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작_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자선작_ 에우로파

무엇인가 들큼한 것이 벽 뒤에서 썩어가는 것 같던, 사람들의 미소와 목소리와 속마음이 모두 다른 말을 하는 것 같던 이물감이, 단순히 처음 진입한 사회생활에서 누구나 느낄 법한 주관적인 인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 P26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까다롭고 유난하고 피곤한 선택들로, 그러나 자신으로선 다른 방법을 생각해낼 수 없었던 유일한 선택들로 이루어진 것이 그녀의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새벽에 부고를 듣고 내려가며 생각했었다. 그녀의 말처럼 우릴 내려다보는 존재 같은 건 없다고, 우리를 혐오하거나 연민하거나 무관심한 존재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고. 밤의고속도로 같은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서로 찌르고 찔리며 꿈틀거린다고. 그러다 죽으면 사라진다고. 그 모든 번민, 선의와 후회가 남김없이 무로 돌아간다고. - P41
거기서 멈췄다. 더 쓸 수 없었다.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그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 무섭도록 생생했기 때문이다. 더 쓸 수 없다고 메일을 보낸 며칠 뒤 새벽, 아직 잠들기 전이었는지 친구가즉각 전화를 걸어왔다. 그럼 더 쓰지 않아도 돼. 대사는 필요 없어. 말로 못하는 걸 몸으로는 할 수 있어. 몸을 비틀고 관절을 꺾을 수 있어. 무너지고 으스러질 수 있어. 그렇게 어떻게든 다다를 수 있어.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있어. 그러니까 네가 더 쓰지 않아도 돼. 원고만 넘겨. 하지만 나는 원고를 넘기지 못했다. 오직 그 모습, 머리에 눈을 인 소녀가 관절을 꺾고 몸을 비틀고, 무너지고 으스러지는 모습만 남았다. 친구가 무대에 올릴 그것과 같을 수 없을, 내 상상 속 그녀의고통만이.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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