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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한 번은 나를 위해 철학할 것 - 매 순간 죽도록 애쓰는 당신을 위해
허유선 지음 / 더퀘스트 / 2022년 8월
평점 :

<인생에 한 번은 나를 위해 철학할 것>은 매 순간 죽도록 애쓰는 사람들을 위해 나를 위해 존재한 듯한 살아있는 철학의 지혜를 이야기하는 인문 도서이다. 이 책의 저자인 허유선 철학 박사는 인생을 지탱해온 생각이 무너지고, 지나온 시간을 부정당할 때마다 사람들이 하는 질문의 답을 철학에서 찾는다. 철학이란 '잘 사는 법'에 목숨을 건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연구해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 칸트, 도가 등 가장 좋은 나를 찾는 동서양의 철학 여정을 통해 직장에서의 번 아웃, 닮아버린 인간관계, 가족의 어려움, 돈을 버는 일 등 일상 구석구석에서 마주하는 구체적인 갈등을 되짚어주며, 철학이 얼마나 우리 삶에 이로움을 주는지를 깨닫게 한다.
"누구나 그렇다는 인생의 물음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마주한 철학자들의 이야기과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을 이끈 방식과 흐름이 내 인생의 고민을 위한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근엄한 그들의 생각 방식이 우리 고민을 자유롭게 풀어볼 기회, 자유롭게 생각해도 될 기회를 열어주기를 희망한다. 그들의 생각을 발판 삼아 나 자신의 마음속으로 깊이 잠수하여 내 안에서 유영할 수 있는 틈을 찾기를. 나를 위해 숨 고르고, 깊이 숨 쉬는 시간이기를."

저자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창작과 사랑을 권한다고 말한다. 프롬은 '사랑이란 세계에 대한 '태도'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의 그 무엇이든 사랑의 태도로 대하며 연결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의 활동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외로움은 이겨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반려감정 같은 것이라고 전한다. 이 책을 읽으며 삶의 막연함과 불안감으로부터 외로움이 증폭될 때, 나와 연결된 것들을 지금부터 하나씩, 잠시만 느끼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프롬은 대신 좋은 연결의 방법으로 창작과 사랑을 추천합니다. 창작은 사물과의 연결 관계를 만드는 일이고, 사랑은 사람과의 연결 관계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들은 너무 자극적이지도, 일시적이지도 않고 나를 지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활성화하지요. 창작과 사랑의 공통점은 바로 '내가 나 자신의 힘을 발휘하며 연결을 만들어가는 활동'이거든요."
저자는 니체의 이야기를 거꾸로 생각해보는 쪽을 제안한다. '내가 원했다'고 도무지 삼킬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는 내가 되도록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도무지 삼킬 수 없는 것은 타인에게 낮은 평가를 받는 나인지, 성공하지 못한 나인지, 아니면 도전하고 싶은 길에 발도 디뎌보지 않은 나인지를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아야 한다.
"껍데기 같은 가치, 실은 모두에게 정답일 수는 없는데 그런척 사람을 눌러왔던 가치를 부정하는 니체의 입장은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는 일이 전부 잘못이고, 그래서 그런 일을 다 때려치워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양한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느라 나를 뒷전으로 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 어떤 기준을 가져오든 내 힘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제시하는 가치에 붙들리지 않고 일단 해보는 것이죠."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짜 두려운 것은 타인의 기준이나 평가가 아니라, 그런 기준에 따라 나의 지나온 시간을 전부 평가절하하는 나 자신입니다. 내가 정말로 원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요? 내가 그럭저럭 할 수 있는 일로 먹고사는 나의 삶일까요, 아니면 그런 나에게 이것저것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말을 옳게 여기며 마음이 요동치고 흔들리는 것일까요? 지금 필요한 것은 이상적인 타협점을 찾는 것도, 나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없게 만드는, 나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드는 선택 혹은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마주하는 일입니다."
저자는 고통은 죄책감과 비난, 고립감, 무력감이라는 이름의 친구들을 데리고 온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독일 철학자이자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로 잘 알려진 칼 야스퍼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고통이 나 대신 내 삶의 주인공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고통, 아무리 애를 써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무력감이나 죄책감은 내가 '한계 상황'에 놓여 있다는 신호이다. 저자는 과거와는 달라질 수 없지만, 과거와 지금 이 막다른 곳에 몰린 듯한 느낌마저 모두 나라는 사람, 나의 인생 안에 속한다는 것을 결국은 받아들이고 소화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고통이 내 삶 전부를 삼켜 버리지 않도록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그 사람과 꼭 같은 방식으로 느끼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달라진 태도, 평소보다 떨어진 업무 능력,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예절이나 배려를 무시하는 것 같은 행동에 실망하고 분노합니다. 특히 잠시간의 일이겠거니 생각했다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모습에 이제는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친밀한 사이라면 이런 일이 더욱 괴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관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배려나 기쁨의 순간을 느끼기는 어려운데 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고통을 겪는 당사자는 더욱 죄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나 때문에 상대방까지 힘들어지는 것 같으니까요. 자기 자신이 고통과 고통에 따라붙는 부정적인 특징을 야기하는 원인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 삶에서 언제든 마주할 수 있는 것이며, 고통을 겪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결실은 '살아남는' 일입니다. 고통과 함께 살아가고, 살아남을 때 비록 우리가 원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의 한계선은 변화하게 됩니다. 나라는 집이 그렇게 커지는 셈이죠."
저자는 좋아하는 것을 싫어질 정도로 노력하는 것은 억지로 애쓰고 있다는 신호라고 말한다. 또한 무위한다는 것은 내가 지켜왔던, 지키려 했던 것을 그만두는 일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무위란 변화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도가에서 경계하는 유의는 자신의 삶과는 어긋나는, 자신과는 점점 더 멀어지는 노력이다. 유의는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나를 지우며 다른 것이 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저자는 번아웃 상태가 된 사람들에게 변화하는 나를 느끼고 이해하고 사이좋게 같이 가려고 노력하는 것, 나로 살기 위한 노력인가를 질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장자는 이 생각에도 함정이 있다고 말합니다.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것에 집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한 상태는 어떤 상태이고, 내가 선택했으며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시간이 흐르며 상황이 바뀌고 나의 신체가 변하고 감정이 변하듯이, 내가 선택하고 바꿀 수 있던 것, 내가 만족했던 상태 또한 변할 수 있습니다. 기쁨도 언제까지 영원할 수는 없어요. 사랑이 변하듯, 꿈도 변하고 들일 수 있는 노력의 모습이나 정도도 변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한때 사랑했던 것이 나를 짓누르는 거대한 벽이 될 수도 있어요. 장자는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니 계속 변하고, 지금 중요하고 소중하다 여기는 것 또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임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붙들리지 않아야 한다고요."
저자는 절학자 한나 아렌트가 주목하는 것은 말과 행동을 한 결과로 얻게 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관계하면서 말과 행동을 '하는 일' 자체라고 말한다. 우리의 개성은 고정되어 있을 수 없고, 우리는 행위마다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행동과는 또 다른 행동을 하기 위해서, 지금의 실패에 머물지 않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나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저자의 글에 위안을 얻는다. 나를 용서하고, 기회를 줘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는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실패의 시간, 괴로운 시간을 맞이하더라도, 처음의 도전과 지금의 도전, 그리고 그 도전마다의 자신의 생각은 결코 갖지 않으며, 우리는 매번 새롭게 뛰어들고, 새롭게 기뻐하고 아파하면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렌트에게 행위는 제2의 탄생입니다.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탄생이잖아요. 우리의 행위는 그것이 의식적으로 의도했던 그렇지 않든 간에 행위하는 사람, 곧 자기 자신을 이 세계 속에서 표명하고 드러내는 활동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행위를 할 때마다, 그리고 행위를 통해서 이 세계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셈이죠."
"우리의 행위는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시도할 때 우리는 예상하고 기대합니다. 시뮬레이션도 여러 번 해보죠. 그러나 그 예쌍과 기대는 언제나 우리를 배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 번 생겨난 행위를 결코 뒤로 돌리거나 무를 수도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행동합니다. 멈추지 않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사는 동안 우리는 매번, 그리고 항상, 가슴 밑바닥의 의심과 함께 복구 불가의 영역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확실한 일에 도전하고 싶어지지만 더 확실한 일이라고 해봤자 그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성공이든 실패든 예측 불가능한 행위의 본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 삶의 어쩔 수 없는 조건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으로 내 발을 묶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일입니다. 다르게 만들어갈 기회를 주는 일이지요. 도전이든 작별이든, 제3의 선택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행동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우리는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요."
저자는 '어차피 죽을 것인데 왜 아등바등 살아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하이데거는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내 인생을 보다 음미하는 삶의 방식은 어떤 것인가요?'로 바꾼다고 말한다. 하이데거가 알려주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허무감이 다 똑같은 허무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을 직면하는 일은 나의 한계를 인정한 후 나의 삶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입니다. 죽음이야말로 반드시 만나고 말, 그리고 이미 맞닿아 있으며 내가 감히 예측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하는 절대적인 한계입니다. 내가 하루를 사는 만큼 죽음은 나에게 성큼 다가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사람, 모든 사건을 똑같이 신경 쓰며 살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 앞에서 내가 집중하고 느끼고 싶은 것은 어떤 것인가요?"
"우리가 대단히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도, 반드시 붙들고 살아갈 무언가가 있어도 삶의 허무가 전부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허무는 우리가 살아 있는 토대이기도 합니다.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것이 생생하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있을 때 '빛'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처럼요. 반대로 죽음이라는 공통된 한계 덕분에 우리가 집중하고 관여하고 싶은 것에 주목하게 된다면, 그때 삶의 다양한 면면은 '어차피 죽을 것', '어차피 사라질 것'이라는 한 가지 색깔로 다 덮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머지 색깔을, 다양한 의미를 섬세하고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죠."
이 포스팅은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