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웰즈의 죄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5
토머스 H. 쿡, 한정아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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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너무 유명해서 인용하기도 민망한 니체의 말,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본다는 말.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이 구절이 떠올랐다. 줄리언 웰즈가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너무 오래도록 심연을 들여다봤기 때문이라고. 그가 지은 '죄'라는 게 그가 평생을 좇아온 어떤 죄의 모습이었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미스터리 장르란 타이틀을 달고 있기엔 아까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간 읽은 미스터리엔 인간 본연의 심리를 다룬 작품도 있고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처럼 사회 본연의 모습을 다룬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미스터리가 향하는 곳은 인간의 심리다. 정확히 꼬집어 말하면, 인간의 심리 중에서도 범죄자와 피해자의 마음. 모든 범죄에는 범죄자와 피해자만 존재한다. 제3의 인물이 존재할 수가 없다. 사건 안에서 어떤 사람도 피해자를 이해할 수 없고 어떤 사람도 범죄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탐정 소설에 탐정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들은 피해자와 범죄자, 모두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수수께끼에 목말라하는 자들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심리면으로 볼 땐 <줄리언 웰즈의 죄>는 기가 막히도록 치밀한 심리를 다뤘다. 줄리언 웰즈의 죽음을 듣고 왜 그가 죽어야만 했는지 탐구해가는 필립과 로레타를 보면서, 그들이 목도한 것은 어느 누군가의 잔인한 마음이었으므로. 종국적으로 그들은 줄리언 웰즈라는 한 사내의 심연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미스터리란 장르를 보고 <줄리언 웰즈의 죄>를 논할 때, 이 글은 미스터리라기보단 '팩션'이 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나치, 학살, 엘리자베스 바토리, 질 드 레, 여러 인물을 놓고 볼 때 이 글은 미스터리라고 볼 수는 없다. 치밀하게 짜여있기는 하지만 미스터리에서 말하는 긴장감은 아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추적해가는 상황도 아니거니와, 줄리언 웰즈가 지었다던 죄나 필립과 로레타가 내내 들었던 마리솔의 이야기나, 누군가가 누군가를 해쳤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글에서는 피해자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가해자란 어떤 악의를 가지고 상대방을 해쳤을 때 생기는 것인데, 이 글에서 악의를 가진 사람은 없었으므로. 마리솔도 줄리언 웰즈도 기가 막힌 상황에서 사투르누스의 기습을 받은 것이다.

책의 뒷표지에 '인생은 사투르누스의 기습이다'라고 적힌 구절이 있는데 왜 이런 구절을 적었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주로 다룬 것은, 사기와 기만에 능한 사람들의 죄를 고발하는 식의 이야기였다. 선량한 사람의 탈을 쓰고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악인의 이야기. 줄리언 웰즈가 말한 죄란 바로 그 속임수에 대한 것이었고 그 속임수가 타인의 목숨을 앗아갔을 때 장난으로 돌멩이를 던지면 안 된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어찌 보면 굉장히 단순한 주제지만 그 안에 내포된 진실은 때론 걷잡을 수 없이 두렵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슬픔이 몰려온다. 고작 그런 까닭으로 누군가가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는 것도, 고작 그런 속임수 하나로 줄리언 웰즈가 그리 되었다는 것도. 인생이 어느 쪽으로 갈지 예측할 수 없을 때, 어쩌면 때론 그 예측할 수 없는 순간이 본인이 상상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향할 때 이는 사투르누스의 기습이 될지도 모르겠다. 태어나자마자 아비의 입속에 삼켜졌던 신들처럼 말이다. 그들은 결국 그들 스스로 아비를 치고 말았지만.

마지막에 줄리언 웰즈의 진실을 목도했을 때 지나치게 허무했다. 허무하여 슬펐다. 왜, 그는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는가. 이런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사기와 기만에 대해 초점을 맞출 때부터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있었단 말인가. 차라리 필립에게라도 털어놓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비극적으로 되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줄리언 웰즈를 동정한다. 그를 가엾게 여겨 슬픔을 느낀다. 그가 적은 책들은 인간의 잔혹사를 담았다. 그가 고발하는 인물들을 보며 나는 김언수 작가님의 <설계자들>을 떠올렸다. 너구리 영감이었나, 누군가 인간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했을 때 그때도 슬픔을 느꼈다. 줄리언이 적어갔던 인물들은 모두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태어났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지독한 영향을 주었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만들어내듯, 줄리언 웰즈의 영혼을 꺼져버리게 했다. 그렇기에 지독한 슬픔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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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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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의 사전적 의미는 '매우 조심스러움'이다. 조심스러워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인가. 조심스러워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의식한단 의미다.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상처주는 것이 두려워 상대방을 어쩔 수 없이 바라봐야 한단 의미다. 결국 신중해진다는 것은, 상대방과 나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단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행동이 그로 하여금 신중하게 하는 것일까. 지하철을 걸어가다가 누군가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 살짝 몸을 튼다거나 걸음을 조금 멈춘다거나 하는 행동을 볼 때가 있다. 지하철에게 빠르게 나오는 사람들을 어쩌질 못해 가만히 서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있어야 할 때도 있다. 신중한 사람이라면, 결코 먼저 나서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신중하니까, 조심스럽게 움직일 것이다.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신중한 건지도 모른다. 이승우 작가님의 <신중한 사람>은 그런 삶을 신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안정적인 직업을 원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면서, 그런 직업을 갖지 못한 '나'는 선배의 부탁을 받아 한 지방의 임시 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변변찮은 벌이지만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굶어죽을지도 모른단 두려움. 안정적인 것에 대한 강박. '나'는 여관에 머물면서 밤마다 켜지는 텔레비전에 시달린다. 리모컨이 있다면 그나마 덜 스트레스일 텐데, 그놈의 리모컨이 없다. 그뿐 아니라 선배가 도시를 구경시켜준다면서 밤마다 불러대는 통에, 거절도 하지 못한 채 끌려다닌다. 그는 자신에게 일을 준 선배에게 피곤하다고 정중히 거절의 뜻을 밝히지만 결국 선배와 함께 하게 된다. 갑갑하면서도 답답한 인생에서 그가 분풀이를 할 수 있는 것은 여관에 없는 리모컨이다. 삶이란 그렇게 무기력한 것이다.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절실히 원하는데 상대방은 "원래 없어요"란 대답으로 산뜻하게 요구를 묵살한다. 그때의 기분은 참담하고 비굴하고 또 분하다. 삶은 그렇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Y에게는 꿈이 있다. 조용한 전원에서 자신만의 집을 짓고 살아가는 것. 그 꿈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꿈에 그리던 전원주택을 마련했다. 그러나 딸이 패션디자인을 하겠다고 유학을 가는 바람에 그 꿈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가 마련한 전원주택은 친절한 이웃의 관리에 맡겨진다. 생활비를 대주기 위해 외국에 나가 일을 하고 돌아왔지만 자신이 마련한 집은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다. 친절한 이웃이 자신의 집이라 속이고 전세를 준 것. Y는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신중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조심스러워한다는 의미가 맞는 것일까. 나는 사전적 의미를 다시 고민해봐야 했다. 아무리 고민을 해도 신중하다는 것은 사전에서 말하는 조심스러움이 아니라, Y의 꺾인 자존심을 의미했다. 뼈 빠지게 일해서 꿈의 주택을 마련했지만 가족에게 희생을 강요당해 먼 타국까지 갔다. 열심히 일한 후 고국에 돌아도니 자신의 주택은 다른 누군가가 멋대로 전세를 주었다. 무기력해진다. 다시, 또, 무기력해진다. 그에게 남은 것은 마치 그 전원주택이 전부라는 듯, 그는 필사적으로 버틴다. 그곳에서 나는 또, 삶에 대한 절망을 엿보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절망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필사적인 건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간의 숭고한 정신.

윤은 J선생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오래된 편지를 발견한다. 소설가로 유명해진 윤은 처음에 J선생의 유품을 정리하기가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J선생과의 오랜 인연을 떠올리며 선생의 작품을 분류하고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때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편지는. 그 편지는 한 친구의 부정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윤은 그 편지를 읽고서 수치심을 느낀다. 결코 세상에 드러내선 안 되는 편지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 인간의 시기였다. 먼저 신춘문예에 당선된 친구의 부정은 그에게 있어서 밝혀내야 할 것이었고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는 듯,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주위의 반응은 싸늘하다. 사실은 윤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시기심으로 그랬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오래된 편지에 적힌 j선생의 첨삭은, 그에게 그런 수치심을 안겨준 것이다. 사람은 단순하다. 누군가가 잘 되면 그것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런 본성을 잘 드러낸 글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이미에서 나와 어디로 향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글은 조금 독특했다. 이미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여관에 머물며 어디로 가기를 꿈꾼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미에서 나와 어디로 향하지 못한 채 사라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누군가의 현실이기도 하면서 누군가의 과거다. 삶은 마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어떤 통로와도 같다. 과거에서 나왔지만 미래로 가지 못한 채, 서성거리는 현재가 있다. 과거에서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에서도 나는 존재할 수 없다. 과거를 거쳐와야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듯, 이미에서 내가 존재해야 어디에도 나는 존재한다. 이미에서 이미 사라진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닐까?

사람이 질투에 눈이 멀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유명한 소설가의 글을 다른 사람이 썼다는 인터넷글이 불러온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그것이 그가 했다고 밝혀졌을 때엔 씁쓸하기만 했다. 망상증이 있는 소설가였던 그가, 망상에 의해 다른 누군가를 파멸로 이끌어간다는 계획. 그것은 그의 망상인가. 현실인가. 그 애매모호한 현실이 바로 삶이었다. 내가 누군가를 시기하게 되면 파멸로 가는 것은 그만이 아니라 나도 함께 간다. 삶은 덫이다. 삶은 늪이다. 빠지면 어찌할 수 없이 빠져드는 것이다. 그런 허우적대는 게 삶이라고 처절하게 말하는 듯했다.

아버지는 빛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 '나'는 사랑에 눈이 멀어 아버지와 절연을 당했다. 커틀러스 검을 가진 아들은 아버지가 두려워 칼에게 매달리게 되었다. 칼을 수집하는 사람은 칼을 우표나 동전을 수집하는 것처럼 수집하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칼은 유일한 자존심인 것이다. 어떤 사람에겐 그렇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버거워 무언가에 매달리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아버지에게 제대로 있기 위해 커틀러스를 품은 남자처럼. 아버지에게 절연당한 '내'가 아버지와 마주하기 위해. 빛이라는 것은 때론 모든 것을 밝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존재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더 또렷하게 보이는 법이다. 모든 것을 다 밝힐 수는 없다. 밝힐 수는 없기에 슬픈 것이다.

한국에서 실패한 삶을 청산하기 위해 외국으로 가려는 남자. 유는 그 삶을 갈망했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그는 가질 못했다. 인생은 농담 같은 것인가. 그토록 원하는 외국행이 바로 직전에 고꾸라지더니. 허망해서 웃음이 비져나왔다. 마지막을 보았을 때 유의 고통이 확 느껴졌다. 오직 외국을 가기 위해 비자를 신청하고 비자가 나오길 기다리던 유였는데, 비자가 나오고 나서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가질 못하게 되었을 때의 심정이란. 삶은 그렇게 다른 누군가를 고꾸라뜨려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때론 살아가는 이에게 고통을 주기도 한다.

내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했을 때, 하지 않았다고 증명하는 일은 어리석다. 하지 않았으므로 증명할 길도 없다. 이렇게 적어가는 문장에 무엇이 숨어 있을까.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요목조목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에 뼈 아픈 진실이 있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추궁을 받을 때, 추궁받은 자의 인생을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글의 중간에 어떤 연예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연예인뿐 아니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살고 있다. 예전에 어느 기사에서 한 남자가 여자애를 성추행했다고 고소를 당했는데 알고 보니 무혐의였었단 사실이 밝혀진 일이 있었다. 사건조사에 대한 미비로, 남자는 억울하게 모든 일을 뒤집어썼다. 세간에서는 그를 추악한 성추행범이라고 욕을 했다. 이미 일이 터지고 나선 수습할 순 없다. 그의 인생은 이제 어린 애를 성추행한 사람으로 낙인 찍힌 것이다. 하지도 않았는데 했다고 이미 터지는 순간, 인생은 파멸하고 만다. 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증명하는 일, 그것은 꽤나 버겁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두 다리에 엄청난 무게를 가진 추를 매달게 되듯, 그대로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절망적이지만 버텨내야만 하는 일, 진실을 파헤치는 것, 그것이 삶이라면,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는 그 진실 하나뿐이다.

참 이상하다. 이승우 작가님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모두, 신중함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나약하다. 나약하다는 것이 죄인가. 그렇지는 않다. 나약하다는 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성정이다. 마치 이 글은 그들을 보호하기로 하듯 적혀 있다. 그들을 비난해서도 외면해서도 안 된다고. 우리는 모두 신중하므로, 신중하기 때문에 그들을 보다듬어줘야 한다고. 삶은 어느 순간 당신이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럴 땐, 신중해지자. 나약하다는 것은 당연하므로, 그렇기에 사랑하자. 작가의 말을 읽으니, 왠지 모르게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삶이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힘들고 사람은 여전히 난해하다. 그래서 소설을 쓰지만, 그래서 소설 쓰기가 쉬워지지 않는다. 나는 맷집이 약하고 체력 역시 부실한 편이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느라 행동하지도 즐기지도 못하는 내 인물들을 보면 언짢고 속이 상한다. 그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데도, 그들에게서 세상의 고뇌를 벗겨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나는 그들을 내버리고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는 않았다. 못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사랑한다고 말하고서 사랑하지 않기는 더 어렵다. 내가 내 인물들을 향해 굳이 사랑을 고백하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_<작가의 말>에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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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삶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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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등 불빛이 느리게 깜빡였다. 손이 멈칫거렸다. 책등이 보이도록 책을 뒤집은 후 천장에 눈길을 주었다. 언제 깜빡였냐는 듯, 형광등은 본래의 빛을 뿜었다. 다시 책에 시선을 준 채 글자와 글자 사이에 있는 빈 공간을 찾아가는데,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느리게 숨을 내뱉듯, 몸을 살짝 떨듯.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다가 죽어버리는 어느 생명처럼 버티다가 형광등은 나가버렸다.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나는 책만 붙잡은 채 멀거니 앉아 있었다. 어둠에 눈이 익기까지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참치와 너구리 사이에는 형광등이 깜빡이는 순간만큼의 어떤 망설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손을 뻗지만 그 손을 잡아주는 사람 없는 무안한 순간들. 지나가는 풍경처럼 무심하지만 그 풍경 하나하나를 간직했던 청춘의 모습들. 왠지 참치와 너구리의 사랑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느티나무처럼, 무언가에 흔들리면서도 굳건히 뿌리를 박고 선 것만 같다. 그들의 사랑은 느리지만 그만큼 서로를 진지하게 마주보고 있고 진지하게 마주보고 있기에 서로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날의 사랑은 그들 모두에게 아주 느린 속도로 다가와 서로의 마음에 뿌리를 내린지도 모른 채 서성이다가 어느 순간 반짝거리는 것을 찾게 되는 그런 따스한 날과 같다고. 그들이 고양이침대에 앉아 날카롭게 빛나는 햇살을 훔쳐봤듯이.

감정은 또렷했지만 다가가는 것은 느렸다. 느린 연애의 이야기다. 떠나기를 자처하는 참치와 머물기를 자처하는 너구리. 어찌 보면 참치와 너구리의 습성을 닮은 두 사람이다. 가을에 남하하다가 봄에 돌아온다는 참치. 너구리는 언제나 한 곳에 머문다. 그들은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만났다. 서로의 온기는 언제나 그들 손아귀에 있었다. 바다와 육지에서 사는 존재가 만났던 것이 기적과 가깠다면, 너구리와 참치의 사랑도 기적에 가깠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서로 사는 세계를 본인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기에 다가가는 것에 망설임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떠나야 하는 참치와 떠날 수 없던 너구리의 사정을 서로 헤아리고 있었던 건지도.

나는 귀찮아, 란 말을 자주 입에 담았다. 그것은 나른해진다는 거라기보단, 어떤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두려움을 포장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그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 귀찮다라고 할 때마다 그런 내 말을 묵묵히 들어주던 아이가 있었다. 누나는 항상 그러더라. 무심하게 말하는 말투에는 웃음이 어렸다. 한심하다고도 하는 게 아닌 그저 묵묵히 기다려주겠단 의지와 같은 것. 나는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다. 참치와 너구리가 느낀 평화로움을 나는 알았다. 내가 내 자신으로 있을 때에 평화롭다. 너구리가 너구리로, 참치가 참치로. 그 순간만큼은 공기도 느리게 흘러가고 햇살도 느리게 닿고, 모든 것이 느려지는 순간이다. 느린 게 좋거든, 참치의 목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참치와 너구리를 보면서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다.

너구리가 날에게 느낀 부러움도 나는 알았다. 어떤 것을 간절하게 붙잡을 수 있는 날.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는 날. 강아지를 잃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날. 날은 살아 있다. 엄청난 생명을 느낄 수 있는 존재다. '귀찮아'라고 말하는 순간 느껴지는 무기력을 너구리도 알았을까. 너구리는 알았을 것이다. 어딘가로 향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무기력이 너구리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떠나려는 참치가 너구리에게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너구리는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것은 단순히 귀찮아서가 아니라, 어떤 무기력과 두려움, 그리고 낯선 세상으로 향할 때 드러나는 자기 자신의 낯섦일 것이다. 어쩌면 너구리는 너구리답게 기다리는 것을 잘해서 기다리기로 했는지도 모르지만.

내 시간이 다른 누군가와 겹쳐져 같이 공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같은 시간에 있는 서로 다른 체온의 느낌. 그것은 가슴이 벅차게 아름다울 것이며 눈물이 나도록 슬플 것이다. 그런 감정들은 붙박인 채, 서로에게 달라붙어 서로를 마주하도록 할 것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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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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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농담 같은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사실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조잡한 농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때론 농담이 아주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찌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도 있다. 농담인 듯 농담이 아니듯, 누군가에게는 웃어 넘길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웃어넘길 수 없는 것.

삶도 그렇지 않을까? 팬터마임이나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상황도 있을 것이고 살짝 찌푸린 채 먼 곳에 뜬 달을 바라보는 삶도 있을 것이다. 농담과 농담이 아닌 상황 사이에서 삶은 어디로 흘러가게 될 것인가. 그것은 어찌 보면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또 어찌 보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모순과 역설의 반복적인 쳇바퀴인지도 모른다.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에서 나는 그런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때로는 서늘하고 또 때로는 진실한 삶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의 이름은 익히 들어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얼마나 유명한 작품인지, 나는 이미 밀란 쿤데라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본 적은 없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좋아하여 그 그림을 표지로 했다는 밀란 쿤데라 전집도 오직 한 권만 소장했을 뿐이다. 어찌 되었든, 이번에 <무의미의 축제>가 발간되었을 때, 나는 이 작가와 만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었다. 그리고 만났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150페이지도 되지 않는 중단편 분량의 글을 나는 하루만에 다 읽어내려가고야 말았다.

정말 농담 같은 글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가벼이 읽힌다는 면에서, 우스꽝스러운 유며가 존재한다는 것에서 밀란 쿤데라의 작품은 어떤 희극인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아래 깔린 무서운 진실을 나도 모르게 외면하게 된 건 아닌가 두려움이 들었다. 칼리닌그리드에 대한 유래를 들려주는 대목에선 스탈린과 칼리닌의 일화를 들려주는데 그 부분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대목이었다. 라몽이 그 이야기를 듣고서 한 말은 아직도 잊히질 않고 있다.

알랭, 나는 죽은 다음에도 십 년마다 다시 깨어난 칼리닌그라드가 여전히 칼리닌그라드로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그래야만 나는 인류에 대해 약간의 연대감을 느끼고 관계를 회복해서 다시 내 무덤으로 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_44p

별 거 아닌 이야기 같지만 가만히 이 일화를 들여다 보면 인간의 어떤 성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 같다. 방광이 약해 계속해서 화장실을 가야만 했던 칼리닌의 희극적인 요소엔 어떤 비극이 깔려 있을 것만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화장실을 간다는 것은 생리적인 현상을 넘어서,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닫게 해준 일화는 아니었는지 하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 희극적인 배경 아래 깔린 진실은, 어떤 인간적인 것을 탐구하게끔 하였다.

사실 이 작품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알랭이 배꼽에 집착하게 되었는데 그 배꼽은 알랭의 탄생에까지 다가가게 되었다. 샤를이 스탈린의 일화에 고집하게 되면서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칼리방이 우스꽝스러운 파키스탄어를 창조하여 사용하게 되었을 때, 인간은 인간 그대로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었나 싶다. 알랭, 샤를, 칼리방, 라몽이 들려주는 각각의 이야기는 사소하면서도 사소하지 않았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다. 무의미한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라몽이 다르델로에게 해준 말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무의미한 것을 사랑하라는 것, 하찮고 보잘 것 없지만 그것을 떼어놀 수 없다는 말. 삶은 모두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시시하고 하찮고 별 볼 리 없지만, 떼어놓으려야 떼어놓을 수 없는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 무의미한 것들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게 될 적엔, 사실은 무의마한 것이 아닌 우리 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음을 말하고자 한 게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라몽은, 무의미한 것을 사랑하라고 말해주었다. 사랑하라고. 마치 이 세상에 의미가 없는 삶은 없듯. 알랭이 마지막에 어머니와 화해하게 된 것도 그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단순히 어떤 사람들의 사소한 일화를 담은 것 같지만 실은 그들의 모든 인생을 담은 글이었다.

삶이 무의미하다 할지라도 살아가다 보면, 무언가에 도달해있을지도 모른다. 별 볼 일 없는 것을 사랑하다보면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까, 사랑하자. 우리의 무의미를. 그것이 축제가 되는 날까지.



다르델로,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죠. 그 당시 나는 무엇보다 당신과 여자들의 관계를 생각했어요. 당신에게 카클리크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죠. 아주 친한 친구인데, 당신은 몰라요. 그래요, 넘어갑시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_147p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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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평가단의 마지막 달이다. 벌써 6개월이 되었다니 믿기질 않는다. 처음 접하는 작가도 있었고 익히 들었던 작가도 있었다. 많은 이야기를 만났다. 이 기회가 초석이 되어 더 많은 작가들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8월 신간은, 유난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많았던 것 같다. 가장 기대가 큰 작품이라고 하면 <여자 없는 남자들>일 것이다. 단편집이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 접하는 나에게 가장 알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도쿄 기담집>도 읽고 싶었던 책이다. <엠브리오 기담>과 같은 이야기를 담아내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결국 둘 중 무엇을 할까 하다가, 둘 다 담아보기로 했다.

 

 

1. 여자 없는 남자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민음사 계간지 <세계의 문학> 1월호에 실린 것을 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어렵다고 느낀 나로서는, 이 단편이 조금 친근하게 다가왔다. 난해한 부분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게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태엽감는 새>를 고등학교 때, 1권만 읽었는데 그땐 유난히 문장이 딱딱하단 인상이 많았다. 하지만 <드라이브 마이 카>는 조금 유쾌했던 것도 같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단편을 통해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다가가고 싶다.

 

 

2. 됴쿄 기담집

 

 

 

 

표지가 두 가지 종류가 있댔다. 빨강과 연두. 나는 개인적으로 연두색 표지가 좋다. 이 책은 제목부터가 마음에 들었다. 재미있을 것도 같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특유의 세계관이 존재하면서도 조금 색다른 느낌이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다.

 

 

3. 디저트 월드

 

 

 

 

 

문학과 지성사에서 연재된 글도 조금 보았지만 책으로 나오니 더 기대가 된다. 김이환 작가님의 작품은 무조건 사수해야 한다. 독특한 세계관을 보여주고, 무엇보다도 재미있다. 이 책도 아마 술술 읽히면서 무언가 남겨주겠지. 참고로 이 책의 주인공은, 토끼탈을 쓴 존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토끼에게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는 '나'일지도 모르고.

 

4.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작가님 작품이니까 그냥 골랐다. 그냥 보고 싶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천명관 작가님은 제목이 참 독특하다.

 

 

 

5. 불로의 인형

 

 

 

 

<궁극의 아이>를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이 작품도 참 기대가 된다. 무엇보다도 평이 좋다. 그래, 믿고 보는 작가다. 어떤 미스터리를 선사해줄지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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