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들 환상하는 여자들 2
브랜다 로사노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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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싸웠던 전장에는 꽃을 가지고 가야 하는 법이야."

"아이 버섯은 지혜롭습니다. 지혜가 곧 언어이기 때문이지요. 지혜는 몸이 아닌 목소리입니다."


남미 문학의 신경향을 이끌 작가로 손꼽히는 '브렌다 로사노'의 <마녀들>이 은행나무 '환상하는 여자들' 시리즈의 제2권으로 출간되었다.

소설은 오악사카의 후예로서 치유자의 피가 흐르던 '팔로마'가 살해당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팔로마는 가스파르라는 이름의 소년으로 출생한, 사포텍 문화권에서 제3의 성으로 인정받는 '무셰'이다.

일종의 주술적 언어를 통해 길흉화복을 점치고 미래를 예지하는 전통 무속인인 듯하다.


팔로마의 살인 사건을 취재하는 젊은 기자 '조에'와 팔로마의 사촌이자 후계자인 '펠리시아나'가 번갈아 등장하고 또는 마주치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자신 혹은 주위의 여성들이 성장하면서 다양한 폭력에 노출되고, 위험에 처하는 장면이 연이어 묘사된다.


현대적인 도회지 멕시코시티와 호젓한 산골 마을 산펠리페에서 각각의 여성들은 신체적/정신적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딸에게 닥칠 위험을 예지하는 엄마의 기이한 능력 때문에 몇 번의 구사일생을 경험한 조에는 그 비결을 묻는다.

"여자들은 모두 자기 안에 마녀 같은 면을 조금은 품은 채로 태어난단다.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지."


여성들은 무법천지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신비한 능력을 일부 지니고 태어난다. 그 필살기는 후천적으로 습득될 수도 있다. 허나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홀로 생존하기는 불가능하다. 여성들은 연대와 협력을 통해 서로의 무사안녕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단단히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아야만 마녀사냥을 피할 수 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고립되어 반사회적인 이단으로 취급받는 마녀들을 불태우기 위한 제단이 높이 솟아 있다. 활활 불타오르는 화형대를 목전에 두고 여성들은 공동체 의식을 굳게 다지는 한편, 각자의 언어적 능력을 발휘해 연대할 필요가 있다. 마술적인 힘과 집단의식이 깃든 언어는 지혜를 발화시키며, 이를 통해 이질적인 세계와 진영은 조화를 이루고 평안을 되찾을 수 있다. 세대를 넘은 치열한 투쟁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을 때.. 생살이 타드는 고통이 멈추고 잿더미만 남은 전장에 검붉은 꽃무리를 수놓을 수 있는 것이다.


브렌다 로사노의 장편 소설 <마녀들>은 두 여성과 세계가 대립이 아닌, 언어적 치유와 연대를 통해 폭력의 상처를 회복하고 해소하는 이야기를 마술적인 필치로 그린다. 우리는 그녀의 소설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상처가 집단의 언어를 통해 회복되는 주술적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현실 사회의 편견과 무자비한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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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마지막 여름
지안프랑코 칼리가리치 지음, 김현주 옮김 / 잔(도서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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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로마'는 화려하고 북적이는 대도시지만, 그 이면은 황량하고 혼탁한 데다 퇴색되어 가는 그림자가 기울었다. 그 도시에 머무르는 이들은 수많은 군중들에 둘러싸여 정처 없이 표류한다. 그들은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관심과 사랑을 갈망하지만, 도시가 내뿜는 어둑한 그림자에 온몸이 물드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외로움과 고독은 떨어질 수 없는, 그들의 절친이었다.




1973년 첫 출간 이후, 절판과 재출간을 거듭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으로 남은 컬트 소설 <도시의 마지막 여름>이 출간되었다. 알음알음 입소문으로 이어진 명성답게, 로마의 명소를 묘사한 '지안프랑코 칼리가리치'의 문장들은 생동감이 넘치고 정교하기까지 하다. 커플의 애정 행위를 정밀 스케치한 문장들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에로틱하게 들끓는다. 책을 읽다 보면 밀라노에서 로마로 건너온 '레오'가 되어 핀초 언덕의 테라스, 캄포 데이 피오리의 쉼터, 움베르티노 지구 등 한여름 로마의 곳곳을 방랑하듯 거닐 수  있다. 레오는 완벽한 혼자가 아니었다. 로마 상류층에 속하는 어느 부부와 가까이 지냈고, 뜻이 맞아 함께 영화를 제작하려 한 절친 '그라지아노'도 외로움을 달래 주었다. 그와 사랑 비슷한 감정을 나누는 '아리아나' 또한 나비처럼 그의 곁에 머물다 사라짐을 반복하며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번잡한 도시 안에서 무의미하고 공허한 나날을 지속하던 레오는 곁의 모든 이들을 관찰한다. 어떠한 분석이나 냉철한 비판 없이 방관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끝 모를 고독의 중심으로 점차 끌려간다. 가혹한 운명은 무더운 도시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그를 놓치지 않았다. 진심으로 교류하던 그라지아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레오는 도시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 존재의 의미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애써 숨기고 부정하면서 아리아나 곁에 머물려 했던 그는 벼랑 끝으로 자신을 몰고 간다. 헛된 허영심과 사치에 잠식당한 그녀는 결국 레오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다. 레오는 하이에나처럼 타인이 남긴 음식을 먹어치우고, 사랑하는 애인을 독차지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절감하며, 도시에서 버림받고 추방당한 모든 이들을 받아주는 푸른 '바다'를 향해 다가간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영원을 향해 나아갔다.

 



50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이 대중들 사이에서 망각되지 않고 복간되는 데는 어떤 보편적 의미가 숨어있을 것이다. 우리는 각종 SNS로 촘촘히 연결된 인터넷/디지털 AI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레오가 느끼는 고독감과 허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인간관계는 이런 모순을 극대화하며, 무수한 팔로워에 둘러싸여 소외감과 외로움을 면치 못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정량적인 숫자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장기간 고립되어 끝내 고독사할 처지에 몰리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도심의 이면에 깔린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진심 어린 사랑과 우정을 나누지 못하는 '레오'들은 오늘날 대도시 어디에나 존재한다. 돛을 올리고 나아가야 할 뚜렷한 목적지 없이 떠도는 이들.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존재 의미를 숙고하지 않은 채, 부유하는 이들이 여러 도시에 남아있는 한, 이 책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보편성을 획득할 것이다. <도시의 마지막 여름>이 시대를 관통하는 영원한 고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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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김종철 지음 / 삼인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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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출판사 개정증보판 출간, 김종철 비평집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은 근대 산업 문명의 폭력성을 꿰뚫어 보고 생명 중심의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사진 속 표지에 명시된 것처럼 이 책은 녹색평론사에서 초판 출간되었다. 1999년 증보판이 제7회 대산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하며 한국 문학계에 묵직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 책은 단순한 비평서를 넘어 생태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필독서로 꼽힌다. 인간, 흙, 상상력이라는 부제처럼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자연과 분리된 채 병들어가는 우리의 삶을 반성하고 문학이 지닌 원초적 생명력을 되살려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다.


저자 김종철은 1947년 경남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영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실천적 사상가다. 1991년 격월간지 <녹색평론>을 창간하며 한국 사회에 생태 사상을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게 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2020년 타계하기 전까지 그는 문학이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지적 유희로 전락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생전 여러 대담과 인터뷰에서 그는 끝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 성장 논리와 결별하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고 일갈했다. 그의 문체는 현학적인 수사를 철저히 배제하고 삶의 본질을 직시하는 단호함을 지녔다. 학자의 안전한 서재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생명 파괴의 현장을 응시했던 그의 치열한 생애가 글 곳곳에 짙게 배어 있다.



정보가 범람하고 AI가 인간의 사유마저 대신하려 드는 오늘날 우리는 참으로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효율성과 속도만을 맹신하는 사이.. 흙의 냄새를 맡고 바람의 결을 느끼는 감각이 무참히 마비되었다. 알고리즘이 쉴 새 없이 쏟아내는 파편화된 지식에 길들여진 현대인은 삶의 총체성을 상실한 채 이리저리 부유한다.


타인의 고통은 화면 속의 자극적인 숫자로 치환되고, 산천의 파괴는 나와 무관한 일회성 기사로 소비된다. 저자가 그토록 경계했던 정신적 불구화와 지적 빈곤이 바로 지금 우리의 삭막한 일상이 되어버린 셈이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 김종철이 제시하는 생태적 사유와 시적 감수성의 세계는 서늘한 깨달음을 준다.


'생태적 사유'란 만물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으로 이어져 있다는 뼈저린 자각이다.

'시적 감수성'은 나무 한 그루가 베어질 때 내 살이 베이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깊은 공감 능력이다.

그는 시적 사고방식이야말로 파편화된 모든 생명을 하나로 묶어내는 본질적인 힘이라고 역설한다. 시는 얄팍한 기교의 산물이 아니라 생명 공동체의 회복을 꿈꾸는 영혼의 절실한 기도다. 자본의 탐욕에 포섭되지 않고 자연의 순리에 맞춰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들 모두가 이 시대의 진정한 시인이다.


이 시대의 진정한 시적 인간이자 이야기꾼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구체적인 사유와 행동의 변화를 일궈내야 한다. 천민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끊임없는 소비와 경쟁의 쳇바퀴에서 과감히 내려와야 한다. 흙을 만지고 생명을 돌보는 소박한 노동의 가치를 삶의 중심에 두는 태도가 필요하다. 텃밭을 일구거나 지역 공동체와 연대하며 자립적인 삶의 기반을 다지는 작은 실천이 우리를 흙과 다시 연결하고 소통케 한다. 타인의 고통과 자연의 훼손을 무감각하게 넘기지 않고 기꺼이 함께 아파하는 공감 능력을 길러야 한다.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지워진 옛이야기들을 복원하고 단절된 이웃, 세대를 잇는 따뜻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김종철 문학평론가의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은 단순한 문학 비평서를 넘어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현대 문명에 울리는 절박한 경종이다. 그는 문학이 지닌 본연의 치유력과 상상력을 통해 메마른 대지를 적시고 파괴된 생태계를 복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자본과 권력의 횡포에 짓눌린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잊혀가는 생명의 논리를 되살리는 작업은 비평가 김종철이 평생을 바쳐 일궈낸 숭고한 성취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단순히 문학 작품을 해석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이윤과 효율의 맹신이 초래한 기후 위기와 인간 소외의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해야 할 잃어버린 감수성의 뿌리를 마주하게 된다.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찰나의 아픔에 공명하는 시적 상상력과 내가 디딘 흙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끼는 생태적 감각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적 진실이다. 성장주의의 환상에서 깨어나 일상의 우애를 실천하고 생명의 속도에 맞춰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결단이 절실하다. 이 책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인류가 기댈 수 있는 가장 따뜻하고 단호한 사상적 이정표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책 속의 문장들은 이 위대한 사상가의 뜨거운 숨결을 고스란히 전한다.


"나무 한 그루가 상처를 입으면 자기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고통을 같이하는 감수성이 중요합니다."


"이야기꾼의 능력도 필경 하나의 재능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재능이 순전히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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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엔 똥을, 한 손엔 소원을: 소네트집
다이앤 수스 지음, 황유원 옮김 / 김영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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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사 신간, 다이앤 수스의 시집 <한 손엔 똥을, 한 손엔 소원을: 소네트집>은 미국 미시간주 시골 마을에서의 빈곤했던 유년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 마약에 중독된 아들과 그의 연인, 펑크 록에 심취했던 뉴욕에서의 혼란스러운 방황 등 시인 자신이 통과해 온 굴곡진 생애를 14행의 소네트 형식에 날것 그대로 담아낸 묵직한 자전적 텍스트다. 엄격하고 정형화된 소네트 형식을 파괴하며 현대인의 난해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가장 솔직하게 기록한 이 시집은 올해의 압도적인 문학적 성취로 극찬할 만하다. 출간 직후 2022년 퓰리처상을 비롯해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도서상 펜/뵐커 시문학상 등 권위 있는 미국 주요 문학상을 동시에 휩쓰는 기염을 토하며 평단과 대중의 뜨거운 지지를 증명했다. 표지에 적힌 인간의 언어로 쓴 짐승 같은 이야기라는 강렬한 수식어처럼 거칠고 파괴적인 언어의 물결이 시종일관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찌른다.


1956년 인디애나주에서 태어나 미시간주 소도시와 시골 변방에서 성장한 다이앤 수스는 오랜 기간 캘러머주대학과 웨스턴미시간대학교 등에서 시 창작과 문학을 가르쳤으며 지역 사회정신 건강 상담가로 일한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1998년 첫 시집 <너를 텅 비워버리는 것>을 출간한 이후 주니퍼 시문학상을 수상한 <늑대 호수, 바람에 젖혀진 하얀 가운>과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네 개의 다리를 가진 소녀> 등 총 여섯 권의 시집을 펴내며 미국 문단에서 확고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그녀는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서 자신이 겪은 지독한 가난과 지속적인 상실의 경험이 모든 시적 기원이라고 밝혔다. 억압받고 소외된 계급의 목소리를 문학적으로 해방시키기 위해 가장 보수적이고 백인 남성 중심적인 시 형식인 소네트를 의도적으로 차용하고 비틀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문학적 스타일은 얌전하고 정제된 우아함에 머무는 대신 온갖 비속어와 일상어를 거침없이 섞어 쓰는 대담한 파격성에 기초한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다이앤 수스의 이번 초역 시집은 현대 미국 문단에서 가장 야생적이고 생생한 에너지를 지닌 작품으로서 깊은 문학사적 의미를 지닌다. 서구 문학사에서 '소네트'는 셰익스피어 시대부터 줄곧 귀족적인 낭만이나 이상화된 사랑을 읊는 고상한 지식인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다이앤 수스는 이 고결한 형식을 흙먼지가 날리는 시골 바닥으로 사정없이 끌어내려 가난 질병 마약 죽음이라는 비루하고 질척이는 현실을 담아내는 파격적인 그릇으로 개조해 버렸다. 주류 문학에서 철저히 소외된 변방의 삶을 여과 없는 거친 언어로 고백하면서도 고도로 직조된 문학적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는 점이 다이앤 수스가 오늘날 현대 미국 문단에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핵심 이유다. 시인은 삶의 고통을 섣불리 위로하거나 가짜 희망으로 미화하려는 얄팍한 시도를 철저히 거부한다. 우리는 시집 전체를 무겁게 관통하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도 맹렬하게 박동하는 뜨거운 생명력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다이앤 수스의 짐승 같은 고백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책을 덮고 나서도 뇌리에 깊이 박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서늘하고 아프도록 아름다운 시구절들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직사각형 안에서 자랐다> 소네트의 서두를 보자.


"나는 직사각형 안에서 자랐다. 알루미늄, 직사각형 장난감 상자가 있었다. 붉은색의. 때때로 나는 장난감을 끄집어내고 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37p


위 시구는 시인이 갇혀 지내야 했던 숨 막히게 가난하고 폐쇄적인 유년의 물리적 심리적 공간을 놀라울 정도로 감각적으로 묘사한다.

표제작의 결정적인 모티브가 된 통찰 어린 아래 구절은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시인의 철학을 가장 명확하게 대변한다.


"소네트는 가난처럼, 없이도 살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 어머니의 말대로라면, 한 손에는 소원을 쥐고 다른 손에는 똥을 쥐는 거다."

131p


이 단호한 삶의 선언은 가장 비참하고 절망적인 바닥의 현실 속에서도 결코 내일을 향한 소원을 완전히 놓지 않으려는 질긴 생의 의지이자 자신의 근원인 그 부조리한 진흙탕을 기꺼이 끌어안고 가겠다는 처절하고 위대한 긍정이다.


<한 손엔 똥을, 한 손엔 소원을>.. 보라! 제목부터 범상치가 않다. 수록된 시 제목들만 훑어봐도 강렬한 아우라를 뿜는다. 보수적인 한국의 공중파에서 이 시들을 낭독했다면 삐~ 소리로 묵음 처리되었을 시구들이 한둘이 아니니..


각설하고..

이 시집은 고통으로 얼룩진 한 인간의 삶이 철저한 고백을 통해 어떻게 가장 빛나는 예술적 성취이자 날카로운 무기가 될 수 있는지 증명하는 완벽한 사례다. 황유원 시인의 유려하고 밀도 높은 번역은 원작 특유의 파괴적인 리듬 & 거친 질감을 조금의 훼손도 없이 생생한 한국어로 재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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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인류학 - 신화와 문화로 살펴보는 죽음과 삶의 풍경
이경덕 지음 / 원더박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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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박스 출판사 신간, 이경덕 지음 <죽음의 인류학>은 신화와 문화라는 렌즈를 통해 인류가 10만 년 동안 쌓아온 죽음과 삶의 풍경을 내밀하게 조망하는 인문 교양서다. 이 책은 현대 사회에서 금기시되거나 병실 어둠으로 밀려난 죽음을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끌어와 존엄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네안데르탈인의 무덤에서 발견된 꽃의 흔적부터 티베트의 천장 의례에 이르기까지 산 자와 죽은 자가 이별을 감당하는 방식을 방대한 역사적 사료와 신화로 풀어낸다.


저자 이경덕은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인류의 신화와 의례를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은 저명한 신화 연구가이자 문화 인류학자다. <0시의 고대 인류 탐험>, <새롭게 만나는 한국 신화>, <나는 스타벅스에서 그리스 신화를 마신다> 등의 전작에서 알 수 있듯 고고하고 난해한 인문학의 영역을 대중의 일상적인 눈높이로 번역하는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지녔다. 평소 저자는 죽음을 다루려고 의도한 궁극적인 이유는 결국 삶을 돌아보고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함이라고 단호하게 밝혔다. 죽음을 단순한 생물학적 종말이 아닌 산 자들의 문화를 지탱하는 거대한 상징체계로 해석하는 그의 독창적인 학문적 스타일이 이번 신간의 텍스트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나이가 들고 주변의 지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죽음'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막연한 관념이 아닌 묵직한 현실로 다가온다. 40대 후반, 상실의 아픔을 겪어내야 하는 시기에 펼쳐 든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를 걷어내고 이를 생명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철학적 위안을 안겨준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동아시아인들에게 익숙한 염라대왕은 본래 인도의 죽음 신 야마에서 유래했으며 이승의 관료적 권력 구조가 저승의 심판관 이미지에 고스란히 투영된 흥미로운 결과물이다. 육신을 해체해 독수리 같은 새들에게 내어주는 티베트의 조장 풍습 역시 미개하거나 잔혹한 행위가 아니라 대자연으로 몸을 돌려보내려는 숭고한 생태적 순환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여러 문화권의 장례와 신화를 교차로 살펴보면 죽음의 풍경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결국 남겨진 산 자들의 몫임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동아시아 사회를 지배해 온 조상숭배 의례조차 죽은 자를 위한 맹목적인 종교적 헌신을 넘어 살아있는 후손들이 자신의 뿌리를 연장하고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치밀한 문화 장치였다.


사후세계와 영생에 대한 인류의 오랜 갈망 역시 매서운 인문학적 분석 앞에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입는다. 수메르 신화의 영웅 길가메시는 영원한 생명을 찾아 험난한 모험을 떠났으나 인간은 유한한 존재임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현재의 삶을 즐기는 지혜를 안고 귀환했다. 산꼭대기로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지는 영원한 삶이 결코 축복이 아니라 자아를 파괴하는 끔찍한 형벌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참된 구원과 천국은 죽음 너머의 미지의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한함을 명확히 인지하고 오늘 하루를 충만하게 살아내는 태도 자체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멕시코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시인 겸 수필가 옥타비오 파스는 멕시코인의 정체성과 죽음관을 치열하게 탐구한 문인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평정심을 찾는 삶을 역설했다. 서두에 인용된 옥타비오 파스의 "죽음을 부인하는 문명은 결국 삶마저 부인하는 것으로 끝난다"라는 묵직한 문장과 에피쿠로스의 "우리들이 착실한 삶을 보낸다면 그것은 반드시 훌륭한 죽음으로 이어진다"라는 통찰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다.

현대 사회는 죽음을 병원 영안실이나 요양원 깊숙한 곳으로 은폐하며 삶과 철저히 분리하려 애쓴다. 파스의 경고처럼 죽음을 일상에서 지워버린 현대인은 삶의 유한함을 망각한 채 무의미한 욕망에 휘둘린다.


책 속의 수많은 장례 의례와 신화가 증명하듯 인류는 오랜 시간 죽음을 삶의 연장선으로 껴안으며 역설적으로 생의 활력을 얻었다. 에피쿠로스의 철학 역시 죽음 자체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얼마나 충실하고 도덕적으로 채워갈 것인지 엄중히 묻는다. 두 사상가의 문장은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경계선이 존재하기에 비로소 지금 이 순간의 삶이 찬란한 의미를 지니며 현명한 삶은 피할 수 없는 종말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 완성된다는 저자의 철학과 완벽하게 공명한다.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낭비하는 대신.. 언젠가 맞이할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다정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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