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교수. 그는 평생을 디아스포라, 즉 이방인과 소수자의 영토에서 살았다. 어느 국적이나 집단에 명확히 소속되지 않은 채, 내부도 외부도 아닌 경계선을 방랑하며 한국과 세계정세를 주시했다. 1951년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전쟁으로 황폐화된 한국의 재건 과정을 낱낱이 지켜본 그는 군홧발에 짓밟힌 모국이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을지는 꿈에도 몰랐으리라. 70년대 군부에 의해 조작된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두 친형이 구속되자, 그는 전 세계에 부당함을 호소하고 형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을 견제하고 가족들의 무고를 증명할 만한 세계 각지의 인권/시민/종교 단체, 민주화 인사 등과 소통하며 유랑하던 중, 그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최전방이자 다양한 인종/문화가 뒤섞인 용광로와 같은 미국에 발을 들이는데..




세월이 흘러 그는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던 판데믹 시기에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을 집필하면서 친형들의 구명 활동을 펼치던 1980년대를 회상한다. 낯선 이국의 땅에 도착한 그는 서투른 영어 실력을 자각하는, 고립되고 소외된 이방인에 불과했다.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몇몇 인권 단체들과 구호 운동 관계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서경식 교수와 수많은 저서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구명 운동을 펼치는 틈틈이 그는 가까운 미술관에 들러 거장들의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위안을 받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용기를 얻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암울했던 시기를 견디게 했던 '선한 아메리카'의 기운에 대해 말한다. 부당하게 차별 당하고 소외된 자들을 포용하고, 그들의 숨은 이야기를 경청하던 당시의 자유분방한 아메리카를 떠올린다. 겉으로 보기에 미국은 변화무쌍한 혼돈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는 듯하지만, 그 복잡성과 다양성이 '아메리카'라는 거인을 일으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허나 현재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동향은 어떠한가? 소수자와 이민자들을 공개적으로 배척하고, 판데믹 시절 수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내몰았던 '트럼프'는 백악관에 다시 입성하기 위해 행보가 분주하다. 러시아는 침공한 우크라이나에서 철군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이스라엘과 반 유대국 간의 국지전과 마찰은 격화되는 상황이다. 서경식 교수는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로부터 멀어져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 우려하고 걱정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필리핀과 캄보디아, 미얀마의 학살 등 잔악한 적대 행위가 반복되고 재현되는 최근 세계정세에 대해 진부하게 느끼는 우리의 둔감한 감정에 대해 경고한다. 일찍이 그는 자신을 '어두운 탄광 속에 갇혀 질식해 가는 카나리아'라 표현하며, 평생을 소수자의 처지에서 방랑한 디아스포라의 예민한 감수성을 드러낸 바 있다.



그가 존경했던 세기의 현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과 유대 민족의 가시 돋친 경계를 허물고, 세계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만 2003년 9월 세상을 떠났다. 인간 그 자체에 절망하지 않으려 한 줄기 희망을 놓지 않은 서경식 교수는 지난 2023년 12월 고인이 되었다. 우리는 성큼 다가온 전 세계적 비극과 절망에 대해 경고해 줄 날카롭고 명민한 카나리아들을 하나둘씩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과연 지금 걸어가는 이 길이 앞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유토피아로 인도하는 과정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갈수록 짙어지는 어둠과 안갯속을 헤매면서, 아우성치고 서로에게 주먹과 칼을 휘두르고 있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

#나의미국인문기행 #디아스포라기행 #이방인 #방랑자 #신작추천 #반비출판사 #서경식교수 #에드워드사이드 #유작 #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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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료시카의 밤
아쓰카와 다쓰미 지음, 이재원 옮김 / 리드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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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쓰가와 다쓰미의 두 번째 미스터리 단편집이 출간되었다. 제목은 <마트료시카의 밤>.

책의 말미 작가 후기에서 소개한 기본 방침대로.. 네 개의 단편은 다양하고 파격적인 구성과 형식으로 짜이되 그 골격은 허술하지 않은, 치밀한 본격 미스터리를 지향한다. 또한 암울한 코로나 시대를 배경으로 삼기에 진지하고 딱딱한 내용보다는 유머러스하고 익살스러운 상황을 그리려 애를 썼다. 


서두를 여는 첫 단편부터 독자의 틀에 갇힌 상식과 예측을 사정없이 부수고 비틀어 버린다. 

내 이름은 아쓰가와 다쓰미.. 난 흔해 빠진, 식상한 미스터리 작가가 아니야. 동서고금의 미스터리 고전과 최신작을 고루 섭렵하고 파격적인 작품을 선보인, 기존 작가와 궤를 달리하는 천재 미스터리 작가라고! 이렇게 소리 높여 외치고 선언하는 듯하다. 건조한 하드보일드 탐정물로 운을 떼는 <위험한 탐정>은 고서점 미스터리 물로 흐르는 듯하더니, 중반 이후 일대 반전이 휘몰아치며 독자의 멍한 정신을 흔들어 일깨운다. 이거 이거,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데.. 비스듬히 앉은 자세를 바로 하고 미간에 힘을 주어 집중할 수밖에 없더라.


이어지는 단편은 브리콜라주 형식으로 짜였다. 미스터리 퍼즐을 풀어야 하는 대학 입시를 기획한 담당자들, 기자, 교수, 학생, 학원 전문가, 블로거, 인플루언서 등이 총출동하여 다양한 의견을 쏟아낸다. 한바탕 난장이 펼쳐진 듯하다. 판데믹 시절 줌(Zoom)을 통해 온라인 생일 파티를 하던 중, 친구가 살해됐다.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파행적인 대입 출제 지문이 제시되고, 이를 풀이하는 각계의 의견이 이어지며 독자의 흥미를 돋운다. 좀비 아포칼립스 물의 신경지를 개척한 맥스 브룩스의 <세계대전Z>와 비슷한 형식으로, 이전 미스터리 소설의 틀을 깨는 대담한 시도를 꾀했다고 평하고 싶다. 




장편보다는 단편에 최적화된 저자의 능수능란한 테크닉은 표제작에서 잘 드러난다. 연극적인 구성의 미스터리 단막극을 연출하면서, 치밀한 논리와 텐션을 시종일관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무대 위에서 심리전을 펼치는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다가는, 이쯤이면 결말이 드러나겠지 하는 시점을 노려 반전에 반전을 거듭 선보인다. 심지어 액자 구성을 통해 이야기 속 이야기를 끌어내며, 무한 증식하는 미스터리 물의 '마트료시카 인형'을 꿈꾼다. 이쯤 되면 시공간을 무너뜨리는 평행 우주에서 동일한 범행이 일어나고 범인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만큼 아쓰가와 다쓰미의 수시로 바뀌는 공수 페이스 전환 속에서 팽팽한 서스펜스와 독자를 납득케 하는 필연성을 유지하는 입담과 필력은 대단하다고 평할 수밖에 없다. 저자의 밀도 높은 미스터리 단편은 Joseph L. Mankiewicz 감독의 1972년작 <sleuth 발자국> 또는 히치콕 감독의 초기작 <rope>를 보는 듯하다. 실제로 저자는 다수의 미스터리 스릴러 연극과 고전 영화, 애니를 통해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아쉽게도 마지막이다. 낯설고 생경한 프로레슬링 오타쿠의 세계에 빠져야 한다. 소싯적 '타이거 마스크'와 박치기 기술로 이름을 떨친 '김일' 선수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그니처 마스크를 눌러쓴 레슬러들과 링 아나운서가 모인 가운데 동료 선수가 외부에서 살해됐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그들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과 틈을 파고드는 대화, 인서트로 삽입된 실제 레슬링 장면 묘사가 코믹하면서도 긴장감이 넘친다. 궁금한 이들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마트료시카의 밤>을 펼치기 바란다. 더불어 아쓰카와 다쓰미의 첫 단편집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도 관심작 리스트에 올리길 추천한다. 미스터리 물 영토에 인상적인 발자국을 새긴 저자의 뒤를 쫓는 것만으로, 근사한 독서 경험과 번득이는 영감을 선사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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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컬렉터 - 집과 예술, 소통하는 아트 컬렉션
김지은 지음 / 아트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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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컬렉터들에게, <디어 컬렉터>. 500 페이지를 훌쩍 넘는 두툼한 양장본이다. 양손에 쥐어 보면 저자가 '벽돌 책'이라 표현한 것이 이해가 된다. 페이지를 넘기면 주옥과 같은 현대 예술 작품들이 질서정연하게 지면에 전시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김지은 작가. MBC <뉴스데스크>와 <출발! 비디오 여행> 등을 진행한 아나운서로 그 이름과 얼굴이 익숙하다. 하지만 그녀는 국내외 유명 교육기관에서 예술학/미술 전시 관련 학력을 쌓고, 20년 넘게 다양한 작품을 수집한 컬렉터다. 프롤로그를 살피면 이 책이 엮이어 출간된 배경과 숨은 사연을 알 수 있다.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집안에 격리된 저자는 연락이 닿은 국내외 예술계 지인들에게 안부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메일과 통화가 오가면서, 저자는 그들이 평생 컬렉팅한 작품과 그 안에 숨은 이야기를 공유해 달라고 요청했다.



예술가, 사진작가,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전시공연 기획자 등등, 여러 분야에서 길을 닦은 그들의 폭넓은 취향과 안목은 일상 속 공간을 유니크한 아트 뮤지엄으로 변화시켰다. 페이지를 넘기면 각자의 내밀한 거실, 침실, 복도와 허름한 다용도실까지.. 바스키아, 우아타라 와츠, 호안 미로, 피터 코핀, 양혜규, 이세현, 박서보 등 선호하는 현대 예술가의 작품들과 작가 미상의 소박한 사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공간에 배치된 수백 점의 작품들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우리는 그들의 프라이빗 한 실내 공간에 초대받아 하루 종일 작품들을 감상하는가 하면.. 안락한 거실 암체어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작가와 관련된 에피소드와 작품 해설을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책에 실린 장윤규 건축가의 일갈에 시선이 머무른다.

"사람이 집에 살면서 밥풀때기 하나라도 묻어야 홈(home)이 된다. 집에는 삶의 호흡이 필요하다. 예술 작품도 마찬가지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걸린 작품은 아직 뜸이 안 든 밥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일이고, 누군가의 마음에 감동이 깃들게 할 때 비로소 작품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판데믹 시대 컬렉터들의 비밀한 공간에 전시된 컬렉션들은 이 책을 통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그들의 친절하면서 세심한 가이드에 귀 기울이면 유명 아트 뮤지엄의 도슨트 해설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진정한 소유는 경험의 공유" 임을 몸소 실천한 여러 컬렉터들과 오랜 시간 소통을 통해 이를 책으로 엮은 김지은 저자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싶다.




내 서가에는 수십 년간 컬렉팅한 각종 책이나 음반이 가득하다. 하지만 미술 작품들은 관심이 닿지 않아 서고 몇 칸에 자리 잡은 '키스 해링'의 작품들이 고작이다. 가끔 액자에 담긴 그 작품들을 바라볼 때마다 결혼 전 아내와 함께 전시회를 거닐던 그 여유로운 분위기에 젖곤 한다. 고심 끝에 몇몇 팝아트 작품을 품에 안을 때의 설렘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떠오르기도 한다. 

<디어 컬렉터>, 현대 예술 작품들이 집대성된 이 책을 감상하다 보면 내 서고와 벽면을 어떻게 큐레이팅 해야 할지 번득이는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정성스럽게 양장 제본된 이 책을 서고 한 칸에 책등과 표지가 보이도록 꽂는 것만으로도, 안목 높은 탁월한 아트 컬렉션이라 평가받을지도 모른다.



#디어컬렉터 #현대미술 #예술미술아트 #김지은 #작가아나운서 #신간리뷰 #신간소개추천 #일상이뮤지엄 #문학동네 #아트북스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벽돌책? #평생소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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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체는 국가 기밀, 모쪼록 비밀 문학동네 청소년 68
문이소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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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히치하이커>, <다꾸의 날> 등, 기발하고 유쾌한 과학 소설을 선보인 문이소 작가.

그녀가 청소년을 위한 SF 소설집으로 우리 곁에 다시 찾아왔다. 책 제목은 <내 정체는 국가기밀, 모쪼록 비밀> 이다. 파격적인 제목만큼 블루 톤의 표지 디자인 또한 참신하고 아기자기하다. 페이지를 펼치면 5개 에피소드의 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소녀 농부 깡지와 웜홀 라이더와 첫사랑 각성자>

<젤리의 경배>

<유영의 촉감>

<이토록 좋은 날, 오늘의 주인공은>

<봉지 기사와 대걸레 마녀의 황홀한 우울경>



웹 소설 목차를 보는 듯한 제목만 보면 그 내용을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마치 내부가 단단히 봉인된, 국가기밀 자료가 가득한 보안 캐비닛 앞에 선 듯하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겨 차근차근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히죽, 웃음이 터진다. 미래 평행 지구에서 건너온 웜홀 라이더에게 현재의 맛돌이 요리를 선보이는 장면에선 절로 군침이 넘어간다. 한 예술가의 디지털 작품을 스토킹하는 인공지능 AI의 덕질은 단순한 팬심을 넘어 일종의 애정 행위처럼 보인다. 읽다 보면 허무맹랑하지만은 않은, 머지않은 미래에 이런 AI 스토커가 출현할 수도 있겠다,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재기 발랄한 문이소 작가의 문장은 거칠 것이 없다. 독자가 미처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워프한 작가의 상상력은 평행 우주 어딘가로 우리를 데려간다. 허나 SF 소설이라 해서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곁에 머무르고 스치는 인연들, 이를테면 표고 농사를 짓는 언니네 가족들, 몇 년째 놀이터를 지키는 검은 길냥이, 요양원에서 함께 정을 나누었던 할머니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이야기를 써냈다고 고백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 이르면 아기 고양이를 납치한 대걸레 마녀의 소굴에 침투하려 하는 봉지 기사가 등장한다. 좌충우돌 실수 연발과 신경전 끝에, 결이 비슷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그들은 의기투합하여 고양이를 돌보기 시작한다. 작가는 삭막하고 황량해 보이는 세상 곳곳에는, 다정한 마음이 숨어 싹트고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려 한다. 은밀하게 감추기에 급급한, 국가 기밀과 같은 소소한 각자의 속마음이 모이고 연대한다면, 각박한 세상은 보다 명랑하고 따스해질 거라고.. 그 비밀을 우리 귓가에 속삭인다. 우리는 그녀의 진심 어린, 솔직한 입담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내정체는국가기밀모쪼록비밀 #문학동네 #문이소 #낭만채집가 #SF소설 #국가기밀서평단 #신간리뷰 #신간추천 #마지막히치하이커 #다꾸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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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푸른숲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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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불상, 1급 살인, 피해자: 아나 사르다, 17세

아르헨티나 아드로게 지역에서 끔찍한 시신 토막/소각 살인이 벌어진지 어느새 30년이 흘렀다.

사르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가장이자 아버지 알프레도는 막내딸 살인 사건의 내막을 파헤치기 위해 평생토록 동분서주했다. 그는 말기 암 투병 중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인 사건의 비밀이 담긴 편지를 둘째 리아와 손자 마테오에게 각각 남기는데..



보르헤스 이후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 출간된 아르헨티나의 대표 작가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작품이 푸른숲에서 출간됐다. 한글판 제목은 <신을 죽인 여자들>. 도전적인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앞표지 또한 범상치 않다. 띠지를 제거하면 강렬한 레드 컬러를 배경으로 양 갈래 땋은 머리가 분리된 여성의 실루엣이 상하로 드러난다. 책 내용을 압축하고 꿰뚫는, 절묘하면서 파격적인 표지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책을 펼쳐 읽어보자. 주요 인물들이 순차적으로 전면에 등장하면서, 화자와 시점이 바뀌고 서사가 흘러간다.

리아를 내세운 서두부터 심상치 않다. 참혹하게 죽은 여동생의 장례식장에서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당당히 밝히는 리아. 그녀는 수많은 가톨릭 성직자와 신도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자신의 무신론적 신념을 천명한다. 얼마 후 고향을 떠나 순례자들이 오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정착하여 서점을 차린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리아의 서점을 방문하는 큰 언니 카르멘과 형부 훌리오. 불청객처럼 불시에 들이닥친 그들의 방문 목적은 리아의 조카이자 외아들 마테오의 행방을 찾는 것. 뭔가 경직되고 어색해 보이는 카르멘과 훌리오는 종교적 편견과 맹신을 얼핏 드러내며 리아와 껄그러운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어느 날 리아는 아버지의 편지를 손에 든 마테오와 마주치게 된다.



이후 리아는 무대에서 퇴장하고 마테오가 등장한다. 그가 무신론자로 거듭난 외조부 알프레도에게 영향을 받아 카르멘과 훌리오의 품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마테오는 부모의 종교적 독선과 광신에 의구심을 품고, 자신의 종교적/정신적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연락을 끊고 리아의 주위를 맴돈다. 이어서 살해당한 아나의 절친이었던 마르셀라의 독백이 터진다. 아나는 자신의 품에 안긴 채 죽었다니.. 충격적인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아나의 생전 마지막 행적을 기억하는 그녀는 친구의 죽음 이후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마르셀라는 의혹투성이인 살인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혼란스러운 언행과 기억 상실 때문에 증인석에 앉지도 못했다.



이후 등장하는 범죄학자 엘메르와 마르셀라, 알프레도의 삼자 회동을 통해 뒤죽박죽 섞인 살인 사건의 조각이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한다. 그들이 그토록 파헤치고 싶었던 사건의 진실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알프레도는 유서로 남긴 비밀 편지를 통해 진실과 대면하지 않은 채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을 거라고 고백하기까지 했다.

책의 후반부는 가해자들의 변명이 페이지를 채우고, 잔혹한 범행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그들이 맹종하는 신이 선사했다는, 위선 가득한 가면과 포도주가 담긴 잔 뒤에 숨어 내뱉는 자기변호가 이어진다.

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형벌을 피하기 위해 신을 방패로 내세운다. 그들이 믿는 신의 의지와 선택에 이끌려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라고, 아나의 죽음 또한 신의 계획에 따른 필연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미성년자인 아나가 최종 결정을 내리고 무책임하게 행동했을 뿐, 그들은 아무 책임이 없다고 강변한다.

은밀한 공간에 숨어 고해성사를 하고 신의 대리자에게 용서를 받은 이상, 자신들이 인간 세상에서 받아야 할 죄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짓을 둘러댄다. 작가가 공들여 묘사하는, 아나의 시신을 토막 내고 그 일부를 불태우는 장면은 잔혹한 고어 영화를 방불케 한다. 가해자들의 광신적 종교관으로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몰아도, 자의적으로 해석된 종교적 관용과 위선, 잣대에 기대어 사건이 유야무야 종결되고 무죄가 선고될 수 있는가? 피해자의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잿더미 속에 파묻혀도 되는 것인가?



작가는 아니라고, 그럴 수는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종교적 편견과 대립 때문에 무고한 자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접경 지역에서 벌어지는 무차별적인 살상과 보복 테러를 지켜보라. 폭탄이 투하된 빌딩 더미에 깔려 숨진 수많은 아이들의 죽음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여성의 자립과 건강을 위해 필요한, 임신 중지에 대한 권리는 종교적 독선에 의해 음지로 내몰리고 묵살되고 있다. 대다수 종교인들이 바라는 대로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면, 심판대에 자리한 신은 무고한 자들을 학대하고 고통과 죽음으로 내몬 광신도들을 너그러이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물음을 곱씹어 되묻고, 신중히 대답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신을 죽인 여자들>을 통해 다양한 관점에서 종교인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신념을 분석한다. 그 결과 무신론자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어느 신이 내민 성배를 받아들어 허울뿐인 술잔 그림자에 숨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찬란한 대성당을 지어 그 안에 은거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독립자들을 향해.. 당신들은 어리석거나 무지하거나, 고립된 혼자가 아니라고 적극 옹호한다. 고유하고 독자적인 대성당을 창조한,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예술적 영혼의 힘을 믿으라고 용기를 불어넣는다.



이 책의 원작 제목은 <Catedrales>, 대성당이다. 그렇다, 애서가들이라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이 떠오를 것이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는 그에게서 영향을 받아 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 소설의 틀에서 벗어나, 참신하고 파격적인 문학적 시도를 통해 금기시하는 주제를 드러내고 이를 다각적으로 분석하려 했다. 한 소녀가 종교적 가스라이팅과 모두의 무관심 속에 처참히 짓밟히는 과정을 다양한 캐릭터의 관점에서 서술함으로써, 고통스러운 진실을 독자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책은 2021년 대실해밋상을 만장일치로 수상하고, 아마존 평점 4.4점을 기록하여 평단과 대중의 관심을 모두 사로잡았다.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 책을 읽고 영화화를 하고 싶다는 욕심을 내비쳤다. 그의 영원한 페르소나 '페넬로페 크루즈'가 자신의 종교관에 사로잡힌 광적인 가해자를 연기한다면 어울릴 듯하다. 아울러 중년의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성적 욕구를 주체하지 못해 타락하는, 우유부단한 성직자를 연기한다면 영화의 구색이 얼추 맞춰질 듯한데.. 소설과 영화를 모두 애정하는 내 억측이라 치부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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