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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 영혼이 향기로웠던 날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안내하는 마법
필립 클로델 지음, 심하은 옮김 / 샘터사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향기>는 프랑스의 지성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필립 클로델의 에세이이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필립 클로델의 영화 <차가운 장미>를 관람하고 나서 그의 팬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향기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수놓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안개'라는 제목의 글이다. 필립 클로델은 안개라는 소재를 아름다운 문장들로 끌어낸다.
"나는 안개가 좋다. 안개 덕분에 언제나 나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으니.
바깥을 나가 내 주변의 공간만이 어렴풋이 나타나 보이는 자연 속을 걸으면, 비록 보이지 않는 지우개에 지워져 이미 삼켜진 세계일지라도 이 세계는 영혼의 단순한 투사물이 된다. 통찰력 있지만 다소 냉정한 가설이 된다.
나는 혼자다.
내면 깊이 혼자다.
나는 껍데기 속 달팽이처럼 이 생각에 틀어박혀 있다. 멀리서 비쳐오는 빛. 그 존재를 증명해주는 하얀 색조가 불가해한 어떤 논리를 따라 이곳저곳 뚫고 들어오려 하지만, 거의 들어오지 못한다.
불투명한 안개의 현존 속에서 중대한 결과도 고통도 없이, 가벼운 '세계의 종말'이 돌연 출현한다. 일시적으로 갇힌 잠재적 향기의 냉정한 추출자로서 안개는 일상의 풍경을 훼손한다. 다르게 보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호텔방'이라는 제목의 향기가 느껴지는 글이 인상적이다. 필립 클로델은 자신의 사무실이나 연구실이었던 호텔방의 이야기를 향기로 건넨다.
"방은 우리와 몇 시간 동안, 하룻밤 동안 결합하여 우리가 유일하다고 믿게 만든다. 더 잘 속이기 위해 우리 향기를 덧입는다. 그러고 나서 사냥감을 몰듯이 우리를 내쫓는다.
호텔방의 진짜 향기는 우리의 간결성과 피상성의 향기인 것이다."
'석탄'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어린시절의 냄새, 가난과 슬픔의 냄새'라는 글이 석탄의 향기를 그대로 느끼게 한다.
"석탄이다. 광산을 채굴하는 이 나라에서는 아직도 거의 어디서나 석탄을 때는 모양이었다.
어린시절의 냄새, 가난과 슬픔의 냄새였다.
크든 작든 해롭든 이롭든 지속적이든 일시적이든, 인생길에 놓여 운명을 더럽히는 불행을 그을음이 잘 드러내 보이듯 말이다."
'잠든 아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현재와 과거의 우리를 이야기하는 잠든 어린아이의 살냄새를 표현하는 필림 클로델의 섬세함이 돋보인다.
"현재의 우리 또는 과거의 우리에 대해, 깊이 잠든 어린아이의 살냄새만큼 더 잘 이야기해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침대 속에서 입을 반쯤 벌린 채 두려움도 공포도 전율도 없이 쉬고 있는 어린아이는, 우리가 늘 가까이 붙어 어둠을 쫓고, 흔뜨리고, 필요하다면 그 어둠을 부정할 준비다 되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시절의 집'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이제 어린시절의 집에서 자신의 자리는 없고 삶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 필립 클로델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아버지는 이곳에서의 삶을 특징지었던 모든 것을 가지고서 떠났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집의 향기도 동시에 죽었다.
춥다. 여기에서 글을 쓰는 것이 여러 해 만에 처음이다. 아마 30년도 넘은 듯싶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곧 집은 팔려서 새로 칠해지도 개조될 것이다. 여기에서 살 존재들은 그들의 삶, 꿈, 고통, 불안, 평안을 이곳에 가져올 것이다. 잠을자고, 사랑하고, 먹고, 씻고, 화장실에 가고, 목공일을 하고, 울고, 웃고, 아이들을 키울 것이다. 늘어나는 양초처럼 집은 조금씩 그들에게 순응해가면서 그들의 향기를 간직하게 될 것이다."
'죽음'이라는 제목의 필립 클로델의 글이 눈길을 끌었다. 죽음에 관한 명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역시 필립 클로델이다.
"죽음은 정말이지 모든 것을 생각한다. 죽음은 살아남을 줄 안다. 죽음은 시간과 결혼했고 화장법을 바꿨다.
혁신.
우리는 충분히 이해한다. 죽음도 분명 권태로웠을 것이다.
항상 이기는 것, 그것은 정당한 게임이 아니다."
'교도소'라는 제목의 글. 필립 클로델은 교도소에 강연을 하러 여러번 간 경험이 있다고 말한다. '교소도의 향기는 억눌린 향기인 것이다'라는 그의 글에 공감한다. 교도소라는 공간을 섬세한 향기로 이야기하는 글에 매료된다.
"교도소의 세계와 그 원리는 그에 적절한 행동 양식, 다른 곳에서는ㄴ 찾아볼 수 없는 병리학, 특별한 냄새를 만들어낸다. 그곳에서는 모두 약화되어 있고, 약해져 있고, 마비되어 있다. 그리고 바깥에서라면 한계 없이 펼쳐질 수 있는 모든 것이 두꺼운 벽 사이, 높은 유리창 아래, 창살로 고정된 빈약한 공간 안에 정체되어 있다.
제약되고 낮춰지고 늦춰진 삶의 향기들이 교도소 안에서 음정을 잃는다. 퇴색되어,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소리가 멈춘다. 들어가자마자 해체되고 희석된다. 낡은 벽의 녹에, 항상 닦지만 여전한 바닥의 기름기에, 매년 봄 헛되이 덧칠해지는 처량한 페인트에 영향을 받는다.
거기 함께 있는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꾸미고 치장하려는 노력을 더는 하지 않는다. 본질을 포기하고 체념하고 일률적으로 변한다. 그것이 아마도 이 장소의 향기를 가장 특징짓는 것, 우리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일 터이다.
본래의 향기를, 그리고 서로 구별되기를 거부하는 냄새들.
스스로 유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냄새들.
단념해버린 냄새들.
교도소의 향기는 억눌린 향기인 것이다."
소설 <회색영혼> <브로덱의 보고서>의 작가, 영화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차가운 장미>의 감독 필립 클로델의 냄새와 추억에 대한 공감각적 산문집, 2013년 장자크 루소 상 수상작인 책 <향기>를 읽으면서 삶과 장소, 인물들에 대한 추억을 섬세한 향기로 기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