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 정진C의 아무런 하루 - 일상, 영감의 트리거
정진 지음 / 디페랑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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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 정진C의 아무런 하루>은 작가 정진의 일상의 고민의 흔적들, 예술가로서 미술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는 에세이다. 그리고 이 책의 목차를 구성하는 '마음 풍경', '영역 인간', '남겨진 감정들'은 작가 정진의 미술작품 제목과 동일하며, 작업하며 적은 노트들을 바탕으로 하였다.



정진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지만, 자신의 일이 운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운명론자가 아니라 그것을 결정이었다는 정진의 글이 눈길을 끈다. 정진은 어려서부터 미술작가, 글작가가 되겠다 희망한 적은 없으며, 점점 그런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고, 순간순간 결정했다고 이야기한다. 미술과 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그것들을 현실에 옮겼고, 결국 우리는 운명보다 매일의 힘을 믿는다는 정진의 글에 공감한다.

정진은 '와장창' 하고 깨어져야만 화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진은 '파사삭' 하는 순간, 주변이 균열한다고 이야기한다. 아마도 그것을 꽤 오랫동안, 누군가를 누군가를 참아 왔다는 것이며, 무너짐은, 짜증 섞인 찌푸림, 거슬리는 한마디, 별것 아닌 거북함에서 시작한다는 정진의 글이 인상적이다.

정진은 생각하는 인간으로서의 미술가, 그 촉발제, 작가에게 생각의 트리거는 영감이라 불리지만, 그리 대단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을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정진은 영감은 하나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생각이 어느 순간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순간적으로 대입되는 것에서, 다른 하나는, 순간 튀어나오는 생각의 파편, 그것들이 빛이 날 때까지 다음어야만 무엇이 되는 두 가지 길로 찾아온다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결국 영감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앞뒤의 지속적인 시간들, 준비왼 사람에게만 보이며, 그것을 가꾸는 사람만이, 그것을 현실로 만든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 시간들보다 영감의 순간에 더욱 관심 있어 보이지만, 천부적 재능이나 행운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영감을 실제로 만드는 것은 성실력이라는 정진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정진은 자신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 우리는, 타인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정진은 존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으로 그들을 정의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얼굴과 이름만 그 사람인, 그와는 다른 누군가를 만든다. 정진은 자신 안에서 상대는, 마치 소설의 등장인물들처럼 살아가며,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말한다. 정진은 가족조차 만들어진 타인일 수 있고, 나의 생각이, 그가 되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철들다는 것은 포기의 영역으로 본인의 의지로 조절 가능해 보인다고 말한다. 그것은 조금 혹은 많이 강요와 강제를 가진다는 정진의 글이 눈길을 끈다. 정진은 내 것을 양보하면 철들었다 하고, 눈치 보기 시작하면 철들었다 하고, 기댈 곳 없으면 철들었다 하고, 그렇다면 그것은 포기의 영역이 맞다고 이야기한다.

"나의 의지를 꺾어 너를, 상황을, 자신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의지.

그래서 어떤 경우 포기는 배려이지만,

어떤 경우 그것은 죽임이다.

내 안의 꿈틀대는 어떤 것을 죽이고 나면, 철들었다 한다.

한동안 착한 어른이고 싶었던 나는, 곧잘 학살자였다."

정진은 예술가가 감정만을 전달하는 사람이라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말한다. 정진은 물론, 그런 예술은 잘못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그런 미술가가 아닐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자신의 작품이 방아쇠가 되기를 소망한다는 정진의 글에서 예술가란 무엇인가를 깨닫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미술가나 그들의 작업을 보며, 무언가를 느껴야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감정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생각하기를 바란다.

나의 작품이 방아쇠가 되기를 소망한다.

당신의 어떤 생각을 죽이는,

당신의 어떤 생각을 깨우는."

정진은 예술이 어머니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한다. 항상 주변에 있어 소중함을 모르지만, 신의 대리인이라 불리는 거대한 존재. 정진은 그녀를 매일 보는 것은 생활의 일부이지만, 사실 그녀는 자신에게 세상을 있게 한, 그 처음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모든 이들에게 어머니가 함께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어머니란 존재가 그의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는 것도 아니라는 것조차, 예술과 닮았다고 말한다.

"인간이 만든 것들이 모두 그렇듯,

그녀는 위대한 동시에 나약하다.

그러니 신의 프레임을 씌워 그 어깨를 무겁게 하지 말자.

그녀를 도우라.

어머니도, 예술도."

정진은 SNS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 주는 장터 같다고 말한다. 정진은 SNS에는 온갖 종류의 욕망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마치 기원전 4세기 그리스, 프락시텔레스의 조각상들을 닮았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SNS 안에는 더 멋진 내가 있고, 좋고 나쁨을 떠나 인간 본능의 영역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진실된 픽션을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최첨단의 즐거움은 항상 본능에 충실하다는 정진의 글이 인상적이다.

"놀랍도록 아름답고 선망하게 하는 그 모습 이면에, 대상의 단점을 모조리 빼버리고, 그 안을 완벽으로 채워 넣은 인간의 모습이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바랐다는, '예술에서의 영혼의 활동'은 기대할 수 없다.

어차피 예술의 영역이 아니기도 하지만, 이곳은 개인의 개성을 담는 그릇이 아니다.

성향이, 아름다움 안에 갇힌다.

이곳의 개성과 아름다움은 현실세계와 다른 정의를 가진다.

정확히는, 보여지고 싶은 곳만을 선별적으로 발췌한 아름다움.

마치 샤랄라하게 각색된 자전적 소설처럼, 드러낼 단점까지도 섬세하게 각색된다."

정진은 스스로의 좌표를 찍는다는 것은, 넓은 세상 속에 나를 작은 점으로 표현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알겠다는 의지라고 말한다. 정진은 나의 정서적 물리적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도, 즐거운 일도 아니겠지만 내가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면,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비로소 시작할 수 있고, 시작은 한번이 아니라 수시로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작가가 생각하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전에 영역 동물이라고 말한다. 정진은 인간 삶의 형태는 야생동물처럼 일정한 패턴을 가진다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산에는 호랑이가 다니는 길, 토끼가 다니는 길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인간 또한 물리적 영역 뿐만 아니라 정서적 영역에서조차 정해진 길만을 다니는 듯 하다고 말한다. 정진은 내 것이 소중할수록 다른 것들을 배척하고 조롱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우리 대부분은 일반적인 사람들, 이렇게 우리는 영역 동물들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지키려 평생을 바친다. 새로운 생명체가 발을 들여놓는 순간, 위태롭고 날카롭다.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온 생명체에 민감하다. 필요하다면 잔인할 수 있다. 그것에는 예외가 없다. 그 안에서는 가족도 친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역 안에서 안락함을 느끼고, 그것을 침범당하면 날선 불편함을 느끼니까.

동물들은 그 불편함을 눈에 보이게 표출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아마도 문명인이라는 타이틀을 포기할 수 없나 보다. 그러니, 인간의 민감함은 동물들의 것과는 다르게 발현된다. 자라며 각자의 사회적 영역을 확보하지만, 다시금 그들만의 숲에 발을 들이는 순간 뱀처럼 똬리를 튼다."

정진은 잃어버렸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상태의 없음이고, 버렸다는 것은 의지를 가진 상태의 없음이라고 말한다. 둘의 공통점은 현재 내게는 없다는 것이다. 정진은 우리는 꿈, 삶, 물건, 사람, 감정 등의 일부를 시간과 함께 하얗게 잊곤 한다고 말한다. 정진은 그것은 마치 마법 같아서 갑자기 없는 것이 되고, 그렇게 없는 것, 잊혀진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고뇌한다.

"인형은 49개로 하얗게 복제되었다.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흼은, 그 대상의 경중과 상관없이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을 뜼한다. 숫자 49는 사람이 죽은 지 49일 째 되는 날 지내는 재를 뜻한다. 사십구재는 윤회를 믿는 이들이, 죽은 이가 후생에 안락하고 평안한 삶을 살기를 바라며 복을 비는 행위이다.

이 작품은, 종교 없는 작가가 지금 곁에 없는 것들의 명복을 비는 일종의 의식이겠다."

정진은 누군가의 질문이 내 안의 생각이나 감각을 일깨우는 경우가 있는데, 상대의 질문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그것이, 처음 듣는 것도 아닌 그것이, 어느 날의 나에게 특별히 다가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진은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거나, 이미 내 안에 있었지만 꺼내어 본 적 없던 것들을 끄집어내는 계기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만약 그 질문에 가르치거나 일깨우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소심하고 예민한 반항아인 나는 단번에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다. 자리도 생각도 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질문도 어떤 날에는 다르게 온다. 그러면 그날 저녁 그리고 그 후로 몇 날 동안, 그것은 내 글과 미술의 시작이 된다."

정진은 미술가가 직업인 자산에게 미술을 감상하는 방법을 묻는다면, 그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를 권한다고 말한다. 정진은 작가의 노트를 꼼꼼히 읽고, 작품을 천천히 보는 것, 이 두 행위가 함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정진은 미술이 어려운 것을 못 견디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보고, 미순을 쉬워야 한다고도 말하지만, 미술은 열린 예술이라고 말한다. 공부하지 않은 것을, 보는 순간 모두 이해하고 싶은 것은 욕심이며, 그것은 좀 염치없다고 이야기하는 정진의 글이 인상적이다. 미술을 감상하는데 공부까지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어디까지 감상하고 싶으신데요?"라고 답하는 정진의 글이 여운을 남긴다.

정진은 예술과 문학 좋아하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이 없다고 질문하는 것에 대해 나쁜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한다. 예술과 문학을 사랑하는 것과 좋은 사람인 것은 비례하지 않는다. 인간성은 예술과 문학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진은 예술과 문학은 항상 변화의 기회를 주고, 기회 속에 살며 변화하지 않는 것은 기회 없는 사람들의 불변보다 더 큰 슬픔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자연은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사랑스러우며, 본질적으로 무섭고 그 속을 알 수 없는 것이며, 무엇보다 그것에는 감정이 없다고 말한다. 정진은 자연은 의지 없이 이치를 따르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그것이 우리의 환경이라고 이야기한다. 산과 바다, 숲 만의 일이 아니고, 우주도 입자도 자연스러우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를 위해 서로를 돕고, 그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움이라는 정진의 글이 눈길을 끈다. 뿐만 아니라 정진은 공존은 다양한 모습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각자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진은 작은 것과 큰 것, 연결된 것과 단절된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새 것과 헌 것 등 언뜻 반대되어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이 모여 하나를 이루고, 이것이 작가가 생각하는 공존의 모습이며, 자연스러운 만물의 생존방식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미술의 존재 이유 한 가지는 화두를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정진은 그것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게 느끼게 하고 가치관이나 행동이 변화할 기회를 주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진은 강요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이 좋은 미술이라고 이야기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를 주는,

더 나은 사회가 될 기회를 주는, 그런 일.

그래서,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런 이들이 더 많은 기회를 가졌다는 믿음이 굳다.

미술의 힘을 믿으니까."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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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테라피 - 마음을 치유하는 영화
모경자 지음 / 하움출판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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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치유하는 다양한 영화의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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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테라피 - 마음을 치유하는 영화
모경자 지음 / 하움출판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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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시네마 테라피>의 저자 모경자는 '시네마 테라피'는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 문화까지 영화에서 보며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기존 이념과 개념들을 현실의 내 문제와 결부해서 새로운 해석으로 나올 때만 확장될 수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닌 마음 작용의 원리와 이해라는 것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함께하는 친구들과 스토리텔링으로 쉽게 나누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이 책은 가족, 사랑, 만남, 독립, 중독이라는 소재들의 영화를 챕터별로 나누어 마음을 치유하는 영화들에 관한 이야기를 건넨다.



저자는 영화 <일요일의 병>을 소개하며 인간은 살면서 외면하고 싶고 가리고 싶은 부분들, 어쩌면 버렸을 수도 있는 부분들이 있으며, 상처로 얼룩진 자존감, 열등감, 수치심, 상실, 실연 등을 동굴에 숨긴 채 열심히 살지만 가슴은 늘 허전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영화 <일요일의 병>에서 엄마 아나벨이 동굴 앞에서 "거기 누구 있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동굴 안에 숨어 있는 자신을 부르는 듯하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딸과 함께하는 10일 동안 자신이 버리고 떠난 삶과 화해하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되는 깊은 여운의 장면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일요일은 주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지만, 영화 제목에 등장하는 일요일은 딸 키아라에게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고 미워하기도 한 엄마와 화해하고 이별하는 날이라고 이야기하여 눈길을 끈다.

"43세인 주인공 키아라는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집을 떠날 때 바라봤던 창문에 오늘도 걸터앉아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 8살짜리였던 키아라에게 엄마가 집을 떠나기 전 화장을 했던 그 화장품들이 어디에 어떻게 널브러져 있었는지 그날, 그 시간의 장면은 정지되어 있었다. 자신의 지병으로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게 된 키아라는 마지막 시간을 엄마와 함께 10일 동안 있기를 원해 엄마를 찾아간다."

저자는 영화 <어느 날 인생이 엉켰다>를 통해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이 진심인지를 진지하게 물으며 나아갈 때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를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 <어느 날 인생이 엉켰다>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흑인 여성의 머리는 곱슬머리가 아닌 긴 머리로 잘 관리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란 바이올렛이 약혼자가 떠나게 되면서 홧김에 머리를 확 밀어 버리고 자신의 삶이 뭔가 엉켰다는 것을 발견하고 풀어 나가는 통쾌한 이야기다. 특히, 영화 <어느 날 인생이 엉켰다>의 주인공 바이올렛의 열등감과 수치심이 그녀의 엄마로부터 이어 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10살이 되는 해 아빠 회사 야유회에 갔던 날, 내 머리가 쭈글쭈글하다고 애들이 비웃어서 부끄러워 풀에 들어갔을 때, 그때 엄마가 날 끌어내서 차에 밀어 넣고 집으로 갔어요. 엄마가 그냥 날 안아 주며 그래도 예쁘다고 했다면 난 지금 어떤 사람일까요?"라고 엄마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말한 바이올렛의 진심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세월이 조금 지나면 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그저 '나'이다. 서로 관계하며 도우며 사는 것이지, 상대는 내가 원하는 만큼 나의 필요와 상처를 다 해결해 주지 못한다. 상대들에게 이것을 많이 요구하고 바랄수록 나는 감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고 그때부터 상대를 미워하며 내가 만든 고통의 우주 속에서 헤맨다."

저자는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소개하며 수학적 사고에 입각한 '사실'을 보고 그 바탕 위에 내 생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저자는 사람들은 사실이 무엇인지를 보지 않으려 하고 남들과 비교하며 살면 상대적 박탈감과 기대치에 시달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타고난 성향과 재능과 기질이 다 다른 우리는 다 의미가 있고 소중한 인생이며, 경쟁 사회라는 거대한 물살 속에서 수학적 사고인 '사실과 생각'의 구별을 꾸준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각하는 힘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삶은 남들이 제시하는 길을 가거나 쉽게 가는 길을 조금도 의심 없이 결과만 보고 따라가기 쉽다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의 등장 인물인 학성의 말처럼 몸으로 직접 부대끼며 이해해야만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런 경험이 자신의 숭고함을 증명할 수 있고, 이때만 정직한 힘이 살아난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수학은 정해진 답이 있다.

이 세상 온 우주 만물도 정확한 법칙과 순리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다.

별과 달, 밤과 낮, 남과 여, 죽음과 탄생 등...... 사계절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계의 질서는 수학의 공식처럼 정확하고 명확하다. 인간의 생각과 욕심만 복잡하고 답이 없을 뿐이다."

저자는 괴팍한 할아버지 세인트 빈센트, 우리 안의 빛과 그림자를 만나게 하는 영화 <세인트 빈센트>를 소개하며 스위스의 정신 분석학자 칼 융이 페르소나와 그림자로 말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이 인상적이다. 칼 융은 "인간의 영혼 안에는 사회와 타인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만들어진 모습을 페르소나라 하고 자아가 의식적으로 거절한 감춰진 부분을 그림자"라고 말하며, 이 두 개의 행동이 만날 때 비로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시네마 테라피는 우리 안에 있는 페르소나, 빛과 그림자들을 유머로 수용하며 만나 주며, 고백하며 웃을 때 공감하며 떨어져 나가는 것을 경험한다고 이야기한다.

"사람은 한 가지 면만 있지 않다. 누구나 내면에 빛과 그림자의 모습이 다 있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인가 하면 또 누군가에게는 안 좋은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다 좋은 면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 나쁜 면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 자신들만의 모습 속에서 들키지만 않을 뿐, 이상한 부분들이 다 있다. 개인의 기질, 습관, 기호, 취미, 성향 등 타인들에게 다 보이지 않은 특정한 어떤 부분들이 다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나 자신만 해도 그렇고 상대들도 그렇다.

어느 날 상대들의 그 이상한 행동들을 알게 되면 당황스럽다며 "의외네~"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인간이다."

저자는 전쟁으로 인생을 다 통제받고 그 환경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 내며 목숨 걸고 무엇을 했던 것이 아닌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온 힘을 다해 살아남은 슈필만(슈만)의 실화를 담은 영화 <피아니스트>를 소개한다. 저자는 영화 <피아니스트>를 통해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고 이야기하며, 주인공 슈필만은 전쟁 전에 잘 나가던 피아니스트였고 폴란드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지적이고, 경제적인 부분으로도 남부럽지 않은 예술가였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의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어떤 가치와 이념, 철학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살아 내야만 하는 것이 삶의 의미와 목적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질 만능 시대에 타인들과 나를 비교하여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거나 이 세상 기준의 잣대로만 보는 의미가 아닌 진정한 의미로 보는 '나'는 나이고 나의 삶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의 삶이다.

그래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삶'이다.

삶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꿈이 없어도 괜찮고 돈이 없어도 괜찮고 몸이 아파도, 실패와 좌절을 해도 괜찮다.

무엇을 해야만, 업적을 일궈야만 의미 있고 성공한 삶이 아니다. 그저 그 자체, 나의 삶이 목적이기에... 그래서 생명이 귀하고 사람이 귀한 것이다.

이렇게 목적을 갖고 이 땅에 온 우리는 어마어마한 별들이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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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서울을 걷는다 - 제10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
허남설 지음 / 글항아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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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재개발이라는 어두운 이면을 들여다보는 책으로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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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서울을 걷는다 - 제10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
허남설 지음 / 글항아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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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못생긴 서울을 걷는다>는 현직 일간지 기자인 저자 허남설이 서울이라는 도시의 못생긴 곳들을 직접 걷고 찍고 주민들을 만나서 깊숙이 들여다본 우리 시대 도시의 자화상을 담은 에세이다. 저자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는 중계동의 '백사마을' ,경사도가 60~70도에 이르는 가파른 골목길이 회오리치는 다산동 주택 밀집 지역, 정화조가 없는 집들이 많아 똥냄새가 진동하고, 불이 나도 골목이 좁아 소방차가 진입할 수 없는 창신동, 비행기 빼고는 다 만들어낸다는 기술 장인들이 몰려 있는 청계천 인근과 세운상가 등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못생긴' 서울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건넨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른바 '못생긴' 서울은 살기에 불편하고, 소음을 유발하며, 미관상 좋지 않은 삼박자를 갖춘 '재개발'의 이슈를 품고 있는 공간들이다. 말이 재개발이지 그것에 착수하는 순간 벽에 부딪히게 되고, 끝내 재개발 계획이 백지화되거나 유야무야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도시는 '못생긴' 부분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재개발이라는 경제논리로는 넘어설 수 없는 도시의 오래된 생태 논리를 저자는 직접 발품을 팔아 찾아다닌다.



저자는 백사마을 주거지보전사업은 오랜 승패의 역사를 한번 뒤집어보고자 했는데, 결국 패색이 완연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원주민 세입자의 재정착, 이웃 공동체를 담아냈던 공간의 재현 따위는 정책에서 우선적인 지위를 얻어내지 못했다. 저자는 앞서는 건 오로지 토지주의 비용을 더 절감하기 위한 분양주택 확대, 그리고 자산 가치를 더 높여줄 대단지 아파트로의 전환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아파트가 양적 논리뿐만 아니라 질적 논리까지 점유한 주거 유형으로, 모든 재개발이 대단지 아파트로 귀결되는 게 논리적으로 마땅해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서울 곳곳에서 이 논리적 귀결의 맹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떤 곳에서는 동네를 완전히 허물고 아파트를 짓는 재개발이 세입자는 말할 것도 없고 토지주가 치러야 할 비용까지 막대하게 물린다. 그런 곳에서는 모두가 패자가 되고 만다. 또한 저자는 재개발하는 곳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사회와 이 사회를 지탱하는 제도 전반에도 패배의 그림자를 드리운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재개발은 '덩치'를 키우는 방향으로 진화했고, 그 결과가 지금 1만 세대까지 불어난 대단지 아파트라고 말한다. 재개발의 진화를 이러한 방향으로 이끈 유전자는 '비용'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재개발의 아이러니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려준다고 이야기한다. 당장 재개발해야 할 것 같은 허름하고 조그만 집들에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복작복작 모여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대부분 소유주가 아니라 세입자이다.

저자는 우리는 도시에서 산동네, 달동네가 흉물스럽다며 파괴한 결과, 도시 구석구석으로 침투한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을 걱정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산동네를 모두 밀어서 아파트로 만든다고 해도 3~4인 가족이 저렴한 가격에 집을 구할 수 없다. 저자는 재개발이라는 이유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살 만한 집을 자꾸 도시에서 내몬 것은 아닌지, 그래서 사람이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그들을 내몬 것은 아닌지, 한번 되짚어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낡고 불편한 동네는 낡고 불편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저렴하고, 그런 곳을 무분별하게 개발하는 건 어떤 사람들이 간절하게 찾는 집을 없애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들과 이들의 노동력이 필요한 도시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한 동네에 모여 사는 사람들끼지 자원을 주고받으며 이뤘던 공동체 역시 무너진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현대에도 '최소한의 공동체'는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제도가 아무리 잘 갖춰져 있더라도 사람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그리고 잘 만든 제도에도 항상 빈틈은 있기 마련이다. 저자는 누군가에게는 불필요해보이는 '간섭'이 어느 순간에는 어느 누군가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관심'이 될 수 있으며, 그 관심이 체계적으로 잘 조직되면 공동체를 지키는 '사회안전망'으로 발전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개발의 덩치를 한껏 키우면서도 속도는 재촉해 내재한 문제를 단기간에 폭발시켰다고 말한다. 저자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 같은 큰 땅덩어리를 단기간에 개조할 수 있다는 환상,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에는 실물경제를 구성하는 산업과 종사자들이 있습니다. 8000개의 사업체와 여기에 엮인 협력업체들, 2만 명의 종사자와 이들에게 의존하는 가족들을 고려하면 그 산업은 결코 작은 규모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서로 일감과 자원을 주고받는 산업 생태계의 특성을 고려하면, 10만 평 땅에 집적된 산업체를 다른 어딘가로 고스란히 옮기는 일도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산업을 불과 몇 년 만에 일소하는 개발 계획은 애초 성립할 수 없다고 보는 게 현실적인 판단입니다. 또 세운재정비촉진지구는 축구장 40개만 한 공간인데,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개발 속도전을 지향했고, 결과적으로 스스로 스텝이 꼬여 무참히 실패했습니다."

저자는 누군가 보기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못생긴 구도심과 산동네의 풍경, 거기에는 그 나름의 복잡한 맥락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공공의 책무는 그 맥락을 최대한 존중하며 문제를 풀어가는 법을 설계하는 것이지, 앞장서 무시하고 파괴하라고 선동하는 것이 아니며, 도지는 백지가 아니라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책 <못생긴 서울을 걷는다>의 저자는 이제는 거리에 서야 하며, 거리에서 조감도가 아닌 투시도의 시선으로 도시를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보기에 썩 만족스럽지 않은 못생긴 도시가 다양한 삶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모든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저자는 보존할 대상은 천막이나 지붕 같은 게 아니라 바로 그런 삶이며, 그 삶을 보존하는 일이 슬레이트 지붕이나 타이어 올린 천막을 지키는 일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며, 그것이 공공의 책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저자는 어떤 때는 못생긴 도시가 누군가의 삶을 지키는 집이 되어주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누구나 빛나고 아름다운 도시를 꿈꾸겠지만, 도시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그 안에는 아름답지 않은, 못생긴 부분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낡고, 긁히고, 부서지고, 심지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곳이 서울에는 아직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그 못생김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고민할 때,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조감도의 시선에서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구경꾼밖에 될 수가 없습니다. 구경꾼은 이미 기울어진 쪽에 서서 기울기를 한층 더 가파르게 만드는 데 일조할 뿐입니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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