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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마이어 - 보모 사진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현상하다
앤 마크스 지음, 김소정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8월
평점 :

시카고의 한 창고에서 발견된 사진으로 비비안 마이어는 순식간에 '20세기 가장 유명한 사진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그가 남긴 놀라운 작품과 베일에 싸인 삶은 곧바로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비비안은 생전 자신의 과거를 워낙 깊이 감추어 그와 함께 살던 고용주들도 그가 어디서 태어나고 자랐는지, 부모나 형제자매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왜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지 않았는지, 왜 현상도 하지 않은 수많은 필림들을 창고에 그대로 방치해두었는지 누구도 답할 수 없었다. 앤 마크스는 8톤의 창고에 무질서하게 쌓여 있던 잡동사니와 작가의 개인적 기록을 샅샅이 훑고, 프랑스 시골 마을과 뉴욕의 문서 보관소를 뒤지고, 14만 장에 이르는 아카이브에 접근할 유인한 권한을 허락받아 이 미스터리한 작가의 유일무이한 초상화를 완성해나간다. 치밀한 조사와 끈질긴 추적 끝에 혼외자, 중혼, 부모의 방임, 약물 남용과 폭력, 정신 질환 등으로 복잡하게 얽힌 가족사를 밝히고 있으며, 그 굴레에서 빠져나와 독립적이고 진취적으로 자기 삶을 구축해나간 한 용감한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책 <비비안 마이어>는 세상과 끊임없이 거리를 두면서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세상을 그렸던 예술가, 비비안 마이어가 평생 무엇을 위해 싸웠고, 무엇을 향해 나아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지적이었고, 창의적이었으며, 열정과 안목이 있었던 비비안은 인간의 보편성을 보여주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방대하고도 광범위한 작품을 남겼다. 비비안 마이어라는 인물의 복잡한 내면에 다가섬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그가 남긴 작품의 진정한 가치, 그가 작품을 통해 세상에 전하려 했던 그 깊고 내밀한 이야기에 다가갈 수 있다. 책에 실린 사진은 비비안 마미어의 초기 작품부터 대표작을 아우르며, 그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주제와 기술, 장비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가장 친절한 해설처럼 다가온다. 비비안 사후의 작품 소유권과 처리 방법을 둘러싼 논쟁 및 그에 얽힌 오해들까지 풀어줌으로써 비비안 마이어의 팬들이 그의 작품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비비안 도러시 마이어는 1926년 2월 1일에 망가진 가족의 일원으로 합류했다. 비비안의 출생증명서에는 아버지 이름은 찰스 마이어라고 기록되어 있었고, 어머니는 도대체 어디에서 가져와 썼다가 버렸는지도 모를 성을 붙인 마리 조소 저스틴이라고 적혀 있다. 비비안과 오빠인 칼은 아버지와 헤어졌으며, 서로와도 떨어져 자라야 했다. 훗날 비비안은 고용주에게 자신은 어머니에게 한 번도 제대로 돌봄을 받을 적도 없고, 그런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비비안의 외할머니인 외제니가 세상을 떠난 뒤, 스물네 살이던 비비안은 프랑스에 이모가 남긴 재산을 정리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1950년 4월에 보르가르 농지를 팔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비비안은 프랑스에서 초점과 원근감을 이용해 전경과 배경을 다양하게 바꾸면서 사진 속 시각적 효과를 강렬하게 구혔했다. 비비안이 인화된 사진 가운데 절반가량이 프랑스에서 찍은 사진으로, 이 때 찍은 사진들은 오랫동안 비비안이 방에 전시한 유일한 작품이기도 했다.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사진작가는 날카로운 봉우리, 깊은 계곡, 거친 시골 지역을 흐르는 구불구불한 시내를 향해 자신의 렌즈를 들이대며 자연광과 그림자, 반사를 끈질기게 연구하고 실험했다. 태양와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려고 같은 풍경을 여러 번 거듭해서 사진에 담았다."

비비안은 보모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왔다. 보모 일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남는 시간에 사진 기술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비비안이 순수한 것, 뒤틀린 것 모두에서 아름다움을 찾았고, 사람들 대부분이 신경 쓰지 않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였다고 말한다. 쏟아질 듯 풍성한 꽃도, 넘쳐 흐를 것 같은 쓰레기도 모두 사진에 담았다. 추레한 공동주택이 잔해와 뒤엉켜 무너지는 동안 전후에 세워진 반짝이는 빌딩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대칭, 패턴, 질감은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비비안이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한, 비비안의 작품을 이루는 기본 요소였다. 이 책에서 뉴욕에서의 비비안의 초기 작품들이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프랑스에서 가져온 박스 카메라를 들고서 비비안은 높은 산봉우리가 아니라 지붕을, 시골이 아니라 도시의 풍경을 담았다. 이전 실험을 바탕으로 위와 아래를, 그림자와 빛을 촬영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동안 다리를 받치고 있는 외팔보, 고가 철도를 지탱하는 교각, 고층 빌딩을 뒤덮은 똑같이 생긴 창문 구조물이 계속해서 비비안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저자는 비비안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타인과 함께하는 능력을 발전시킬 기회를 얻지 못하고 결핍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지만 작업에서만큼은 인간의 애정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비비안은 이 주제를 가지고 젊은 연인 뿐만 아니라 아이와 친구들 사이, 그리고 흔히 간과되곤 하는 노인들 간의 유대감도 다채롭게 기록했다. 그리고 사소한 몸짓이 불러일으키는 친밀감에 주목했다. 어디에서 사진을 찍든, 비비안의 촬영분 일부는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비비안이 값비싼 최고급 카메가 롤라이플렉스를 장만하며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롤라이플렉스는 비비안의 영감과 재능에 잘 어울리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 카메라였다. 비비안의 밀착인화지는 1953년 8월에 비비안이 갑자기 뉴욕으로 돌아온 가장 큰 이유가 사진 기술을 익히고 직업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전 해 여름에 롤라이플렉스를 장만하면서 꾸기 시작한 꿈을 더욱더 밀어붙인 것이다. 1954년 한 해 동안, 사진은 비비안의 인생에서 중심을 차지했다. 훗날 비비안은 이 시기를 가리켜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나이는 스물여덟 살이에요. 요령을 알고 문제에 휘말리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성숙하면서도 젊음의 에너지도 있어,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탐험할 수 있는 나이니까요."라고 했다.

저자는 1955년 상반기에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사진부장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기획한 <인간 가족전>이라는 전시는 비비안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 전시회에서 비비안이 이제 막 탐구하기 시작했던 기술들이 풍성하게 소개되었고, 다루는 소재도 비비안의 관심 분야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전시회에서 광범위하게 다룬 주제는 어머니와 아이들 사이의 유대감이었다. 비비안은 이런 내적 유대감에 깊이 매혹되어 있음을 자신의 작품으로 보여주었고, 다양한 방식으로 그 이끌림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비비안은 자신의 삶에 비어 있는 부분에 자연스럽게 끌린 것이다.
"인생의 모든 시기와 모든 측면을 다룬 <인간 가족전>은 비비안의 아카이브에 비어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시회에서 보이는 전통적인 대가족의 삶을 묘사한 작품 같은 것은 비비안의 아카이브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비비안은 가족사진에 아버지를 끼워넣는법이 없었으며, 사실상 미소 짓거나 웃고 있는 남자, 아이들과 놀아주는 남자는 없었다고 봐도 된다. 이러한 부재는 잘 알려진 비비안의 어린 시절 경험과도 일치하며, 그 경험이 사진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저자는 어디를 가든지 비비안은 늘 주목을 받았지만, 비비안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도, 비비안을 이해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프랑스 시골의 감성과 도시의 세련미, 엄청난 창의력과 지적 자원, 어렸을 때 겪은 깊은 트라우마 같은 이중적 요소들이 비비안을 복잡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 모든 요소들이 한데 뭉쳐 동기와 행동을 파악하기 힘든, 비비안 마이어라는 독특한 인물을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비비안이 처한 사항을 고려하면 그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입을 다물고 사람들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상황에서 사진이 비비안의 감정 배출구 역할을 한 것은 당연하다. 저자는 많은 사람이,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기를 힘들어했던 여인이 그토록 개방적이면서도 감정적이고 인간미 넘치는 사진을 촬영했다는 데서 역설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 이런 무심한 태도는 그녀 자신의 존재감을 낮춤으로써 피사체에 정직하고 꾸밈없이 다가가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저자는 보모로 일했던 겐스버그 가족이 플로리다에 있는 친적을 만나러 갈 때 비비안도 함께 갔고, 1957년 마이애미에서의 어느 날 밤 비비안은 겐스버그 가족과 야자수를 찍은 뒤에 홀로 모험에 나서 단 한 장의 완벽한 사진을 찍었다고 말한다.
"그 따뜻했던 저녁 시간, 비비안은 다른 경우에도 자주 그랬듯 사진을 단 한 장만 찍었는데, 그 한 장은 비비안의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완벽한 사진은 비비안의 뛰어난 안목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마치 천상의 존재처럼 연석을 향해 하늘하늘 걷고 있다. 부드러운 조명이, 마치 여자의 몸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묘한 분위기를 내며 사진 중앙을 비춘다. 멀어져 갈수록 희미해지는 가로등은 별처럼 빛나고 있다. 그날 밤, 단 한 번의 셔터를 누른 비비안은 그 사진에 그저 '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저자는 비비안은 피사체의 감정에 신경 썼음이 분명했지만, 사진을 찍는 순간만큼은 촬영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도 일부 작품에서는 여전히 비비안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있는 주제와 기술 등이 등장한다. 피사체게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더 많은 이야기를 담기 위해 피사체를 조금 덜 보여주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움켜잡고 있는 뒤틀린 장갑만으로도 잔뜩 긴장했음을 보여주는 사진고 있고, 드러난 발만으로도 한 소년의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는 사진도 있다.
"비비안과 함께한 촬영 여행에서 잉어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것은 사진을 찍을 대상을 인식하고 그 순간을 포착하는 비비안의 속도였다. "피사체를 발견하면 곧바로 카메라를 열어서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누를 때까지 1초도 안걸렸을 거예요. 그러니 찍히는 사람들은 반응할 시간도 없었죠.""


비비안의 저장 장애의 징후는 갑자기 맥밀런 가족에게 사진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서른 살 정도부터 명백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도 저장 장애를 악화시키는데, 1966년에 겐스버그 가족을 떠나면서 비비안의 상태는 더 나빠졌고, 비비안의 작품 기류는 뚜렷하게 바뀌었다. 그때부터 비비안은 신문 한 장, 한 장을 모두 찍는 강박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11년을 함께한 집과 가족을 떠난다는 것은 비비안의 저장 장애를 한층 악화시키기 충분한 불안정한 사건이었다. 겐스버그 가족과의 결별은 비비안의 내면을 파괴했고, 수집벽을 더욱 악화시켰다. 미적 감각이 탁월했고, 특히 무늬와 모양, 질감에 예민했던 비비안이 신문을 병적으로 수집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비안은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고 싶다는 욕망보다 갖고 싶다는 욕망이 훨씬 컸다.
"시간이 흐르면서 비비안의 수집벽은 훨씬 더 심각해졌다. 자기 방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고용주들에게 엄격하게 경고했고, 문에 열쇠를 달았다. 당연히 그 때문에 사람들은 비비안의 방을 더 궁금해했다. 비비안은 중고 서점 '북맨스 앨리'의 주인이었던 친구 로저 칼슨에게 사람들이 쌍안경을 가지고 자기 방을 들여다보며, 고용주의 아이들이 자기 물건을 뒤진다고 털어놓았다."
비비안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그녀가 사진에 분명히 담은 인간애 사이의 극단적인 차이가 있다. 비비안에게 사진은 믿음과 감정,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를 표현하는 배출구로 기능했고, 그 결과 보편적인 진리와 폭넓은 정서를 반영하는 방대한 작품 세계를 낳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화상 사진은 비비안이 병치되는 이미지를 만들고,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실재하는 시간 속에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는 데 위협적이지 않은 매개물이었다. 많은 자화상 사진은 소통하고 참여하고자 하는 비비안의 욕구를 보여주면서도, 작업 전체를 보았을 때 비비안의 자아상과 마음의 상태가 어떤 식으로 변해갔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비비안이 1970년대 찍은 사진을 보면 구호와 표어에 깊은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매체가 곧 메시지다'라는 개념을 기꺼이 받아들인 비비안은 시카고 곳곳에 적힌 낙서 사진을 수천 장이나 찍었다. 화려한 색을 자랑하는 낙서들 속에서 비비안은 자신의 활동과 역설적인 관점을 지지하는 생각들을 곳곳에서 찾아냈다. 비비안은 대부분 자신이 재미있고 재치있다고 생각하는 낙서들을 찍었다.
"뉴스 중독인 비비안은 워터게이트 사진에 끝없이 빠져들었다. 비비안의 사진에는 다양한 정치 견해가 담겨 있지만, 대부분은 비비안이 좌파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비비안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가 뒤섞인 신념을 간직했고, 총기 소유 옹호 같은 특정 주장과 견해를 고수하는 보수적인 정치인들을 견딜 수 없어했다. 고용주 앞으로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정치적 견해를 담은 문서가 배달되면 비비안은 몰래 빼돌렸다."

비비안은 사진을 출력한 뒤 현상소 봉투 위에 평가 점수와 사진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적어 놓으며 완벽을 추구했다.
"비비안은 사진 인화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컬러 필름은 모두 현상소에 맡겨 인화했지만, 결과물만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관리하고 간섭했다. 사진을 출력한 뒤 현상소 봉투 위에 적어놓은 평가 점수를 보면 사진에 대한 비비안의 확신과 자신감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70세가 될 때까지, 40년 동안 사진을 찍은 비비안은, 그 나이에 이른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열정을 소진한 듯 했다고 말한다. 비비안의 기력을 서서히 쇠약해지고 있었다. 비비안은 꾸준히 건강이 악화되다 2009년 4월 21일에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비비안이 보모로 일하며 사랑했던 소년이었던 겐스버그 형제들은 어른이 되어 비비안을 화장하고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보모의 유골을 함께 뛰어다니며 야생 딸기를 수집했던 보호림에 뿌려주었따.
"전제적으로 마지막 사진들은 비비안의 위축된 자아감을 보여준다. 자화상 사진은 눈에 띄게 줄어, 1990년대에 비비안이 본인을 찍은 사진은 열장도 되지 않는다. 1996년, 더는 보모 일을 하지 않게 된 뒤로 거의 사진을 찍지 않은 비비안은 1999년이 되면, 아직 그녀 앞에 10년이 더 남았는데도, 카메라를 영원히 손에서 놓고 만다."
사진은 비비안 마이어에게 세상과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고리였고, 비비안은 원할 때면 언제라도 세상으로 들어가 자신이 있어야 할 정당한 위치를 요구했다. 저자는 비비안이 사후에 자기 자신이 전시되기를 바랐을지 여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남긴다. 그리고 저자는 비비안은 자신의 재능을 확신했고, 유명인을 동경했으며, 예술은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할 수 있다고 믿었고, 궁극적으로는 숙명론자였다고 이야기한다. 그 누구도 비비안의 궁극적인 바람이 무엇이었을지 알 수 없을 테고, 어쩌면 비비안 자신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는지 모르지만, 그저 우리는 비비안 마이어의 진정한 꿈과 바람이 어떻게 해서든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비비안도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사랑받고 받아들여지길 간절히 원했다. 사진은 그런 마음을 표출하는 수단이었기에, 비비안은 인간애와 유머, 아름다움이 가득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비비안의 작품 속에 들어 있는 너무나도 명확한 자질들이 비비안을 묘사하는 모순된 말들과 조화를 이루며 진정한 자아를 드러낸다는 걸 알고 있다. 비비안에게 자화상 사진은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이자, 자신이 분명히 실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수단이었다."
"비비안에게 사진은 그저 자신을 표현하는 수간이 아니었다. 세상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촉진제였다. 비비안의 카메라는 세상을 향하는 문을 열어, 사회생활이 서툰 이 사진작가를 전 세계, 수천 명에 달하는 다양하고도 흥미로운 사람들에게 연결해주었다. 새로운 거리, 새로운 집에 들어갈 때면 목에 건 장비는 비비안에게 목적의식과 권위를 선사하고 안전한 거리에서 감정을 끌어낼 수 있게 함으로써 비비안을 규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