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 창비세계문학 58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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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가 장편 소설을 썼나?'

이런 사실조차 몰랐던 나는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는 별다른 기대감없이 집어 들었다. 이름있는 거장의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들은 '습작'인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실망감을 안겨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째서 탐험소설들 특히 해양탐험소설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듯 세부 묘사에 집착하는 걸까?'

이 작품의 도입부분 역시 지루하다.  배의 전체적인 모습은 그렇다치고 밧줄의 매듭 방법과 갑판에 생긴 작은 틈새까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세하게 설명하면서도 오히려 등장인물의 심리에 대해서는 매정하다싶을 만큼 건조체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이런 장르가 주목받기 시작한 근대(18~19세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근대는 현실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낭만주의에 대한 반발로, 과학과 실증 및 경험적 태도를 중시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분위기가 문학작품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래서 에드거 앨런 포 역시 이 작품을 쓰면서 비록 꾸며낸 이야기(소설)일지라도 과장하거나 미화시키지 않고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그려내고자 노력하지 않았을까 싶다.

 


 

암튼, 아서 고든 핌이라는 18살 청년이 우여곡절 끝에 친구의 도움으로 고래잡이 배에 몰래 승선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는 즉시 내 작은 아파트를 차지했는데, 새로운 궁전으로 들어서는 어떤 왕도 그때의 나보다 더 흡족한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거스터스는 이어서 그 방의 열린 끝부분을 닫는 방법을 보여주었고, 그런 뒤 심지를 갑판 가까이 가져다가 거기 놓인 짙은 색 채찍끈 하나를 보여주었다. 그는 그 끈이 내가 숨은 장소로부터 목재들 가운데 낸 꾸불꾸불한 통로를 지나 그의 방으로 통하는 통풍창 바로 아래 선창의 갑판에 박힌 못으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만에 하나 그럴 필요가 생긴다면 내가 이 끈을 이용해서 그의 안내 없이도 쉽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장치해놓은 것이었다. 이제 그는 내게 충분한 양의 심지와 성냥 등과 더불어 랜턴을 건네주고, 의심을 사지 않는 선에서 자주 나를 찾아오겠다고 약속한 뒤에 떠났다. 이것이 6월17일의 일이었다. -2장 35쪽-



그러나 고든을 돌봐주기로 약속했던 친구 어거스터스는 배가 출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상반란으로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고 만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고든은 답답한 '은신처'에서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심지어 신선한 공기도 부족한 상황에서 열흘 가까이 버텨낸다.  



선상반란으로 무법천지가 되어버린 배 위에서는 잔인하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

마치 화면 전체를 붉은 피로 물들이는게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하드코어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아버지는 손발이 묶인 채 승강용 계단 위에 고개를 아래도 향하게 눕혀져 있었으며 이마에 난 깊은 상처에서 피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죽음이 멀지 않아 보였다. 일등항해사가 악령 같은 조소의 표정을 띈 채 그를 굽어보며 그의 주머니를 샅샅이 뒤져서 커다란 지갑과 정밀시계를 꺼냈다. -4장 62쪽-


마침내 신참자로 배를 탔던 영국 남자가 불쌍하게 울면서 올라왔다. 그는 항해사를 향해 너무나도 비굴한 태도로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고 있었다. 그가 들은 유일한 대답은 도끼로 이마를 가격당한 일이었다. 그 불쌍한 사람은 신음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갑판 위로 쓰러졌고, 흑인 요리사는 그를 아기처럼 팔에 들고 잘 조준해서 바닷물에 던져버렸다. -4장 64쪽-


상갑판에 있던 모든 선원들이 곧 굴복할 뜻을 비쳤고 하나씩 둘씩 올라와서 처음의 여섯명과 함께 포박된 채 눕혀졌다. 선상반란에 관여하지 않은 선원은 다 해서 스물일곱이었다.

이어서 너무나 끔찍한 살상이 뒤따랐다. 포박된 선원들은 통로로 끌려갔다. 그곳에서는 요리사가 도끼를 들고 서 있다가 다른 반란자들이 희생자를 한명 한명 배의 옆면으로 밀치면 그들이 머리에 도끼를 박았다. 그런 식으로 스물두명이 죽었다. 그리고 어거스터스는 매 순간 다음이 자신의 차례라고 예상하며 이제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4장 65쪽-



이것만으로도 입을 다물기 어렵건만 난파된 상태에서 네 명의 생존자들이 제비를 뽑아 희생자를 정하고 동료를 죽여 인육을 먹는가 하면,  영국국적의 고래잡이 배에 의해 간신히 구조되어 어느 섬에 정박하지만  그곳 원주민에 의해 단 두명만 제외하고 서른 여섯 명 선원 전원이 몰살 당하는 등등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본다면 포의 다른 대표작들의 괴기스러움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포는 안타깝게도 이 작품에서만큼은 자신의 주특기를 기꺼이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생전에 포 자신 역시 이 작품을 두고, '어리석은 작품'이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채 일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한 사람이 겪었다고 하기엔 너무 잔인하고 충격적이며 믿을 수 없을 만큼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이렇게 무덤덤하게 그려냈다는 것 자체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도 공포고딕소설을 완성했으며 현대추리소설 장르를 새롭게 개척한 인물로 알려진 에드거 앨런 포가  말이다. 게다가 이야기가 한창 전개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후기' 를 삽입하여 독자가 수긍할 만한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작품을 끝내버린다.



핌 씨가 안타깝게도 근자에 갑자기 사망했다는 사실과 그 정황에 대해서는 이미 일간신문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그의 이야기를 완성시켰을 몇개의 남은 챕터들, 즉 위의 챕터들이 활자화되고 있는 동안 그가 지니고 수정하던 챕터들도 사고 도중 복원 불능의 상태로 망실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다를 수도 있으며 만일 궁극적으로 그 챕터들이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독자들에게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이 결손을 메꾸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시도해보았다. 서문에서 이름이 언급된 신사, 즉 거기서 이루어진 진술로 미루어 이 진공 상태를 채워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도 좋을 그 신사는 그 일을 거절했다. (...)

마지막 두세 챕터의 상실은 (잃은 것은 다 해서 두세 챕터였다) 그것들이 남극에 관련된 사실을 담고 있거나 적어도 남극에 무척 가까운 지역에 관한 사실을 담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또한 지금 정부에서 남태평양에 보내려고 준비하고 있는 탐험대가 그 지역들에 관한 저자의 진술들의 진위를 곧 확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다. -후기 272~273쪽-


 

 

그래서 이 작품은 미완성 작품으로 평가되어 출간 당시에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포의 엄청난 명성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널리 알려지지 못한 작품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건, 만약 에드거 앨런 포의 이 작품이 없었다면 하멜의 <모비딕>도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도 탄생하지 못했을 거란 점이다. 세상의 모든 단편소설들이 고골리의 '외투' 속에서 나왔다고 말한다면,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불러다오."라는 문장도, 벵골산 호랑이 '리차드 파커'의  포효도, 이 한 작품으로부터 시작되었노라고 말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이 작품은 에드거 앨런 포를 재발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포는 마약중독에 빠져 어린 아내와 궁핍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불운한 천재로만 알고 있었는데, 새롭게 확인된 사실에 따르면 포가 당시 미국 문단을 지배하던 주류문단에 비판적인 글을 많이 썼기 때문에 악의적으로 매도되어왔다는 게 정설이라고 한다.


또한, 과학적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신비로운 현상과 인간의 어두운 심리를 연결시켜 독특한 공포추리소설 장르를 구축한 점을 들어 포를 과거지향적인 전근대적 인물로 바라보았던 시각 역시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역자가 작품해설에서 지적했듯 포는 자연과학을 추구하는 19세기 근대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또 이를 극복하자 했던 인물이며,『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야말로 포가 이와 같은 자신의 사상을 담아내려고 시도한 첫 작품으로 봐야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 대한 미스터리(?)도 자연스럽게 풀린다. 어째서 배경에 대해선 지루할 정도로 세심하게 묘사하면서도 인물들의 심리와 감정에 대해선 신문기사문처럼 무미건조하게 처리했는지를, 또한 어째서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야기의 뒷마무리를 하지 않고 남극에 대한 여운만을 남긴 채 끝내버렸는지를 말이다.  어쩌면 포는 이 작품을 통해서 감성보다는 이성을 미신보다는 과학을 향한 인류의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이라고 해서 그의 추리소설들만을 상상하고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린 시절 <80일간의 세계 일주> 와 <15소년 표류기> 등등 모험소설에 열광했던 독자라면 아마도 이 작품에 경의를 표하게 될 것이다.



여러모로 아쉽지만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또한 놀라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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