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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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읽지 않아도 그저 그 이름만으로도 독자를 '울컥'하게 만드는 작가가 있다. 나에게 작가 공선옥은 그런 존재다.


공선옥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주로 다루는 작가로 그녀의 작품들은 언제나 '그때 그곳'에서부터 출발한다. 다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한 것이 있다면 입을 틀어막고 가슴을 치며 쏟아내던 통곡이 마른 침을 조용히 삼키며 먼곳을 응시하는 서늘한 침묵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리라.  


일본의 대표적 반전 작가 이바라기 노리코의 대표작에서 제목을 따온『내가 가장 예뻤을 때』역시 그녀답게(?) '후일담' 소설이다.

1980년 그해 봄, 스무살을 보내던 아홉 명의 이야기가 봄날처럼 때론 따사롭게 때론 변덕스럽게 펼쳐진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인 이들은 계엄령이 내려진 거리에서 한명은 피를 흘리며 죽었고, 또다른 한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살아남은 일곱 명 중 누군가는 대학에 들어가서 운동권이 되는가 하면, 또다른 누군가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엄마가 된다. 


스무살답게 그들은,

꿈꾸고... 도전하며... 분노하고... 좌절한다...

그리고 또한, 사랑하고... 이별한다...   



 

어떡하든 돈을 좀 마련해서 서구보건소로 오라며 전화를 끊는데 속에서 뭔가 왈칵 치밀었다. 경애가 죽었을 때 태용이 어린애처럼 악을 쓰며 울던 것이 생각났다. 우리는 이제 더이상 덴뿌라 하나씩 입에 물고 찐빵 같은 웃음만 지어도 행복한 어린애들이 아니었다. 그것이 서러웠다. 진만이, 승규, 만영이, 태용이, 승희, 정신이, 그리고 나 해금이. 우리 곁에 경애와 수경이가 있었다. 아홉 송이 수선화 중 두 송이가 졌다. 그리고 승희가 애를 낳았다. 승희 아이는 새로 핀 꽃송이인가. -42쪽


사는 게 외롭고 괴롭고도 서글퍼서 밥을 먹고도 단 초코파이를 먹는 판님이와 판님이 또래들이 과자와 음료수봉지를 안고 양지 쪽으로 몰려간다. 공장 안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그 얼굴들이 수척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찡해온다. 오후에는 좀더 분발해서 외로운 것은 어떻게 못 해줘도 일 때문에 괴롭히지는 말아야지. 각오를 새기며 찰기라곤 없는 밥과 붉은 기름이 둥둥 떠 있는 육개장 비슷한 국, 고춧가루와 소금으로만 무친 듯한 김치와 딱딱한 닭튀김 조각이 놓인 식판에 고개를 숙인다. 또 눈물이 비어져나오려고 한다. 코를 처박고 기름을  피해가며 국물을 떠먹는데, 누군가 내 등을 툭 친다.  -242쪽


겨우 참았던 눈물이 다시 퐁퐁 샘솟기 시작했다. 시인이 말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 때문에 울 수 있는 사람은 아름답지. 자신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보다 다른 사람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좀더 아름다워질 거야. 그러니까 너도 아름답구나. 환이 때문에, 해금이 너 때문에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졌는지도 몰라. 봐, 네가 울기 전보다 지금 별이 훨씬 더 반짝이잖아." -211쪽


 

독자답게 나 또한, 

좋은 문장에 밑줄을 긋고...눈을 감고 장면을 상상하며...웃고...울다가...

결국, 비어져나오려는 눈물에 잠시 잠깐 고개를 든다...



 

나는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며 숭늉을 마셨다. 승희 엄마가 내 등을 토닥거려주며 깊은 속에서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악아, 우지 마라. 사는 것은 죄가 아닌게로 우지를 마라."

나는 승희 엄마의 품속에 안겼다. 승희 엄마 옷자락에서 아주 아주 오래 묵은, 엄마 냄새가 났다. 그건, 바로 흙냄새였다. 여름에 소나기가 내리면 마당의 마른 흙에서 뿜어져나오는 냄새, 가을에 고구마를 캘 때면 땅속에서 솟아나는 자우룩한 냄새. 그리고 저녁 냄새가 났다. 모든 저녁이면 나는 냄새들. 환한 낮에는 숨어 있다가 어둠이 스며들면 비로소 피어나기 시작하는 냄새들. 뜨물 냄새, 연기 냄새, 수챗물 냄새, 쉰 행주 냄새, 파 마늘 냄새.... 그리고 별냄새, 달냄새. 승희 엄마 품은 한없이 포근했다. 승희 엄마가 내 등을 토닥이며 노래 같기도 하고 한숨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소리를 흥얼거렸다. -65쪽 


 

난, 이 문장이 좋고 또 좋아서 읽고 또 읽었다.

'그래, 누구에게나 사는 건 죄가 아닌데... 왜, 눈물이 자꾸 나는 걸까.'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 역시 참 슬펐던 것 같다.

비록, 광주민주화운동처럼 멀쩡한 주위 사람들이 순식간에 송장이 되어나가는 참극을 겪지는 않았지만 막연한 불안감에 종종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더랬다. 

또래 친구들보다 뒤처질까 늘 전전긍긍했고, 남들 눈에 비치는 내모습이 초라하진 않을까 자주 긴장했으며, 드넓게 펼쳐진 미래는 너무 막연해서 그저 막막했다.


지금도 눈 감으면 마치 어젯일처럼 손에 잡힐 듯 기억은 생생하건만, 왜 그렇게 서글펐는지 도무지 구체적인 이유도 까닭도 떠오르질 않는다. 마치 작중 화자 해금이에게 스물 살이 꿈처럼 피안(彼岸)으로 사라져 갔듯 나의 스물살도 그렇게 기억 너머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갔더랬다.    



그와 나 사이에 가로놓은 안타까운 거리만큼, 안타까운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이환과 보낸 세상물정 모르던 시간들은, '내 가슴에 은하수 흐르던 시절'들은 아스라이 멀어졌다. 그 시절은 내게도 오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환에게도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시절들이 그렇듯, 목련이 지듯, 모란이 지듯, 속절없이 지나가고 전혀 다른 새로운 시절들이 밀려오게 되어 있다. 졸음이 밀려오는 틈새로, 은하수도 흐르지 않는 깜깜한 밤에 건조한 모래바람 부는 사막을 횡단하는 김진혁의 영상이 떠올랐고, 저 깊은 근원으로부터 일어서 표면에 이르러서야 파문을 일으키는 물결처럼, 저 깊은 속에서부터 일어나는 진저리를 느끼며 나는 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282쪽



 

그녀의 작품은 마치 '집밥'같다.

'어떤 맛일까?' 궁금증을 유발하지도 않고 침이 꼴깍 넘어갈만큼 식욕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투박하지만 깊은 맛이 있고 아무리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표현할 순 없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집밥처럼 그녀의 작품들은 한결같다. '한결같다'는 건 작가로서 개별 작품들에 특징이 없다는 것이고, 그만큼 창조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녀의 작품들은 이상하게 물리지도 질리지도 않는다. 친숙한 인물들과 익숙한 사건 및 배경들이건만 왠일인지 그 느낌이 불편하거나 거북하기는커녕 오히려 엄마 손길이 깃든 집처럼 포근하다.  


역사는 어쩌면 그저 평범한 생을 살다 갈수도 있었을 사람들을, 어쩌면 그것이 한평생 소망이었을 사람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이바라기 노리코를 일본의 대표적 반전(反戰) 작가로 만들었고, 광주민주화운동은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공선옥을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후일담 작가로 다시 살아가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끝으로,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읽고 난 후, 자꾸만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려는 마음을 이바라기 노리코의 또다른 시 한편으로 추스려본다.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바짝바짝 말라가는 마음을 남 탓으로 돌리지 마라

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하고서는


나날이 까다로워져가는걸 친구 탓으로 돌리지 마라

유연함을 잃은건 어느쪽인가


뜻대로 되지 않는 걸 가족 탓으로 돌리지 마라

무엇이든 서툴기만했던건 나 자신이 아니던가


초심이 사라져가는 걸 생활 탓으로 돌리지 마라

애초에 깨지기 쉬운 결심에 지나지 않았던가


안 된 일들을 모두 세상 탓으로 돌리지 마라

간신히 빛나던 존엄의 포기일 뿐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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