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위의 낱말들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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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위의 낱말들>은 <생각이 나서>, <밤 열한 시>, <초콜릿 우체국>, <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 등 다양한 감성을 담은 이야기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작가 황경신의 신작 에세이다. 이 책은 단어와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 황경신 작가가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듯이 펼쳐지는 스물여덟 편의 단편과 작가와 얽힌 사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열 편이 수록되었다. 작가 황경신은 시처럼 유려한 언어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 책에서 1장 '단어의 중력'에서는 작가 황경신이 직접 찍은 사진이 수록되어 저자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으며 다양한 장소에서 찍은 다양한 경험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묶여 우리에게 전해진다. 2장 '사물의 노력'에는 일러스트레이터 전지나의 감성적인 일러스트가 실려 있어 한층 더 풍부한 느낌을 자아내며 독자들에게 더 큰 울림을 안겨 준다.

"어느 적막하고 쓸쓸한 밤, 당신이 그리워 올려다본 하늘에 희고 둥근 달이 영차 하고 떠올랐다. 달은 무슨 말을 전하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달의 표면에 달을 닮은 하얀 꽃들이 뾰족 솟아 있었다. 썩은 열매의 씨앗들이, 바람을 타고 달로 날아가, 꼬물꼬물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잎을 뻗고 꽃잎을 여는 중이었다. 터지고 쫓고 오르는 것들, 버티고 닿고 지키는 것들이 거기 있었다. 인연과 선택과 기적이 거기 있었다. 뭔가 다른 것이 되어. 말랑하고 따뜻하고 착하고 예쁜 것이 되어."



황경신 작가는 어두워가는 방 안에 홀로 앉아 너에 대하여, 나에 대하여, 혹은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에 대하여 쓰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 닫힐 때 우리는 써야 한다는 황경신 작가의 글에 공감한다. 황경신 작가는 당신에게 일어났던 불행한 일에 대하여,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당신이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하여, 기억을 잃어버린 하루에 대하여 써야 한다고 독자에게 이야기한다.

"쓰세요. 기억을 잃어버린 하루에 대하여. 달과 행성과 외계인에 대하여. 당신이 사랑하는 노래와 그림에 대하여.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에 대하여. 새로울 것도 없고 빛날 것도 없는 당신의 일과에 대하여. 실제로 일어난 일, 일어나지 않았으나 일어났을 법한 일,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을 하나하나 떠올리세요. 정면을 보고 뒷모습을 보고 뒤집어 보고 올려다보고 내려다보세요. 이랬다면, 저랬다면, 가정해 보고 상상해 보세요. 당신이 무언가를 쓸 때, 당신은 여기가 아닌 거기로 갑니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한 번도 갖지 못했던 것을 갖게 됩니다. 단 하나의 우주에 갇혀 있는 당신은 무한한 우주를 만납니다."

황경신 작가는 방콕 여행에서 들른 카페에서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지을 수 없는 미소의 바텐더를 보고 '행복'에 대한 낱말을 이야기한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만난 이후 행복을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는 황경신 작가의 글이 눈길을 끈다.

"그 섬에 머문 일주일 동안 너는 그 카페를 매일 저녁 찾아갔다. 노을에 휘감기며 서서히 어두워지는 바다의 풍경이 좋았고 신선한 모히토가 좋았고 알록달록하고 포근한 쿠션도 좋았지만, 네가 보고 싶었던 건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가 지닌 행복은 너를 부끄럽게 하지도 않았고 시샘을 느끼게 하지도 않았다. 파도처럼 일렁이며 공기를 흔들어 너에게로 전해지는 행복이었다."

"요란하거나 고요하거나, 격정적이거나 심심하거나, 삶의 겉면은 둘 중 하나일지라도 그 내면은 온통 소용돌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뜨거었다가 차가워지고, 발길이 빨라지다 느려진다. 그렇게 살아가다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를 불현듯 맞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행복이 지속이 아니라 찰나인데, 그것으로 충분한가?

너는 삶이 행복을 약속하지도 않을뿐더러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니라도 생각했다. 삶이란 오히려 견디는 거라고, 고장 난 것들을 고치고 떠나가는 것들을 배웅하는 거라고. 한없이 기다리고 오래도록 기억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행복은 지속이 아니라 찰나이기 때문에 만족과 동시에 상처를, 기쁨과 동시에 고통을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황경신 작가는 안나푸르나 트레킹 일정의 여행에서 온 힘을 다해 불쑥 솟아올라 어둠을 물리치는 해를 목격하며, 살아가야 할 하루가 자신 앞에 활짝 열리는 순간이 심장 깊이 각인되는 것은 매일 일어나는 기적, 그러나 자신이 돌보지 않았던 기적이라고 말한다. 기적이라는 낱맡에 대한 황경신 작가의 섬세한 글이 묵직한 울림을 준다.

"'기적'을 이루는 두 글자 모두 사람을 품고 있다. 그러니 기적은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나 '신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아니라, 사람이 일하고 사람이 걸어간 곳에서 태어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양이고 형편일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하루가 저물고 또 하루가 오는 일, 하루를 살기 위해 네가 아침마다 눈을 뜨는 일, 때로 부주의하고 때로 불친절한 너를 견디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일,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쓰러진 몸을 일으키고 무너진 마음을 다독이는 일이 모두 기적이다. 기억하지 않아도 돌보지 않아도 묵묵히 일어나는, 갸륵한 기적이다."

황경신 작가는 라오스 여행에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아이에게 다정한 인사를 되돌려주었다고 말한다. 인생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희망이 찾아와 너의 눈을 들여다보고 미소를 지어주는 일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원하던 그것이 스스로 찾아와 주는 일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황경신 작가의 글이 인상적이다.

"당신이 머무는 그 공간에서, 미움의 아픔도 사랑의 고통도 없이, 세상의 모든 해로운 것으로부터 벗어나 안전하고 편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안녕이다. 티끌도 먼지도 묻어 있지 않은 순결한 바람이다. 만날 때도 안녕, 당신을 위한 변함없는 소망이다."

"이제 또 가혹하고도 아름다운 일상이 너를 몰아가리라는 것을, 네 삶은 여전히 겨울을 통과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아프게 인지할 수밖에 없지만. 하지만 너는 생각한다. 눈을 감으면 라오스가 웃고 있다. 아이처럼 무고하고 천진하게 소리 내어 웃고 있다. 너의 조그마한 슬픔은 아마도 그것으로, 한동안 조그마한 위안을 품으리라."

황경신 작가는 비행기 안에서 공포를 느꼈던 순간을 떠올리며 '공포'에 대한 낱말에 관해 이야기한다. 황경신 작가는 안감힘으로 가까스로 떠올린 하나의 문장은, 요코야마 히데오의 소설 <클라이머즈 하이> 속 '밥을 먹고 나면 무섭지 않다.'라는 문장이었다고 말한다. 공포라는 무시무시한 감정을 경험한 인간의 마음과 삶을 위협하는 공포를 마주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황경신 작가의 글에 위안을 얻는다.

"두려울 공은 굳을 공과 마음 심이 만나 만들어졌다. 공은 흙을 다지는 도구인 달구를 들고 땅을 내리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여기에 심이 더해져 '달구로 심장을 내리치다'는 의미가 되었다. 무엇이 심장을 내리치는가. 언젠가 겪어본 혹은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무서운 일이 삶을 내리친다. 존재가 송두리째 흔들리라는 예감으로 인해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고 숨이 가쁘고 식은땀이 나고 온몸이 떨린다. 그토록 두려운 '공'에 두려울 포가 결합한 것이 공포다.

존재가 소멸하면 그걸로 그만이지만, 살아서 맞닥뜨리는 공포는 현재진행형인 동시에 과거 어딘가에 존재하는 무시무시한 경험을 떠올리게 하고, 최악의 상황이 거듭될 수 있는 미래를 포함하고 있다. 두려움에 두려움이 더해져 육체와 영혼을 포식하고 그것을 에너지 삼아 증식한다."

"디저트까지 말끔하게 비우고 나자 비로소 네가 직면한 공포의 얼굴이 보였다. 피할 수 없는 삶, 그 속에 뿌리를 뻗고 네 심장을 내리치고 있는 건 사람이었다. 너를 싫어하는 사람, 너를 좋아하는 사람, 네가 미워하는 사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절망과 희망으로 위협하고 위로하고 있었다. 흔들리고 휘둘리며 표류할 수밖에 없는 것이 너의 인생이었다.

수많은 사람의 얼굴들이 어지러이 명멸하는 사이, 네 배 속에 든든하게 자리를 잡은 밥이 명령했다. 그만 생각을 멈추라고. 맞서 싸울 수는 없어도 견딜 수는 있을 거라고. 오늘의 공포는, 두려움은, 고뇌는 이것으로 충분하고 넘친다고. 그 안에서 멈칫거리며 싹을 틔우는 희망을 품고 다시 걸음을 옮기라고."

황경신 작가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자신과 함께했던 다양한 사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건네는데, 그 중에서 '책'에 대한 글이 흥미롭다. 책과의 다양한 시행 착오 끝에서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는 황경신 작가의 삶이 담긴 글이 인상적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침대 안에서 잠시 꼼지락거리며 쓰다만 글을 생각한다. 생각의 꼬투리가 잡히면 컴퓨터를 깨우고 쓰기 시작한다. 틈틈이 물을 끓이고 커피를 내리고 샤워를 한다. 식사를 하면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다가 글을 쓰고 글을 쓰다가 빨래를 널고 설거지를 하다가 아르바이트를 하다 그러다가 쇼핑 사이트를 열어 식료품과 생필품을 구입한다. 저녁에는 친구를 만나거나 책을 읽는다. 책을 읽다가 잠이 든다. 몇 달에 한 번씩,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쌓여가는 책들을 정리한다.

가끔 번거롭고 대체로 느긋하다. 종종 고요하고 자주 행복하다."

순서대로 읽지 않고, 아무 페이지나 마구 펼쳐 마구 읽기를 부탁하는 황경신 작가의 글처럼, <달 위의 낱말들>은 고요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작가의 책을 읽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담겨있다. 다채로운 경험들이 쌓여서, 인간이 만나게 되는 세계와 감정들을 은유로 직조한 글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 책을 읽고나서 독자들이 자신만의 낱말들을 스스로 정의하고 이야기하는 시간들을 갖게 되기를 황경신 작가도 바라지 않을까?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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