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삶은 흐른다 (특별판 트레싱지 에디션) - 삶의 지표가 필요한 당신에게 바다가 건네는 말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이주영 옮김 / FIKA(피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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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바다 곁에 머물고 싶다. 보드라운 해변에 앉아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잔잔해진다. 가까이 코발트빛 바다에서 물장구치고 헤엄치는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때로는 풍덩, 뛰어들어 더위를 식히곤 한다. 하지만 바다 저 멀리, 수평선 가까이 바짝 다가가는 건 두려워진다. 헤엄쳐서 가는 건 엄두도 안 나고 요트나 배를 타고 간다 해도 먼 거리 항해는 갈수록 삼가는 마음이 더해진다.

바다는 예측불허, 변화무쌍한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을 품고 있다. 파도는 오르막이 있는가 하면 곧이어 내리막이 찾아와 짜릿한 스릴과 공평함을 선사한다. 바다는 우리네 삶과 닮았다. 혹자는 산이 인간의 생을 닮았다 하지만, 바다는 삶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 있고 완벽함을 지향한다. 그간 바다에 대해 막연하게 품고 있던 생각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여 정리한 책이 있다.

프랑스 최고의 철학자 로랑스 드빌레르의 <모든 삶은 흐른다>. 이번에 10만 부, 50쇄 기념 리커버 트레싱지 에디션이 새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바다와 인간의 삶의 관계를 돌아보고, 철학적인 사유를 통해 그 의미를 알기 쉽게 풀어냈다. 바다에서 마주치는 밀물과 썰물, 섬, 등대, 방파제, 빙하 등을 주제로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공감 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로랑스 드빌레르의 <모든 삶은 흐른다> 10만 부, 50쇄 기념 리커버 트레싱지 에디션

어릴 적 어느 잡지를 뒤적이다 시선이 머무른 사진이 있다. 어느 젊은 부부가 망연히 바다를 바라보는 흑백 사진. 최근 검색을 통해 바다에 뛰어들려는 남편을 제지하는 아이 엄마의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1954년 4월 2일, LA Times의 사진 기자 John Gaunt 가 Hermosa Beach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는 <바닷가의 비극>이라 명명된 이 사진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사진이 품은 사연은 당혹스럽고 잔인하기 그지없다. 


* 관련 링크>>

https://rarehistoricalphotos.com/tragedy-by-the-sea-backstory/



부부의 19개월 된 아기는 해변에서 모래 놀이 중이었다. 찰싹이는 파도가 모래를 적시는 가운데, 갑자기 돌풍이 불었는지 아니면 인접한 물살이 뒤엉켜 소용돌이쳤는지.. 거센 파도가 아이를 덮쳤다. 가까이 서서 지켜보던 부부가 미처 구할 새도 없이 아이는 파도에 휩쓸려 그들 시야에서 사라졌다. 닥쳐온 비극에 발을 동동거리고 입을 막은 부부는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주변에 구조를 요청할 인력도 없었고, 금세 평온해진 바다에게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었으니.. 멀리서 보기에 바다는 천국과 같이 반짝이고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가 그 안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알 수 없는 공포심이 짙어진다. 심해는 칠흑과 같이 어두컴컴하고 아득하다. 미지의 불빛이 어른대는가 싶어 다가가면 비죽한 이빨을 드러낸 괴어가 달려들까 섬뜩하다. 휘몰아치는 조류에 휘말리면 아득한 심연이 눈을 뜨고 눈앞에 다가온 '죽음'이 어서 오라 손짓을 한다. 바다는 이처럼 삶과 함께 죽음을 품고 있다. 인간의 어떤 불굴의 노력과 의지도 단숨에 꺾을 만한, 실낱같은 운명을 집어삼킬 바다의 블랙홀은 잠시의 고통을 선사하고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 앞으로 곧장 데려간다. 우리는 바다와 삶의 역경에 직면하여 겸손할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어 원숙해질수록 그 파도에 맞서기보다는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는 것이 순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물침대처럼 잔잔하다가는 포효하며 으르렁대는 변덕스러운 파도에 몸을 맡기고 정처 없이 흐르다 보면 어딘가에 당도할 것이다. 그곳이 온갖 배가 모여드는 찬란한 미항일 수도 있고, 황량한 무인도일 수도 있다. 표류하다가 근처를 지나는 배의 눈에 띄어 구조될 수도 있으리라. 언젠가는 명이 다해 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 수장될 수도 있겠지. 



그 끝이 어떻든 우리는 지금 눈앞에 밀려드는 파도에 몸을 맡겨야 한다.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패기 넘치게 맞설 수도 있지만 그럴수록 숨은 찰 것이고 기력은 빠르게 떨어질 것이다. 우리는 한낱 인간일 뿐이고 삶은 매 순간 다른 파도로 우리를 휘감으며 어딘가로 데려간다. 우리는 너른 바다를 바라보며 마치 우리네 삶을 투영하는 듯한 상념에 젖는다. 로랑스 드빌레르의 <모든 삶은 흐른다>는 바다와 우리 삶에 대한 철학적 혜안을 담고 있다. 


붉은 아치형 창문 너머 푸른 바다가 그려진 책 표지를 덮고 다시금 1954년의 그 바다를 바라본다. 

그 후로 부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자신들 그리고 바다를 끝내 용서할 수 있었을까. 어디든 육지 끝에는 너른 바다가 존재함을, 어디로든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고 좌절하지는 않았을까. 자신의 아이를 집어삼킨 저 바다가 자신들의 삶과 닮았음을 깨닫고, 유유히 흐르는 대로 몸과 마음을 놓아주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했을는지.. 어떻든 흐르는 대로 삶을 살아냈을 그들의 찢어진 마음을 짚어보고 흉터 자욱을 조심스레 더듬어 본다. 




#모든삶은흐른다 #로랑스드빌레르 #서평단 #피카출판사 #바다 #인생 #삶 #철학 #예측불허 #변화무쌍 #파도 #심연 #리커버스페셜에디션 #트레싱지에디션 #바닷가의비극 #신간추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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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우리돌의 들녘 - 국외독립운동 이야기 : 러시아, 네덜란드 편 뭉우리돌 2
김동우 지음 / 수오서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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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우리돌.. 눈을 감고 소리 내어 읽으면서 그 의미와 형태를 상상해 보자. 비죽 모나지 않고 둥글넓적한 돌이 허허벌판 가운데 놓여 있을 것만 같다. 세찬 바람 따라 물 따라 가벼이 굴러다니지 않고 묵직하게 자리를 지킬 것만 같은 바위를 뜻하는 말. 백범 김구 선생은 자신을 '뭉우리돌'이라 칭하고 바위처럼 굳건히 대한 독립을 위해 책무를 다 하리라며, 독립투사들을 탄압하려는 일제 무리들에게 저항했다.


뭉우리돌처럼 강건하게 국외에서 대한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친 이들의 자취를 톺아보는 이가 있다. 사진작가 김동우. 그는 러시아, 중국, 인도, 네덜란드 등 국외에서 고국의 독립을 위해 필사의 투쟁을 펼쳤던 이들의 일생에 사로잡혔다. 인도 뉴델리의 '레드 포트'를 시작으로 멕시코, 쿠바, 미국 땅에 파묻힌 독립투사들의 흔적을 발굴하고 기록한 <뭉우리돌의 바다>를 시작으로.. 러시아 연해주, 연추,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와 네덜란드 헤이그에 흩어진 한인/열사들의 발자취를 쫓아 <뭉우리돌의 들녘>을 새로이 펴냈다.



한반도를 강탈한 일제를 압박하고, 해외 정치/군사 세력들과 협력하기 위해 국외에 활동 근거지를 구축한 독립투사들. 그들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무장한 군대를 조직해 국경에서 전투를 벌이는가 하면, 게릴라 투쟁을 통해 요인을 암살하거나 자금을 탈취하기도 했다. 고종의 명을 받은 이준, 이상설, 이위준 열사는 멀리 헤이그에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려 백방으로 애를 썼다. 허나 기울 대로 기운 국운을 바로 세우지 못해 전 세계의 이목을 끄는데 실패하자 이준 열사는 먼 이국의 땅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헤이그에는 뜻있는 개인의 노력으로 이준 열사 기념관이 존재한다.



저자는 각지에 흩어진 기념비, 묘비와 학살이 자행된 옛 터 등을 순례하며 사진 기록을 남기고 감상에 젖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망각되고 심지어 은폐되는 역사를 되짚어 복원하고, 과거를 떠올려 의미 있는 현재로 소환하는 책무를 다하기 위해 그는 사진을 남긴다. 각각의 이미지에 투쟁 서사를 부여하고, 이를 바라보는 감상을 정겨운 우리말을 최대한 곁들여 기록했다. 해외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증언을 글로 남기고, 일생을 바친 선대의 희생을 기렸다. 양면 페이지 가득 선명한 사진 이미지로 수록된.. 안중근, 우덕순, 이범진, 최재형, 홍범도, 최진동, 김알렉산드라 그리고 투쟁 도중 희생된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기리는 기념비들은 황량한 벌판에 우뚝 서 있었다. 외롭고 쓸쓸해 보이지만 세월의 풍파를 견딘 굳건한 '뭉우리돌'처럼 푸른 하늘을 받들고 서서 고국을 향한, 부릅뜬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세월이 흘러 우리는 국외에 묻힌 그들의 공덕을 잊었을지 몰라도, 그들의 혼백은 여전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연대하지 않고 분열하여 서로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오로지 자본과 개인만을 우선시하는 현 세태에 대해 염려하고 선대의 경험과 가르침을 주려 한다. 김동우 사진작가는 이국의 외딴 불모지에 드문드문 흩어진 과거의 자취를 그러모아 서사를 품은 현재의 이미지로 복원하고 그들의 삶과 역사를 의미 있는 기록으로 남기는데 성공했다.

그의 '뭉우리돌을 찾아서' 프로젝트의 다음 행보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묻힌 독립운동 역사를 다룬다고 한다. 아마도 홍범도 장군의 중앙아시아 이주, 하얼빈으로 향하는 안중근 의사의 발자국이 이어지리라. 시간의 풍파에 밀려 잊히고, 미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독립운동 역사가 수록될 것이다. 저자의 명민한 눈과 손에 의해 갈수록 마모되고 스러지는 국외 독립투쟁 역사가 선명히 재생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G마켓도서서평단 #뭉우리돌의들녘 #김동우사진작가 #G마켓도서 #수오서재 #신간추천리뷰 #국외독립운동 #러시아네덜란드 #블라디보스토크 #헤이그특사 #안중근의사 #홍범도장군 #이준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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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재나 마르틴 베크 시리즈 1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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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예타 운하 보렌스훌트 갑문에서 준설 작업을 하던 중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잔인한 폭행 흔적이 역력한 그녀의 신원과 단서, 용의자를 찾기 위해 스웨덴 경찰들은 분주히 움직인다. 하지만 수사에 별다른 진척이 보이지를 않는다. 스웨덴 최고의 형사 '마르틴 베크'가 수사팀에 가세하고, 그는 콜베리, 멜란데르, 라르손 등 유능한 동료들과 함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어느 날 미국 네브래스카 현지 경찰과 연락이 닿으면서 피해자와 용의자의 신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바닥을 모르는 인내심, 논리적이고 냉철한 두뇌를 갖추었지만, 신체적/지능적으로 특출나지 않은 평범한 경찰인 마르틴 베크는 온갖 난관에 봉착한다. 과연 그는 한 여성을 무참히 살해한 용의자를 체포해 자백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인가?




1965년 첫 출간된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국내에서 열 편으로 완간되었다. 스웨덴의 작가 커플인 마이 셰발페르 발뢰가 번갈아 원고를 쓰며 공동 저작한 '마르틴 베크' 시리즈. 그 시작을 알린 <로재나>는 밀실과 탐정, 수수께끼 풀이에 갇혀 있던 스릴러 소설을 스웨덴의 운하와 거리를 헤매는 경찰들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일대 변혁을 이루었다. 시리즈에서 주연으로 등장하는 마르틴 베크는 셜록 홈스처럼 단번에 문제를 해결하는 압도적인 지능을 자랑하거나, 악당들을 박살 내는 괴물 같은 피지컬을 지닌 캐릭터가 아니다. 반대로 그는 험난하고 지지부진한 수사 진도에 낙담하고 괴로워하며 체력적으로 한계에 부딪힌다. 60년 대 인터넷과 무선 통신, DNA 과학 수사가 도입되기 이전, 발품을 팔아 주변인 심문에 증거 채취를 하고, 각지로 수사 협력 전보를 날리는 그 시대 경찰들.

마르틴 베크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다. 연달아 밤을 새워 탐문에 미행을 하다가 감기 몸살에 시달리고, 그의 부인은 언제 집에 돌아오냐고 성화를 부린다. 그는 교살 사건을 멋지게 해결하고 가정에도 충실하고 싶지만, 구시대의 경찰 체제에 갇힌 평범한 인간에게는 힘에 벅찬 희망 사항일 뿐이다.



마이 셰발 & 페르 발뢰는 장기간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경력을 살려 사실적인 경찰 소설을 선보이기로 결심했다. 당시의 스웨덴 운하와 거리의 모습, 그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인물들의 행태를 세밀히 그렸다. 실제 수사 현장과 흡사하게,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하는 초동 수사마저 힘겹기만 하다. 증거는 수집되지 않고 목격자와 제보는 낌새도 없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무수한 시행착오, 일정 시간과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멀리 미국 경찰과 인터폴, 내부 동료들의 긴밀한 협조를 바탕으로 베일에 가려진 용의자는 희미한 실루엣을 그리며 윤곽을 드러낸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완독하기 위해서는 저자들이 의도한 느린 템포에 맞추어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주변 인물들을 직접 찾아 인터뷰를 하고, 범행 현장과 피해자를 찍은 필름 사진들을 관찰하여 특이점을 포착하는 경찰들의 주의 깊고 느린 행보와 속도를 맞춰야 한다. 서서히 좁히는 수사망에 걸려든 용의자는 예상대로 매력이 넘치고 허점이 보이지 않는, 치밀하고 신중한 자였다. 조심스레 그의 뒤를 쫓고, 미끼를 놓아 함정 수사를 하는 후반의 체포 작전은 형사들의 바닥난 인내심을 시험하며 서서히 긴장도를 높인다. 막판 올가미를 조여 덫에 걸린 늑대의 발을 낚아채는 것처럼.. 본색을 드러낸 살인자를 연행하는 과정은 숨 쉴 틈 없이 진행되어 폭발적인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사실적인 노르딕 누아르를 표방한 '마르틴 베크' 의 첫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두 공동 저자는 이후 대히트한 네 번째 시리즈 <웃는 경관>을 거쳐 마지막 시리즈 <테러리스트>까지.. 총 열 편의 시리즈를 출간하여 경찰 소설의 모범이자 북유럽 미스터리 스릴러의 원점을 제시했다.



이후 등장한 헨닝 망켈, 스티그 라르손, 요 네스뵈 등 북유럽의 장르 문학 작가들은 하나같이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 빚을 지고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장르 문학에 발을 들이고, 미스터리 스릴러 형사물에 입문하려는 이들은 마이 셰발 &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시작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마르틴베크 #로재나 #마이셰발 #페르발뢰 #시리즈정주행 #스웨덴 #노르딕느와르 #경찰범죄소설 #미스터리스릴러 #형사경찰물 #전설의시작 #엘릭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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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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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를 보면서 뭔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누군가 중요한 인물이 극중 제외된 것이 아닌가 하는 궁금증에 빠졌다.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수학자들 가운데 누가 얼굴을 비추지 않은 걸까? 단팥빵에 팥앙금이 빠진 것만 같은, 휑하고 허전한 느낌.. 벵하민 라바투트의 <매니악 Maniac>을 읽으면서 그 물음이 자연스레 풀렸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리처드 파인만,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유진 위그너, 쿠르트 괴델, 에드워드 텔러 등 내로라하는 천재들이 신에 가장 근접한 천재라며 존경하고 칭송한 그 이름.. '존 폰 노이만'이 그 주인공이다.

네덜란드 태생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는 그를 유리 거울이 사면을 감싼 방에 가두고는 주변 인물을 통해 다각적으로 관찰한다. 어릴 적부터 괴력의 지능을 발휘한 노이만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그의 부모, 가족들, 스승, 배우자, 친구 등을 화자로 내세워 편집증적이고 광적인 천재의 방대한 업적과 주요 에피소드, 심리 상태 등 거의 모든 면을 서술했다.




책은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심한 우울감과 고뇌에 빠진 천재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의 생애를 다룬다. 그는 개인사와 학문적 고뇌를 견디다 못해 다운증후군을 앓던 막내아들과 함께 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고전 물리학의 확실성이 무너지면서 대두하는 냉혹한 비이성에 대해 경고했다. 과학의 순수한 영혼을 따라다니는 유령, 정신 나간 미치광이 이성이 우리 곁에 어른거린다. 그가 남긴 말이다. 어둡고 음울한 오스트리아 태생 천재의 비극적인 삶을 통과하면 '노이만'이 전면에 등장한다.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똑똑한 사람, 외계인, 천재 중의 천재, 신에 가장 근접한 자.. 노이만은 100년 이후의 세계를 예견하고, 광대한 영역의 학문적 토대를 닦은 선지자였다. 인류의 발명 가운데 가장 창조적인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초기 이론과 모델을 창안했다. 가장 파괴적인 발명이라 할 만한 핵폭탄과 수소 폭탄의 연구 개발에 자신의 모든 재능을 쏟았다. 두 분야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닌,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폭발적으로 진화하여 전 인류의 밤낮과 세계 정세를 변혁시켰다. 또한 세계 판도를 냉전 시대를 거쳐 다극화/네트워크/디지털 AI 시대로 나아가는 동력을 제공했다.




2부 노이만의 일생을 짚어가다 보면.. 놀란 감독이 <오펜하이머>에서 그를 배제한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다. 폰 노이만이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학자들은 그 빛이 바래고 조연으로 물러날 위험이 있다. 놀란 감독은 그 점을 우려했을지 모른다. 후에 그를 주연으로 다룬 영화를 따로 만들자, 고심 끝에 이를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역사에 길이 남을 아인슈타인, 오펜하이머마저도 그를 불세출의 압도적인 천재라 칭했고 경외했다. 그는 유수의 천재들마저 쩔쩔매는 미지의 불확실성을 빠르게 제거했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불모의 영역을 개척하여 학문의 신영토를 확장시켰다. 저자는 노이만의 개인/가정사를 세밀하게 그리고, 발음 상 특이한 버릇까지 세부 관찰하여 그가 환생하여 곁에 현존하는 것처럼 사실성을 부여했다. 덕분에 이 책은 픽션도 논픽션도 아닌, 소설과 다큐 경계에서 아슬한 줄을 타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감과 몰입감을 선사한다.

폰 노이만은 신을 닮은 천재였지만 냉혹하면서 잔인한 면이 있었다. 그가 지지하고 개발에 기여한 수소 폭탄 '아이비 마이크'는 전 인류의 말살과 지구의 파멸을 앞당길 만한 대재앙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피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무릇 인간의 고통과 죽음이었다. 대다수의 범인과 달리 한 천재의 죽음은 지극히 고통스럽고 비극적이었다. 책을 통해 평범한 인간으로 회귀한, 노이만의 말년을 돌아보길 바란다.




대망의 3부는 천재 기사 '이세돌'의 바둑 인생과 딥마인드가 개발한 알파고의 탄생/각성을 다룬다. 인간 대 AI, 세기의 바둑 대전에 얽힌 숨은 이야기, 쌍방의 결정적인 승부수를 느린 호흡으로 복기한다. 이후에 이세돌의 이른 은퇴 선언, 알파고의 폭발적인 진화를 다룰 때면 한 인간으로서 당혹스럽고 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인간 이세돌은 전 인류에게 고개 숙여 사과할 필요가 없었다. 인류가 아닌 그의 패배이자 과오라고 원죄를 뒤집어쓰는 건, 한 개인으로서 너무나 잔인한 고백이자 형벌이었다. 현시점에서 인간은 AI의 번개 같은 수 계산과 승부 예측 그리고 냉혹함을 절대 따라갈 수 없다. 커제 등 AI 와 맞붙은 일류 바둑 기사의 연이은 패배로 인간과 AI의 격차는 증폭되고 있음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AI는 인간의 활동에 도움을 주는 선을 지키고, 임계점을 넘을 경우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둑과 체스 등 예와 즐거움, 공정한 승부를 중시하는 게임은 인간이 AI와 맞붙지 않도록 규칙을 정하고 선을 그어야 한다. 어느 분야와 영역이든, 인간이 AI 와 대결하여 허무하게 패배하는 것은 초기 몇 번이면 족하다. 만약 이러한 패배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가중된다면 AI 로봇 혐오 현상, 즉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현상이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SF 영화에서나 볼법했던, 인간과 AI 간의 대립과 마찰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책의 말미 알파고와 대적하여 연승했다는, 업그레이드된 차세대 AI '알파제로'의 출현과 백돌 한 수를 신중히 내려놓는 이세돌의 사진을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광적인 천재들이 이룩한, 매니악한 디지털 AI 세계의 끝은 희망 가득한 유토피아일지, 아니면 벼랑 끝 아포칼립스일지.. 우리는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안갯속을 헤매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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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여자들의 은밀한 삶
디샤 필리야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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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여성들에게 '교회'란 어떤 의미일까?

대서양 건너 아프리카에서 끌려와 갖은 중노동과 학대, 차별을 겪은 그들에게 교회는 탈출구이자 안식처로 기능했을 것이다. 그들이 건설한 교회는 집단으로 모여 신께 구원을 갈구하는 곳이자, 흑인 특유의 리듬과 바이브로 목청껏 함께 노래 부르며 광란에 가까운 영적 체험을 겪는 공간이었으리라.




미국 플로리다 잭슨빌 태생의 흑인 여성 '디샤 필리야'는 어릴 적부터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교회라는 공간과 그 안에서 다채로운 인물들이 부딪는 대소사들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할머니, 어머니, 형제자매들, 친구들과 지인들을 지면으로 불러내 그들의 적나라한 욕망과 속내를 드러낸다.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숨기고 싶은 치부까지 대담하게 까발리며 첫 소설집을 대중들과 출판계 인사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디샤 필리야의 <교회 여자들의 은밀한 삶>. 표지에 그려진 목조 교회당의 솟을 지붕이 회빛 하늘을 비죽 찌를 듯하다. 교회 안에서 성령 충만하고 정숙해 보이는 신도들이지만, 일상에서 비치는 그들은 여느 인간들처럼 속된 욕망에 충실하고 현실 밑바닥에서 각자 몸부림치며 삶을 살아내고 있다. 2000년 밀레니엄 전야를 맞이하여 동성인 소꿉친구들이 서로의 육체를 탐하고 밀회를 즐기는 첫 단편은 종교적 믿음과 성적 욕구가 충돌하는 혼란스러운 순간을 그린다. 관계를 맺기 전 기도를 올리며 신께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율라'의 모습. 이후 제단에 69자세로 바친 제물들처럼.. 뒤엉켜 서로를 혀로 탐하는 장면이 도전적이면서 에로틱하다.




총 9편의 단편들 중, <복숭아 코블러>에 눈길이 머무르고 손이 간다. 올리비아는 매력적인 외모의 어머니와 단둘이 빈민가에 살고 있다. 어머니는 매주 월요일이면 찾아오는 '하느님', 유부남 목사를 위해 '복숭아 코블러'를 정성껏 준비한다. 스위트한 디저트를 매개로 삼아 펼쳐지는 은밀한 불륜과 종교적 타락의 현장이 노골적이면서 생생하다. 올리비아와 함께 흐느적대는 외창 커튼 사이로 다가가 그들의 정사를 엿보는 듯하다. 실로 잔인하게 어머니는 상간남에게는 디저트를 맛보게 하지만, 딸 올리비아에게는 조각 하나 주지 않으려 한다. 어려서부터 달콤함을 경험하면 갈증을 달래려 할 테고, 자라서는 누군가 흘린 그 부스러기나 탐하리라는 명분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어머니 그 자신을 닮지 말라는 말도 덧붙인다. 올리비아는 어머니의 말에 굴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뭉개진 코블러를 한 주먹 움켜쥐어 맛을 본다. 이브가 경고를 뿌리치고 금지된 악과를 따먹는 것처럼, 바닥까지 내려가 터부시되는 금기를 깨부순 그녀는 천상의 맛에 취한다. 허나 올리비아는 달큼한 복숭아를 탐했지만, 그것에 도취되어 복숭아 자체에 중독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니 불운하게도 목사의 집에 과외 선생으로 초빙되어 그 집 아들과 관계를 맺지만, 그녀는 달콤하고 끈적한 코블러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았다. 속된 욕망에 빠져 허우적대고 집착하는 어머니와 달리, 그녀는 아름다움과 달콤함의 본질을 추구하고 곁의 이들과 나누며 살겠다고 항변한다. 부조리하고 타락한 이들이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따귀를 날리고, 갖은 핍박을 가해도 그녀는 끝내 다른 삶을 살아낼 것이다. 다른 이들이 남긴 부스러기를 탐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어머니를 닮지 않으려 그녀는 분전하고 노력하리라.





디샤 필리야, 배경이 변변치 않은 흑인 여성이기에 누군가는 그녀를 미국 문단의 '신데렐라'라고 일컫기도 한다.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작가.. 소설 장르만큼은 이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 작가 자신의 내밀한 삶이 투영되는 장르이기에 빈약하고 일천한 내적 경험과 사상으로는 이토록 파격적이면서 독자의 심정에 깊이 다가서는 소설을 써낼 수 없다는 얘기다.

그녀의 첫 작품은 교회 의자에 나란히 앉아, 십자상을 바라보는 흑인 여자들의 은밀한 삶과 치부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책 서두에서 인용한 앤설 엘킨스_<이브의 자서전>의 문장대로.. 은총을 잃고 타락하는 것이 아닌, 자유를 향해 두 날개를 펼친 천사처럼.. 저 하늘 멀리 도약하는 레전드 작가의 데뷔작으로 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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