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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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해동안 읽은 책들 중, 가장 인상적인 책을 꼽으라고 한다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전자가 역사학자의 시선으로 진화생물학과 인류고고학을 영민하게 뒤섞어 인류의 발전 과정을 거시적(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빅히스토리')으로 그려냈다면,  후자는 상상 · 협력 · 탐욕이라는 사피엔스의 본능적 특질이 어떻게 컴퓨터 공학 및 의학과 결합하여 인류를 불멸의 존재로 이끄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틀렸다. 인간은 존재하기 때문에 그저 생각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도 틀렸다. 인간은 존재(해야)하기 때문에 그저 욕망할 뿐이다. 애초 인간에게는 자의식 즉 내면의 목소리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가 내면의 목소리라고 굳게 믿어왔던 건 다름 아닌 두뇌의 알고리즘일 뿐이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유주의는 어떤 외적 실체가 이미 만들어 놓은 의미를 우리에게 제공할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유권자, 소비자, 관객은 저마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이용해 자기 인생뿐 아니라 우주 전체의 의미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하지만 생명과학은, 개인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생화학적 알고리즘들의 집합이 지어낸 허구적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자유주의를 뿌리째 뒤흔든다. (...) 중세 십자군 전사들은 삶의 의미가 신과 천국에서 온다고 믿었고,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인생의 의미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둘 다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지금까지 자유의지와 개인의 존재를 의심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도, 중국, 그리스의 사상가들은 2,000년도 더 전에 '개별적인 자아는 환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의심이 경제, 정치, 일상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실제로 역사를 바꾸지는 못한다. 인간은 인지부조화의 대가라서, 실험실에서는 이것을 믿고, 법원이나 의회에서는 전혀 다른 것을 믿을 수 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펴낸 날 그리스도교가 사라지지 않았듯이, 과학자들이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해서 자유주의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417~419쪽


그러므로 자신을 알고 싶다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 아니라 구글의 빅데이터나 인공지능(AI) 시스템에 개인 정보를 넘겨주면 된다. 앞으로 우리가 직면할 미래는 내가 검색하고 클릭하고 '좋아요'를 눌렀던 수많은 나의 '흔적'들이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에 의해 분석되어 내가 어떤 직업과 배우자를 선택하고 어느 곳에서 생활하며 어떤 음식을 먹는게 더 좋을지를 통계 수치로 알려주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저자의 주장이 다소 과격하게 들릴지라도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오면서 절대 권력과 종교에 저항하기 위해 강조되었던 개인의 지위와 역할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인본주의와 개인주의를 불러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을 희생시켜도 괜찮다는 인식. 개체로서의 내가 느끼고 생각하며 경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최고이자 절대진리라는식의 개인우선(우월)주의 사고가 현대 자본주의 물질소비문명과 결합하여 역으로 개인을 소외시키고 있다.  

 


 


농업혁명이 유신론적 종교를 탄생시킨 반면,과학혁명은 신을 인간으로 대체한 인본주의 종교를 탄생시켰다. 유신론자들이 '데오스(theos, '신'을 뜻하는 그리스어)'를 경배하는 반면,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을 경배한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나치즘 같은 인본주의 종교들의 창립이념은 호모 사피엔스는 특별하고 신성한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의미와 권위가 거기서 나온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호모 사피엔스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 선 또는 악이 된다.

유신론이 신을 내세워 농업을 정당화했다면, 인본주의는 인간을 내세워 공장식 축산 농장을 정당화했다. 축산 농장은 인간의 필요, 변덕, 소망을 신성시하는 반면 그밖에 모든 것을 무시했다. 동물들은 신성한 본질을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축산 농장은 동물에게 조금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축산 농장에는 신도 필요 없다. 현대 과학과 기술이 고대의 신들을 훨씬 능가하는 힘을 인간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농장주들은 과학기술 덕분에 전통적인 농업사회의 조건들보다 더 극단적인 환경에서 젖소, 돼지, 닭을 기를 수 있다. -142쪽


 

흔히, 다른 생물종과 구별되는 인간의 가장 큰 능력으로 '생각하는 힘'을 들곤 한다. '생각하는 인간(호모 사피엔스)'이란, 다섯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보다 육감('느낌')이나 생각('상상')을 더 중시한다는 뜻이다. 사피엔스는  이처럼 생각하는 능력을 통해 다른 유인원종 사이에선 찾아볼 수 없는 집단 협력으로 지구를 지배하고 인류 문명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이와 같은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가상의 존재('허구')를 수없이 창조하고 또한 이를 경배해 왔다.

 


 

허구는 나쁜 것이 아니다. 허구는 꼭 필요하다. 돈, 국가, 기업 같은 허구적 실체에 대한 널리 통용되는 이야기가 없다면 복잡한 인간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똑같은 허구적 규칙들을 모두가 믿지 않으면 축구 경기를 할 수 없고, 허구 없이는 시장과 법원의 이점을 누릴 수 없다. 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이야기가 목표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단지 허구임을 잊을 때 우리는 실제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그때 우리는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또는 '국익을 보호하려고' 전쟁을 시작한다. 기업, 돈, 국가는 우리의 상상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를 도우라고 그것들을 발명했다. 그런데 왜 그것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하는가? -246~247쪽



그러고 보면, 인류 역사는 '신(信)'을 위한 투쟁'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인류는 자신이 믿고 따르는 것을 위해 목숨도 불사했다. 신(神)을 위해 죽었고 왕(國)을 위해 전쟁을 했다. 오늘날에도 이 점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좀더 교묘해졌고 더한층 악랄해졌을 뿐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우리는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살고 죽을 것이다. 다만 그 대상은 외부나 타자가 아니라 자기 내부 즉 바로 자기 자신(自身)으로 바뀔 따름이다. 과거 인간은 필멸이라는 숙명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영혼(종교)을 통한 불멸의 삶을 추구했다면, 이제 인간은 과학기술의 도움을 빌어 영원한 육체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神) 즉 '데우스'로 거듭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개별적 가치를 상실하는 과정 속에서 그 무엇(혹은 '누구')으로도 대체불가하고 인공지능(빅데이터)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스스로를 업그레이드시켜 신인류로 살아남을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神)은 얼마나 될까?

<그리스 로마신화>만 봐도 그속에는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벅찬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 그동안 수많은 신들이 존재해왔고, 또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신들이 탄생(?)하고 있으리라. 


맨  처음 창조주는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신의 모습을 닮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 신들을 만들어냈다.

신의 복제품인 인간이 자신의 모습(복제품)을 본떠서 수많은 신들을 만들었으니 신들은 '복제품의 복제'인 셈이다. 이제 인류는 신들을 복제하는 것(시뮬라크르)에서 벗어나 신들을 그대로 흉내내는(미메시스) 단계로의 진입이 머잖아 보인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복제품(인간)과 진품(신)이 구별되지 않는, '시뮬라시옹(가상이 현실이고, 가짜가 진짜인 세상)'의 세계로 접어든 것이다.   


보통 인문서나 과학서 한 권을 정독하고 나면 겨울철 목욕탕에 갔다가 막 나왔을 때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서늘한 기운이 관통하면서 온몸이 맑아지고 새로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알듯말듯했던 궁금증들과 조각난 지식들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의 큰 그림으로 맞춰지면서 완성되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이 책은 읽고 나서 기분이 산뜻해지기는커녕 더한층 우울해졌다. 아무리 미래에 대한 예측은 '장미빛 환상' 아니면 '지옥의 묵시록' 양극단을 오고가는 시계추라고는 하지만, 이 책 속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현재보다 더욱 발전된 미래임에도불구하고 그것에 환상을 품기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동안 인류는 스스로 만든 창조물들 앞에서 창조주로서 그것을 사용하고 관리하기보다는 지나치게 의지하고 숭배함으로써 오히려 얽매이고 지배당하는 피조물로서의 역할에 더 익숙해왔기 때문이리라.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우리가 만들어냈지만 우리는 완벽하게 그것에 통제당하고 있지 않은가.



 

이 한 권의 책이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복음서인지 아니면 인류의 멸망을 예언한 계시록인지는 중요치 않다. 정말 중요한 건, 복음서라면 신을 향한 복음이 아닌 인간을 향한 복음이 되어야 할 것이요, 계시록이라면 인간에 '대한' 계시록이 아닌 인간을 '위한' 계시록이 되도록 해야한다는 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이 모든 열쇠는 신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쥐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이 복음서 혹은 계시록이 될지는 순전히 인류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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