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러 가자고요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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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 가자고요>는 8년 만에 선보이는 김종광의 다섯 번째 소설집이다. 2011년에서 2017년까지 잡지 지면에 발표했던 소설들 가운데 9편을 수록한 책 <놀러 가자고요>는 농촌 소도시를 배경으로 세련된 삶의 뒷전으로 밀려난 정답고 순박한 마음과 풍경들을 그려낸다.

이 책은 '<범골사> 해설, 범골 달인 열전, 놀거 가자고요, 감사또, 봇도랑 치기, 산후조리, 만병통치 욕조기, 아홉 살배기의 한숨'이라는 9편의 소설집으로 구성되어 인상적이다.

이 책에서 작가 김종관은 나이든 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으며, 유머와 해학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흥미롭다. 농촌을 배경으로 하여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범골 호랑이는 1초에 한 수씩 두었고, 늙은범골은 1분에 한 수씩 두었다. 지루함을 참다못한 범골호랑이가 대화를 입력했다. '늙은탱, 빨랑빨랑 못 두니? 너 늙은 분 맞지? 우리 범골에는 너같이 느린 것은 발을 쭉쭉 뽑아서 전봇대로 만드는 풍습이 있어. 너 둘 때까지 나 계속 지랄할 거야. 야, 올드 도그 베이비야, 빨랑 두랑께......'
늙은범골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대화창을 수첩으로 가리고 두었기 때문이다. 결국에 세대를 초월한 진검 승부는 호신선의 승리로 끝났다. 승부가 한창이었으나, 느림에 굴복한 방과외가 접속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호신선의 147번째 '접속끈김성'이었다."

이 책에서 '아홉 살배기의 한숨'이라는 제목의 글이 인상적이다. '한숨'이 어우러지며 가족들이 함께 하는 일상을 그려내어 눈길을 끌었다.

"아내가 보기엔 녀석의 한숨이 여전하다는 거였다. 아내의 다친 마음도 여전한 듯했다. 어머니의 답답한 속도 여전할 테지. 나 역시 여전한가?
어버이날을 일주일 앞두고 비가 거세게 내리는 날, 버스 안에서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큰아버님이 돌아가셨대!"
내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2년 동안 뵙지 못한 백부님 덕분에 우리 가족이 빨리 만나게 되었네, 였다. 한숨이 어우러진다, 라고나 할까...... 백부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어버이 날에도 만나기 어려웠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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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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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작인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의 소설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는 이스라엘의 도시 네타니아에 위치한 작은 클럽에 한 스탠드업 코미디언 '도발레'가 쉰일곱살 생일무대에 오르는 장면을 시작으로 유머와 비극이 공존하는 삶의 이야기를 건네는 작품이다이 책에서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은 이스라엘의 현실을 거침없는 언어와 풍자를 곁들여 충격적인 반전을 선사하며 독자의 심장과 머리를 동시에 뒤흔든다.

 

생일은 당신들도 알다시피 영혼을 탐색하는 날이야, 적어도 영혼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말이야. 그런데 우리끼리 얘기지만, 현재 나의 상태에서, 나는 영혼을 유지할 자원이 없어. 진지하게 하는 말인데, 영혼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정비해줄 것을 요구하잖아, 안 그래? 절대 끝나지를 않아! 매일, 하루종일, 영혼을 끌고 들어와 손을 봐줘야 해.”

 

스탠디업 코미디언 '도발레'는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은퇴한 판사 '아비샤이'를 자신의 무대에 초대하고, '아비샤이'에게 "자신을 봐주고그것을 말해주는 것", 단 한 가지를 바랬다. 이 책에서 아비샤이도발레의 이야기를 듣는 청중이라는 관찰자 역할로 등장하여 도발레라는 인물이 공유한 삶의 파편들을 함께 기억하는 과정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전립선 암이라는 병이 든 도발레가 여읜 몸으로 관객에게 웃음을 잃지 않고 자신의 비극적인 진실을 알리는 모습은 '아비샤이가 은퇴 후 삼 년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위로를 받았던 순간이었다. ’도발레'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스런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읽어내려가 줄 인물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윽고 숨죽여 킥킥대는 소리들. 그는 거대한 가구 안에 들어가 있는 꼬마처럼 보인다. 몇 사람이 큰 소리로 웃지 않으려고, 그의 눈길을 피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보인다. 마치 그가 혼자서 풀고 있는 어떤 복잡한 계산에 자기들도 얽혀들까봐 걱정하는 것처럼. 아마 그들도, 나처럼, 이미 원래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그 계산에, 사람 자체에 말려들었다고 느낄 것이다.” 

 

"나는 듣고 싶어네가 동의한다면아비샤이 바로 너 같은 사람한테서 듣고 싶어이런 일을 하도록 훈련받은 사람그러니까평생 사람들을 보고 순식간에 그 사람들을 읽어내고사람들 뿌리까지 쑥 내려가......"  

 

'도발레'는 어린 시절 남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아비샤이'에게 삶의 이야기라는 보물을 찾아준 친구였다하지만 현재 은퇴한 판사 '아비샤이'는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하던 시기가 오래된 인물이었다. '도발레'가 관객에게 그의 인생을 관통한 중요한 삶의 이야기를 말하는 모습을 보고처음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던 ‘아비샤이 "저 사람이 이야기를 하게 하시요!"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아비샤이'는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언어를 통해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달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도발레'가 경험한 비극적인 과거 안에 자신도 함께 존재했음을 기억한다무대 위에 선 채로 삶을 고백하는 '도발레'의 모습은 '아비샤이'가 잊었던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그를 존재하게 만들어준다.

 

"그의 질문을 받다보니 나에게 진귀한 보물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인생 경험나의 삶이당시까지 여행그리고 아파트나 학교나 언어나 얼굴의 빈번한 변화로 이루어진 부담스러운 소용돌이로 견뎌왔던 그 삶이 사실은 엄청난 모험이었던 것이다.“

 

매번 헤어질 때마다 허공에서 맴도는 가능성이 있었지만 우리 둘 다 감히 그것을 입 밖에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했다. 마치 현실이 이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이야기를 다룰 방법을 알 거라고 아직 믿지 못하는 것처럼.”

 

아비샤이는 자신이 그를 오랜 시간 잊고 살았다는 것과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극구 피하다보면 과거의 거대한 부분이 천천히 무뎌지고 지워지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즉시 아이를 알아보았다. 아이들이 킬킬거리는 것으로 보아 내 얼굴에서 뭔가를 눈치챈 듯했다. 도발레는 아이들의 눈길을 따라 나를 보았다. 얼굴이 눈물로 축축했다. 그 만남은 우리의 깜냥을 넘어선 것이었으며,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대처 능력도 넘어선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네거티브필름이 되어버린 것 같았음에도, 둘이 완전히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의 비명이 내 목구멍 안에 얼어붙어 있었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외면하고, 걸어나갔다. 여전히 그 아이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들렸다.”

 

'도발레'에게는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뒤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지만 아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도발레의 일상은 폭력으로 물들어갔고, 그는 폭력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물구나무를 서서 거꾸로 세상을 마주하며 걸었다.

 

그래, 아버지는 물구나무로 걷지 말라고 말했고, 그래서 그렇게 했어. 하지만 그때부터 생각하지 시작했어. 이제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나 자신을 구하지?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 내가 어떻게 해야 이런 직립성 때문에 죽지 않을 수 있느냐는 거야. 어떻게 살아 있을까? 그게 당시 내 마음이 움직이던 방식이야. 나는 늘 그런 불안이 있었지. 좋아, 아빠는 내가 다른 모든 사람처럼 걷는 걸 보고 싶다 이거지? 좋았어, 아빠가 원하는 대로 걸어주지. 늘 내 두 발로 서 있어주지, 착한 꼬마가 되어주지, 하지만 걸을 때 체스 규칙을 따르겠어, 알았어?”

 

도발레열 네 살에 군사캠프에 가게 되고, '장례식'에 가야 한다는 상관의 명령에 따라 운전병과 함께 트럭을 타고 고향으로 향하던 시간을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관객들에게 고백한다. '도발레'는 운전병과 함께 트럭에서 내리기까지의 시간은 인간의 삶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짐승 같아야 했던 순간들이라고 생각했다. '도발레'는 부모의 '장례식'에 조의를 표하러 가는 길이 아니라 '장례식'이라는 의식을 처단하는 주인공으로서 인간이 아닌짐승의 시간을 보내기 위한 죽음의 길목으로 향하는 중이었다운전병이 '도발레'에게 끊임없이 개그 이야기를 건넨 이유는 '도발레'가 저지르게 될 악행을 뿌리채 잊어버릴 수 있는 방어막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게 내 첫 장례식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나는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어디에서 그 사람이 갑자기 나타날지그 사람을 볼 수 있는 건지 아니면 뭔가에 덮여 있을지 알지 못했어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여기저기 서 있는 게 보였어무리마다 각기 다른 곳에나는 그 사람들이 뭘 기다리는지누가 책임자인지우리가 뭘해야 하는 건지 알지 못했어.” 

 

'도발레'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는 삶을 선택한 것은 '유머'라는 방어기제가 엄마를 죽음으로 이끈 홀로코스트의 가해자이가 피해자가 된 자신의 기억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역사라는 비극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홀로코스트'의 만행을 저지른 '도발레'의 곁을 지켜주지 못한 친구 '아비샤이'는 후회와 슬픔을 즉시하며 '도발레'가 건네는 이야기를 끝까지 관람한다. ‘도발레는 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그 사람에게서 잘못되고 뒤틀린 것들 너머에 놓인 것을 판단하는 판사로 일했던 고유한 내적인 빛을 지닌 아비샤이에게 자신이 온몸으로 경험한 역사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끔찍한 일을 당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정의를 바라볼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기억을 잊고 싶었던 도발레는 한 인간으로서의 엄마의 존재를 기억한다. ‘도발레가 삶이 건네는 모순과도 같은 감정인 웃음과 슬픔이 뒤섞인채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정말로 엄마가 느껴지는 순간이 몇 번 있었어...... 그러니까단지 나의 엄마로서만이 아니라한 인간으로서여기 이 세상에 있었던 한 인간아빠는 엄마가 가고 난 뒤에도 거의 삼십 년을 버텼지알아마지막 몇 년은 내가 돌봐드렸어그래도 아빠는 집에서 죽었어내가 옆에 있을 때."

 

<말 한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코미디'로 풍자하며 고통스런 진실과 마주하는 순간들을 전하는 작품이 아닐까? ‘을 통해 이야기를 전하는 행위는 ''의 진실을 ''와 함께 공유하고 ‘ ‘의 삶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건네는 치유의 순간들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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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코리 스탬퍼 지음, 박다솜 옮김 / 윌북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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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전 편찬자가 말하는 세상의 언어를 담아낸 단어의 매혹적인 이야기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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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들의 역사 - 20년차 기자가 말하는 명화 속 패션 인문학
유아정 지음 / 에이엠스토리(amStory)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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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들의 역사>는 17~19세기 바로코, 로코코 시대의 명화를 통한 패션과 역사,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책으로 인상적이며, 패션 아이템들이 어떻게 탄생하고 성장했는지를 아름다운 명화와 함께 만나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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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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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아름다운 사랑을 떠올리는 책의 제목을 발견하고 경이로운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책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에서는 첫사랑과 낙원이라는 황홀한 제목이 부여하는 감정을 상기할 수 없을 정도로 독자의 상상을 깨부수며 뒤흔든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의 작가 린이한은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했고 2009년 대입자격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하며 화제를 모은 인물이다. 린이한은 세 번의 자살 지도 뒤에 2012년 대만정치대학 중문과에 다시 입학했지만 3년 후 또 다시 우울증이 악화되어 휴학했다. 2017년 2월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발표한 소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다시 한 번 화제를 모았지만 그로부터 두 달 뒤인 4월 27일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후 작가의 부모는 주인공 팡쓰치가 열세 살부터 유명 문학 강사에게 상습적인 성폭행을 당했다는 소설의 내용이 작가의 실제 이야기에 바탕했다고 밝혔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에 등장인물인 팡쓰치와 류이팅은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을 함께한 영혼의 쌍둥이이다. 고등학교 졸업반인 이팅은 어느 날, 낯선 산 근처의 파출소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그곳으로 찾아간다. 그곳에는 정신 나간 표정으로 콧물과 침을 흘리는 쓰치가 있었다. 경찰은 산에서 쓰치를 발견했다고 했다. 소설은 쓰치의 일기를 통해 이팅이 지난 5년 동안을 재구성하면서 시작된다.

팡쓰치는 열 세 살이라는 나이에 문학 강사인 '리궈화'로부터 성폭행을 당한다. 아름다운 사춘기를 시작해야 할 나이에 팡쓰치는 '리궈화'로 인해 비뚤어진 사랑을 배운다. 리궈화는 팡쓰치의 몸 안에서 그녀를 조종하며 죄책감 없이 쾌락을 즐긴다. 팡쓰치는 자기 혼자서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영영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진실은 무엇이고, 거짓은 무엇일까? 진실과 거짓은 상대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세상에 절대적인 거짓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녀는 찢겼고 휘저어 뭉개졌으며 찔려 죽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녀도 선생님을 사랑한다면 그건 사랑이 된다. 그녀에게는 다른 미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과거 자신의 위조품이다. 애초에 진품이 없는 위조품. 분노의 오언절구는 영원히 늘여 쓸 수가 있다. 쓰고 또 쓰고 천 글자를 써도 끝나지 않는, 애절하고 장엄한 시가 될 수 있다."

"중학교 1학년 스스의 날 이후 그녀는 조금도 자라지 않았다. 리궈화가 자라지 못하게 그녀의 몸을 짓눌렀다. 인생에 대한 의욕, 삶에 대한 열정, 둥그렇게 뜨고 있던 커다란 눈, 아니면 그 무엇이든, 누군가 밑에서부터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 들어와 모든 걸 비틀어놓았다."

소녀였던 팡쓰치에게 문학 선생님이라는 권력으로 시작된 리궈화의 달콤한 말과 성폭행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눈 뜨지 못하게 할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팡쓰치는 생존하기 위해 자신을 좋아해야 했고,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믿어야 했고, 다시는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에게 화가 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녀 자신에게 화가 났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우울함은 거울이고, 분노는 창이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야 했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사나웠더라면 이토록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편인 첸이웨이에게 폭행을 당하며 살아가는 이웃집 언니 이원은 팡쓰치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는 것을 예감하지만, 팡쓰치를 구원하지 못한다. 이 책에서 괴물 같은 몸 속의 상처라는 같은 고민을 지닌 이원과 팡쓰치가 교감하는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리얼리즘에서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사랑스럽기 때문이고 누군가 죽는다면 그가 죽을 짓을 했기 때문이야. 악인이 있으면 작가는 그를 탑에 가두고 불을 질러서 뛰어내려 죽게 만들지. 그러나 현실은 달라. 인생은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책에서 세상의 아픔과 불행을 배워지만, 현실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엄습할 때 책을 펼치고 논문을 써서 반박하지 못했어. 내 몸의 반쪽을 책 속에 끼운 채 안으로 파고들어 숨어버릴지 훌훌 도망쳐 나올지 갈피를 잡이 못했어. 나는 열여덟 살의 내가 싫어하던 어른이 된 것 같아. 하지만 너희는 늦지 않았어. 아직 기회가 있어. 또 너희는 나보다 지혜로워. 정말이야. 넌 아직 늦지 않았어."

팡쓰치는 잠을 자지 못하고, 악몽을 꾸며,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영혼을 나누었던 친구 팡쓰치와 이팅이였지만 둘의 인생은 다가설 수 없는 평행선처럼 다른 선로를 우회한다.

"쓰치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자신의 피부와 점막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기를 바랐다. 머릿속 기억은 묻어버릴 수 있지만 몸의 기억은 그럴 수가 없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은 여전히 일자 두 개였다. 옆자리와 시험지를 바꾸어 채점했다. 이팅의 시험지에 계속 동그라미를 쳤다. 채점이 끝나고 돌려받은 쓰치의 시험지에도 모두 동그라미가 쳐 있었다. 똑같은 점수의 시험지, 하지만 두 시험지가 맞이한 인생은 완전히 달랐다."

리궈화는 팡쓰치를 열 세살의 시간 속에 버리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문학이라는 아름다운 말로 치장하며 소녀들의 삶을 유린한 리궈화와 같은 어른들은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리궈화는 타이베이의 아파트 욕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내려다볼 때면 문득 팡쓰치가 떠오르곤 했다. 자신의 조심스럽지만 광적이고, 매력적이면서도 한껏 팽창된 자아가 통째로 쓰치 안으로 들어갔던 순간이 생각났다. 쓰치는 그에게 친친 휘감겨 유치한 단어들 속으로 내던져졌다. 그의 비밀, 그의 자아가 그녀의 입에서 나오지 못하고 그녀의 몸 안에 갇혀 있었다. 심지어 마지막까지도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언어의 무게였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의 작가 린이한은 세상 그 어떤 팡쓰치든 소비되어버릴까 봐 두렵다고 말했다. 작가 린이한이 고통스럽지만 매일 여덟 시간씩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팡쓰치에게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고통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단 한사람이라도 있다면 외롭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로 쓰지 않을거에요.'라고 말했던 작가 린이한은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라는 소설을 완성했다. 린이한은 문학은 직접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고통을 공감하고 상처를 위로하며 영혼을 움직일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쓰치의 일기를 다 읽고 난 이팅은 예전의 이팅이 나이었다. 자기 영혼의 쌍둥이가 바로 아래층에서, 또 자기 옆에서 유린당하고 더럽혀지고 음식물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일기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달의 뒷면 같았다. 그녀는 이 세상의 곯아터진 상처가 이 세상 자체보다 크다는 걸 알았다."

이원은 이팅에게 세상 누구도 폭력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글을 쓰라고 말한다. 글의 힘은 폭력을 감내하는 것을 미덕으로 규정하지 않고, 분노를 표출하고 세상에 올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넌 아직 열여덟 살이야. 선택할 수 있어. 이 세상에 소녀를 강간하며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강간당한 소녀가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쓰치라는 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다른 누군가와 공갈젖꼭지와 피아노를 공유한 적 없고, 다른 누군가와 똑같은 취향과 생각을 가진 적이 없는 척 살 수 있어. 부르주아의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어. 정신에 걸리는 암이 있다는 것도, 쇠 울타리 안에 정신암 말기 환자들을 모아둔 곳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이 세상에 마카롱과 핸드드립 커피, 수입산 문구만 있는 척 살 수 있어. 하지만 넌 쓰치가 경험했던 모든 고통을 겪고, 쓰치가 그 고통에 저항하기 위해 쥐어짜낸 모든 노력을 따라하 수도 있어. 너희가 태어나서 함께 지낸 시간들과 네가 쓰치의 일기에서 찾아낸 시간들을 모두 합쳐서 말이야. 넌 쓰치 대신 대학에 입학하고 대학원에 다니고, 연애를 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해. 퇴학을 당할 수도 있고 이혼을 할 수도 있고 유산을 할 수도 있지. 하지만 쓰치는 그렇게 흔하디흔하고 시시하고 따분한 인생도 경험할 수가 없어. 알아듣겠니? 넌 쓰치의 생각, 감정, 느낌, 기억, 환상, 사랑, 미움, 공포, 방황, 불안, 따뜻한 정, 욕망을 모두 경험하고 기억해야 해. 쓰치의 고통을 단단히 끌어안으면 쓰치가 될 수 있어. 그런 다음에 쓰치를 대신에서 쓰치의 몫까지 사는 거야."

"고통스러운 경험은 말하기가 힘들다. 이 세상에 문학이 있어 다행이다"고 말했던 작가 린이한이 경험한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은 작가 자신의 오랜 고통의 시간을 읽어내려간 시간을 의미한 작품이었다. 아무런 괴로움이나 고통이 없이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즐거운 낙원과 같은 첫사랑을 꿈꾸던 팡쓰치와 같은 소녀였던 작가 린이한이 세상 너머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하며 살아가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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