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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평점 :
나는 이 작품집을 읽기 전, 뒤에 실린 신형철의 평론을 먼저 읽었다.
작품보다 평론이나 해설을 먼저 읽으면 확실히 독자적(獨自的)인 작품 읽기에 방해가 되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글을 눈앞에 두고서 읽지 않고 버텨낼 면역력(?)이 나에겐 아직 없는 것 같다.
평론가이면서도 독자적(讀者的)인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 항상 작품과의 거리감이 나의 의도보다 훨씬 더 크게 줄어든다. 또한 학구적인 표현들로 가득한 일반 평론들과는 확연히 다른 그의 문체는 마치 한 편의 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단순히 '잘 쓴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영혼마저 털리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나는 신형철의 글 앞에서만큼은 작품을 직접 읽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특별한 즐거움을 기꺼이 포기하곤 한다.
이 작품집을 두고, 그가 이런 글을 남겼다.
이미 오래전에 빅터 프랭클 같은 이는 인간은 이성으로 사유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먼저 고통받는 인간이며 그것이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하는 더 중요한 측면이라고 과감하게 말하면서 '호모 파티엔스(homo patiens)'라는 명칭을 제안한 바 있다. 그런데 나는「봄밤」과 「이모」 같은 소설을 읽으며 '호모 파티엔스'를 달리 번역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고통은 '고통을 받다'라는 형태로만 사용되는데 이 경우 인간은 고통에 대해 수동적인 위치에 있는 것으로만 이해된다. 그러나 인간은 고통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해내기도 한다. 환자(patient)는 견디는(patient)사람이다. 그들은 고통을 받으면서 인생의 비참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고통을 견디면서 인간의 숭고함을 입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전에는 없는 동사인 '고통하다'를 발명해내고, '호모 파티엔스'를 '고통-받는 인간'이 아니라 '고통-하는 인간'이라고 옮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형철「호모 파티엔스(patiens)에게 바치는 경의」중 -
그렇다면, 평생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가 생의 마지막 2년 동안만 오롯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다간 '이모'(「이모」)와 남동생 관주의 죽음에 일말의 책임이 있을지도 모르는 옛 직장 동료(문정)을 끝까지 원망하지 않는 관희(「카메라」). 그리고 정신지체 누나를 둔 탓에 여자친구(예연)로부터 버림받은 전직 헬스트레이너이자 일식요리사인 인태(「층」)는 분명 '호모 파티엔스'다.
어쩌면 기억이란 매번 말과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살금살금 움직이고 자리를 바꾸도록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몹시 쇠약해져 한번에 몇마디밖에 하지 못했다. 그때 그녀가 한 말들은 또 이전에 한 말들과도 조금 달랐다.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 거고." -106쪽「이모」중-
그것은 어쩌면 10년 전에 지자체의 책임자가 그 길을 다시 포장하면서 돌길을 깔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1년 9개월 3일 전에 문정이 지나가는 말로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 -136쪽「카메라」중-
한때 그녀를 보면서 그녀가 누나였으면 하던 때가 있었다. 한때 그녀를 예연씨라고 부르던 때가 있었다. 그날 그녀는 사촌에게 사정을 다 듣고도 그에게 내색을 안한 거다. 그가 바래다줄 때도 와이퍼와 우산 얘기만 했다. 결국 누나는 흘려졌다. 그날 인희는 그녀에게 흘러들어갔다. 사촌의 무식함도 같이 흘러들어갔다. 그는 그런 인간들을 많이 봤다. 끝까지 시치미를 떼다 뒤통수를 치는, 그녀가 그런 년이었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예연은, 예연은, 그는 어딘가에 칼을 찔러넣는 심정으로 내뱉었다. 개년이다. 예연은, 개년이다. 그가 알지 못하는 온갖 낯선 생각들로 가득 차 있을 그녀의 머릿속이..... 더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말만은 하고 싶었던가. 지금 그의 눈앞에 앉아 초밥를 먹는 이 남자처럼.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230쪽「층」중-
그저 손바닥 위에 담뱃불을 눌러 끄고... 남동생이 어이없이 쓰러져 죽어간 돌길을 찾아나서며... 옛 여자친구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다녔던 길 건너 도서관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자신의 운명을 견뎌낼 뿐이다.
그렇다면, 혹시 이들의 성격이나 어떤 행동들이 잔인한 운명을 불러온 건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 "악덕과 악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하마르티아(hamartia) 때문에" (「시학」13장) 불행에 빠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마르티아'란 원래 '화살이 과녁을 비껴가는 일'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것이 ① 단순한 판단 착오나 실수인지, ② 주인공의 도덕적 성격적 결함인지가 불분명하여 여전히 논란거리다. (...)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마따나 '에토스가 곧 다이몬'이라면 (즉 성격이 곧 운명이라면) 세상의 모든 성격은 제안에 비극적인 것을 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신형철「호모 파티엔스(patiens)에게 바치는 경의」중-
예술가의 기질을 '자의식 과잉'으로 착각한 어느 신참 여류작가의 환각과 환청(「역광」)의 원인은 인물의 성격이 그들을 비극적 운명으로 인도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람의 성격은 선천적으로 타고나기도 하지만 후천적 환경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점에서 비극의 원인을 전적으로 개인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무리라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개인의 성격보다는 환경이나 상황이 어떻게 개인을 되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몰아 넣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지자체에서 도로를 새로 깔면서 기존의 아스팔트 대신 고궁이나 공원처럼 작은 돌들로 교체했다는 평범한 현실 속에는, 한 남자가 죽었고 그로 인해 한 여자가 실연을 당하는 아픔과 그 충격으로 앞니를 가는 습관이 생겨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정신지체 장애인 누나가 또다시 가출을 해서 임신을 했다는 어이 없는 소식에 자기도 모르게 '미친년'이라는 욕이 튀어나와버린 대수롭지 않은 상황 속에는,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에 빠진 박사 학위를 소지한 여자와 고졸 학력이 전부인 남자가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긴 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합당한 이유따위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 니체는 일찌기 '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라고 일갈했는지도 모르겠다. 운명이란 만들어지는 것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오롯이 견뎌내는 것이고 참아내는 것이다. 견뎌내고 참아내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
딱, 여기까지였다면 그러니까 이렇게 운명을 견뎌내는 호모 파티엔스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쳤더라면, 그저 그런 눈물팔이식 통속 소설집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타협하지 않고, 기어이 눈물로 가득찬 독자의 심장에 화살을 꽂는다. 투명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던 천사같은 얼굴이 붉디붉은 피로 물들어 고통스럽게 이그러지도록 만든다.
바로, 이거다.
연민하지 말고 공감하라는 것.
불행에 처한 사람들을 보고도 마음 아파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소시오패스를 빼고는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배고픔에 우는 아이를 보면 저절로 눈물이 고이고, 실의에 빠진 사람을 보면 가만히 어깨를 다독거리며, 장애아나 그 가정을 보면 기꺼이 지갑을 연다.
그러나 이런 눈물 한방울 돈 몇 푼 속에는, '내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라는 속마음이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반면,
불행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서 실제로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차마 눈물을 흘리지도 호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지도 못한다. 그런 작은 호의나 선의로 사라질 슬픔이 아니라는 걸 줄어들 고통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들은 앓는다. 천갈래 만갈래 고통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행운을 재확인하는 목격자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눈을 마주바라보면서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는 체험자로서의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나저나, 제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작가는 묻는다.
당신은 어느 쪽이냐고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라고 말하면서, 눈물 몇 방울 돈 몇 푼 떨구고는 서둘러 현장을 떠나버리는 목격자인지 아니면 고통의 현장에 남아 슬픔의 매순간을 고스란히 견뎌내면서 끙끙 앓는 체험자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