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 마이어 - 보모 사진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현상하다
앤 마크스 지음, 김소정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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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의 한 창고에서 발견된 사진으로 비비안 마이어는 순식간에 '20세기 가장 유명한 사진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그가 남긴 놀라운 작품과 베일에 싸인 삶은 곧바로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비비안은 생전 자신의 과거를 워낙 깊이 감추어 그와 함께 살던 고용주들도 그가 어디서 태어나고 자랐는지, 부모나 형제자매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왜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지 않았는지, 왜 현상도 하지 않은 수많은 필림들을 창고에 그대로 방치해두었는지 누구도 답할 수 없었다. 앤 마크스는 8톤의 창고에 무질서하게 쌓여 있던 잡동사니와 작가의 개인적 기록을 샅샅이 훑고, 프랑스 시골 마을과 뉴욕의 문서 보관소를 뒤지고, 14만 장에 이르는 아카이브에 접근할 유인한 권한을 허락받아 이 미스터리한 작가의 유일무이한 초상화를 완성해나간다. 치밀한 조사와 끈질긴 추적 끝에 혼외자, 중혼, 부모의 방임, 약물 남용과 폭력, 정신 질환 등으로 복잡하게 얽힌 가족사를 밝히고 있으며, 그 굴레에서 빠져나와 독립적이고 진취적으로 자기 삶을 구축해나간 한 용감한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책 <비비안 마이어>는 세상과 끊임없이 거리를 두면서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세상을 그렸던 예술가, 비비안 마이어가 평생 무엇을 위해 싸웠고, 무엇을 향해 나아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지적이었고, 창의적이었으며, 열정과 안목이 있었던 비비안은 인간의 보편성을 보여주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방대하고도 광범위한 작품을 남겼다. 비비안 마이어라는 인물의 복잡한 내면에 다가섬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그가 남긴 작품의 진정한 가치, 그가 작품을 통해 세상에 전하려 했던 그 깊고 내밀한 이야기에 다가갈 수 있다. 책에 실린 사진은 비비안 마미어의 초기 작품부터 대표작을 아우르며, 그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주제와 기술, 장비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가장 친절한 해설처럼 다가온다. 비비안 사후의 작품 소유권과 처리 방법을 둘러싼 논쟁 및 그에 얽힌 오해들까지 풀어줌으로써 비비안 마이어의 팬들이 그의 작품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비비안 도러시 마이어는 1926년 2월 1일에 망가진 가족의 일원으로 합류했다. 비비안의 출생증명서에는 아버지 이름은 찰스 마이어라고 기록되어 있었고, 어머니는 도대체 어디에서 가져와 썼다가 버렸는지도 모를 성을 붙인 마리 조소 저스틴이라고 적혀 있다. 비비안과 오빠인 칼은 아버지와 헤어졌으며, 서로와도 떨어져 자라야 했다. 훗날 비비안은 고용주에게 자신은 어머니에게 한 번도 제대로 돌봄을 받을 적도 없고, 그런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비비안의 외할머니인 외제니가 세상을 떠난 뒤, 스물네 살이던 비비안은 프랑스에 이모가 남긴 재산을 정리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1950년 4월에 보르가르 농지를 팔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비비안은 프랑스에서 초점과 원근감을 이용해 전경과 배경을 다양하게 바꾸면서 사진 속 시각적 효과를 강렬하게 구혔했다. 비비안이 인화된 사진 가운데 절반가량이 프랑스에서 찍은 사진으로, 이 때 찍은 사진들은 오랫동안 비비안이 방에 전시한 유일한 작품이기도 했다.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사진작가는 날카로운 봉우리, 깊은 계곡, 거친 시골 지역을 흐르는 구불구불한 시내를 향해 자신의 렌즈를 들이대며 자연광과 그림자, 반사를 끈질기게 연구하고 실험했다. 태양와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려고 같은 풍경을 여러 번 거듭해서 사진에 담았다."



비비안은 보모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왔다. 보모 일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남는 시간에 사진 기술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비비안이 순수한 것, 뒤틀린 것 모두에서 아름다움을 찾았고, 사람들 대부분이 신경 쓰지 않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였다고 말한다. 쏟아질 듯 풍성한 꽃도, 넘쳐 흐를 것 같은 쓰레기도 모두 사진에 담았다. 추레한 공동주택이 잔해와 뒤엉켜 무너지는 동안 전후에 세워진 반짝이는 빌딩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대칭, 패턴, 질감은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비비안이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한, 비비안의 작품을 이루는 기본 요소였다. 이 책에서 뉴욕에서의 비비안의 초기 작품들이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프랑스에서 가져온 박스 카메라를 들고서 비비안은 높은 산봉우리가 아니라 지붕을, 시골이 아니라 도시의 풍경을 담았다. 이전 실험을 바탕으로 위와 아래를, 그림자와 빛을 촬영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동안 다리를 받치고 있는 외팔보, 고가 철도를 지탱하는 교각, 고층 빌딩을 뒤덮은 똑같이 생긴 창문 구조물이 계속해서 비비안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저자는 비비안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타인과 함께하는 능력을 발전시킬 기회를 얻지 못하고 결핍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지만 작업에서만큼은 인간의 애정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비비안은 이 주제를 가지고 젊은 연인 뿐만 아니라 아이와 친구들 사이, 그리고 흔히 간과되곤 하는 노인들 간의 유대감도 다채롭게 기록했다. 그리고 사소한 몸짓이 불러일으키는 친밀감에 주목했다. 어디에서 사진을 찍든, 비비안의 촬영분 일부는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비비안이 값비싼 최고급 카메가 롤라이플렉스를 장만하며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롤라이플렉스는 비비안의 영감과 재능에 잘 어울리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 카메라였다. 비비안의 밀착인화지는 1953년 8월에 비비안이 갑자기 뉴욕으로 돌아온 가장 큰 이유가 사진 기술을 익히고 직업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전 해 여름에 롤라이플렉스를 장만하면서 꾸기 시작한 꿈을 더욱더 밀어붙인 것이다. 1954년 한 해 동안, 사진은 비비안의 인생에서 중심을 차지했다. 훗날 비비안은 이 시기를 가리켜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나이는 스물여덟 살이에요. 요령을 알고 문제에 휘말리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성숙하면서도 젊음의 에너지도 있어,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탐험할 수 있는 나이니까요."라고 했다.



저자는 1955년 상반기에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사진부장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기획한 <인간 가족전>이라는 전시는 비비안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 전시회에서 비비안이 이제 막 탐구하기 시작했던 기술들이 풍성하게 소개되었고, 다루는 소재도 비비안의 관심 분야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전시회에서 광범위하게 다룬 주제는 어머니와 아이들 사이의 유대감이었다. 비비안은 이런 내적 유대감에 깊이 매혹되어 있음을 자신의 작품으로 보여주었고, 다양한 방식으로 그 이끌림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비비안은 자신의 삶에 비어 있는 부분에 자연스럽게 끌린 것이다.

"인생의 모든 시기와 모든 측면을 다룬 <인간 가족전>은 비비안의 아카이브에 비어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시회에서 보이는 전통적인 대가족의 삶을 묘사한 작품 같은 것은 비비안의 아카이브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비비안은 가족사진에 아버지를 끼워넣는법이 없었으며, 사실상 미소 짓거나 웃고 있는 남자, 아이들과 놀아주는 남자는 없었다고 봐도 된다. 이러한 부재는 잘 알려진 비비안의 어린 시절 경험과도 일치하며, 그 경험이 사진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저자는 어디를 가든지 비비안은 늘 주목을 받았지만, 비비안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도, 비비안을 이해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프랑스 시골의 감성과 도시의 세련미, 엄청난 창의력과 지적 자원, 어렸을 때 겪은 깊은 트라우마 같은 이중적 요소들이 비비안을 복잡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 모든 요소들이 한데 뭉쳐 동기와 행동을 파악하기 힘든, 비비안 마이어라는 독특한 인물을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비비안이 처한 사항을 고려하면 그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입을 다물고 사람들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상황에서 사진이 비비안의 감정 배출구 역할을 한 것은 당연하다. 저자는 많은 사람이,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기를 힘들어했던 여인이 그토록 개방적이면서도 감정적이고 인간미 넘치는 사진을 촬영했다는 데서 역설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 이런 무심한 태도는 그녀 자신의 존재감을 낮춤으로써 피사체에 정직하고 꾸밈없이 다가가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저자는 보모로 일했던 겐스버그 가족이 플로리다에 있는 친적을 만나러 갈 때 비비안도 함께 갔고, 1957년 마이애미에서의 어느 날 밤 비비안은 겐스버그 가족과 야자수를 찍은 뒤에 홀로 모험에 나서 단 한 장의 완벽한 사진을 찍었다고 말한다.

"그 따뜻했던 저녁 시간, 비비안은 다른 경우에도 자주 그랬듯 사진을 단 한 장만 찍었는데, 그 한 장은 비비안의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완벽한 사진은 비비안의 뛰어난 안목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마치 천상의 존재처럼 연석을 향해 하늘하늘 걷고 있다. 부드러운 조명이, 마치 여자의 몸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묘한 분위기를 내며 사진 중앙을 비춘다. 멀어져 갈수록 희미해지는 가로등은 별처럼 빛나고 있다. 그날 밤, 단 한 번의 셔터를 누른 비비안은 그 사진에 그저 '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저자는 비비안은 피사체의 감정에 신경 썼음이 분명했지만, 사진을 찍는 순간만큼은 촬영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도 일부 작품에서는 여전히 비비안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있는 주제와 기술 등이 등장한다. 피사체게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더 많은 이야기를 담기 위해 피사체를 조금 덜 보여주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움켜잡고 있는 뒤틀린 장갑만으로도 잔뜩 긴장했음을 보여주는 사진고 있고, 드러난 발만으로도 한 소년의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는 사진도 있다.

"비비안과 함께한 촬영 여행에서 잉어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것은 사진을 찍을 대상을 인식하고 그 순간을 포착하는 비비안의 속도였다. "피사체를 발견하면 곧바로 카메라를 열어서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누를 때까지 1초도 안걸렸을 거예요. 그러니 찍히는 사람들은 반응할 시간도 없었죠.""




비비안의 저장 장애의 징후는 갑자기 맥밀런 가족에게 사진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서른 살 정도부터 명백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도 저장 장애를 악화시키는데, 1966년에 겐스버그 가족을 떠나면서 비비안의 상태는 더 나빠졌고, 비비안의 작품 기류는 뚜렷하게 바뀌었다. 그때부터 비비안은 신문 한 장, 한 장을 모두 찍는 강박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11년을 함께한 집과 가족을 떠난다는 것은 비비안의 저장 장애를 한층 악화시키기 충분한 불안정한 사건이었다. 겐스버그 가족과의 결별은 비비안의 내면을 파괴했고, 수집벽을 더욱 악화시켰다. 미적 감각이 탁월했고, 특히 무늬와 모양, 질감에 예민했던 비비안이 신문을 병적으로 수집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비안은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고 싶다는 욕망보다 갖고 싶다는 욕망이 훨씬 컸다.

"시간이 흐르면서 비비안의 수집벽은 훨씬 더 심각해졌다. 자기 방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고용주들에게 엄격하게 경고했고, 문에 열쇠를 달았다. 당연히 그 때문에 사람들은 비비안의 방을 더 궁금해했다. 비비안은 중고 서점 '북맨스 앨리'의 주인이었던 친구 로저 칼슨에게 사람들이 쌍안경을 가지고 자기 방을 들여다보며, 고용주의 아이들이 자기 물건을 뒤진다고 털어놓았다."

비비안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그녀가 사진에 분명히 담은 인간애 사이의 극단적인 차이가 있다. 비비안에게 사진은 믿음과 감정,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를 표현하는 배출구로 기능했고, 그 결과 보편적인 진리와 폭넓은 정서를 반영하는 방대한 작품 세계를 낳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화상 사진은 비비안이 병치되는 이미지를 만들고,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실재하는 시간 속에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는 데 위협적이지 않은 매개물이었다. 많은 자화상 사진은 소통하고 참여하고자 하는 비비안의 욕구를 보여주면서도, 작업 전체를 보았을 때 비비안의 자아상과 마음의 상태가 어떤 식으로 변해갔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비비안이 1970년대 찍은 사진을 보면 구호와 표어에 깊은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매체가 곧 메시지다'라는 개념을 기꺼이 받아들인 비비안은 시카고 곳곳에 적힌 낙서 사진을 수천 장이나 찍었다. 화려한 색을 자랑하는 낙서들 속에서 비비안은 자신의 활동과 역설적인 관점을 지지하는 생각들을 곳곳에서 찾아냈다. 비비안은 대부분 자신이 재미있고 재치있다고 생각하는 낙서들을 찍었다.

"뉴스 중독인 비비안은 워터게이트 사진에 끝없이 빠져들었다. 비비안의 사진에는 다양한 정치 견해가 담겨 있지만, 대부분은 비비안이 좌파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비비안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가 뒤섞인 신념을 간직했고, 총기 소유 옹호 같은 특정 주장과 견해를 고수하는 보수적인 정치인들을 견딜 수 없어했다. 고용주 앞으로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정치적 견해를 담은 문서가 배달되면 비비안은 몰래 빼돌렸다."


비비안은 사진을 출력한 뒤 현상소 봉투 위에 평가 점수와 사진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적어 놓으며 완벽을 추구했다.

"비비안은 사진 인화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컬러 필름은 모두 현상소에 맡겨 인화했지만, 결과물만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관리하고 간섭했다. 사진을 출력한 뒤 현상소 봉투 위에 적어놓은 평가 점수를 보면 사진에 대한 비비안의 확신과 자신감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70세가 될 때까지, 40년 동안 사진을 찍은 비비안은, 그 나이에 이른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열정을 소진한 듯 했다고 말한다. 비비안의 기력을 서서히 쇠약해지고 있었다. 비비안은 꾸준히 건강이 악화되다 2009년 4월 21일에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비비안이 보모로 일하며 사랑했던 소년이었던 겐스버그 형제들은 어른이 되어 비비안을 화장하고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보모의 유골을 함께 뛰어다니며 야생 딸기를 수집했던 보호림에 뿌려주었따.

"전제적으로 마지막 사진들은 비비안의 위축된 자아감을 보여준다. 자화상 사진은 눈에 띄게 줄어, 1990년대에 비비안이 본인을 찍은 사진은 열장도 되지 않는다. 1996년, 더는 보모 일을 하지 않게 된 뒤로 거의 사진을 찍지 않은 비비안은 1999년이 되면, 아직 그녀 앞에 10년이 더 남았는데도, 카메라를 영원히 손에서 놓고 만다."

사진은 비비안 마이어에게 세상과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고리였고, 비비안은 원할 때면 언제라도 세상으로 들어가 자신이 있어야 할 정당한 위치를 요구했다. 저자는 비비안이 사후에 자기 자신이 전시되기를 바랐을지 여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남긴다. 그리고 저자는 비비안은 자신의 재능을 확신했고, 유명인을 동경했으며, 예술은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할 수 있다고 믿었고, 궁극적으로는 숙명론자였다고 이야기한다. 그 누구도 비비안의 궁극적인 바람이 무엇이었을지 알 수 없을 테고, 어쩌면 비비안 자신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는지 모르지만, 그저 우리는 비비안 마이어의 진정한 꿈과 바람이 어떻게 해서든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비비안도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사랑받고 받아들여지길 간절히 원했다. 사진은 그런 마음을 표출하는 수단이었기에, 비비안은 인간애와 유머, 아름다움이 가득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비비안의 작품 속에 들어 있는 너무나도 명확한 자질들이 비비안을 묘사하는 모순된 말들과 조화를 이루며 진정한 자아를 드러낸다는 걸 알고 있다. 비비안에게 자화상 사진은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이자, 자신이 분명히 실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수단이었다."

"비비안에게 사진은 그저 자신을 표현하는 수간이 아니었다. 세상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촉진제였다. 비비안의 카메라는 세상을 향하는 문을 열어, 사회생활이 서툰 이 사진작가를 전 세계, 수천 명에 달하는 다양하고도 흥미로운 사람들에게 연결해주었다. 새로운 거리, 새로운 집에 들어갈 때면 목에 건 장비는 비비안에게 목적의식과 권위를 선사하고 안전한 거리에서 감정을 끌어낼 수 있게 함으로써 비비안을 규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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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한 번은 나를 위해 철학할 것 - 매 순간 죽도록 애쓰는 당신을 위해
허유선 지음 / 더퀘스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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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의 말과 함께 내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에 직면할 수 있게 하는 책으로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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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한 번은 나를 위해 철학할 것 - 매 순간 죽도록 애쓰는 당신을 위해
허유선 지음 / 더퀘스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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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한 번은 나를 위해 철학할 것>은 매 순간 죽도록 애쓰는 사람들을 위해 나를 위해 존재한 듯한 살아있는 철학의 지혜를 이야기하는 인문 도서이다. 이 책의 저자인 허유선 철학 박사는 인생을 지탱해온 생각이 무너지고, 지나온 시간을 부정당할 때마다 사람들이 하는 질문의 답을 철학에서 찾는다. 철학이란 '잘 사는 법'에 목숨을 건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연구해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 칸트, 도가 등 가장 좋은 나를 찾는 동서양의 철학 여정을 통해 직장에서의 번 아웃, 닮아버린 인간관계, 가족의 어려움, 돈을 버는 일 등 일상 구석구석에서 마주하는 구체적인 갈등을 되짚어주며, 철학이 얼마나 우리 삶에 이로움을 주는지를 깨닫게 한다.

"누구나 그렇다는 인생의 물음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마주한 철학자들의 이야기과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을 이끈 방식과 흐름이 내 인생의 고민을 위한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근엄한 그들의 생각 방식이 우리 고민을 자유롭게 풀어볼 기회, 자유롭게 생각해도 될 기회를 열어주기를 희망한다. 그들의 생각을 발판 삼아 나 자신의 마음속으로 깊이 잠수하여 내 안에서 유영할 수 있는 틈을 찾기를. 나를 위해 숨 고르고, 깊이 숨 쉬는 시간이기를."




저자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창작과 사랑을 권한다고 말한다. 프롬은 '사랑이란 세계에 대한 '태도'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의 그 무엇이든 사랑의 태도로 대하며 연결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의 활동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외로움은 이겨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반려감정 같은 것이라고 전한다. 이 책을 읽으며 삶의 막연함과 불안감으로부터 외로움이 증폭될 때, 나와 연결된 것들을 지금부터 하나씩, 잠시만 느끼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프롬은 대신 좋은 연결의 방법으로 창작과 사랑을 추천합니다. 창작은 사물과의 연결 관계를 만드는 일이고, 사랑은 사람과의 연결 관계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들은 너무 자극적이지도, 일시적이지도 않고 나를 지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활성화하지요. 창작과 사랑의 공통점은 바로 '내가 나 자신의 힘을 발휘하며 연결을 만들어가는 활동'이거든요."

저자는 니체의 이야기를 거꾸로 생각해보는 쪽을 제안한다. '내가 원했다'고 도무지 삼킬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는 내가 되도록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도무지 삼킬 수 없는 것은 타인에게 낮은 평가를 받는 나인지, 성공하지 못한 나인지, 아니면 도전하고 싶은 길에 발도 디뎌보지 않은 나인지를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아야 한다.

"껍데기 같은 가치, 실은 모두에게 정답일 수는 없는데 그런척 사람을 눌러왔던 가치를 부정하는 니체의 입장은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는 일이 전부 잘못이고, 그래서 그런 일을 다 때려치워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양한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느라 나를 뒷전으로 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 어떤 기준을 가져오든 내 힘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제시하는 가치에 붙들리지 않고 일단 해보는 것이죠."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짜 두려운 것은 타인의 기준이나 평가가 아니라, 그런 기준에 따라 나의 지나온 시간을 전부 평가절하하는 나 자신입니다. 내가 정말로 원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요? 내가 그럭저럭 할 수 있는 일로 먹고사는 나의 삶일까요, 아니면 그런 나에게 이것저것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말을 옳게 여기며 마음이 요동치고 흔들리는 것일까요? 지금 필요한 것은 이상적인 타협점을 찾는 것도, 나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없게 만드는, 나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드는 선택 혹은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마주하는 일입니다."

저자는 고통은 죄책감과 비난, 고립감, 무력감이라는 이름의 친구들을 데리고 온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독일 철학자이자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로 잘 알려진 칼 야스퍼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고통이 나 대신 내 삶의 주인공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고통, 아무리 애를 써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무력감이나 죄책감은 내가 '한계 상황'에 놓여 있다는 신호이다. 저자는 과거와는 달라질 수 없지만, 과거와 지금 이 막다른 곳에 몰린 듯한 느낌마저 모두 나라는 사람, 나의 인생 안에 속한다는 것을 결국은 받아들이고 소화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고통이 내 삶 전부를 삼켜 버리지 않도록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그 사람과 꼭 같은 방식으로 느끼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달라진 태도, 평소보다 떨어진 업무 능력,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예절이나 배려를 무시하는 것 같은 행동에 실망하고 분노합니다. 특히 잠시간의 일이겠거니 생각했다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모습에 이제는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친밀한 사이라면 이런 일이 더욱 괴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관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배려나 기쁨의 순간을 느끼기는 어려운데 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고통을 겪는 당사자는 더욱 죄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나 때문에 상대방까지 힘들어지는 것 같으니까요. 자기 자신이 고통과 고통에 따라붙는 부정적인 특징을 야기하는 원인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 삶에서 언제든 마주할 수 있는 것이며, 고통을 겪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결실은 '살아남는' 일입니다. 고통과 함께 살아가고, 살아남을 때 비록 우리가 원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의 한계선은 변화하게 됩니다. 나라는 집이 그렇게 커지는 셈이죠."

저자는 좋아하는 것을 싫어질 정도로 노력하는 것은 억지로 애쓰고 있다는 신호라고 말한다. 또한 무위한다는 것은 내가 지켜왔던, 지키려 했던 것을 그만두는 일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무위란 변화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도가에서 경계하는 유의는 자신의 삶과는 어긋나는, 자신과는 점점 더 멀어지는 노력이다. 유의는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나를 지우며 다른 것이 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저자는 번아웃 상태가 된 사람들에게 변화하는 나를 느끼고 이해하고 사이좋게 같이 가려고 노력하는 것, 나로 살기 위한 노력인가를 질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장자는 이 생각에도 함정이 있다고 말합니다.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것에 집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한 상태는 어떤 상태이고, 내가 선택했으며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시간이 흐르며 상황이 바뀌고 나의 신체가 변하고 감정이 변하듯이, 내가 선택하고 바꿀 수 있던 것, 내가 만족했던 상태 또한 변할 수 있습니다. 기쁨도 언제까지 영원할 수는 없어요. 사랑이 변하듯, 꿈도 변하고 들일 수 있는 노력의 모습이나 정도도 변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한때 사랑했던 것이 나를 짓누르는 거대한 벽이 될 수도 있어요. 장자는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니 계속 변하고, 지금 중요하고 소중하다 여기는 것 또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임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붙들리지 않아야 한다고요."

저자는 절학자 한나 아렌트가 주목하는 것은 말과 행동을 한 결과로 얻게 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관계하면서 말과 행동을 '하는 일' 자체라고 말한다. 우리의 개성은 고정되어 있을 수 없고, 우리는 행위마다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행동과는 또 다른 행동을 하기 위해서, 지금의 실패에 머물지 않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나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저자의 글에 위안을 얻는다. 나를 용서하고, 기회를 줘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는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실패의 시간, 괴로운 시간을 맞이하더라도, 처음의 도전과 지금의 도전, 그리고 그 도전마다의 자신의 생각은 결코 갖지 않으며, 우리는 매번 새롭게 뛰어들고, 새롭게 기뻐하고 아파하면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렌트에게 행위는 제2의 탄생입니다.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탄생이잖아요. 우리의 행위는 그것이 의식적으로 의도했던 그렇지 않든 간에 행위하는 사람, 곧 자기 자신을 이 세계 속에서 표명하고 드러내는 활동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행위를 할 때마다, 그리고 행위를 통해서 이 세계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셈이죠."

"우리의 행위는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시도할 때 우리는 예상하고 기대합니다. 시뮬레이션도 여러 번 해보죠. 그러나 그 예쌍과 기대는 언제나 우리를 배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 번 생겨난 행위를 결코 뒤로 돌리거나 무를 수도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행동합니다. 멈추지 않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사는 동안 우리는 매번, 그리고 항상, 가슴 밑바닥의 의심과 함께 복구 불가의 영역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확실한 일에 도전하고 싶어지지만 더 확실한 일이라고 해봤자 그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성공이든 실패든 예측 불가능한 행위의 본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 삶의 어쩔 수 없는 조건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으로 내 발을 묶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일입니다. 다르게 만들어갈 기회를 주는 일이지요. 도전이든 작별이든, 제3의 선택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행동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우리는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요."

저자는 '어차피 죽을 것인데 왜 아등바등 살아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하이데거는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내 인생을 보다 음미하는 삶의 방식은 어떤 것인가요?'로 바꾼다고 말한다. 하이데거가 알려주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허무감이 다 똑같은 허무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을 직면하는 일은 나의 한계를 인정한 후 나의 삶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입니다. 죽음이야말로 반드시 만나고 말, 그리고 이미 맞닿아 있으며 내가 감히 예측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하는 절대적인 한계입니다. 내가 하루를 사는 만큼 죽음은 나에게 성큼 다가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사람, 모든 사건을 똑같이 신경 쓰며 살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 앞에서 내가 집중하고 느끼고 싶은 것은 어떤 것인가요?"

"우리가 대단히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도, 반드시 붙들고 살아갈 무언가가 있어도 삶의 허무가 전부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허무는 우리가 살아 있는 토대이기도 합니다.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것이 생생하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있을 때 '빛'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처럼요. 반대로 죽음이라는 공통된 한계 덕분에 우리가 집중하고 관여하고 싶은 것에 주목하게 된다면, 그때 삶의 다양한 면면은 '어차피 죽을 것', '어차피 사라질 것'이라는 한 가지 색깔로 다 덮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머지 색깔을, 다양한 의미를 섬세하고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죠."

이 포스팅은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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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위의 낱말들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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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신 작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섬세한 글들이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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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위의 낱말들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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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위의 낱말들>은 <생각이 나서>, <밤 열한 시>, <초콜릿 우체국>, <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 등 다양한 감성을 담은 이야기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작가 황경신의 신작 에세이다. 이 책은 단어와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 황경신 작가가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듯이 펼쳐지는 스물여덟 편의 단편과 작가와 얽힌 사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열 편이 수록되었다. 작가 황경신은 시처럼 유려한 언어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 책에서 1장 '단어의 중력'에서는 작가 황경신이 직접 찍은 사진이 수록되어 저자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으며 다양한 장소에서 찍은 다양한 경험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묶여 우리에게 전해진다. 2장 '사물의 노력'에는 일러스트레이터 전지나의 감성적인 일러스트가 실려 있어 한층 더 풍부한 느낌을 자아내며 독자들에게 더 큰 울림을 안겨 준다.

"어느 적막하고 쓸쓸한 밤, 당신이 그리워 올려다본 하늘에 희고 둥근 달이 영차 하고 떠올랐다. 달은 무슨 말을 전하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달의 표면에 달을 닮은 하얀 꽃들이 뾰족 솟아 있었다. 썩은 열매의 씨앗들이, 바람을 타고 달로 날아가, 꼬물꼬물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잎을 뻗고 꽃잎을 여는 중이었다. 터지고 쫓고 오르는 것들, 버티고 닿고 지키는 것들이 거기 있었다. 인연과 선택과 기적이 거기 있었다. 뭔가 다른 것이 되어. 말랑하고 따뜻하고 착하고 예쁜 것이 되어."



황경신 작가는 어두워가는 방 안에 홀로 앉아 너에 대하여, 나에 대하여, 혹은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에 대하여 쓰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 닫힐 때 우리는 써야 한다는 황경신 작가의 글에 공감한다. 황경신 작가는 당신에게 일어났던 불행한 일에 대하여,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당신이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하여, 기억을 잃어버린 하루에 대하여 써야 한다고 독자에게 이야기한다.

"쓰세요. 기억을 잃어버린 하루에 대하여. 달과 행성과 외계인에 대하여. 당신이 사랑하는 노래와 그림에 대하여.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에 대하여. 새로울 것도 없고 빛날 것도 없는 당신의 일과에 대하여. 실제로 일어난 일, 일어나지 않았으나 일어났을 법한 일,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을 하나하나 떠올리세요. 정면을 보고 뒷모습을 보고 뒤집어 보고 올려다보고 내려다보세요. 이랬다면, 저랬다면, 가정해 보고 상상해 보세요. 당신이 무언가를 쓸 때, 당신은 여기가 아닌 거기로 갑니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한 번도 갖지 못했던 것을 갖게 됩니다. 단 하나의 우주에 갇혀 있는 당신은 무한한 우주를 만납니다."

황경신 작가는 방콕 여행에서 들른 카페에서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지을 수 없는 미소의 바텐더를 보고 '행복'에 대한 낱말을 이야기한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만난 이후 행복을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는 황경신 작가의 글이 눈길을 끈다.

"그 섬에 머문 일주일 동안 너는 그 카페를 매일 저녁 찾아갔다. 노을에 휘감기며 서서히 어두워지는 바다의 풍경이 좋았고 신선한 모히토가 좋았고 알록달록하고 포근한 쿠션도 좋았지만, 네가 보고 싶었던 건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가 지닌 행복은 너를 부끄럽게 하지도 않았고 시샘을 느끼게 하지도 않았다. 파도처럼 일렁이며 공기를 흔들어 너에게로 전해지는 행복이었다."

"요란하거나 고요하거나, 격정적이거나 심심하거나, 삶의 겉면은 둘 중 하나일지라도 그 내면은 온통 소용돌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뜨거었다가 차가워지고, 발길이 빨라지다 느려진다. 그렇게 살아가다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를 불현듯 맞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행복이 지속이 아니라 찰나인데, 그것으로 충분한가?

너는 삶이 행복을 약속하지도 않을뿐더러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니라도 생각했다. 삶이란 오히려 견디는 거라고, 고장 난 것들을 고치고 떠나가는 것들을 배웅하는 거라고. 한없이 기다리고 오래도록 기억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행복은 지속이 아니라 찰나이기 때문에 만족과 동시에 상처를, 기쁨과 동시에 고통을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황경신 작가는 안나푸르나 트레킹 일정의 여행에서 온 힘을 다해 불쑥 솟아올라 어둠을 물리치는 해를 목격하며, 살아가야 할 하루가 자신 앞에 활짝 열리는 순간이 심장 깊이 각인되는 것은 매일 일어나는 기적, 그러나 자신이 돌보지 않았던 기적이라고 말한다. 기적이라는 낱맡에 대한 황경신 작가의 섬세한 글이 묵직한 울림을 준다.

"'기적'을 이루는 두 글자 모두 사람을 품고 있다. 그러니 기적은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나 '신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아니라, 사람이 일하고 사람이 걸어간 곳에서 태어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양이고 형편일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하루가 저물고 또 하루가 오는 일, 하루를 살기 위해 네가 아침마다 눈을 뜨는 일, 때로 부주의하고 때로 불친절한 너를 견디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일,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쓰러진 몸을 일으키고 무너진 마음을 다독이는 일이 모두 기적이다. 기억하지 않아도 돌보지 않아도 묵묵히 일어나는, 갸륵한 기적이다."

황경신 작가는 라오스 여행에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아이에게 다정한 인사를 되돌려주었다고 말한다. 인생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희망이 찾아와 너의 눈을 들여다보고 미소를 지어주는 일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원하던 그것이 스스로 찾아와 주는 일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황경신 작가의 글이 인상적이다.

"당신이 머무는 그 공간에서, 미움의 아픔도 사랑의 고통도 없이, 세상의 모든 해로운 것으로부터 벗어나 안전하고 편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안녕이다. 티끌도 먼지도 묻어 있지 않은 순결한 바람이다. 만날 때도 안녕, 당신을 위한 변함없는 소망이다."

"이제 또 가혹하고도 아름다운 일상이 너를 몰아가리라는 것을, 네 삶은 여전히 겨울을 통과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아프게 인지할 수밖에 없지만. 하지만 너는 생각한다. 눈을 감으면 라오스가 웃고 있다. 아이처럼 무고하고 천진하게 소리 내어 웃고 있다. 너의 조그마한 슬픔은 아마도 그것으로, 한동안 조그마한 위안을 품으리라."

황경신 작가는 비행기 안에서 공포를 느꼈던 순간을 떠올리며 '공포'에 대한 낱말에 관해 이야기한다. 황경신 작가는 안감힘으로 가까스로 떠올린 하나의 문장은, 요코야마 히데오의 소설 <클라이머즈 하이> 속 '밥을 먹고 나면 무섭지 않다.'라는 문장이었다고 말한다. 공포라는 무시무시한 감정을 경험한 인간의 마음과 삶을 위협하는 공포를 마주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황경신 작가의 글에 위안을 얻는다.

"두려울 공은 굳을 공과 마음 심이 만나 만들어졌다. 공은 흙을 다지는 도구인 달구를 들고 땅을 내리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여기에 심이 더해져 '달구로 심장을 내리치다'는 의미가 되었다. 무엇이 심장을 내리치는가. 언젠가 겪어본 혹은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무서운 일이 삶을 내리친다. 존재가 송두리째 흔들리라는 예감으로 인해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고 숨이 가쁘고 식은땀이 나고 온몸이 떨린다. 그토록 두려운 '공'에 두려울 포가 결합한 것이 공포다.

존재가 소멸하면 그걸로 그만이지만, 살아서 맞닥뜨리는 공포는 현재진행형인 동시에 과거 어딘가에 존재하는 무시무시한 경험을 떠올리게 하고, 최악의 상황이 거듭될 수 있는 미래를 포함하고 있다. 두려움에 두려움이 더해져 육체와 영혼을 포식하고 그것을 에너지 삼아 증식한다."

"디저트까지 말끔하게 비우고 나자 비로소 네가 직면한 공포의 얼굴이 보였다. 피할 수 없는 삶, 그 속에 뿌리를 뻗고 네 심장을 내리치고 있는 건 사람이었다. 너를 싫어하는 사람, 너를 좋아하는 사람, 네가 미워하는 사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절망과 희망으로 위협하고 위로하고 있었다. 흔들리고 휘둘리며 표류할 수밖에 없는 것이 너의 인생이었다.

수많은 사람의 얼굴들이 어지러이 명멸하는 사이, 네 배 속에 든든하게 자리를 잡은 밥이 명령했다. 그만 생각을 멈추라고. 맞서 싸울 수는 없어도 견딜 수는 있을 거라고. 오늘의 공포는, 두려움은, 고뇌는 이것으로 충분하고 넘친다고. 그 안에서 멈칫거리며 싹을 틔우는 희망을 품고 다시 걸음을 옮기라고."

황경신 작가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자신과 함께했던 다양한 사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건네는데, 그 중에서 '책'에 대한 글이 흥미롭다. 책과의 다양한 시행 착오 끝에서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는 황경신 작가의 삶이 담긴 글이 인상적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침대 안에서 잠시 꼼지락거리며 쓰다만 글을 생각한다. 생각의 꼬투리가 잡히면 컴퓨터를 깨우고 쓰기 시작한다. 틈틈이 물을 끓이고 커피를 내리고 샤워를 한다. 식사를 하면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다가 글을 쓰고 글을 쓰다가 빨래를 널고 설거지를 하다가 아르바이트를 하다 그러다가 쇼핑 사이트를 열어 식료품과 생필품을 구입한다. 저녁에는 친구를 만나거나 책을 읽는다. 책을 읽다가 잠이 든다. 몇 달에 한 번씩,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쌓여가는 책들을 정리한다.

가끔 번거롭고 대체로 느긋하다. 종종 고요하고 자주 행복하다."

순서대로 읽지 않고, 아무 페이지나 마구 펼쳐 마구 읽기를 부탁하는 황경신 작가의 글처럼, <달 위의 낱말들>은 고요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작가의 책을 읽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담겨있다. 다채로운 경험들이 쌓여서, 인간이 만나게 되는 세계와 감정들을 은유로 직조한 글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 책을 읽고나서 독자들이 자신만의 낱말들을 스스로 정의하고 이야기하는 시간들을 갖게 되기를 황경신 작가도 바라지 않을까?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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