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높이 아름답게>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필요하다!

자기 존재를 감추고 무화하는 법을 터득했다. 숨어서 공부했고 숨어서 성당에 나갔고 숨어서 일을 꾸몄다. 그 은신술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마리아가 파독 간호사를 지원해 독일로 떠난 후 사흘이 지나도록 집안에서 그녀의 부재를 눈치챈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죽기 전까지도 숨어서 약을 먹고 주사를 놓았으므로 마리아가 죽을 만큼 아프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 P88
마리아가 지난주에 신부님 드시라고 가져다준 밑반찬이 아직 냉장고에 남아 있는데 그걸 만든 당사자가 더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반찬통에 든 반찬처럼 마리아도 곧 관에 들려니 생각하다 ㆍ ㆍ ㆍ 찜찜해졌다. - P95
죽을 때까지 마리아에게 은밀한 기쁨이 하나 있었다면 그건 태극기를 팔러 가는 일이었다. 살기 위해 무엇이든 떼다 팔던 시절, ㆍ ㆍ ㆍ 열아홉 살의 마리아가 미지의 나라인 독일로 출발하는 순간에 보았던, 태극기가 무수히 펄럭이던 장면의 뒤늦은 효과인지도 몰랐다. 현란한 태극 무늬와 검은 괘의 점선들은 그 당시 마리아의 가슴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희열과 공포를 그대로 찍어 인화해놓은 듯했다. - P105
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 ㆍ ㆍ ㆍ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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