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평화 - 자연과 놀고, 사람과 놀고, 역사와 놀고, 노래와 놀며 캐낸 평화 이야기, 평화의 상상력
홍순관 지음 / 탐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예로부터 인간이 꿈꾸던 세상은 아주 평화로운 곳이었다. 동양의 신선들이 산다는 무릉도원이 그러하고, 기독교인들이 꿈꾸던 천국이 바로 그런 곳이다. 이는 인간이 평화를 갈망하는 강한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시기보다는 전쟁이 벌어진 시기가 더 많다. 비록 휴전이라곤 해도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잘 모를 수 있지만 아프리카와 같은 지역에서는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어린 아이들이 총을 들고 싸우고 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참극이 여전히 이 지구상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류는 항상 전쟁과 함께 해왔다.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왜 이렇게 모순 적인 역사를 만들어 왔을까? 우리가 자랑하는 인류의 문명과 발전이라는 것은 상당수가 전쟁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특히 의학의 경우가 그렇다. 문명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것도 인간의 주된 특성 중 하나이니 따지고 보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평화를 갈망한다. 문명과 인류의 발전이라는 것도 평화가 보장되어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가 지금까지 저질러 왔던 실수 중 최악의 사건을 거친 다음 인류는 UN이라는 국제기구를 세우고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해왔고 지금도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전쟁의 소리는 멈추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 역시 터지지 않았을 뿐 언제든지 평화가 깨질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왜 전쟁이 멈추지 않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언제나 공동체를 만들어 왔으며 그 덕에 다른 동물들과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이 공동체가 커져서 최종적으로 국가라는 형태까지 갖추게 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공동체가 커지면 개인은 물론이고 집단, 지역 간에 이해관계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보니 같은 국가 내에서 서로 부딪히는 일이 생긴다. 때문에 과거 군주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강력한 법을 만들었으며 또 종교의 힘을 빌어 민심을 안정시키고 결속하여 국가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방법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모습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유지된 평화는 최소한의 평화에 불과하다. 어디까지나 공존만 가능할 뿐 이들이 진정 평화를 누린다고 볼 수 없다. 물론 전쟁 중인 상황보다야 훨씬 낫다. 하지만 언제나 깨어질 수 있는 또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척하는 세상이 인간이 꿈꾸는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은가?

 

우리 학급도 마찬가지다. 평화샘 프로젝트를 도입하고 나서 직접적으로 괴롭힘이 있거나 왕따를 시키거나 또는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면을 보면 여러 가지로 갈등이 존재하고 있으며 학급이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지 못하다. , 공존은 가능하지만 서로 어울리는 그런 평화를 만들지는 못한 것이다.

 

책의 저자 홍순관 님이 말하는 춤추는 평화는 그런 최소한의 평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평화란 좀 더 적극적인, 각자의 색깔이 어우러진 조화와 배려, 상호존중이 넘치는 비유하자면 비빔밥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가 인간과 세상에 대해 매우 섬세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쌀 한 톨의 소중함. 쌀 한 톨에 우주가 담겨있다는 이야기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쌀 한 톨에 우주가 담겨있다면 우리 인간은 얼마나 존엄한 존재란 말인가? 이렇게 존엄한 존재가 이익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과 세상을 해코지 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우리 세상이 그러하다.

 

경제학의 기본 법칙인 수요-공급법칙에 따르면 수요가 많고 공급이 적으면 가격이 오르고, 수요가 적고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내린다고 한다. 이는 희소성의 법칙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데 사람이 많아진 반면 사람이 필요한 부분은 적어진 탓인지 인간이 귀히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같은 국가에 산다고 해서 다 아는 사람은 아니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숫자로 환원되고 기계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모습을 보면 왠지 씁쓸하다. 저자가 지적하는 상업주의에 물든 세상이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이다.

 

오늘날 극단화되어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이 상업주의는 모든 가치를 화폐로 환원해버린다. 인간도 화폐로 그 가치가 결정된다. 타고 다니는 차에 따라 사람 대접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는 너무 흔하지 않은가? 10개 교과에서 유독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만 강조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대학진학과 관련되기 때문 아닌가?

 

이러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황금만능주의를 신봉하게 되고 돈만 벌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려고 한다. 화폐로 통일된 세상. 어떻게 보면 그 때문에 국가가 유지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세상은 평화롭지 못하다. 겉보기에는 다툼 없이 공존하고 있지만 서로 시기·질투하고 다른 사람과 경쟁해서 이기는 사람만 모든 것을 가지는 승자독식 사회가 평화롭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전교1등을 못했다는 황당한 이유로 자살하는 어린 영혼들이 생기는 지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는지 의문이다.

 

저자의 말만 따라 이익을 쫓아서는 평화를 만들 수도 누릴 수도 없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고 불필요한 것을 비운 사람만이 평화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 여유 있는 사람과 바빠서 여유 없는 사람을 돌아보자. 여유 없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과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

 

 

지난번에 예비군 훈련을 받으면서 안보 강연을 들었는데 강정 해군기지 이야기도 나왔다. 강사 분은 북한과 일본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서 해군기지가 필요하다며 이를 막는 사람들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계속 강조하였다.

 

나는 해군기지가 필요하다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주도가 평화의 섬이라는, 구럼비 바위가 천연의 자연보고라는 반대 논리는 힘과 힘이 맞부딪히는 국제 사회를 헤쳐 나가야 하는 입장에서 너무 원론적이고 무의미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일단 공존이 가능하려면 안타깝지만 힘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평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얼마나 쉽게 뭉개지는지 확인하였다. 세계가 통합된다면 모를까 국가가 최대단위인 지금 힘을 갖추는 것은 자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 해군기지를 굳이 강정에 만들어야한다는 논리 역시 원론적이고 반민주적인 이야기다. 지금 언론에서는 해군기지만 가지고 이야기할 뿐 왜 해군기지를 강정에 건설해야하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군사학적 지식을 갖추지 못한 입장에서 이에 대해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해군기지 건설을 찬성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필 꼭 강정에 건설해야 하는가?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면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쯤은 묵살해도 되는 것인가? 이러한 논리가 계속 확장되면 그게 바로 파시즘이다.

 

평화를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필요하다. 상호간의 존중이 있을 때 비로소 배려와 나눔이 있을 수 있고 진정한 하나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하나를 위한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 나도 학급을 그런 공동체로 만들고 싶다. 나는 본래 자유주의자이고 개인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못했지만 그동안 보지 못했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보이는 이상 본래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방향이 옳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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