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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낯들 -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오찬호 지음 / 북트리거 / 2022년 5월
평점 :

<민낯들>은 사회학자인 오찬오가 때마다 선언을 반복하면서 아픔을 소비하고 흘려버리는 우리의 민낯을 깊숙이 들여다본 사회비평 도서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故 변희수, 故 최진리, 故 최숙현, 故 김용균, 故 성북 네 모녀, 故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문제적 죽음을 응시하고, 코로나19 팬데믹, N번방 사건, 세월호 참사, 낙태죄 폐지 등 대형 재난 및 이슈를 되짚으며 한국 사회의 위기 신호와도 같은 민낯을 폭로한다.
"발 딛고 서 있는 땅이 흔들리고 있는데, 땅의 성가신 일들이 창공의 고요함과 무탈함에 침범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겎다는 결의가 넘치는 세상이다. 이를테면 "내 집 대문 앞에 장애인 특수학교가 웬 말이냐"와 같은 현수막이 당당하게 붙어 있는 것처럼, 혐오가 표현의 자유처럼 포장된 곳에서 이동권을 보장하라며 지하철에서 시위하는 장애인에게 "출근 시간을 방해 말라!"면서 화를 내는 이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희망이 없는 여기를 보자는데, 졀망을 외면하는 저기만 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차별과 혐오, 불평등과 불신이 선명한 땅보다 자기 계발, 동기 부여, 긍정적 사고, 힐링, 경제적 자유인 등의 슬러건이 나부끼는 하늘을 보는 걸 좋아한다."

저자는 故 최숙현 선수가 드러낸 스포츠계 폭력이라는 한국 사회의 절망적인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저자는 스포츠계의 괴기스러운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제 대회 성적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흥분하는 사회가 원인이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이 과잉된 감정에서 엉터리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연장장되었으며,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최숙현 선수는 전전긍긍하며 끝내 기댈 곳을 찾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선수가 금메달을 거머쥘 때마다 환호했다. 언론은 수십 개의 특집 기사를 작성했고, 뉴스에는 선수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까지 등장하여 훈훈한 이야기를 하기 바쁘다. 금메달리스트는 여러 곳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기업의 광고 모델이 되곤 한다. 한순간에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된 운동선수의 모습은 다른 선수들에겐 '지금의 부당함'을 참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어 버린다. 방황할 때 '때려 주는' 스승이 참스승이라고 억지로 생각하면서 버티게 한다. 반복되다 보면 정말로 그런 줄 착각하고 더한 일에도 개의치 않는다. 금메달만 따면 '한 방에' 인생이 달라질 테니까."
저자는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하청업체 직원이었던 비정규직 노동자 故 김용균의 사건에 관한 이야기한다. 시간을 줄이고 비용을 아껴야만 하는 게 기본값이 된 이들은 안전하지 않아도 몸이 일단 움직이도록 길들어져 있다. 저자는 위험의 외주화는 누군가에게는 위험이지만 누군가에는 엄청난 이들이며, 이처럼 산업구조의 변화는 함께 을이었떤 노동자들을 병, 정, 무로 더 세분화시키며 연대를 무용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사람이 기계 속으로 말려 들어가 몸이 분리되어 사망한다. 사람 몸이 레고 블록이 아니니, 실제 현장은 '분리'라는 단어로 온화하게 표현할 수준이 아닐 거다. 그런 일이, 조선 시대도 아니로 2018년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자 와이파이가 안 터지는 곳이 없다는 국가에서 버젓이 발생했다. 지문으로 입출금을 하는 디지털 세상에, 기계가 사람의 위험을 감지하고 자동으로 멈추는 시스템 따위는 없었다. 끔찍한 건 이런 사고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고, 이 사고는 좀 더 끔찍했기에 사회적 관심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여기서 사회를 보는 두 갈래가 선명하게 구분된다. 누구는 이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인가 묻지만, 누구는 어쩔 수 없다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이 두 갈래는 그저 다양한 시선이라고 할 수 없다. 전자가 옳고, 후자는 틀렸다. 전자가 불가능한 사회, 후자를 유도하는 사회 모두 나쁜 사회다."
저자는 2019년 11월 서울 성북구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발생한 '故 성북 네 모녀' 사건을 소개한다. 이들은 함께 세상을 등지면서도 밀린 공과금과 월세 70만 원을 봉투에 담아 집주인에게 메모를 남겼다. "마지막 집세와 공가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저자는 복지 사각지대를 줄이려고 그물망을 촘촘히 하는 노력은, 어떻게 해도 다시 사각지대를 만들어 낸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성북동 네 모녀' 사건은 굽실거림을 전제하는 선별적 복지의 한계를 알렸고 보편적 복지 논쟁에 다시 불을 지폈다고 말한다.
"죽는 마당에 공과금이라니, 삶을 포기하는 순간까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이웃으로서의 도리를 포기하지 않았던 셈이다. 세 모녀의 메모는 복지를,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인생 밑바닥까지 추락한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에게 밥 굶지 말라고 서류만으로, 종이 위에 찍힌 몇 가지 숫자만으로 복지가 완성된다는 건 착각이라는 거다. 어떤 가난은 서류 몇 장으로, 단순한 숫자만으로 증명하기 힘들다. 송파구 세 모녀는 눈앞의 평범한 사람들이 실제로는 위태로운 상황일 수도 있음을, 시스템이 이들의 위기를 포착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했다."
"보편적 복지란 일상의 '공공성'을 강화하지 않고서는 빈곤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얼음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노력만큼, 얼음판 두께를 탄탄하게 만드는 접근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보다, 최저임금을 현실적으로 인상하고 사업주가 이를 잘 준수할 환경을 만드는 일이 '무너지는' 사람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다."
저자는 'n번방' 사건을 n번방의 악마라고만 부르면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n번방을 만들고 운영한 이들은 물론이고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까지, 모두가 한국의 문화 속에서 성장했고, 특별한 DNA 구조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n번방의 괴물들은, 우리와 함께 숨 쉬며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저자는 n번방은 성을 자유롭게 말하는 시대가 얼마나 엉성하고 엉망으로 흘러갔는지를 대변하며, n번방 악마들은 '우리들의 문화'를 뚜벅뚜벅 지나서 '그들만의 리그'를 차근차근 완성했다고 이야기한다.
"언론에서는 "초유의", "전례 없이" 등의 표현으로 묘사함녀서 n번방 사건을 우주에서 온 악인들의 소행처럼 다루었지만, 우리는 독버섯이 땅에서 자랐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이 특별히 악하게 태어나지 않았따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만, 보통의 세계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악마가 아니라 출석부에 흔히 등장하는 평범한 아무개라는 걸 받아들여야만 지금껏 우리 사회가 디지털 성범죄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는 걸 인정할 수 있다. 한쪽을 변태라 취급하면, 역설적으로 다른 한쪽의 문제에는 둔감해진다."
저자는 2019년 4월 11일, 1953년에 제정되어 66년간 존속했던 낙태죄는 폐지되었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낙태는 법으로 통제할 수 없다라는 '낙태죄 폐지'에 관한 내용을 통해 '낙태는 불법인데 어떤 경우에 가능하지?'라는 제한적인 물음이 '낙태는 개인의 선택인데 어떤 시기에 신중히 생각해야 하지?'로 전환되고 있다고 말한다. 전자는 '허락된 경우'에서 벗어난 개인들이 온갖 편견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뜻하지만, 후자는 40주라는 임신 기간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토대 위에서 임신과 출산, 나아가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오롯이 스스로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낙태죄 폐지'는 '낙태할 자유'와 같은 의미지만, 다른 결이 있다. 낙태죄라는 사슬을 푼 것은 자유를 향한 갈망이기 전에, 자유가 '없었을 때' 여성이 어떤 고충에 허우적거렸는지를 간과하지 말자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여성의 몸에 국가가 기준을 들이대며 왈가왈부하는 정도를 조금이나마 줄였다고 해야 적당할 것 같다. 여성에게 강요된 자기 몸에 대한 수동적인 태도를 약간이라도 희석시키는, 제도의 긍정적 변화임을 먼저 짚어야 한다."
저자는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서울 종로우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 투쟁을 벌이는 가운데 보수라고 자칭하는 일부 청년들이 폭식 투쟁을 벌였던 사건에 관해 이야기한다. 또한 저자는 '아직도'가 아니라 '여전히' 세월호를 붙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추모는 감정이 아니라 학습이며, 개인이 알아서 느끼는 게 아니라 사회의 옳은 방향을 위해 지녀야 할 시민 정신이기 때문이다.
"'폭식투쟁'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여러모로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들을 악마, 패륜 등으로 묘사한 글들이 쏟아졌다. 저들을 대한민국과 어울리지 않는 일부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과연 그럴까? 내가 느낀 먹먹함은 단지 그들의 기행을 목격한 불편함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추모한다는 것의 한계와 슬픔에 공감한다는 것의 미흡함을 다시 마주했기에 느껴지는 몸서리였다. 그들 위로 '우리'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추모의 감정을 학습하지 못한 설익은 모습들 말이다. '지하철 투신으로 출근길 혼란'이라는 표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우리들 말이다. 학교에서 친구 누가 자살을 한들 '동요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냥 덮고 넘어가기에 급급했던 우리들 말이다. 죽음 사람 이야기가 몇 번 반복되면 '산 사람은 살아야 되지 않냐'면서 추모를 지겨움의 프레임에 가두는 '구조적인' 감정 상태로부터 누가 자유로운가. 폭식투쟁은 그 토양 위에서 자란 괴상한 나무였을 뿐이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