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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 2017 개정신판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평점 :
읽은지는 한참되었지만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죄책감까지는 아니어도 해야할 중요한 일을 하지 않은 기분이랄까.
일단, 저자 유시민은 내가 한때 열렬히 좋아했었고 또다른 어느 한때엔 죽도록 싫어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후, 그에 대한 미움조차 '팬심'의 일부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2011년도에 나왔고 2017년인 올해초 개정판이 나왔다. 드문 일이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개정판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촛불집회'로 대변되는 정치 개혁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무관치 않으리라.
그동안 나는 유권자로서 어떤 후보를 찍어야 하고 어떤 정부가 올바른 정부일까? 에 대한 고민은 했었지만, 국가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국가란 당연히 '실재'하는 것으로, 국가가 아닌 혹은 국가가 없는 상태를 상상하지 못했다. 솔직히 두려움 때문에 애써 외면했었는지도 모른다.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과 두려움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인의 피 속에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으니까...
국가의 탄생은 바로 이와같은 대중의 혼란과 공포로부터 기원했다.
'자연상태'란 곧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질서도 법도 선악의 판단기준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국가가 출현하기 전 인간의 삶이 실제로 그러했는지 입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국가 출현 이전 인간의 삶은 홉스가 묘사한 '자연상태'와 비슷했을 것이다. 개인이 아니라 생활의 단위를 중심에 두고 보면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진화생물학자들은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20만 년 동안 혈연으로 맺어진 작은 생활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다른 작은 공동체와 적대적 경쟁을 벌였다고 말한다. 사자와 늑대, 하이에나, 침팬지 같은 포유동물의 일반적 생활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는 다른 동물과 달리 높은 인지능력과 학습능력, 소통능력을 발현함으로써 자연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었다. 그게 바로 국가였다. 불안하고 고독하고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두가 두려워하고 복종하는 공동의 권력을 세운 것이다. -30쪽
홉스는 국가의 탄생을 <사회 계약설>의 토대 위에서 찾았다. 물론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전제군주정의 시대에 살았던 홉스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핵심을 꿰뚫어봤다고 할 수 있다. 국가주의 국가론은 그후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 자유주의 국가론를 불러왔고, 19세기 중반엔 마르크스 유물론에 입각한 전체주의 국가론이 대두한다.
로크가 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면서 국가와 국민은 천부적으로 맺어진 고정불변한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면, 루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와 정부를 분리하고 정부가 계약을 위반했다면 국민은 그 정부를 무너뜨릴 권리('계약을 해지할 권리')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처럼 로크와 루소가 다진 자유주의 국가론의 토대 위에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최고의 선(善)으로 규정하고 이를 해칠 수 있는 모든 국가 권력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자유주의 국가론은 당시 신생 국가였던 미국의 헌법 제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세워진 대한민국 또한 이와같은 미국의 법치 제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처럼 국가주의 국가론과 자유주의 국가론이 국가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고 그 위에서 국가의 역할과 목적에 대해 논했다면, 유물주의 국가론은 국가란 계급 투쟁의 산물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는 국가가 사라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마르크스 이론에 기초하여 일어난 공산주의혁명은 마땅히 국가주의를 물리쳐야만 한다. 하지만 공산사회주의 국가들은 오히려 국민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도구로써 국가 중심주의를 더더욱 강화하였다. 바로 전체주의 국가론이다.
마르크스는 '빅 브라더'나 철학자, 가장 지혜로운 자 또는 어떤 선택된 계급이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꿈꾸었던 것은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였다. 계급적 적대관계가 없고, 삶의 주체로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개인들이 서로 상생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세상, 이보다 더 멋진 사회를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시 유럽인의 삶을 지배했던 기독교의 문화적 토대를 존중해 말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을 의미한다. 이런 사회는 더 이상 운동하거나 변화하지 않는다.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연합체일 뿐, 더는 '투쟁하는 대립물의 통일'이 아니다. 내부에 적대적 계급관계나 계급투쟁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사회에는 운동과 변화의 동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투쟁의 역사가 종결됨으로써 결국 역사 그 자체가 종결된다.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역사 그 자체를 종결하는 마지막 혁명이 되는 것이다. -90~91쪽
전체주의 사회를 풍자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1984>은 1945년에 출간되었다. <동물동장>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알려진 예브게니 쟈마찐의 소설 <우리들>은 1921년,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1931년에 나왔다. 그리고 중국의 공산혁명은 1949년에 완성되었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세계를 그린 책들이 이미 여러 권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어떻게 19세기까지 무려 수백 년간 세계 문명의 중심 국가였고 수천 년 간 종교 대신 철학을 신봉했던 사람들이 공산주의라는 허구를 믿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우리나라 일부 386세대는 마오쩌둥 사후 바로 역사의 오점으로 지적된 중국 대륙의 문화혁명을 찬양하고 공산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품을 수 있었을까?
이와 같은 나의 질문들에 유시민은 이렇게 답한다.
현실적 위력은 사라졌지만 자본주의 비판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가진 생명력은 다 타버린 화로 밑바닥의 불씨처럼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진화의 시간이 아닌 역사의 시간에 그것이 큰 불길로 다시 살아날지는 알 수 없지만 영원히 죽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론은 좌절한 인류의 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때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실현 불가능한 꿈을 향해 달려간다.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별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는 것처럼,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에 대한 꿈은 언제든 사람을 다시 설레게 할 수 있다. -100쪽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별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는 것처럼...' 상상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호모 사피엔스만의 독특한 특질이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경쟁력이었다. 그러나 이런 특질들은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믿음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특징도 함께 발달시켰다. 그래서 현대인은 늘 변화를 부르짖으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국가 권력 아래 순종하려는 인간의 의지는 자유를 향한 의지 못지 않게 강렬하다. 어쩌면 불안한 자유보다는 안정적인 독재를 더욱 선호하도록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원래 국가란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났으며 평화와 안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법을 만들어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키고, 때론 폭력을 동원해서 강자의 이익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국가 권력이 끝없이 확대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민주주의가 탄생했으며, 국가의 정의와 목적을 찾는 것보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대한민국은 "사악하거나 무능한 지배자들이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하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갖춘 나라이다. 이 제도들을 제대로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어떻게 하면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을지를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뽑아놓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좋지 않은 제도라고 불평할 수 없다. 그들이 일시적으로 악을 저지른다고 해도 위축될 이유가 없다. 민주주의 정치제도는 원래부터 그런 위험을 적절하게 관리하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은 언제든, 임기가 정해져 있는 정부를 해고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다.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국민이 정부를 교체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한, 그 나라의 정부는 민주정부이다. 이 가능성을 말살하면 독재정부가 된다. 압도적인 민심의 압력이 국회의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2016년12월9일, 우리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임을 재확인했다. -118쪽
한때 우리 사회는 진보정당과 종북세력을 구분하지 못했던 무지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주체사상을 옹호하는 소수 운동권 세력이 국회에 진출했다가 물러나는 해프닝이 벌어졌는가 하면, 반정부 발언과 보수 언론을 일갈하는 일부 지식인들을 향해서 '혹시 빨갱이 아닐까?'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유시민 역시 그중 한 명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종종 너무 급진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들리거나 남성중심주의적 사고로 오해받을 만한 발언들을 했던 그가 참으로 '위험'해 보였다. 그러나 이를 또다른 각도에서 보면, 누군가의 자유로운 발언으로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사회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와 역할 또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국가론과 목적론적 국가론은 결합할 수 있으며, 그 결합을 통해 각자의 결점을 제거하고 서로를 보완해줄 수 있다. 나는 진보정치세력에게 필요한 국가론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
진보정치는 무엇인가? 진보정치는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 이것이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국가에 대한 다섯 번째 질문이다. 내가 찾은 답은 이러하다.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려는 활동이다. 직접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줌으로써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진보정치의 목표여야 한다는 것이다. -225쪽
이 책은, 많은 철학자들의 철학서들을 탐독하고 고민한 결과이다.
국가의 탄생과 발전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도 저자는 주저없이 자신의 생각들을 밝힌다.
그저 앎(知)이라는 지적인 만족에만 머물지 않고 앎을 실천(行)으로 이끌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본보기와 같은 책이 아닐까 싶다. 일독을 권한다. 만약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만족한다면 읽지 않아도 상관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