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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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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훌륭하고 고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절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 거다.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나기를 그랬던 것 같다. 그들은 나의 뿌리이고 울타리이고 자랑이다. 나는 그들이 정말 좋다. 지금도 그렇다. 눈을 감으면 언제든 복숭아꽃 살구꽃이 환하게 핀 고향의 집에서 어머니가 나 오기를 기다리며 마당에 서 있는 게 보인다. 형님은 하모니카로 <클레멘타인>을 불고 아버지는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고 있다. 어서 와, 어서 와. 누나들은 산나물이 담긴 바구니를 옆에 끼고 나를 향해 손짓한다. 할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 할머니의 다정한 말소리. 동생들이 달려나온다. 석수다. 옥희다. 나는 마주 달려간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난다. 햇볕이 따뜻하다. 소가 운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내 아들 태석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앞치마를 한 아내가 손을 닦으며 나를 바라다보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다 있다. 보인다. 지금 같은 순간이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내가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 기쁨이 내 영혼을 가득 채우며 차오른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느낌, 개인의 벽을 넘어 존재가 뒤섞이고 서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진짜 나다."(365p~366p)



삶은 때론 어떤 의미로 처절하다. 가볍다가도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상승과 하락이 반복된다. 살면서 그걸 깨닫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삶을 버티느냐, 무게에 깔려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느냐는 본인의 선택이다. <투명인간>은 한 인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해 보이고, 어느 누군가에게는 처절해 보이는 삶. 김만수의 삶은, 삶이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한다. 기억하게 만든다.

이 글은, '투명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이 왜 투명인간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을 알기 위해선 투명인간이 된 사람을 알아야 한다. 그가 김만수다.

김만수의 역사는 실로 엄청나다. 만석꾼이었던 집안이 할아버지의 일로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졸지에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개운리로 오면서 할아버지는 소를 사서 키우고 농사에 대하여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등 개운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김만수의 아버지는 일자무식으로 농사만 아는 양반이었다. 할아버지와 뜻이 달랐다. 그래서 무조건 일만 했다. 그러나 술을 먹으면 성질이 사나워진다. 할아버지는 상냥하고 다정했으며 손주들에게 많은 지혜를 베풀었다.

김만수가 태어났을 때부터 머리는 크고 몸을 말라, 허약한 체질이었으니 부모의 걱정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발육도 느리고 말이 트는 것도 느려, '사람 노릇'을 할지 걱정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할아버지의 말을 무조건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아이였고 식구들을 위해 제 한 몸 희생하는 아이였다. 말이 트고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그는 무모하기까지 하고 바지런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김만수는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누나들을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노력했다. 석수가 자신을 무시하고 깔봐도 하하 웃으면서 동생에게 잘해주려고 했다.

그의 인생은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증언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형, 큰누나, 석수, 명희, 옥희, 친구들과 선생님, 어쩌면 김만수와 인연이 닿지 않았을 사람들까지. 태어나면서부터 자라고, 어른이 되어 투명인간이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김만수와 얽혔다. 그리고 그의 삶을 이야기했다. 김만수가 어떤 인간인지 철저하게 파헤쳤다.

정작 김만수 본인의 입으로 하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 즈음에 그의 말이 독백처럼 존재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점이 또 특별하다. 김만수 본인의 입으로 말하는 김만수의 삶이 아니라 주위에서 말하는 김만수의 삶. 이를 통해 삶이란, 어느 한 사람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삶의 파도를 느꼈다.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는 내 안을 휘저어, 삶을 다시 적었다. 김만수가 가족을 위해 치른 희생은 희생이었는가. 그의 행보는 전율케 했으며 때로는 복잡한 기분이 들게 했다. 자기만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자기를 위한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이기적으로 자기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인가. 그가 동생들을 위해 제 한 몸을 깎아 만든 돈은, 분명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 그 한 몸 몸바쳐 일하고 일하고 일을 했다. 그렇지만 막상 또 돌아서서 생각하면 김만수가 원한 삶이 그러한 게 아닌가 싶었다. 부도가 난 공장을 지키겠다고 한 것이 불법이 되어버려 엄청난 빚이 떠안겨졌을 때, 그는 그것을 모두 갚겠다고 했다. 그때 식구들은 얼마나 힘들어했는가. 동생의 아이를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자신의 아이처럼 돌보았다. 송진주는 어찌 되었는가. 그의 삶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그 자신대로 열심히 살았다. 남들보다 배는 열심히 살았다. 그것은 위대하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어딘지 모르게 가슴이 서늘해지는 부분이 있다.

<투명인간>이 전해주는 그 서늘한 감각은, 어찌 보면 이 글 전반에 깔려 있는 사회문제 때문일 것이다. 김만수가 살아오면서 거친 수많은 정치상황, 노동현실,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져 온 상황들. 그것들이 맞물려 가난한 자들은 비참해지는 상황까지 가버리고 말았다. 성석제 작가가 말하는 <투명인간>이란,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지 못한 채 바스러져 간 사람들의 모습이다. 김만수가 결국 투명인간이 된 것은, 지배층에 의한 피지배층의 희생이다. 그것을 놓고 보면 투명인간이 되는 삶은, 지금 현실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태석이가 왜 투명인간이 되었을까. 그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열심히 피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고 외면받았다. 태석이 바라는 건, 그저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그런 진심을 외면했다. 태석은 투명인간이 되어서야 그 존재를 인정받았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엄청난 빚을 떠안기도 한다. 삶은 얼마나 불공평한가. 세상은 얼마나 불공평한가. 여전히 이 시대에선 투명인간이 넘쳐나고 있다. 다리에서 떨어져 투명인간이 되는 사람, 손목을 그어 투명인간이 되는 사람. 그들은 투명인간이 되어서야 행복해지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더 고통스러워지는가. 성석제 작가가 말하는 '투명인간'은 소외되어 가는 현실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나. 독거노인, 고아, 가난한 사람들, 노숙자들과 같은 그런 삶. 삶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평등하기에 모두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불공평하다. 불공평하기에, 외면받는 현실이 벌어진다. <투명인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외면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 누군가의 삶을 외면하면 그는 바로 투명인간이 된다. 존재하지도 않는 이름을 붙잡으며 살아갈 이는 아무도 없다. 허상의 이름을 오래도록 생각할 사람은 없다. 투명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내 존재를 증명해야만 한다.

그 존재를 증명하는 길은, 김만수의 말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아픔도 슬픔도 없이 모두가 평등한(367p)" 삶이 투명인간의 삶이라면 "아픔도 슬픔도 존재하고 모두가 불평등한 삶"이 지금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어찌할 수 없이 만들어지는 차등은 사람들을 비참하게 하고 비굴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지만 이것을 이기는 방법은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남는 것이다.


"죽는 건 절대 쉽지 않아요. 사는 게 오히려 쉬워요. 나는 포기한 적이 없어요."(369p)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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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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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질주하는 무질서의 삶 속으로

세대가 거듭하면서 빚어지는 인간의 역사.

 

 

스위드. 달콤하게 울리는 이 마법 같은 이름에는 어떤 역사가 있다. 찬란한 금발에 키가 190cm나 되는 잘생기고 멋진 청년은 어디에 가도 주목을 받았고 어디에 가도 사랑을 받았다. 그 완벽함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파괴적인 것. 파괴로 빚어지고 파괴로 망가지는 어떤 작은 것이 그의 안에 숨겨진 것도 모른 채 그는 살아왔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미인인 돈 드와이어와 결혼을 하고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 부유해졌으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가졌다. 그들은 행복했고 행복해야만 했다.

 

행복해야만 했다.

 

 

그러나 레보브 가족에게 어떤 비극적인 일이 생긴다. 그 비극은 가히 그들에게는 이질적인 것이다. 어떤 파괴, 그간 숨겨져 있던, 존재하지도 몰랐던 어떤 파괴가 정면으로 그들에게 나타나기로 한 것이다. 메리는 말더듬이가 되었고 전쟁을 혐오했고 폭탄을 터트려 사람을 죽였다. 사람을 죽였다. 폭탄을 터트려서.

 

그의 인생은 가시밭길이 아닌 장밋빛이어야 했다. 그에게 가시밭길과 같은 황량하고 척박한 땅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향기로운 꽃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부인과 토끼처럼 귀여운 자식과 함께 죽을 때까지 순탄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리라 믿었다. 레보브 가문이 이룩한 것. 전쟁 전, 할어비지가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 레보브 가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유대인으로서 미국에서 태어나, 그는 미국적인 삶을 영위하리라 굳게 믿었다.

 

주커먼은 소설가다. 이 소설의 화자는, 스위드를 매력적이고 완벽한 남자로 묘사한다. 그런 스위드가 그를 '스킵'이라고 불러준 것을 영광으로 알고, 그가 편지를 보내 만나자고 했을  때 '당연히' 만나야만 했다. 그러나 그 번듯하고 멋지고 예의 바르고, 성공적인 삶을 가진 스위드에게 어떤 이질적인 것이 있었다. 존재하지 말아야 할 어둠, 있어서는 안 되었던 감정들. 불안이라 불리고 절망이라 불리고 파괴적인 것이라 불리는 그 모든 감정들. 주커먼은 스위드의 삶을 고민하고 고민하여, 스위드의 인생으로 스며들어갔다.

 

반짝반짝 빛이 나던 빛들이 산산조각이 나버린 어떤 인생이 있다. 스위드의 삶이 그러했다. 그는 빛을 둘러싸고 태어나 빛에 둘러싸인 채 자랐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메리의 존재, 메리의 폭탄, 메리가 죽인 사람. 메리의 분노와 파괴적인 것. 그것이 스위드를 날려버렸다. 그때 터트린 폭탄은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스위드의 인생마저 떠들썩하게 해버렸다. 한 번의 폭발이 스위드의 인생을 뿌리채 흔들어댔다. 그는 생각한다. 어째서 메리는 전쟁을 혐오하게 되었으며 어째서 메리는 폭탄을 터트리게 되었는가. 왜 그래야만 했는가. 그 아이는 왜 그랬는가. 어째서 자신에게 그런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는가.

 

메리와 스위드는 서로 반대의 길을 가는 존재다. 스위드가 언제나 활달하면서도 매너 있고 아름다운 존재로 남아있다면 메리는 음침하고 분노하고 추한 존재로 남아있다. 메리는 아버지만큼 큰 키에 뚱뚱한 존재로 자랐다. 그리고 폭탄을 터트려 사람을 죽였다. 스위드는 심지어 메리가 그리 된 것에 대해, 말더듬증을 비롯하여 어릴 때 키스를 해줘서 그렇다고 믿어버리게 되었다. 이 말도 안되는 사정이 사실은 말이 되는 사정이 되었으며 메리의 그런 정당화되지 않을 행동을 설명하게 했다.

 

이 이야기는 한 인간의 몰락을 다루고 있지만, 미국 폭동과 베트남 전쟁, 그 당시 일어났던 사회전반에 걸친 현상을 생각하면 미국의 어떤 현상을 몰락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여겼다. 인종차별에 참을 수 없어서 일어난 폭동, 베트남과 전쟁을 하면서 일어나던 무력시위. 급변하는 시대에 휩쓸린 사람들의 그런 무질서함이 스위드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 번도 그런 무질서함을 느껴본 적이 없던 스위드였기에 메리의 행동은 그를 파괴시켰다. 메리가 결국 그렇게 행동했던 것은 스위드가 원인이었기에 결국 그는 고꾸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꿈꾸었던 삶, 결코 존재하지 말아야 할 어둠 앞에서 그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의 그 아름다운 모습들은 그가 사랑을 받으려고 쳐둔 방어벽에 지나지 않았고 메리의 행동이 그의 방어벽을 조금씩 무너뜨려 그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게끔 하였다.

 

사람들은 결국 어떤 가면을 쓴 채 살아가고 있다. 스위드뿐 아니라 나도, 너도, 그리고 그들도. 그들이 갖고 있는 가면이란 상대방의 기분을 해치지 않으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때론 무심하게 넘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일 것이다. 스위드는 그저 타인에게 깊이 들어가지 않고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그 자신을 제대로 짚어보지 않았기에 남들에게 언제나 만들어진 인물처럼 느껴지게끔 했다. 흠 하나 없는 완벽함을 연기함으로써 메리를 폭발하게 만들었고 메리가 떠나가게끔 했다. 리타 코언이 그를 괴롭혀 왔던 것은 단순히 그가 부르주아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어떤 인간적인 냄새가 나지 않았던 탓이 아니었나 싶다. 그를 직접 찾아와 모욕감을 주고, 다리를 벌려 섹스를 하도록 강요한 것도 그 안에 숨겨진 어떤 충동적인 내면을 드러나게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결국 그는 메리를 사흘 동안 숨겨주었던 실라에게 그 폭력적인 것을 드러냈고 동시에 무너져내렸다.

 

스위드는 오컷을 보면서 아무렇지 않아하려고 하지만, 돈의 그런 비웃음을 들으면서 그에게 편견을 가지려 하지 않았지만 결국 오컷을 의식하여 오컷에게서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돈과 오컷이 바람이 났다는 것을 떠나, 스위드도 결국은 혼돈 안에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조화에서 혼돈으로, 결국 인생이란 그렇게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와 같은 것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스위드가 믿고 있던 그 모든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으며 현실은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녹록지 않다는 것을 드러냈다. 메리의 폭탄은, 미국을 날려버렸을 뿐 아니라 스위드란 사람도 폭발시켰다. 그가 쳐둔 바리케이드를 모두 벗겨 그를 무방비 상태의, 가장 순수하고 여린 존재로 탈바꿈시켰다. 아름다운 아버지, 강한 아버지, 모두가 좋아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그도 미움을 받을 수 있고 그에게도 어둠이 존재한다는 것을 폭로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오히려 이 글이 신비롭다고 느끼게 된 것은 주커먼의 상상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어떤 사실적인 것을 밝혀내지도 못한 채 끝을 맺었다는 것이다. 동창모임에서 주커먼은 스위드를 생각하다가, 스위드를 꿈꾸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스위드의 인생을 모두 재조명하게 되었다. 스위드가 직접 이야기를 들려준 것도 아니고, 제리가 말을 해준 것도 아닌데 어찌 그는 그것을 말할 수 있는가. 이 또한 어떤 환상을 설명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지. 스위드가 꿈꾼 것이 모두 환상이었듯, 스위드의 이야기 또한 어떤 환상이 아니었는지.

 

처음에서부터 끝까지 가는 여정을 좇다 보면 이 글이 얼마나 놀라운지 알게 된다. 전체적인 그림을 완성하게 되었을 때 느껴지는 짜릿함, 심지어 소름마저 끼치는 결말에서 이 글이 보이려고 한 게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미국적인 것을 좇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스위드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의 인생을 다루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 질서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 무방비 상태로 무질서로 뛰어든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무질서에서 살아남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것. 메리야말로 그 혼돈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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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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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엔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130페이지)

 그날이 오면, 나는 도망가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는가. 언제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1980년 5월을 떠올리면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강렬하게 쏟아져오는 햇살이 두려워 참을 수 없어집니다. 꿈속에서 저는 몇 번이나 도망을 칩니다. 도망치지 말자, 도망치지 말자 되뇌어도 제 두 다리는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도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나는 도망가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로 돌아가게 되면 맞서 싸운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저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어느 작가가 그날의 현장을 담은 기록을 적었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날 바로 그 책을 구입했지만 막상 책을 펼칠 수는 없었습니다. 단편적으로 제가 알고 있는 그날의 일이 생생하게 펼쳐질까봐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저는 그 작가에 대한 인터뷰나 기사를 찾아 읽었습니다. 

 
작가는 광주에서 태어났지만 열 살 즈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갔다고 합니다. 이사를 했을 때가 광주민주화운동 직전이었다고 했습니다. 그후에 외가친척은 물론 여러 친척들과, 주위 지인으로부터 그날의 참상을 들었다고 기사에서 읽었습니다. 그날부터 작가에게는 1980년의 5월을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작가의 뇌리엔 왜 자신의 주변인이 그런 일을 겪어야 했는지 의문이 떠올랐고, 피할 수 없던 것처럼 소설로 적어야만 했다고 합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작가가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이사를 했던 것이 참상을 피하게 한 운명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이었는지 고민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이 참 많이 일어나지요. 그때 태어나지 않았던 제가 1980년 5월에 일어났던 일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도저히 그때를 상상할 수 없겠지요. 그날의 기록을 읽는다고 해도, 혹여 영상이 남아 있어 그것을 본다고 해도 결코 저는 그때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 사람은 그리 잔인해질 수 있는가, 왜 그들은 싸워야만 했고 왜 그들은 그렇게 시들어가야만 했는가, 그런 질문들을 제가 던지는 것조차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그날의 일을 본다고 해도 그날의 시간은 저를 비켜갈 것입니다. 제가 보는 것을 믿을 수 없단 얼굴로, 저는 한 걸음 멀어진 채 그날의 시간에서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결국 저는, 그 책을 펼쳤습니다. 작가가 "피할 수 없었던" 일을 적었듯, 저 역시 "피할 수 없었던" 그날의 기록을 읽었습니다.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에 하나씩 무언가 덧씌어졌습니다. 그것은 제가 한 상상이 현실로 빚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시민들은 총을 들고 군인들은 시민들을 저지하기 위해 총을 쏘아댑니다. 그들에게 총을 쓰는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총을 든 이유는 단순한 사냥처럼 보였습니다. 시민들은 왜 싸워야만 했을까요? 어째서 그들은 싸워야만 했을까요? 그 이유가 책에 적혀 있을 줄 알았습니다. 민주화운동이라고 역사에서는 말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워야만 했는지 어째서 그렇게 싸웠는데 그들은 포기해야만 했는지, 괴로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현재를 이어나가야 했는지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광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조차 믿을 수 없었습니다. 왜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해야 하는지, 권리를 주장하면 왜 무참히 총을 쏘아대는지,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인간답게 사는 것 하나였을 텐데, 왜 군인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죽인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들은 그날, 무수히 많은 꿈을 쏘아버렸습니다. 

 
동호는, 제가 책에서 만난 동호는, 어떤 작은 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이 무수히 많이 죽어가면서 그 아이는 나라에 대해 고민을 했더군요. 왜 시신을 태극기에 싸서 묻느냐. 그는 은숙 누나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에게 국가는 무엇이었는지, 그들은 평생 고민했을 것 같습니다. 시민들이 무수히 죽고 무수히 잡혀가고 잡혀간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고문을 받고서 살아남았습니다. 누군가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었고 누군가는 살기 위해 과거로부터 도망을 쳤습니다. 누군가는 아들을 잊지 못해 늘 아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만약 사람이 죽은 후에, 정말 그 사람의 혼이 그 주위에 있다면 육체가 타기 전까지 육체에 매달려 있다면 그들은 육체가 타기 전까지 살아있는 생명일 것입니다. 열십자로 포개어지는 단순한 시체가 아니라, 아직은 떠나지 못한 고결한 영혼이라고. 그것은 그들이 이루지 못한 꿈이었고, 결국엔 부서진 꿈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그들의 꿈을 떠올렸습니다. 그날, 그들이 그렇게 일어선 것은 꿈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꿈을 꾸지 말라는 의무를 부여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동호는 살 수 있었을 겁니다. 정대가 바로 눈앞에 죽었단 이유로 죄책감이 시달릴 필요 없이,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이 그를 움직였던 것일까요? 왜 그는, 그날 총을 들어야만 했을까요? 그들은 그저 그렇게 해야만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선택에 아니라, 반사적으로 해야만 했을 뿐이라고. 나는 동호를 떠올렸습니다. 수많은 중학생과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떠올렸습니다. 그 젊은 피가 거리에 흩뿌려졌을 때, 국가는 무엇을 했나요? 

 
2014년 4월 16일, 수많은 영혼이 하늘로 떠나갔습니다. 1980년 5월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1980년 5월은 가만히 있지 못한 이유로 죽음을 당했지만 2014년 4월은 가만히 있었단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란 말이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배 안에 있던 수많은 영혼들도, 배 밖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도. 결국 배는 가라앉았고 가라앉는 동안 찍힌 동영상이 유렁처럼 배회했습니다. 저도 그 영상을 보았습니다. 장난도 치고, 농담도 한 그 어린 목소리를 잊을 수 없습니다. "엄마,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아이들의 환한 웃음은 그날의 사고가 장난처럼 보였습니다. 1980년 5월의 일은 아직 잊히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국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국가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침묵하는 자가 더 많습니다. 비겁한 자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저도 비겁합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 끝없이 그날의 일을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는 그날의 일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제게 그날은, 멀고 먼 날처럼 느껴집니다. 세상의 모든 파도가 제게 오는 게 아닌, 저를 피해 나아가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심장이 깨지고 싶습니다. 영혼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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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삶 1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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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길을 가야 했다. 외로움과 고독을 견뎌야 했다. 성공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고 이민자이면서 남의 나라 알파벳을 배우는 자신의 왜소함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삶을 허비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조롱거리가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궁극적으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각오를 하고 시를 쓰는 데 전념할 정도로 용감해져야 했다.(436페이지)

 

 

 

 자유로운 삶이란 무엇일까. 자유로운 사람이란 무엇일까.

<자유로운 삶>이란 글자를 치면서 내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오탈자를 냈다. 결국 자유로운 삶이란, 내가 잘못 적은 자유로운 사람처럼 삶과 사람이 같은 것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잘못 적은' 글자인 사람이 주는 울림은 자유롭다. 자유롭다는 것은 잘못 간다는 것을 감안하는 것임이 분명하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내가 잘못 적은 '사람'이란 글자가, 나를 자유로움으로 이끌었다. 

 

1989년에 일어난 텐안먼 사건이 무엇인지 몰라, 네이버 검색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나는 중국이 우리나라처럼 민주주의를 위해 운동을 벌였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텐안먼 사건으로 인하여,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했다는 작가 하 진. 이 책은 그의 인생을 대변하는 책이 될지도 몰랐다. 난 우가 겪은 것이 작가 하 진이 겪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결국 난 우의 삶은 하 진의 삶과 귀결될 것이다. 안타까운 건, 텐안먼 사건은 민주화 운동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 민주화를 위해 울부짖던 소리는 그럼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 책에서 보여지는 망명자의 삶은, 조국과는 절대 떨어질 수 없으면서도 살기 위해서 타국으로 와야 하는 외로움과 고독을 절실하게 보여준다.

 

난 우는, 미국으로 건너 오면서 조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하지만 텐안먼 사건이 그를 미국에 붙잡아두었고 아내가 오고 아들인 타오타오가 오면서 그는 미국에 뿌리를 내릴 생각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민과 조국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보았다. 그들이 원한 것은, 자유로운 삶이었다. 중국 정부가 정해준 대로 사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두 다리로 굳게 이 땅에 서는 것이었다. 난이 그토록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던 것도 그런 삶을 위함이었다. 그는 시를 쓰고 싶어했지만 가족의 안정이 우선이었기에 대학원을 포기하고 경비 일을 전전하다가 애틀랜타에서 식당을 개업한다. 

 

그는 가족을 위해 일을 하면서도, 시를 머리에서 떠나 보내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그는 시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시를 쓰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식당을 마련하고 자신만의 집을 가졌건만 정작 시에서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었다. 

 

첫사랑인 베이나에게 상처를 받은 그는 핑핑과 결혼을 하여 아들을 가졌지만 정작 그는 가정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들인 타오타오가 미국에 왔을 때에 순수한 기쁨으로 차오르고 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었지만, 자동자 운전면허를 취소할 위기에 처하자, 아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쏴죽이란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가족에게 그 전부를 줄 마음은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핑핑은 달랐다. 그녀는 난과 타오타오를 위해 전부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난을 보면서 상처를 받지만 그를 사랑한다. 그에게 헌신하는 강한 여성이다. 신기하게도 난과 핑핑의 관게는 공생적이라는 것이다. 난은 핑핑이 옆에 있으면 편안해지고 핑핑이 있기에 강해질 수 있다. 핑핑은 난을 사랑하지만, 난이 떠나리라는 두려움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결국 난은 가족이 전부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중년이 되어서야 핑핑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을 얻기에 그는 너무 많은 길을 걸어왔다. 

 

주위에서 보는 난 우의 인생은 성공적이다. 그에게는 그를 위해 희생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고 그와 아내의 명의로 된 식당이 있었으며, 그들에게는 호수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집도 있다. 주위에서는 그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아메리칸 드림은 실현하는 것이 아닌 추구해야 하는 것이며, 그가 지금까지 놓쳐왔던 것들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였다. 그는 핑핑을 다시 보았고 아들의 삶이 자유롭길 바랐으며 궁극적으로 그 자신이 시를 쓸 수 있기를 바랐다.

 

시를 쓰는 건 존재하는 것이다.(445페이지)

그의 삶은 시 위에 서 있길 바랐지만 결국 그는 나이가 들어서야 시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었다. 중국인인 그가 영어로 글을 쓰는 어려움을 봉착했을 때의 절망은 쉬이 짐작이 되지 않는다. 글을 쓴다는 것의 어려움은 익히 알고 있지만 타국에 가서 타국의 언어로, 조국을 적어야 하는 고통은 짐작도 못하겠다. 그는 이민 1세대였다.  아들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삶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래야만 했을까? 타오타오가 미국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길 바라면서 그들은 타오타오의 인생에 간섭을 했다. 영어는 물론 중국어를 배우게 하였으며 핑핑은 타오타오가 의사가 되길 바랐다. 그들은 아들에게서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게 아닐까. 

 

이루지 못하는 꿈. 이룰 없는 꿈. 꿈들은 그렇게 존재한다. 그 꿈을 움켜쥐고 앞으로 나아가는 다닝이나 바오 유안을 보면서 난 우는, 그들을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그들을 가엾게 보기도 한다.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없다던 다닝은 오히려 더 불행하게 보이기도 했다. 돈을 많이 버는 화가가 되었지만 결국 바오 유안의 그림은 예전만도 못하게 되었다. 물질을 추구하며 살아왔던 그들 모두의 삶은 자유롭지 못했다. 자유로워지고자, 미국까지 왔건만 다닝과 바오 유안은 결국 조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도 오래전부터 간직한 꿈이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창작의 괴로움을 겪고 보니, 꿈이란 아름다울 때까지만 간직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떠나 보낸 사람도 많았다. 내가 괴로움을 토해낼 때마다 사람들은 떠나갔다. 나는 꿈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중얼거리면 그들은 나를 외면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들의 자유마저 앗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난 우의 걸음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를 얻기 위해선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지만,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가려고 해서 빚어진 슬픔이었는지도 모른다. 꿈이란 것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도 하지만 사람을 절망에 빠트리기도 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원하는 것을 위하여 살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꿈을 오래 간직하면 꿈을 다시 꺼낼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시를 적지 못했던 난이 다시 시를 적게된 것도 그 꿈을 버리지 않고 간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삶에 대해 오래 고민했다. 자유로운 사람에 대해 오래 고민했다. 쓴다는 것이 존재한다던 난의 삶은, 이제 자유로워졌을까? 

 

나는 그가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모든 것에서 해탈하여,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기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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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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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평가단에서 토마스 핀천의 작품을 골랐을 때, 어떤 기대감이 있었다. 데뷔 전, 특히 대학 시절에 썼다는 초기의 단편을 수록했다는 면에서 독특한 기획이라고도 생각했다. 이 책을 막상 읽기 시작했을 때, 작가 서문을 제일 먼저 읽고 시작했는데, 다 읽고 난 후 서문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토마스 핀천이 지은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란 의미는, 이 책의 작가 서문에도 적혀 있듯, "작가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것에 있는 듯하다. 그의 초기 작품을 통해, 후학들이 그처럼 되지 않도록 진심 어린 조언도 잊지 않았다.

 

토머스 핀천은 문학과 과학의 경계에 서 있는 작가라고 책소개에서 보았다. 그를 찬사하는 말 중 하나가 "영어로 글을 쓰는 현존 작가들 가운데 최고"였는데, 막상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도저히 토머스 핀천이란 작가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었다. 1950년대의 무지에서 오는 시대적인 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세계는 나와는 달라, 마치 내가 그보다 한참 아래 있는 어떤 땅에서 서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너무 고차원적이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곳에 서식해 있다. 그의 은둔생활은 그런 면에서 더욱 더 신비롭게 느껴진다.

 

전쟁과 전쟁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라 그랬을까. 그의 작품에서는 유독 '허무함'이 많이 느껴졌다. 그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어찌 보면 저항과도 같은 허무였고 또 어찌 보면 모든 것을 포기하는 허무처럼 느껴졌다. <이슬비>에서 러바인은 허리케인에 의해 죽은 시체를 수습하면서 죽음에 대한 어떤 저항을 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그이상으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데, 죽음에 대한 무기력에서 오는 허무가 아니었나 싶다. 반면에, <로우랜드>에서 플랜지는 아내에게 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집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폐차장에 가서 만난 집시 소녀에게 이끌려간다. 그가 자율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가, 생각하면 의문이 들 만큼 그가 수동적으로 느껴졌다. 젊음을 잃어가는 중년의 나이에서 그는 무기력을 느꼈던 것일까. 싱그러운 젊음을 잃어가면서, 아내에게 대들지 못하는 그런 나약함에 질려버린 것일까. 젊었을 때, 바다에 나아갔던 것을 회상하며 그는 바다를 바라본다. 바다는 그의 환상이며 그의 인생이다. 그리고 그가 만난 소녀는, 마치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어느 것이 환상이고 어느 것이 실재인지 모르는, 그 경계 사이에서 토머스 핀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오래도록 고민했다. 삶과 죽음에서 떠도는 것이 인간의 생이라면 무엇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해준 책이기도 했다. 비록 나는 토머스 핀천을 처음 접하긴 했지만 그의 초기 작품, 아니, 그의 작품 세계의 문을 열어준 이 책을 읽게 된 것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어떤 작가의 작품을 접하는 것에 있어서 초기 작품은 때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무엇을 주로 읽고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알게 해주니까 말이다. 이 책에서 토머스 핀천의 군대에 있던 시절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마지막 해설에서 보니 은둔자처럼 살아왔다고 하는 기이한 행적이, 그의 존재를 마치 소설처럼 환상과 실재 사이에 끼어 있게 했으니 말이다. 그런 은둔 생활이 그의 작품에 환상과 현실을 섞이게 했던 것일까.

 

<엔트로피> 역시, 모호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엔트로피가 무엇인지 몰라 사전의 힘을 빌렸다. 이 작품은 특이한 구성을 갖고 있다. 3층에서 시끄러운 음악과 술과 정신 없는 파티를 하고 있고 4층에서는 어떤 질서에 확립된, 어떤 완벽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혼돈과 질서는 딱 분리된 뉘앙스를 풍겼고 마지막에 창문이 깨졌을 때 두 세계는 어떤 균형적인 감각을 맞추려는 시도를 보인 것만 같았다. 뒤에 역자의 해설과 함께 작품을 곱씹으며 소설의 제목인 엔트로피와 함께 소설의 내용을 가늠하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어려운 작품이었다. 분리된 두 세계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겠는데, 그것이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엔트로피의 정의인지도 확실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3층에서 일어나는 시끄럽고 무질서한 파티가 현실처럼 느껴진다면 4층에서 일어나는 새의 죽음을 막으려는 한 학자의 시도는, 환상처럼 느껴졌다. 이처럼 내가 본 토머스 핀천의 작품은, 환상과 실재로 번갈아가며 보여지고 있었다.

 

<언더 더 로즈>는,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더 재미있게 읽힐 것만 같은 단편이었다. 어떤 세대의 전환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스파이, 음모, 나름의 위트가 있어서 흥미로운 작품이라 생각된다. 몰드웝이라는 독일인 첩자는 전설처럼 느껴져 이 작품은 신비롭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토머스 핀천이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안개 속에 무언가 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조금 답답하다.

 

하지만 <은밀한 통합>은 무척 좋았다. 이 작품을 읽고 나서야 토머스 핀천의 작품관이 뚜렷해졌다고 느꼈다. 그는 무질서 속에서 어떤 조화를 찾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죽음과 삶의 혼돈에서 그 둘을 똑바로 바라보고 양립하려는 작가의 고심이 담겨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혼돈 아래, 팀과 그 친구들이 칼이라는 상상의 흑인 소년을 만들어내 '통합'을 이끌어내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른들에 대항하는 철 없는 소년들의 모습은 흑인 칼 매카피를 만나면서 그 목적이 더욱 뚜렷해지지 않았나 싶다. 그들이 말하는 스파르타쿠스 작전이란, 결국 노예제도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인 스파르타쿠스처럼, 어른들에 대항하여 인종차별에 대한 비난을 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어른들에게 패배를 했던 것일까. 공장이 다시 원래대로 가동되고, 마지막에 집으로 돌아가 안전할 수 없는 꿈자리로 들어가게 되었단 구절은, 결국 그들은 어른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되리란 암시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토머스 핀천의 초기 작품 네 작품과, 마지막에 수록된 <은밀한 통합>을 보며 토머스 핀천이란 작가세계가 통합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죽음, 혼돈, 허무와 같은 감정들은 어느 순간 빛과 희망과 조화와 같은 감정에 뒤섞였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남은 것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이다. 이 무기력 앞에서 다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저항할 것인지, 순응할 것인지. 토머스 핀천이 내게 준 답을 이랬다.

 

 

 

바다는 물결치긴 하지만 어떤 견고함을 갖고 있어서, 수평선으로 쭉 펼쳐진 회색 혹은 연한 청록색 사막과 황무지가 되곤 한다. 그래서 구멍줄을 따라 포면 위로 걸어나갈 수 있을 것 같고, 텐트와 충분한 식량만 있다면 그 길을 따라 이 도시 저 도시를 여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로니모는 이것을 메시아 콤플렉스의 특이한 벼녕으로 간주해, 플랜지더러 그러한 시도를 하지 말라고 아버지처럼 충고했다. 하지만 플랜지에게 그 광활한 흐린 유리 같은 평원은 단 한명의 인물만이 완전성을 향해 성큼성큼 가로질러 가도록 되어 있는 일종의 로우랜드였다._90~91페이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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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devous 2014-06-15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우랜드 발췌문 보니 악명 높은 '핀처네스크' 문체가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플랜지에게 그 광활한 흐린 유리 같은 평원은 단 한명의 인물만이 완전성을 향해 성큼성큼 가로질러 가도록 되어 있는 일종의 로우랜드였다' 로우랜드가 어떤 곳인지 모르겠지만 가고 싶게 만드는 핀천 필력의 힘^^

뒤팽 2014-06-16 08:49   좋아요 0 | URL
저는 토머스 핀천이 어려웠어요ㅠㅠㅠ 근데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니까 핀천 작품이 대개 다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은밀한 통합>은 반전이 있는지는 해설을 보고서야 아~~ 했구요. 그래도 <은밀한 통합>과 <로우랜드>는 제가 어떤 인상을 남겨줬어요. 제가 느끼기에 로우랜드는, 플랜지가 어딘가로 가고 싶어하는 이상향이 아니었나 싶어요^^ 방문해주셔서 감사하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rendevous 2014-07-14 20:55   좋아요 0 | URL
우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

뒤팽 2014-07-14 21:3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윤스리 님도 저번달에 우수리뷰 되신 거 축하드려요>_< 이렇게 자주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