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되는 일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후회되는 일은 장만옥을 만나러 가지 않은 일이다.

그때 왜 그토록 용기가 없었을까? 치파오 복장을 보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어쩌다. 등려군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들려도 마음은 그때로 돌아가는데 만나면 말하려고 영화 속 대사를 수없이 외워 지금도 현지인처럼 말할 수 있는데.]
“我想 每天 正开眼睛 都 看到妳 ” 워시앙 메이티엔 쩡카이얜찡 떠우 칸 따오 니. p122

1000% 공감하는 글이다.

1989년 1월 대만과 홍콩을 다녀와서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북경어가 아닌 대만표준어였다.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언어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일취월장, 괄목상대의 실력을 발휘하면서 1년6개월만에 일기를 중국어로 쓸 수 있었고 매일밤 100 여명의 홍콩배우들의 이름을 한자로 쓰면서 잠들었다.
1991년 타이페이는 한번 더 다녀왔지만 1992년 대만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번체자 주음부호에서 간체자 한어병음으로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다.
반복보다 좋은 학습은 없다.
내가 중국어를 배운 이유는 오직 하나, 유덕화가 한국에 오면 통역사로 그의 옆에 서 있기를 꿈꾸면서.
華仔天地의 국제팬클럽회원도 되었다. 지금의 아미들 못지 않은 열정으로.
그러나 잠실체육관, 유덕화의 첫 콘서트 무대와 나와의 간격 150m의 거리를 끝내 좁히지 못했다. 찰랑찰랑 긴생머리를 좋아한다고 해서 십수년을 유지했다.
후회되는 일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후회되는 일은 유덕화를 만나러 홍콩에 다시 가지 않은 일이다. 낼모레 환갑인데 아직도 ‘화華‘ 자만 봐도 심쿵심쿵하는데 말이다. 동시통역도 가능했던 능력은 출산후 소멸해 버렸고 이제는 겨우 하고 싶은 말만 할 수 있다.
배운 중국어로 수 많은 중국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내가 진정한 유덕화의 연인이라 인정한다.
나는 아화메이 다. 我是阿华妹。

不要问我一生曾经爱过多少人?
나에게 묻지마세요 일생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랑했었는지?
我一辈子只爱一个人,就是您。
내 일생 사랑한 사람은 당신 하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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