 마히토와 숲이 품은 비밀

소설은 가미모리 산책로에서 행방불명되었던 다섯 살 남자아이 마히토가 일주일 만에 무사히 발견되면서 본격적인 막을 올린다. 아이는 눈에 띄게 쇠약해졌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숲에서 물과 음식을 어떻게 얻었는지 묻는 어른들에게 그저 "곰 아저씨가 도와줬어."라는 미스터리한 말만 남긴다. 보호자인 미사키와 삼촌 도야는 아이가 텔레비전이나 어린이집에서 배운 적 없는 나무를 비벼 불 피우는 시늉을 하거나, 숲속 곰 아저씨라는 동요를 부르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며, 실종 기간 동안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아이를 적극적으로 돌보았음을 직감한다. 소설은 마히토의 기적적인 귀환 이후 흩어져 있는 단서들을 역추적하는 동시에, 어둡고 광활한 숲속으로 숨어든 다양한 인간 군상의 과거 시점을 절묘하게 교차 편집하여 보여준다. 이처럼 치밀하게 설계된 플롯은 독자로 하여금 거친 야생의 자연 속에서 연약한 아이를 살려낸 구원자가 과연 누구인지 끊임없이 추리하게 만드는 독서 동력을 제공한다.


벼랑 끝에 선 인간들이 교차하는 고립된 공간

페이지를 넘길수록 배경이 되는 가미모리 숲은 단순한 자연 풍경을 넘어, 각자의 절박한 사연을 품고 사회로부터 도망쳐 온 이들의 은밀한 도피처로 변모한다. 숲에서 길을 잃은 5세 자폐 아동 마히토는 운 좋게도 이곳에서 네 명의 성인을 차례로 만난다. 빚에 쫓겨 야심 차게 원시 캠핑 생존 방송으로 재기를 노리지만 라이터조차 없이 허덕이는 다쿠마, 야쿠자 조직의 상납금을 훔쳐 달아나며 짐승처럼 숲에 몸을 숨기는 다니시마, 소중한 인형의 무덤을 만든다는 기괴한 거짓말로 아이의 입을 막으려는 미나, 그리고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자살을 시도하는 중등 교사 사토미가 그들이다. 이들은 우연히 마주친 마히토에게 마실 것을 주거나 추위를 피하게 해 주며 잠시 돌보았을 뿐, 각자의 안위가 우선이었기에 끝내 아이를 집, 수색대에 돌려보내지 않는다. 타인의 생명보다 자신의 도피, 생존이 먼저였던 어른들의 비겁함과 이기적이고 잔인한 면모는 자칫 마히토를 영영 실종 상태로 놔둘 뻔한 아찔한 위기를 조장한다. 불안정한 현대인의 위태로운 내면을 투영한 이기적인 선택들은 팽팽한 범죄 스릴러의 묘미를 선사하며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거대한 자연의 조소와 그 속에서 피어난 기적

허나 벼랑 끝에 몰린 어른들이 외면한 연약한 생명을 거두어 구원한 것은 다름 아닌 대자연이었다. 비겁한 인간들과 대비되게 정체불명의 곰 아저씨와 가미모리 숲은 어린아이를 따스하게 돌봐주었고, 덕분에 마히토는 애타게 기다리던 엄마 품으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작가 오기와라 히로시는 범죄 미스터리의 외피를 두르고 있으면서도, 종국에는 오만한 인간성에 대한 경종과 자연의 거대한 섭리를 절묘하게 교직한다.

소설 후반부에 이르러 진상을 조사하는 도야가 숲이 인간들을 조소하고 비웃는 듯한 소리를 듣는다는 묘사는 강렬하고 서늘한 잔상을 남긴다. 거대한 자연의 품속에서 한없이 작고 하찮은 존재일 뿐인 인간의 위선과 어리석음을 통렬하게 꼬집는 것이다. 자폐 스펙트럼(ASD) 아동의 시선을 철저히 객관적이고 담담한 필치로 그려내며 억지스러운 감동을 강요하지 않아 진한 여운을 자아낸다.


서스펜스와 인간 소외, 자연의 비밀에 대한 통찰이 최적의 비율로 배합된 북다 신간 <웃는 숲>은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래도록 반추하게 되는 독서 경험을 선사한다.






#오기와라히로시 #웃는숲 #북다 #신간소설추천 #일본소설추천 #소설리뷰 #책리뷰 #베스트셀러소설 #중앙공론문예상 #독서미터올해의책 #나오키상수상작가 #스릴러소설 #힐링소설 #가족소설 #자폐아동 #생존소설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독서기록 #서평쓰기 #휴일독서 #몰입감좋은책 #인간소외 #어른을위한동화 #소설책추천 #책블로그 #이소담옮김 #신간추천리뷰 #책추천리뷰 #도서추천리뷰 #소설추천리뷰 #북다방 #서평단 #도서제공협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