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영_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솔직히 프랑스어도 잘하지 못한다고 했다.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육 년을 더 산다고 한국어를 그만큼 더 잘하게 되지 않는 것처럼 프랑스에서 육 년 살았다고 해서 육 년 치의 프랑스어 실력을 자동적으로 갖추게 되지는 않는다는 논리였다. 마찬가지로 한국어 실력이 딱 육 년만큼 준 것도 아니라고 했다. - P19
그 영화는 내가 장 피에르에게서 받은 어떤 인상과 아주 흡사했다. 부서진 사물의 보이지 않는 역사. 연약한 식물 같은 내면. 평생 어떤 역할에도 적응하지 못할 것 같은, 왠지 자살하거나 정신병원에 갈 것만 같은 어색한 기운.....한 학기 내내 그는 강사나 교수라기보다는 영원히 졸업하지 않으리라 결심한 나이 많은 학생 같았다. - P20
그는 멜빌의 <사무라이>에 나오는 알랭 들롱같이 코트 주머니 속에 권총을 숨기고 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주머니에 두 손을 깊숙이 찔러넣은 채 뻣뻣하게 몸을 세우고 걸어 다녔다. 캠퍼스 안에서 학생들과 마주치면 그는 순식간에 얼굴이굳어져 걸을 때부터 이미 굳어 있었지만) 멈칫하고는, 꽉 쥐고 있던 권총을 슬그머니 내려두듯 주먹을 풀어 침착하게 손을 뺀 다음, 어지럼증이 나서 균형을 잡으려는 사람처럼 땅바닥을 누르는듯한 손짓을 하며 알은척을 해주었다. - P21
오래된 기억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면 그 시절에는 아직 아무 일도 없던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른 새벽의 고요한 거리처럼. 아무도 해치지 않은 푸른 공기를 들이마시며 길을 나서는 것처럼. 어쩌면 그때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어진다. 아직 노트르담이 불타지 않았고, 배는 침몰하지 않았고, 방사는 오염도 없었으며, 북극의 빙하에도, 내 인생에도 약간은 희망이 있었던 그런 시절. 삶의 결정적 순간들과 돌이킬 수 없는 잘못들도 아직은 일어나기 한참 전인 그때. - P45
소설을 쓰는 동안 특히 즐거웠던 몇몇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그 중 가장 인상적으로 남은 것은 우연히 집어 든 책들에서 어떤 문장을 발견했을 때다. 아주 평범한 얼굴로 페이지 속에 숨어 있던 그 글자들이 어떤 단서를 암시하며 내게 다가왔을 때 느꼈던 그 미세한 전율. ㆍ ㆍ ㆍ 어쩌면 무심코 스쳐 지나가 버렸을지도 모르는 백 퍼센트의 무엇. 그런 우연들을 주저하지 않고 따라 나선 것을 지금도 기쁘게 생각한다. 마법 같았던 그때의 그 느낌은 이제 조금 빛이 바래서 소설 말미에 달린 각주를 통해서만 자신의 흔적을 남겨 놓았을 뿐이다. 문장들은 원래 그 자리에 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익숙하게만 느껴진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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