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칠 수 있는 용기 - 출간 10주년 증보판
파커 J. 파머 지음, 이종인 옮김 / 한문화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날 자본주의라는 경제사상은 정치, 문화, 심지어 교육에까지 침투되어 여타 물건은 물론이려니와 이제는 사람까지도 수치로 판단하게 만들고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물론 인간의 속성 중에 숫자로 파악할만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봐도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이 일을 잘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조금 더 있다는 것일 뿐이다.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들은 숫자로 파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은 숫자에 집착하다 못해 견디지 못하고 자살까지 택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아무리 스펙을 쌓아도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삶과 죽음 중 죽음을 택하는 것은 이제 절대로 있을 수 없다거나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이제는 사회문제로 공동체 차원에서 나설 문제인 것이다.

 

교사들 역시 숫자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국가에서 진행하는 사업에 몇 명의 학생이 참석했는지, 부진아 숫자는 없는지, 전국에서 몇 등을 했는지 등등 많은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수치화가 꼭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하다면 필요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교육의 본질인가?

 

이러한 시달림에서 교사들이 교육에 대한 열정이나 제정신을 유지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같은 숫자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학생들이 미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무리가 있다. 숫자의 압박 속에 교사들은 학생들을 인격체로 대하기보다는 하나의 숫자로 대할 가능성이 크다. 비록 학생과의 마주침에서 이를 억제하려 한다 할지라도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태도는 나타나게 된다.

 

때문에 교사들은 초기에 가지고 있었던 교육적 열망이 식어가고 그 자리에 회의감, 무력감이 자리 잡게 되어 현실에 함몰하게 된다.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냉소로 대하고 별 수 없는 거라고 말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를 교사 개인에게 돌릴 수는 없다. 보다 사회적인 문제로 봐야 옳다.

 

그러나 사회문제로만 치부하는 것도 옳지 않다. 교사로서의 소명은 외부의 압력에 의해 저버리기에는 사람을 다루는 일이기에 너무 무겁다. 비록 버거워도 교사는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교사들의 딜레마를 극복하는데 파커 J. 파머는 <가르칠 수 있는 용기>라는 책에서 내면의 풍경을 가꾸는 작업을 이야기 한다.

 

그는 외부의 구조적 문제를 인정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마음활동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외부 문제만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외부의 억압에 인간은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우울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마 현실에 냉소적인 사람들도 이러한 결론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통 우리는 좋은 교구와 실력있는 강사의 설명, 문제집, 질 좋은 참고서만 있으면 학업성취가 보장된다고 생각한다. 아마 교과부의 고위 관료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에 막대한 예산을 기초학력 증진에 퍼붓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간의 역사가 증명하듯 그런 방식으로 부진아 문제는 극복되지 못했고 그에 대한 비난은 학교가 감당하고 있다.

 

물질적인, 기술적인 투자만으로는 학력을 증진시킬 수 없다. 공부란 학생이 하는 것이고 학생의 마음이 동하게 하는 게 우선이다.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가꾸기 위해서는 훌륭한 테크닉이 아니라 교사라는 존재 자체가 필요하다. 교사와 학생의 신뢰관계가 형성되고 자신의 자아를 열어 학생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교육은 비로소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야기는 허무맹랑한 미신이 아니다. 브리크와 슈나이더에 의하면 신뢰관계-교사와 행정가, 교사와 교사, 교사와 학부모 사이의 신뢰-가 일반적으로 학교의 역량을 좌우하는 최고의 결정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외적 요소들을 상쇄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그들의 논문에 실린 내용에 이러한 실험결과가 나와 있는데 1994년에 강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고된 학교가 신뢰도가 낮은 학교보다 읽기와 수학 점수에서 3배나 더 급격한 향상을 보였다고 한다. 1997년에는 신뢰도가 낮은 학교들은 일곱학교 중에서 한 학교 정도가 향상된 범주로 올라선 데 반해, 신뢰도가 높은 학교들은 두 학교 중에서 한 학교가 향상된 범주로 올라섰다고 한다.(p.23)

 

이러한 신뢰 관계는 인간의 마음활동-공감, 헌신, 동정, 인내-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 활동은 우리의 마음, 즉 내면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결론을 돌이켜보면 훌륭한 가르침의 원천은 바로 인간의 마음인 것이다.

 

현 한국 교육계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바로 수업을 잘 할 수 있는 스킬, 즉 방법론이다. 과거의 경직된 수업모형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교사들은 만능열쇠를 찾듯이 어떻게? 무엇을? ? 라는 질문에 집착한다. 이러한 집착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방법론적 환원주의로 교육의 경직화, 획일화를 불러올 수 있다.

 

그렇다고 파머가 이러한 현상을 모두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테크닉 역시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교사의 내면의 지형을 알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 누구? 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훌륭한 가르침의 원천이 바로 인간의 마음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나오는 결론이다.

 

혹자는 배움은 학생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교사가 아니라 학생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교사가 필요 없다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된다. 물론 배우는 학생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학생이 아무런 조건 없이 스스로 배우는가? 어른과 접촉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루소라면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막대하게 축적된 인류의 지식과 지혜를 아무런 조력 없이 학생 혼자서 습득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설령 가능하다 할지라도 시간낭비다. 때문에 교사의 조력이 필요하며 교사는 학생의 배움의 환경을 창조 가능한 존재라는 점에서 교사 역시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교사 자신이 학생에게 있어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요소이다. “직업은 당신의 진정한 기쁨과 세상의 깊은 허기가 서로 만나는 장소이다라는 프레데릭 뷔흐너의 말처럼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다면 그 직업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목소리야말로 진정한 소명의식이며 교사에게 힘을 주는 원천이다. 이러한 목소리와 자신을 단절시킨다면 무기력과 허무감,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며 결국 교육은 실패하게 된다.

 

공포는 학교의 조직을 지배하는 중요 요소 중 하나다. 외부에서 작용하는 권력이 학교를 다루기 위하여 택하는 것이 바로 공포다. 한국의 교사들은 이러한 공포에 굴복하지 않으면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한다. 특히 승진을 생각한다면 위의 권력에 굴복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교사들의 생태는 교실에서도 똑같이 반영되어 경력과 다른 후광으로 자신을 가리고 학생들을 공포로서 통제하게 만든다.

 

이러한 공포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교실에서 공포로서 자신을 감추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어의 권위라는 단어는 authority 인데 author은 우리말로 저자 즉, 권위의 주인을 의미한다. 권위는 권력과 다르다. 권위는 외부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의 내면에서 비롯된다.

 

내면의 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고려해 보건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간 서구 전통에 도도하게 흐르는 객관론이라는 거대담론은 이러한 내면의 힘을 부정하는 듯하다. 객관론에 따르면 우리가 사물과 관계를 맺는 것은 주관에 의해 진리를 오염시키는 행위가 된다. 때문에 사물과 거리를 두고 분석을 해야만 한다. 이러한 객관론은 과학문명을 발전시키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 한계도 명약관화하다. 객관론의 신화는 자신만이 옳다는 전제주의나 타자의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1,2차 세계대전이 바로 그것이며 그 결과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객관론의 신화를 부정하는데 힘을 기울여 왔다.

 

철학의 작업 외에서 객관론의 신화를 뒷받침해온 과학 역시 새로운 관점을 내세우고 있다. 생물학은 과거의 약육강식의 자연관에서 탈피, 상호협력과 공존의 자연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물리학은 기존의 원자론에서 벗어나 입자간의 관계와 전체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양자론이야 말로 객관론의 신화를 무너뜨리는 과학이론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지식이란 주관과 관련 없는 개념 덩어리가 아니다. 지식이란 우리가 알 수 없는 타자와의 일체감을 이루는 방식을 의미한다. ,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의 설명해야하는 대상이 있고 프로인 교사가 있으며 아마추어인 학생이 있는 객관론의 신화에 근거한 커뮤니티에서 벗어나 주제를 중심으로 무수한 인식자들이 의사소통하는 진리의 커뮤니티를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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