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처럼 일하지 않습니다 - 네덜란드의 탄력근무제에 깃든 삶의 철학
린자오이 지음, 허유영 옮김 / 행복한북클럽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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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처럼 일하지 않습니다>는 노동 만족도 1위, 전 세계 행복지수 6위인 네덜란드의 근로기준과 직업관, 인생관을 군더더기 없이 묶은 책이다. 특히, 이 책은 본업이 일이고, 취미는 아근이고, 특기는 특근인 사람들, 소처럼 일하며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 수당이나 달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읽기를 권하는 책이다.

소화불량에 위염, 편두통에 시달리는 직장인 친구들을 수없이 봐온 대만인인 저자는 네덜란드에 가서야 그 고통을 끝낼 단서를 찾았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직장인이다. 논리적인 사고방식과 실용적인 태도 덕분이다. 이 책은 우리가 너무나 쉽게 간과했던 '지속가능하게 일하는 법'에 대하여 되짚는다. 우직한 소처럼 말 없이 일만 하고 있다면, 한층 농밀하게, 한층 유쾌하게 실무 태도를 바꿔보자.

"이 책은 단순히 더 효율적으로 일하는 비결을 알려주는 자기계발서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또 외국 것이 더 좋다고 주장하는 책도 아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일'과 '삶'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하고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나는 그들의 비결이 '논리적인 사고방식의 생활화'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항상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하루 24시간 내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그걸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법은 무엇인지 결정한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선택의 지혜가 필요하다. 인생에 주어진 유한한 시간 내에 사회적인 성취, 생활, 가정, 개인적인 취미 등의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더 멋지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이 책은 '1장 네덜란드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방식, 2장 네덜란드의 근무 환경과 직장 문화, 3장 네덜란드 경영자의 관리 비결'이라는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실용성을 추구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감정에 치우친 행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으니 그걸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재발을 막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며 해결안을 찾는데 집중한다. 남을 탓하고 비난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이 처음 네덜란드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납품 실수를 저질러 회사에 비용 손실을 초래한 적이 있었는데, 상사가 보인 반응은 "비싼 수업료를 냈다고 생각해, 넘어지면 아프다는 걸 다음번에 꼭 기억하라고."라는 한 마디였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네덜란드에서 8년 동안 일하면서 '일 처리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상사가 부하직원을 질책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감정적인 언사는 더더욱 들은 적 없다고 말한다. 스물여섯 살에 네덜란드로 건너온 뒤에야 진정한 자립이 무엇인지 배웠고, '누구도 날 도와줄 의무가 없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나를 책임질 사람은 나 자신뿐이었다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저자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퀄리티 타임(Quality Time, 퇴근 후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일'보다 '가족'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네덜란드 인구의 86%는 주당 근무시간이 34시간도 되지 않는다. 저자는 퀄리티 타임은 네덜란드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단어로, 특히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의미하는데, 이것만 봐도 네덜란드 사람들이 가족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네덜란드의 직장에서는 나이가 많거나 경력이 오래됐다고 해서, 직위가 높다고 해서 더 큰 귄위를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네덜란드의 직장에서는 도움이 필요할 때는 부하직원에게 '부탁'해야 하고, 명령조의 말투나 일방적인 지시는 통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의 기업문화는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이며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효율과 생산력을 최우선으로 한다. 동료들끼리 서로 돕고 호흡이 잘 맞는 조직을 추구하고,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해 일한다는 네덜란드의 기업문화가 눈길을 끈다.

저자는 네덜란드 정부가 근로시간을 제한하고 강제로 휴식하게 하는 규정은 근로자를 보호할 뿐 아니라 국가의 잠재적인 지출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네덜란드 정부가 발간한 근로시간 관련 법규 지침서에 따르면, 고용주는 근로시간, 휴식시간, 야근 등에 관한 법규를 반드시 준수해야 하고, 근로 점검팀이 수시로 무작위 조사를 실시해 법규 위반 사례가 적발되면 고용주에게 경고나 벌금 처분을 내린다고 이야기한다.

"네덜란드 정부는 근로시간법을 제정해 근로자들의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고 있다. 그 법에 따르면 18세 이상 근로자는 하루 근로시간 12시간, 주당 근로시간 6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연속 4주간 일하는 경우 주당 근로시간이 55시간을 초과할 수 없고, 연속 16주간 일하는 경우에는 일주일에 48시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연속 근로를 제한하기 위해 일간 및 주간 최소 휴식시간도 법으로 정하고 있다. 하루 일하고 나면 11시간이 지나야 일할 수 있고, 2주간 최소 36시간의 휴식을 보장해야 한다. 과로로 인해 발생하는 산재 보상금과 의료비를 정부가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규정을 둔 것이다."

저자는 노사 양측이 영구계약을 체결한 뒤에는 고용주가 일방적으로 직원을 해고할 수 없으며, 반드시 직원 본인, 법원 또는 네덜란드 노동복지 담당 부처인 UWV의 동의를 받아야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가장 중요한 점은 성별, 임신, 질병을 이유로 해고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이야기한다. 근로자의 복지와 보장에 관한 한 네덜란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며, 지금도 보장 범위를 계속 확대하고 있다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네덜란드에서 택시를 타려면 전화를 걸어 택시를 부르거나 택시 정류장 근처에 가야 하는데, 대부분의 택시가 벤츠라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12월 31일 기차 운행이 평소보다 일찍 중단되어 새벽 1시까지 기다려서야 첫차를 타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두 가지 사례의 공통점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나 책임감 때문에 일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고 전한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건강과 업무상 재해 예방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그들이 어떤 사안을 대할 때 일하는 사람의 감정이나 마땅이 누려야 하는 평등권을 존중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네덜란드에서 경제, 무역, 예술 전반에 걸쳐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던 17세기 초의 튤립 파동은 투기로 인해 벌어진 세계 최초의 거품 경제 현산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 역사에서 큰 교훈을 얻었고, 더욱 신중해졌다. 저자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독특해야 잘 팔린다고 믿으며, 이미 포화 상태인 레드오션에 뛰어들어 출혈 경쟁을 하는 것보다 자신의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블루오션에서 여유롭게 파도를 탄다고 이야기한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장점은 그들이 출혈경쟁에 뛰어들지 않고 시장 규모를 키우기 위해 함께 노력한다는 점이라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저자는 네덜란드 직장에서 오전과 오후 각 15분의 휴식 시간과 30분간의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모든 직원이 일에만 집중한다고 말한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모든 물건과 서비스에는 그에 맞는 가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임금이란 근로자에게는 자신이 매달 일한 노동시간 또는 노동효율의 가치이고, 교융주는 근로자의 노동시간에 해당하는 성과에 지급라는 돈으로, 곧 노동은 '거래'다. 저자는 정시 퇴근이 정당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칼퇴근하는 자신과 동료를 격려하고 지지해야 한다고 전한다. 정시에 퇴근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일과 사생활을 구분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고, 모두가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저자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일에 대한 책임이나 돈을 보는 것보다는 생활 속에서 재미있거나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실업수당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나라이지만 그들은 실업자로 사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네덜란드 사람들은 근로시간보다는 효유 향상을 통한 생산성 증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그 외에 시간에는 휴가를 떠나고 인생을 즐긴다.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돈은 부족하지 않을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고, 그들은 저축하기 위해 근무시간을 늘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돈을 더 벌기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활발한 사고와 토론을 장려하는 문화 덕분에 일의 맥락을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과거의 원인, 현재 상황, 앞으로 받게 될 영향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예측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한다.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계급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평등의식을가진 네덜란드 정부는 숨낳은 토론과 논의를 통해 혁신적인 체제와 정책을 수립하고 일찌감치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

"그들은 어떤 문제든 간에 '각자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며, 속으로 감추고 말하지 않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떤 일에 대해 의구심이 들거나 불만이 생기면 당사자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저자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탄력적인 사고는 장점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모든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 문제가 생겨도 다양한 해결 방식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세상에 '모 아니면 도'인 문제는 없으며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고, 더욱이 한 가지 가치나 표준 답안만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저자는 '즐거운 생활'과 '휴가'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책임, 게으름 같은 단어가 연상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네덜란드 사람들을 보면, 정말 중요한 건 얼마나 오랫동안 일하느냐가 아니라 회사의 실적에 얼마나 기여하느냐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의자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직원들을 죽기 살기로 일만 하는 '예스맨'으로 만드는 건 회사를 위해서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즐겁게 일하는 직원이 있어야 기업에 선순환이 생겨나고 업무의 능률과 논리적 사고, 창의적인 업무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저자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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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책 : 문학 편 1 - 르몽드, 뉴욕타임스 선정, 세기를 대표하는 100권의 책
디오니소스 지음 / 디페랑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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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명서들에 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만나볼 수 있어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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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책 : 문학 편 1 - 르몽드, 뉴욕타임스 선정, 세기를 대표하는 100권의 책
디오니소스 지음 / 디페랑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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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기의 책 문학 편1>은 책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혹은 '책에게로의 시간'이 삶의 일부인 저자들의 협업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르몽드와 뉴욕타임스 선정 「세기의 책」 시리즈 중 첫 권이다. <세기의 책 문학 편1>에서 마음에 끌리는 페이지가 있다면 독자들은 직접 그 책을 읽어 보면 다양한 명서들을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처음 소개하는 책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언제 올지, 아니 올지 안 올지조차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은, 이런저런 기다림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낸다. 오지 않는 고도와 기다림을 포기하지 못하는 두 남자, 같은 듯 다르게 흘러가는 서로의 시간, 이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게 될 기다림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을 생각하게 한다. 이 책에서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글을 소개하며 "무엇을 기다리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아직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도래할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믿음 자체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라 달래고 어르는, 곧 '감림'의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때로 그 강림의 속성으로 하염없이 뒤로 물러나는, '언젠가는'이라는 순간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마지막 문장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고도가 누구인지, 뭘 의미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건, 사실 우리가 삶의 목표나 의미를 명확히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일과 같지 않을까? 의미 있는 삶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고고와 디디가 자꾸만 지금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걸 잊듯, 그렇게 망각 속에서 한 시절을 보내곤 한다.

달리 생각해 보면, 어쩌면 고도는 거창한 삶의 이유나 가치보다 그저 한 오라기 실낱같은 희망일지도 모르겠고, 고단한 삶을 평안하게 만들 생의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겠다. 언젠가 고도가 드디어 약속 장소에 나타난다면, 흥미진진하고 신나는 새로운 삶의 한 장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때까지의 이야기가 종결되고 마는 건 아닐까?"

이 책에서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에 대한 깊은 성찰을 만나볼 수 있어 눈길을 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소개하는 <무기여 잘 있거라> 속 "이 세상은 모든 사람을 부러뜨리지만 많은 사람은 그 부러진 곳에서 더욱 강해진다. 그러나 세상은 부러지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만다. 아주 선량한 사람들이든, 아주 부드러운 사람들이든, 아주 용감한 사람들이든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고 공평하게 죽인다. 당신이 그 어디에 속하지 않는다 해도 이 세상은 당신 역시 틀림없이 죽이고 말겠지만, 특별히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마음 속 소용돌이를 일으키듯 이끌린다.

"헨리는 참전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사'에 관한 문제에는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을 일로 생각했다. 그러나 폭파 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다. 캐서린과의 사랑을 통해, 거대한 이념 이외의 모든 의미를 지워 버리는 전쟁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할 때쯤, 다시 비극으로 돌아서는 삶. 헨리는 신을 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 신은 존재하는 것을까? 신의 가호가 과연 정말 우리와 함께하는 걸까? 의지할 것이 없다면,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다울 수 있으나, 아무것도 보장할 수도 보상할 수도 없다."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는 희망이 그려져 있지 않다. 그는 세월과 함께 어떤 깨달음 속에서 희망을 찾아낼 것일까? 혹은 환상으로라도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을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세월 속에서 전쟁의 기억이 흐려진 것인지 궁금해진다.

우울하고 허무했던 작품이지었지만 그래서 더욱 빛나던 찰나의 행복한 장면을 옮겨 둔다.

길고 텅 빈 복도, 문밖에 나란히 놓인 구두, 두꺼운 카펫이 깔린 바닥, 창밖에 내리는 비와 함께 호텔에서 보낸 그날 밤, 방 안은 밝고 즐겁고 쾌적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불을 끄니 보드라운 시트와 편안한 침대에 가슴이 두근거렸으며 마침내 내 집에 돌아온 듯한 느낌,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한밤중에 잠을 깨도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곁에 그대로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에서 사르트르의 <구토>에 대해 소개하는 글이 인상적이다. 사르트르의 <구토>는 우리가 본질이라고 믿고 잇는 규정 이면에 자리한 실재, 기존의 믿음을 게워 낸 자리에 새로운 지평이 잉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사르트르는 결말 부분에 로캉탱의 구토를 멈추게 하는 매개로, <머지않은 어느 날>이라는 제목의 재즈곡을 등장시킨다. 이는 스스로를 구원하는 예술과 문학의 기능에 대한 사르트르의 대답이기도 하다."라는 글에 공감한다.

"언어 밖의 실재는, 태초에 '말씀'이 있기 전의 혼돈 그 자체다. 존재들은 그저 거기 있을 뿐, 어떤 의미와 목적을 지닌 채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무'라고 부르지만, 정작 자신은 인간이 '나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의 의미와 목적으로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어로 의미를 부여하며 이 존재를 인식하지만, 실상 존재 자체는 목적적이지 않다. 존재 자체는 모두 우연의 산물이라는 이 주제가 샤르트르의 무신론까지 이러지는 것이기도 하다.

언어적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그곳에 펼쳐진 세계의 실재. 그러나 그런 실재에 우리는 익숙하지 않다. 언어가 규정하는 본질에서 벗어난 사물 그 자체의 세계는 우리에게 혼란이다. 현기증이 일어난다. 구토가 인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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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낯들 -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오찬호 지음 / 북트리거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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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서는 안 될 한국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건들의 깊이 있는 성찰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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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낯들 -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오찬호 지음 / 북트리거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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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낯들>은 사회학자인 오찬오가 때마다 선언을 반복하면서 아픔을 소비하고 흘려버리는 우리의 민낯을 깊숙이 들여다본 사회비평 도서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故 변희수, 故 최진리, 故 최숙현, 故 김용균, 故 성북 네 모녀, 故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문제적 죽음을 응시하고, 코로나19 팬데믹, N번방 사건, 세월호 참사, 낙태죄 폐지 등 대형 재난 및 이슈를 되짚으며 한국 사회의 위기 신호와도 같은 민낯을 폭로한다.

"발 딛고 서 있는 땅이 흔들리고 있는데, 땅의 성가신 일들이 창공의 고요함과 무탈함에 침범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겎다는 결의가 넘치는 세상이다. 이를테면 "내 집 대문 앞에 장애인 특수학교가 웬 말이냐"와 같은 현수막이 당당하게 붙어 있는 것처럼, 혐오가 표현의 자유처럼 포장된 곳에서 이동권을 보장하라며 지하철에서 시위하는 장애인에게 "출근 시간을 방해 말라!"면서 화를 내는 이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희망이 없는 여기를 보자는데, 졀망을 외면하는 저기만 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차별과 혐오, 불평등과 불신이 선명한 땅보다 자기 계발, 동기 부여, 긍정적 사고, 힐링, 경제적 자유인 등의 슬러건이 나부끼는 하늘을 보는 걸 좋아한다."



저자는 故 최숙현 선수가 드러낸 스포츠계 폭력이라는 한국 사회의 절망적인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저자는 스포츠계의 괴기스러운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제 대회 성적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흥분하는 사회가 원인이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이 과잉된 감정에서 엉터리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연장장되었으며,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최숙현 선수는 전전긍긍하며 끝내 기댈 곳을 찾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선수가 금메달을 거머쥘 때마다 환호했다. 언론은 수십 개의 특집 기사를 작성했고, 뉴스에는 선수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까지 등장하여 훈훈한 이야기를 하기 바쁘다. 금메달리스트는 여러 곳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기업의 광고 모델이 되곤 한다. 한순간에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된 운동선수의 모습은 다른 선수들에겐 '지금의 부당함'을 참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어 버린다. 방황할 때 '때려 주는' 스승이 참스승이라고 억지로 생각하면서 버티게 한다. 반복되다 보면 정말로 그런 줄 착각하고 더한 일에도 개의치 않는다. 금메달만 따면 '한 방에' 인생이 달라질 테니까."

저자는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하청업체 직원이었던 비정규직 노동자 故 김용균의 사건에 관한 이야기한다. 시간을 줄이고 비용을 아껴야만 하는 게 기본값이 된 이들은 안전하지 않아도 몸이 일단 움직이도록 길들어져 있다. 저자는 위험의 외주화는 누군가에게는 위험이지만 누군가에는 엄청난 이들이며, 이처럼 산업구조의 변화는 함께 을이었떤 노동자들을 병, 정, 무로 더 세분화시키며 연대를 무용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사람이 기계 속으로 말려 들어가 몸이 분리되어 사망한다. 사람 몸이 레고 블록이 아니니, 실제 현장은 '분리'라는 단어로 온화하게 표현할 수준이 아닐 거다. 그런 일이, 조선 시대도 아니로 2018년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자 와이파이가 안 터지는 곳이 없다는 국가에서 버젓이 발생했다. 지문으로 입출금을 하는 디지털 세상에, 기계가 사람의 위험을 감지하고 자동으로 멈추는 시스템 따위는 없었다. 끔찍한 건 이런 사고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고, 이 사고는 좀 더 끔찍했기에 사회적 관심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여기서 사회를 보는 두 갈래가 선명하게 구분된다. 누구는 이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인가 묻지만, 누구는 어쩔 수 없다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이 두 갈래는 그저 다양한 시선이라고 할 수 없다. 전자가 옳고, 후자는 틀렸다. 전자가 불가능한 사회, 후자를 유도하는 사회 모두 나쁜 사회다."

저자는 2019년 11월 서울 성북구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발생한 '故 성북 네 모녀' 사건을 소개한다. 이들은 함께 세상을 등지면서도 밀린 공과금과 월세 70만 원을 봉투에 담아 집주인에게 메모를 남겼다. "마지막 집세와 공가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저자는 복지 사각지대를 줄이려고 그물망을 촘촘히 하는 노력은, 어떻게 해도 다시 사각지대를 만들어 낸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성북동 네 모녀' 사건은 굽실거림을 전제하는 선별적 복지의 한계를 알렸고 보편적 복지 논쟁에 다시 불을 지폈다고 말한다.

"죽는 마당에 공과금이라니, 삶을 포기하는 순간까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이웃으로서의 도리를 포기하지 않았던 셈이다. 세 모녀의 메모는 복지를,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인생 밑바닥까지 추락한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에게 밥 굶지 말라고 서류만으로, 종이 위에 찍힌 몇 가지 숫자만으로 복지가 완성된다는 건 착각이라는 거다. 어떤 가난은 서류 몇 장으로, 단순한 숫자만으로 증명하기 힘들다. 송파구 세 모녀는 눈앞의 평범한 사람들이 실제로는 위태로운 상황일 수도 있음을, 시스템이 이들의 위기를 포착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했다."

"보편적 복지란 일상의 '공공성'을 강화하지 않고서는 빈곤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얼음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노력만큼, 얼음판 두께를 탄탄하게 만드는 접근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보다, 최저임금을 현실적으로 인상하고 사업주가 이를 잘 준수할 환경을 만드는 일이 '무너지는' 사람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다."

저자는 'n번방' 사건을 n번방의 악마라고만 부르면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n번방을 만들고 운영한 이들은 물론이고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까지, 모두가 한국의 문화 속에서 성장했고, 특별한 DNA 구조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n번방의 괴물들은, 우리와 함께 숨 쉬며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저자는 n번방은 성을 자유롭게 말하는 시대가 얼마나 엉성하고 엉망으로 흘러갔는지를 대변하며, n번방 악마들은 '우리들의 문화'를 뚜벅뚜벅 지나서 '그들만의 리그'를 차근차근 완성했다고 이야기한다.

"언론에서는 "초유의", "전례 없이" 등의 표현으로 묘사함녀서 n번방 사건을 우주에서 온 악인들의 소행처럼 다루었지만, 우리는 독버섯이 땅에서 자랐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이 특별히 악하게 태어나지 않았따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만, 보통의 세계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악마가 아니라 출석부에 흔히 등장하는 평범한 아무개라는 걸 받아들여야만 지금껏 우리 사회가 디지털 성범죄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는 걸 인정할 수 있다. 한쪽을 변태라 취급하면, 역설적으로 다른 한쪽의 문제에는 둔감해진다."

저자는 2019년 4월 11일, 1953년에 제정되어 66년간 존속했던 낙태죄는 폐지되었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낙태는 법으로 통제할 수 없다라는 '낙태죄 폐지'에 관한 내용을 통해 '낙태는 불법인데 어떤 경우에 가능하지?'라는 제한적인 물음이 '낙태는 개인의 선택인데 어떤 시기에 신중히 생각해야 하지?'로 전환되고 있다고 말한다. 전자는 '허락된 경우'에서 벗어난 개인들이 온갖 편견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뜻하지만, 후자는 40주라는 임신 기간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토대 위에서 임신과 출산, 나아가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오롯이 스스로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낙태죄 폐지'는 '낙태할 자유'와 같은 의미지만, 다른 결이 있다. 낙태죄라는 사슬을 푼 것은 자유를 향한 갈망이기 전에, 자유가 '없었을 때' 여성이 어떤 고충에 허우적거렸는지를 간과하지 말자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여성의 몸에 국가가 기준을 들이대며 왈가왈부하는 정도를 조금이나마 줄였다고 해야 적당할 것 같다. 여성에게 강요된 자기 몸에 대한 수동적인 태도를 약간이라도 희석시키는, 제도의 긍정적 변화임을 먼저 짚어야 한다."

저자는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서울 종로우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 투쟁을 벌이는 가운데 보수라고 자칭하는 일부 청년들이 폭식 투쟁을 벌였던 사건에 관해 이야기한다. 또한 저자는 '아직도'가 아니라 '여전히' 세월호를 붙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추모는 감정이 아니라 학습이며, 개인이 알아서 느끼는 게 아니라 사회의 옳은 방향을 위해 지녀야 할 시민 정신이기 때문이다.

"'폭식투쟁'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여러모로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들을 악마, 패륜 등으로 묘사한 글들이 쏟아졌다. 저들을 대한민국과 어울리지 않는 일부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과연 그럴까? 내가 느낀 먹먹함은 단지 그들의 기행을 목격한 불편함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추모한다는 것의 한계와 슬픔에 공감한다는 것의 미흡함을 다시 마주했기에 느껴지는 몸서리였다. 그들 위로 '우리'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추모의 감정을 학습하지 못한 설익은 모습들 말이다. '지하철 투신으로 출근길 혼란'이라는 표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우리들 말이다. 학교에서 친구 누가 자살을 한들 '동요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냥 덮고 넘어가기에 급급했던 우리들 말이다. 죽음 사람 이야기가 몇 번 반복되면 '산 사람은 살아야 되지 않냐'면서 추모를 지겨움의 프레임에 가두는 '구조적인' 감정 상태로부터 누가 자유로운가. 폭식투쟁은 그 토양 위에서 자란 괴상한 나무였을 뿐이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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