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소녀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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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은 역사 속에서 언제나 같이 해온 사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을 다 제외 시켜버리면 무엇이 남을까? 인간이 자랑하는 문명이란 것도 전쟁의 틈바귀에서 빠르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전쟁이란 것은 인간에게 있어 떨궈내고 싶어도 떨궈낼 수 없는 그런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동안 있었던 역사가 다시 되풀이되어야 한다는 어떤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도둑질이 항상 있어왔다고 해서 도둑질을 용납해서야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전쟁 역시 비록 인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사라지기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반드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위험한 행위다.

 

이 책 <나무소녀>는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책이다.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얼마나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지 이 책은 고발하고 있다. 나무소녀가 겪는 책 내내 계속되는 비인간적인 경험들은 인간이 환경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 사악해질 수 있는지 뼈저리게 보여준다.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전쟁이란 힘의 균형이 깨졌을 때 일어난다. 평화주의자들의 일각에서 대두되는 ‘군대무용론’이 얼마나 허접한 이론인지는 상식만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 군대가 있어서 전쟁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있기에 군대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군대무용론’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무책임한 제안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은 왜 폭력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이 책만큼 한 국가단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어느 단위든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존재하고 있고 기회가 된다면 폭력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폭력에 의한 지배욕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차별화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만약 자신과 같은 평등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지배욕이 있다 하더라도 상대를 인정하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보면 대다수가 강자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고 대다수가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행한 폭력을 자연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고 남이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1)에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폭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전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의 ‘라티노’라고 불리는 기득권층은 이러한 행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인디오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기득권을 사용하여 이들을 착취한다. 아마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니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그런데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인종차별은 흔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의 수준이 높아지고 인권에 대한 민감성이 높아지면서 이러한 차별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정리해보자. 전쟁이란 따지고 보면 인간에 대한 차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자신의 우월성을 선포하는데서 비롯한 것이다. 이를 축약하면 ‘선민사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선민사상’의 무서운 점은 이게 어떤 사상, 신념체계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는데 있다. 자신의 것만 소중하다, 중요하다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는 셈이고 언제든지 폭력으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2)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히틀러에 의한 인종청소 사건이다. 히틀러는 아리안 인종[독일인]이 가장 우수하며 다른 인종은 열등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집시, 유대인들은 쓰레기 인종으로 반드시 멸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실천에 옮긴 것이 아우슈비츠, 즉 홀로코스트다.

 

히틀러만큼은 아니더라도 유럽 열강의 지배자, 시민들은 대다수가 백인들이 황인, 흑인보다 우월하다고 여겼다.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은 아직도 존재하며 아이러니컬하게도 일제의 차별을 겪은 우리나라에서는 동남아인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이 존재한다.3)

 

총칼로 이루어지는 폭력만이 폭력이 아니다. 편견과 차별로 인한 폭력은 어디에서든 일어나고 있다. 최근 대두되고 있는 다문화에 대한 증오 역시 편견과 차별로 인한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는 매우 우려되는 움직임이다.4)

 

일단 전쟁이 시작되고 지속되면 인간은 광기에 휩쓸리게 된다. 시위자들과 맞서는 전경들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일단 아군이 다치기 시작하면 정의, 도덕 같은 관념들은 힘을 잃게 된다. 중요한 것은 생존이며 일단 이기는 것이 중요해 진다. 평화란 말은 바닥에 쳐 박히며 생존이라는 가치 앞에 인간의 존엄은 사라진다. 가브리엘라는 그녀가 겪은 험하고 끔찍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홀로코스트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많은 유대인들은 대다수가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잃어버렸다고 한다.5)

 

이러한 일은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다. 우리는 돈 앞에 인간의 생명이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것을 모른 척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돈만 벌면 장땡이라는 생각에 휩쓸려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우습게 여긴다. 우리와 ‘라티노’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평화로운 사회란 인간의 존엄이 우뚝 선 사회를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사회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훌륭한 ‘시민’이다. 민주주의는 그에 걸 맞는 ‘시민’에 의해 유지된다.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소수에 의한 참주정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이미 자본의 족쇄에 사로잡혀 자본을 많이 축척하고 있는 자본가를 우러러보며 자본의 먹이그물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소외받고 있으며, 문제를 제기하면 탄압받는다. 뭐, 노동자 계급[블루컬러]의 사람들도 자기 자식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차별과 비인간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의 연대만이 사람을 차별하려는 시도와 이로 인한 비인간화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연대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교육이다. 인간의 긍지와 자존심을 길러줄 수 있는 교육만이 연대를 가능하게 하고 연대가 차별을 위한 모든 시도를 막을 수 있다. 그렇다면 현 한국 교육은 과연 인간의 긍지와 자존심을 길러주고 있는가? 아니면 자본이 원하는 숙련된 노동자만을 ‘생산’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사상으로 이 사상의 원류인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이라는 논문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인간의 이기심에 의한 발전에 초점을 둔 것은 그 당시에 획기적인 일로 오늘날까지 인류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러나 어느 사상이든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지 인간이 사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무조건 지켜야한다는 율법주의자들처럼 현대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은 경쟁, 기업의지를 교리처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6) 그 결과는 양극화 및 세계경제 침체다. 경쟁이 극심해지면 사람들의 경쟁력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떨궈지기 시작한다. 이런 사람들은 소비능력이 없을 것이고 가면 갈수록 소비능력이 있는 사람은 줄어든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밥을 몇 끼 먹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사회의 소비력 자체가 줄어든다는 것이고 이는 자본의 순환이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종적인 결과는 대공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매력에 홀려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의 위해 봉사해야하는 자본에 스스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대다수다. 과거 이라크 전쟁 당시 부시의 이라크 공격에 찬성하는 미국인이 대다수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이들이 이라크 공격에 찬성한 이유는 정의 실현보다는 기름값 때문이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칠 수도 있다는 사고방식에서 전쟁을 지지했다는 이야기다.7)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189쪽에서 가브리엘라는 마야인들의 삶과 그링고들의 삶을 비교한다. 땅과 하늘과 자연이 주는 혜택으로 이루어진 가브리엘라의 마을과 자기들이 만들어낸 물건들로 둘러싸인 미국의 도시. 어느 것이 더 매력적이고 인간적인가? 지나친 개발로 염증이 난 현대인 입장에서 아마 전자가 더 매력적일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사고의 전환은 필요하지만 극단적인 인공주의에서 다시 극단적인 자연주의로 갈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에릭 호퍼는 자연이 우리 인간을 도와주고 인도한다느니, 자연은 마치 어머니와도 같아서 그 현명한 계획을 인간이 실현하도록 북돋아주고 밀어준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면 왠지 역겹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것도 그럴 것이 인생의 대부분을 부두 노동자로 살았던 에릭 호퍼에게 자연은 언제나 고통을 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큰 관심이 없다. 자연주의자들이 찬양하는 자연은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자연이다. 이들이 자연을 찬양하는 모습은 과거 선비들이 정자에 앉아 자연이 아름답다고 시를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다. 실상 그들이 그렇게 편하게 자연을 예찬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일반인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들은 이를 외면하거나 아니면 모른다. 자연주의도 인간의 삶에서 구현되어야지 이를 교리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세계 어디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나무소녀 가브리엘라가 겪은 전쟁도 참혹한 것이지만 이 지구상에는 이보다 더 참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아프리카의 경우 군벌들의 경쟁으로 힘없는 사람들은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경우가 흔하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나무소녀보다는 훨씬 나은 사회와 환경에서 지내고 있지만 여전히 차별은 존재한다. 마리오의 말처럼 우리가 싸워야 할 적과 치러야 할 전쟁은 한 둘이 아닌 것이다. 삼성의 백혈병 노동자들은 여전히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고 쌍용차 문제도 해결이 안 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 역시 현존하며 최근에는 남성연대라는 기괴한 단체도 나타난 상태다.

 

불합리와 부정의가 판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앞으로 더 나은 세상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살펴보면 인류의 역사는 계속해서 진보해 가고 있다.

 

가브리엘라는 마을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동안 외면한 자신을 저주하며 다시는 나무에 오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에 자신을 제한시키는 것은 결국 자신을 가장 크게 저버린 행동이었다. 이를 깨닫는 것은 책의 끝 부분에서인데 가브리엘라는 결국 부모님과의 약속을 기억하며 수용소로 다시 되돌아간다. 그러나 이는 후퇴가 아니며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볼테르의 말처럼 자기 정원을 가꾸어야 하며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전진해야 한다.8) 그리고 언젠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바로 자신의 손으로.



1) 자신의 말이 옳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이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말이 옳고 이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2) 자신의 생각에 신뢰를 보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자신의 생각‘만’ 신뢰한다는 것.

3) 반대급부로 백인에 대한 근거 없는 환상 역시 존재한다.

4) 독일에서도 새로운 세력, 네오나치가 등장했다.

5) 이것은 나치의 전략이었다. 같은 지능을 지닌 사람을 죽이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나치는 고의로 유대인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수용소를 꾸몄고, 빅터 프랭클 같은 특별한 사람 외에 상당수가 희망과 인간의 존엄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즉, 짐승처럼 될 수밖에 없었다.

6)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원류인 하이에크는 ‘공정한’ 경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기업의 부당한 행위를 경계했다.

7) 우리나라도 할 말이 없는데 아직도 베트남에 대한 사과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8) 그러나 과거를 그냥 묻어두는 것은 옳지 않다. 과거에 얽매이는 것은 문제지만 과거에 있었던 문제들을 그대로 묻어두는 것 역시 문제다. 제대로 된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전진하는 것은 진보라기 보다는 퇴보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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