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삶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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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등 불빛이 느리게 깜빡였다. 손이 멈칫거렸다. 책등이 보이도록 책을 뒤집은 후 천장에 눈길을 주었다. 언제 깜빡였냐는 듯, 형광등은 본래의 빛을 뿜었다. 다시 책에 시선을 준 채 글자와 글자 사이에 있는 빈 공간을 찾아가는데,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느리게 숨을 내뱉듯, 몸을 살짝 떨듯.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다가 죽어버리는 어느 생명처럼 버티다가 형광등은 나가버렸다.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나는 책만 붙잡은 채 멀거니 앉아 있었다. 어둠에 눈이 익기까지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참치와 너구리 사이에는 형광등이 깜빡이는 순간만큼의 어떤 망설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손을 뻗지만 그 손을 잡아주는 사람 없는 무안한 순간들. 지나가는 풍경처럼 무심하지만 그 풍경 하나하나를 간직했던 청춘의 모습들. 왠지 참치와 너구리의 사랑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느티나무처럼, 무언가에 흔들리면서도 굳건히 뿌리를 박고 선 것만 같다. 그들의 사랑은 느리지만 그만큼 서로를 진지하게 마주보고 있고 진지하게 마주보고 있기에 서로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날의 사랑은 그들 모두에게 아주 느린 속도로 다가와 서로의 마음에 뿌리를 내린지도 모른 채 서성이다가 어느 순간 반짝거리는 것을 찾게 되는 그런 따스한 날과 같다고. 그들이 고양이침대에 앉아 날카롭게 빛나는 햇살을 훔쳐봤듯이.

감정은 또렷했지만 다가가는 것은 느렸다. 느린 연애의 이야기다. 떠나기를 자처하는 참치와 머물기를 자처하는 너구리. 어찌 보면 참치와 너구리의 습성을 닮은 두 사람이다. 가을에 남하하다가 봄에 돌아온다는 참치. 너구리는 언제나 한 곳에 머문다. 그들은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만났다. 서로의 온기는 언제나 그들 손아귀에 있었다. 바다와 육지에서 사는 존재가 만났던 것이 기적과 가깠다면, 너구리와 참치의 사랑도 기적에 가깠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서로 사는 세계를 본인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기에 다가가는 것에 망설임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떠나야 하는 참치와 떠날 수 없던 너구리의 사정을 서로 헤아리고 있었던 건지도.

나는 귀찮아, 란 말을 자주 입에 담았다. 그것은 나른해진다는 거라기보단, 어떤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두려움을 포장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그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 귀찮다라고 할 때마다 그런 내 말을 묵묵히 들어주던 아이가 있었다. 누나는 항상 그러더라. 무심하게 말하는 말투에는 웃음이 어렸다. 한심하다고도 하는 게 아닌 그저 묵묵히 기다려주겠단 의지와 같은 것. 나는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다. 참치와 너구리가 느낀 평화로움을 나는 알았다. 내가 내 자신으로 있을 때에 평화롭다. 너구리가 너구리로, 참치가 참치로. 그 순간만큼은 공기도 느리게 흘러가고 햇살도 느리게 닿고, 모든 것이 느려지는 순간이다. 느린 게 좋거든, 참치의 목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참치와 너구리를 보면서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다.

너구리가 날에게 느낀 부러움도 나는 알았다. 어떤 것을 간절하게 붙잡을 수 있는 날.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는 날. 강아지를 잃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날. 날은 살아 있다. 엄청난 생명을 느낄 수 있는 존재다. '귀찮아'라고 말하는 순간 느껴지는 무기력을 너구리도 알았을까. 너구리는 알았을 것이다. 어딘가로 향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무기력이 너구리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떠나려는 참치가 너구리에게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너구리는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것은 단순히 귀찮아서가 아니라, 어떤 무기력과 두려움, 그리고 낯선 세상으로 향할 때 드러나는 자기 자신의 낯섦일 것이다. 어쩌면 너구리는 너구리답게 기다리는 것을 잘해서 기다리기로 했는지도 모르지만.

내 시간이 다른 누군가와 겹쳐져 같이 공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같은 시간에 있는 서로 다른 체온의 느낌. 그것은 가슴이 벅차게 아름다울 것이며 눈물이 나도록 슬플 것이다. 그런 감정들은 붙박인 채, 서로에게 달라붙어 서로를 마주하도록 할 것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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