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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 ㅣ 윌북 클래식 첫사랑 컬렉션
이디스 워튼 지음, 김율희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순수의 시대>는 당대 미국 사회의 분위기와 풍속, 인물상을 묘파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1921년 여성 작가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뉴욕 상류층 출신 작가 이디스 워튼의 대표작이다.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상류층의 관습과 질서에 맞춰 재단된 삶과 불행한 결혼생활, 사랑의 열정과 좌절 등 자전적 요소가 배어나는 이 작품으로 이디스 워튼은 거장의 반열에 오른다.
<순수의 시대>는 1970년대 화려하고 오만한 뉴욕의 상류사회가 배경이다. 개인의 감정을 억압하는 세계에서 욕망에 충실한 행복과 사회적 의무를 놓고 갈등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전통적인 구체제와 역동적인 신체제의 대립을 절묘하게 포착해낸다. 이 책은 정신적으로는 시대를 앞서갔으나 현실과 타협한 뉴랜드 아처, 당대 사회의 요구에서 벗어난 현실을 살았으나 완벽히 자유롭지 못했던 엘런, 사회의 규범과 울타리 안에 안주하고 다른 삶을 꿈꾸지도 않았던 메이 등 뚜렷하게 대비되는 인물들이 펼치는 삼각관계와 로맨스를 만나볼 수 있다.

뉴랜드 아처는 지적이고 섬세한 심미안으로 사회와 인간의 내면을 감지한다. 모든 것이 가공된 관습과 위선으로 점철된 옛 뉴욕 사교계는 안전하지만 박제된 삶을 강요한다. 이 억압적인 사회와 획일화를 깨닫지만, 아처는 사회에 완벽히 적응하지도 못하고 사회를 변화시키지도 못하며 한계에 갇힌다. 영혼을 바쳐 사랑하는 엘런에게도, 자신의 곁을 평생 지키며 사랑해준 아내 메이에게도, 누구에게도 완전히 닿지 못한 채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그의 이상과 정신은 엘런에게 가닿아 있으나 현실과 몸은 메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순수의 시대>는 뉴랜드 아처가 엘런을 만나면서 다양한 변화와 현실적인 한계를 경험하며 성숙해가는 과정을 보여주어 눈길을 끈다.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은 모두 주어진 시대와 현실 속에서 각자에게 맞는 행복과 사랑을 추구하며, 갈등하고 선택하고 견디고 살아간다.
"올렌스카 백작 부인의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확고히 자리 잡았던 신념이 흔들렸고 그의 머릿속을 위험하게 표류했다. "여자들은 자유로워야합니다...... 우리 남자들만큼이나."라는 그의 외침은 그가 속한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로 모두가 합의한 문제의 뿌리를 공격했다. '참한' 여자들은 제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그가 말한 종류의 자유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아처 자신처럼 관대한 남자들은 한층 더 기사도적인 태도로 여자들에게 그 자유를 허용해줄 용의가 있었다. 그런 말뿐인 관대함은 사실 모든 것을 속박하며, 사람들을 낡은 행동 방식에 구속하는 냉혹한 관습을 눈속임하고 위장하는 방관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자기 아내가 그랬다면 교회와 국가의 온갖 비난이 쏟아지길 빌어 마땅하다고 여겼을 행위를 두고, 약혼자의 사촌으로서 옹호하기로 맹세한 셈이었다."
""절대....... 절대 불행해지지 말아요."
엘런이 손을 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가 견딜 수 없는 미래를 그것뿐이라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뉴랜드 아처는 조용하고 자제력이 뛰어난 젊은이었다. 좁은 사교계의 규율에 순응하는 것이 거의 제2의 천성이 된지 오래였다. 너무 감정적이거나 남의 이목을 끄는 행동, 밴더 라이든 씨가 반대하고 클럽 회원들의 박스석에서 예법에 어긋난다고 비난받을 행동을 하는 것을 혐오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클럽 회원들과 밴 더 라이든 씨, 그리고 관습이라는 따뜻한 피난처로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에워싸던 모든 것들을 갑자기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오페라하우스 위쪽의 반원형 통로를 걸어가,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문인 듯 밴 더 라이든가의 박스석 문을 열었다."
"이것은 '피를 흘리지 않고' 목숨을 빼앗는 옛 뉴욕의 방식이었다. 질병보다 추문을 더 두려워하고 용기보다 품위를 우선시하며 '난동'보다 더 교양 없는 것은 오직 난동을 일으킨 사람들의 행동뿐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방식이었다."
이 책의 끝부분에서 엘런과 헤어지고 오랜 시간이 흘러, 나이든 아처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메이와의 결혼 생활에서 낳은 아들 댈러스는 아버지인 아처와 달리 자유로운 가치관과 자신의 사랑에 충실한 인물로 자라나는 모습은 아처가 이루지 못한 희망을 담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로렌과의 만남을 앞두고도 발길을 돌리는 아처는 나이가 들고 기력이 다해 이제 변화하고자 했던 자신의 세계를 바꿀 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 과거를 돌이켜보며, 그는 자신이 판에 박힌 생활에 얼마나 깊이 물들었는지를 절감했다. 의무를 다할 때 가장 나쁜 점은 분명 다른 것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그의 세대에 속한 사람들은 그렇게 여겼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정직과 부정, 존경할 만한 것과 그 반대인 것을 철저히 구분했기에 예기치 못한 요소가 설 자리가 거의 없었다. 늘 머무는 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침잠했던 상상력이 갑자기 일상의 수면 위로 솟아올라 운명이라는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바라보는 순간이 되었다. 아처는 그렇게 공중에 떠올라 질문했다.......
그가 자란 작은 세상에, 그를 굴복시키고 얽매던 그 기준 중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짙어지는 어스름 속에서 벤치에 앉아 한참을 보내는 동안, 그는 발코니에서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창문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고 잠시 후 하인이 발코니로 나와 차양을 올리고 덧문을 닫았다.
그 모습에, 그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이 뉴랜드 아처는 천천히 일어나 홀로 호텔을 향해 걸었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