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미술관 - 잃어버린 감각과 숨결이 살아나는 예술 여행
강정모 지음 / 행복한북클럽 / 2022년 6월
평점 :
절판



<한낮의 미술관>은 VIATOR가 선정한 세계 10대 가이드이자 예술 여행 전문 기획자인 저자 강정모와 떠나는 한낮의 미술관 기행을 담았다. 이 책은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곳곳의 아름다운 도시와 그곳에 서린 예술가들의 지난 삶의 자취를 따라간다. <한낮의 미술관>은 유명 작품 앞에서 인증샷만 남기고 바쁘게 돌아서는 여행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삶의 언저리를 채운 열망과 사랑, 삶에 대한 애틋함과 같이 복잡하고 아름다운 감정을 따라 걷는 여행을 제안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가들의 숨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산책하듯 잃어버린 감각을 깨우는 청량함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미술 여행의 새로운 지도이기도 하고, 새로운 미술 여행 입문서이기도 한 만큼 다양한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보는 신선한 관점,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 목표인 여행을 제안한다. 기존에 미술 여행 공식 코스를 이미 경험했던 사람은 물론 다시 여행이 시작되는 지금, 미술 여행을 앞둔 사람도 두루 읽을 수 있도록 쉽고 흥미로운 미술 테마 여행만을 담아보았다.

프루스트가 말한 것처럼, 사람에게 여행이 필요한 이유는 새로운 풍경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찾고 발견하는 눈을 가지기 위해서'라고 믿는다. 미술은 모든 예술 중에서도 가장 자유롭다. 또, 미술은 시공을 초월한 또 다른 세상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마술적 경험을 선물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미술 여행은 '여행 속의 여행'이다. 누구든 이 책을 통해 여행과 예술이 주는 다층적 경험을 만끽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비로소, 이 책을 들고 자신만의 여행을 시작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저자는 극단적인 명암을 부각하며 사실을 표현하는 카라바조 화풍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르네상스 때부터 사용되어온 명암을 강조한 키아로스쿠로 기법에서 더 나아가 배경을 어둡게 만들고 인물만 부각해 극적인 효과를 자아냈다. 이처럼 극적 효과를 강조한 기법을 '테네브리즘'이라고 한다. 하지만 다양한 논란 속에서 카라바조는 그의 나이 서른아홉에 토스카나의 한 해변에서 고열로 쓰러져 사망한다. 저자는 그가 평생 빛과 어둠을 그린 것처럼, 그의 삶도 빛과 어둠의 연속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카라바조는 빛과 어둠을 사용한 극명한 대비로 기쁨, 슬픔, 분노, 고통 등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두각을 나타냈다. 이제 사람들은 균형 잡힌 르네상스의 작품에 열광하지 않았다. 카라바조의 작품 속에는 언제나 드라마가 스며 있었고, 사람들은 그 강렬함에 중독되어갔다. 훗날 그의 기법을 추종한 이들이 우리가 익히 아는 렘브란트, 루벤스, 벨라스케 같은 화가다. 그들은 카라바지스티라고 불린다. 그렇게 17세기 위대한 회화의 시대가 포문을 열었다."

"르네상스 시절 신성하고 아름답게 묘사되었던 성서 속 인물들은 카라바조에 의해 우리 삶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웃이 되어 지상으로 내려왔다. 카라바조가 살아 있는 모델을 선택한 것은 어둠을 강조하면서 빛을 드러낸 작품 세계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밑바닥에서 삶의 본질을 마주하고 그것을 작품 안에 담았다."

<한낮의 미술관>은 단순한 여행 가이드북도 하니고, 상세한 미술 작품 해석만 가득 담긴 전문 미술서도 아니다. 이 책은 예쑬가들의 작품과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조명하며 무엇이 아름답고 어떠한 삶이 가치 있는지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여행의 지도와 다름없다.

이 책은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의 다양한 미술관들과 예술작품을 소개하여 흥미롭다. 특히 세계문화유산이자 대영 박물관, 바티칸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루브르 박물관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인상적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루브르 박물관을 찾은 많은 관람객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자리자>에서 실질적인 탐방을 멈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이야기하며, <모나리자> 관람 이후의 작품들에 대해 교감하는 여행을 알려준다.

"루브르는 늘 프랑스 역사의 중심이었다. 이곳은 원래 요세로, 12세기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파리를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그 후 요새를 개조해 궁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왕의 거처가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겨지며, 왕실의 수집품을 보관하는 장소가 되었다.

왕의 거쳐였던 이곳이 파리 시민들의 장소가 된 것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다. 당시 시민 대표로 구성된 국민의회가 루브르를 '국립중앙미술관'으로 선포한 것이다. 그 후 역사의 중심이 왕실에서 시민으로 옮겨가고, 예쑬을 누리는 계층 또한 특권층에서 일반 시민으로 넓혀졌다."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레나>는 트루가 즐겨 그리던 주제가 잘 드러난 그림이다. 그는 이 주제로 네 작품을 남겼다. 그중 오늘 소개하는 작품 속의 막달라 마리아는 어깨가 다 드러난 옷을 입고 왼손으로는 턱을 괸 채 조용히 등불을 바라보고 있다. 오른손으로는 해골을 만진다. 여기서 해골은 무상한 인간사, 촛불은 자신을 희생해 세상을 밝히는 구원자 예수를 의미한다. 그녀가 촛불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난 참된 자기 자신이다. 당시 프랑스는 반종교 개혁의 움직임 속에 회개와 금욕에 대한 그림이 많이 그려지던 시기였다. 이 작품 또한 그런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피카소 미술관에서 러시아 태생의 화가 니콜라 드 스탈이 자살하기 몇 시간 전까지 작업한 작품 <콘서트>가 관람객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하는 글귀가 눈길을 끈다. 저자는 우리는 곧잘 추한 것, 고통스러운 것을 외면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것만 눈에 담으려 하지만 스탈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 관람객의 눈길을 고정시킨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인산의 모든 감정을 보여주지만 때로는 그 고통을 견뎌내지 못해 스탈처럼 삶에서 급히 퇴장해버리기도 하여, 안타까운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콘서트> 앞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작품이 뿜어내는 격정적인 감정 때문이다. 무엇을 묘사하는지 알 수 없는 추상적인 그림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사진도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지만 물감과 색채, 붓의 방향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오직 그림에서만 가능하다."

"피카소는 이곳에서 행복의 감정을 화폭에 담았고, 스탈은 죽음과 삶 사이에서 고뇌하는 격정을 표현했다. 이 대조되는 두 감정을 남김없이 느끼고 미술관을 나와 다시 지중해와 바다와 반짝이는 햇살과 마주해본다.

어쩌면 이 투명한 햇살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앙티브에서 기쁨, 행복, 슬픔, 고통 등 삶의 모든 감정을 솔직하게 느끼고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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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비트겐슈타인, 나_라는 세계의 발견
나카무라 노보루 지음, 박제이 옮김 / 독개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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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배울 수 있는 책으로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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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비트겐슈타인, 나_라는 세계의 발견
나카무라 노보루 지음, 박제이 옮김 / 독개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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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비트겐슈타인, 나_라는 세계의 발견>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쉽고 간결하게 해설한 책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자들의 언어유희를 비판했듯이 철학입문자도 지금까지 수많은 철학서와 해설서를 읽으며 좌절한 사람도 용기를 내어 책을 펼치면 배경지식이 없더라고 읽으면 읽을수록 철학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의 말을 함께 음미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는 쓸데없는 전문용어를 쓰지 않고, 진정한 철학적 질문에 맨손으로 맞선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실은 그 자신이 서양철학 세계에서는 아마추어였다. 비트센슈타인은 원래 수학과 논리학을 공부한 인물로, 전반적인 철학 교육은 전혀 받지 않았다. 철학의 지식이나 소양과는 무관한 인물인 셈이다.

그렇기에 사전 지식 없이 철학을 진심으로 이해햐려는 사람에게는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곧 중고등학생과 마찬가지 지점에 있는 철학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지식으로 대충 얼버무리려고 하지 않는 더없이 진지한 철학자라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젊은 시절에 쓴 <논리 철학 논고>에서 "세계가 어떤지가 신비한 것이 아니다.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저자는 이 감각이 철학자가 될 수 있고 없고를 가르는 갈림길이라고 말한다. 철학에 눈뜨는 감각은 알 수 없는 일투성이인 이상한 게계가 애초에 '있다'는 것에 있다. 저자는 이것은 대체 무엇인가? 왜 이렇게 되어 있는가? 이 지점에서 깊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라고 이야기한다. 왜 이 세계가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을 던저야 한다. 이 절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높은 벽에 부딪혀 쓰러져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이 세계의 존재' 그 자체에 압도당한다는 감각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꼼짝할 수 없는 감각이다. 단 한 걸음도 떼지 못할 정도로 절망적이고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세계 내부의 게임과는 전혀 다른 절대적인 감각이다. 세계라는 게임 그 자체가 날아가버리기 때문이다. 세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이 감각을 경험하고 나면 삶의 의미가 엄청난 수수께끼로 둔갑한다. 이 세계 안에서 목표를 지니고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것이 왠지 먼 풍경처럼 보인다. 이 세계 안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일까. 참 별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돈을 벌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TV나 인터넷을 보며 웃고, 학교에 가고...... 이런 모든 것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 시작한다. 바로 이것이 철학의 첫걸음이다."

저자는 비트겐슈타인은 윤리의 본질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윤리는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며 상황이나 시대, 사람에 따라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윤리'란 인간이 다양한 논의를 통해 결론 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절대 알 수 없는, 인간을 뛰어넘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공동체를 불안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든가, 거짓말을 하면 인간관계가 삐거덕거리기 때문이라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으며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된다는 말이다.

"세계의 존재, 혹은 어떤 것이든 좋지만 '존재'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하다. 존재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다. 누구에게도, 어떤 생물에도 '세계가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손을 쓸 수가 없다. 그저 '세계의 존재'에 크게 경악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렇게 놀라는 자기 자신도 그 세계의 일부이며 '자신이라는 존재' 그 자체다.

그 어떤 설명도 할 수 없는 깊이 모를 신비에 그저 아연할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러한 압도적인 경험이야말로 '절대적'인 경험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절대적인 경험은 '윤리'라고 불리는 것의 경험과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쁘다'고 말할 때의 '나쁘다'는 이러한 '절대'의 장소에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나=세계라는 입장에서 무척 명과하고 날카로운 '죽음'에 관한 생각을 제시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에서 "죽음은 인생의 사건이 아니다. 인간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영원이란 끝없이 시간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시간이라고 이해한다면, 현재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영원히 살아 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시야에 경계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다."라고 말했다.

"나와 세계는 같으므로, 나의 죽음은 세계의 끝이다. 세계 자체의 틀이 사라져서 없어지는 것이므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다. 단적으로 무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그 무를 확인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세계가 없으므로, 그렇게 되면 세계의 끝, 곧 나의 죽음을 경험하거나 확인하는 사람 혹은 존재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완전히 무인 것이다."

"우리의 시야에는 끝이 없다. 곧 우리의 시야를 외부에서 틀로 가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세계의 중심(나=세계)이므로, 나의 시야를 파악하는 다른 나의 시야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볼 수는 없다.

이것과 완전히 같은 의미에서 지금에는 틀이 없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지금이며 무시간의 틀을 이룬다. 지금은 절대 흐르지 않는다. 다르게 표현하면 언제나 지금이며 지금이 아닌 때는 어디에도 없다. 곧 삶은 지금이라는 틀 속에 있는 한 절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원한 지금으로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저자는 비트겐슈타인이 단언하듯, 이러한 자신의 내적 체험을 드러내는 표현은 결국은 '타인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언어가 아닌 것이다.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언어라면,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내는 시점에서 이미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자신만 알면 된다면 이미 말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안쪽 사정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바깥쪽 언어를 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곧 안쪽의 것은 안쪽인 채로는 대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것도 아닌 '바깥쪽 언어'로 반드시 변해 버리기에, 아니, 처음부터 '바깥쪽 언어'만이 등장한다.

"한편 누군가가 자신의 내적 체험을 (자신의 감정이나 기분 등을) 자신만을 위해 기록하거나 말할 수 있는 언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까? 그런 것이라면 우리의 보통의 언어로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언어의 낱말은 말하는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의 직접적이고 사적인 감각을 지시하는 것이다. 타인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다." - <철학적 탐구>

"우리는 무난하게 "잘 지내"라든가 "조금 힘들어" 같은 (자신의 복잡한 상태에 비하면)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말을 내뱉고는 그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다. 평소에 쓰는 말의 주고받음으로 우리는 언제나 상황을 모면할 뿐이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 대부분은 이러한 표면적이고 의식적인 주고받음으로 관철되어 있다고 해도 좋다. 이 의식적인 주고받음은 한없이 인사에 가깝다고 하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우리의 '사적인 것'은 결코 언어화될 수 없다. 만약 언어화되었다면 그것은 이니 '사적인, 자신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이것이 '모두의 것이기도 하고 누구의 것도 아닌' 말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것의 옳고 그름은 별개로 하고 말이다."

저자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문법적인 오류'에 대해 소개하며, 말의 사정에 따라 우리가 속아 넘어간다고 말한다. 말은 우리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그것만으로 성립하므로, 아무리 애써도 우리는 휘둘리기 시작한다. 저자는 우리는 날마다 '문법'이 파놓은 함정에 직면하며, 그 함정을 일일이 지적하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철학'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초등학교 때 '절친'이라는 말이 무척 싫었다. 누가 '절친'이고 어떤 친구를 '절친'이라고 부르는지 혼자서 몰래 고민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인데 그때는 '절친'이라는 말에 휘둘린 것이다. '절친'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그런 친구가 존재한다고 강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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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 윌북 클래식 첫사랑 컬렉션
이디스 워튼 지음, 김율희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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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디슨 워튼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인간에 대한 통찰이 인상적인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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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 윌북 클래식 첫사랑 컬렉션
이디스 워튼 지음, 김율희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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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순수의 시대>는 당대 미국 사회의 분위기와 풍속, 인물상을 묘파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1921년 여성 작가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뉴욕 상류층 출신 작가 이디스 워튼의 대표작이다.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상류층의 관습과 질서에 맞춰 재단된 삶과 불행한 결혼생활, 사랑의 열정과 좌절 등 자전적 요소가 배어나는 이 작품으로 이디스 워튼은 거장의 반열에 오른다.

<순수의 시대>는 1970년대 화려하고 오만한 뉴욕의 상류사회가 배경이다. 개인의 감정을 억압하는 세계에서 욕망에 충실한 행복과 사회적 의무를 놓고 갈등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전통적인 구체제와 역동적인 신체제의 대립을 절묘하게 포착해낸다. 이 책은 정신적으로는 시대를 앞서갔으나 현실과 타협한 뉴랜드 아처, 당대 사회의 요구에서 벗어난 현실을 살았으나 완벽히 자유롭지 못했던 엘런, 사회의 규범과 울타리 안에 안주하고 다른 삶을 꿈꾸지도 않았던 메이 등 뚜렷하게 대비되는 인물들이 펼치는 삼각관계와 로맨스를 만나볼 수 있다.



뉴랜드 아처는 지적이고 섬세한 심미안으로 사회와 인간의 내면을 감지한다. 모든 것이 가공된 관습과 위선으로 점철된 옛 뉴욕 사교계는 안전하지만 박제된 삶을 강요한다. 이 억압적인 사회와 획일화를 깨닫지만, 아처는 사회에 완벽히 적응하지도 못하고 사회를 변화시키지도 못하며 한계에 갇힌다. 영혼을 바쳐 사랑하는 엘런에게도, 자신의 곁을 평생 지키며 사랑해준 아내 메이에게도, 누구에게도 완전히 닿지 못한 채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그의 이상과 정신은 엘런에게 가닿아 있으나 현실과 몸은 메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순수의 시대>는 뉴랜드 아처가 엘런을 만나면서 다양한 변화와 현실적인 한계를 경험하며 성숙해가는 과정을 보여주어 눈길을 끈다.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은 모두 주어진 시대와 현실 속에서 각자에게 맞는 행복과 사랑을 추구하며, 갈등하고 선택하고 견디고 살아간다.

"올렌스카 백작 부인의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확고히 자리 잡았던 신념이 흔들렸고 그의 머릿속을 위험하게 표류했다. "여자들은 자유로워야합니다...... 우리 남자들만큼이나."라는 그의 외침은 그가 속한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로 모두가 합의한 문제의 뿌리를 공격했다. '참한' 여자들은 제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그가 말한 종류의 자유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아처 자신처럼 관대한 남자들은 한층 더 기사도적인 태도로 여자들에게 그 자유를 허용해줄 용의가 있었다. 그런 말뿐인 관대함은 사실 모든 것을 속박하며, 사람들을 낡은 행동 방식에 구속하는 냉혹한 관습을 눈속임하고 위장하는 방관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자기 아내가 그랬다면 교회와 국가의 온갖 비난이 쏟아지길 빌어 마땅하다고 여겼을 행위를 두고, 약혼자의 사촌으로서 옹호하기로 맹세한 셈이었다."

""절대....... 절대 불행해지지 말아요."

엘런이 손을 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가 견딜 수 없는 미래를 그것뿐이라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뉴랜드 아처는 조용하고 자제력이 뛰어난 젊은이었다. 좁은 사교계의 규율에 순응하는 것이 거의 제2의 천성이 된지 오래였다. 너무 감정적이거나 남의 이목을 끄는 행동, 밴더 라이든 씨가 반대하고 클럽 회원들의 박스석에서 예법에 어긋난다고 비난받을 행동을 하는 것을 혐오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클럽 회원들과 밴 더 라이든 씨, 그리고 관습이라는 따뜻한 피난처로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에워싸던 모든 것들을 갑자기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오페라하우스 위쪽의 반원형 통로를 걸어가,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문인 듯 밴 더 라이든가의 박스석 문을 열었다."

"이것은 '피를 흘리지 않고' 목숨을 빼앗는 옛 뉴욕의 방식이었다. 질병보다 추문을 더 두려워하고 용기보다 품위를 우선시하며 '난동'보다 더 교양 없는 것은 오직 난동을 일으킨 사람들의 행동뿐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방식이었다."

이 책의 끝부분에서 엘런과 헤어지고 오랜 시간이 흘러, 나이든 아처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메이와의 결혼 생활에서 낳은 아들 댈러스는 아버지인 아처와 달리 자유로운 가치관과 자신의 사랑에 충실한 인물로 자라나는 모습은 아처가 이루지 못한 희망을 담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로렌과의 만남을 앞두고도 발길을 돌리는 아처는 나이가 들고 기력이 다해 이제 변화하고자 했던 자신의 세계를 바꿀 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 과거를 돌이켜보며, 그는 자신이 판에 박힌 생활에 얼마나 깊이 물들었는지를 절감했다. 의무를 다할 때 가장 나쁜 점은 분명 다른 것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그의 세대에 속한 사람들은 그렇게 여겼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정직과 부정, 존경할 만한 것과 그 반대인 것을 철저히 구분했기에 예기치 못한 요소가 설 자리가 거의 없었다. 늘 머무는 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침잠했던 상상력이 갑자기 일상의 수면 위로 솟아올라 운명이라는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바라보는 순간이 되었다. 아처는 그렇게 공중에 떠올라 질문했다.......

그가 자란 작은 세상에, 그를 굴복시키고 얽매던 그 기준 중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짙어지는 어스름 속에서 벤치에 앉아 한참을 보내는 동안, 그는 발코니에서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창문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고 잠시 후 하인이 발코니로 나와 차양을 올리고 덧문을 닫았다.

그 모습에, 그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이 뉴랜드 아처는 천천히 일어나 홀로 호텔을 향해 걸었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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