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사람을 세 번 미치게 한다. 

한 번은 제목에, 다른 한 번은 내용에,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그 파급력에...

아마 나뿐만은 아니리라.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읽을 수 '없는' 이 책을, '읽어버린' 사람이라면, 이미 '미쳤'거나 곧 '미쳐'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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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의 싯구에서 인용했다는 제목을 보고는 종교서적인 줄로만 알았다가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보고는 책의 혁명이나 혁명에 관한 책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종교 서적도 혁명에 관한 이론서도 아니었고, 서평집은 더더욱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책은 '혁명서'다.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일, 바로 혁명을 선동하고 촉구하는 책이다.

 

 

 

 

 

16세기초 루터는 성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까지 절대진리라고 믿어왔던 준거들이 사실은 거짓이었음을...

성직자들이 주장한 것들은 성서에는 적혀 있지 않거나 다르게 적혀 있다는 걸 발견한다. 그는 다른 성직자들이나 선지자들처럼 침묵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히브리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성직자를 통해 전해듣기만 했던 성서를 직접 읽도록 만들었다. 이로써 중세는 무너지고 문예부흥을 거쳐 인류 역사는 근대로 빠르게 진입할 수 있었다.  


사실, 인류의 혁명은 개인의 책읽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이 전혀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이처럼 뻔한 주장을 반복함에도불구하고 전혀 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여러가지로 이야기해왔습니다만 쓴다는 것, 읽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접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거지반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가 작동하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그것은 본질적인 난해함이나 무료함이지, 결코 난해한 체하는 것도 아니고 번역이 나쁜 것도 아니며 재미있게 읽을 수 없는 자신이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알아버리면 미쳐버립니다. 정당하게도 어딘가에서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에서 읽을 수 없는 것처럼, 모르는 것처럼 검열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독서의 묘미'가 되는 것입니다.


방어기제를 가동시키고, 따라서 기묘한 무료함이나 난해함을, '기분 나쁜 느낌'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사람을 몰아넣지 않고 안이하게 진행된 책이 과연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떤지, 그런 책을 읽는 것보다는 카프카의 무의식에 자신의 무의식을 비춰보고 자신의 무의식과 함께 변혁시키는 위험한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라는 겁니다. 싫은 느낌이 들어서, 방어 반응이 있어서, 잊어버리니까,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왕왕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똑같은 것이 쓰여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즉 자신은 지(知)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착취당하는 측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읽은 책의 수를 헤아리는 시점에서 이미 끝입니다. 정보로서 읽는다면 괜찮겠지만, 그것이 과연 '읽는다'는 이름을 붙일 만한 행위일까요. 그렇게 정보로 환원되는 것밖에 상대하지 않으니 당당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42~44쪽

 

 

TV 방송 보듯 그냥 습관적으로 봤을 뿐(watch),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거나 내면의 불편한 감정들을 억누르면서 진짜 읽었다(read)고 할 수 있는 책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책들 중, 반은 읽으나 마나 한 책들이었고, 그 반 중 반은 읽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책들이었으며, 나머지 반 중 반만 진짜 읽은 책이다....,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이마저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을, 바로 읽을 수 '없는' 이 책을, 읽어버렸으므로.


'책을 읽는다'는 건,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책들은 무의식적으로 걸러내고 회피하게 된다. 소위 '취향적 독서'란, 내 마음을 건드리지 않는 착한(?) 책들만 보는 걸 말한다. 이런 책들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엔 안성맞춤이겠지만 읽으나 마나하거나 읽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책들이다. 이런 책들은 진통제와 같아서 일시적으로 통증을 잊게 해주지만 치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병을 악화시킨다.


 

'나'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식견의 끄트머리에 섰을 때, 인간은 두려움에 몸부림친다.  

소멸을 두려워하고 소멸과 동시에 모든 건 끝이라는 편협한 개인적 사고야말로 우리를 이기주의자로 만들고 종말론자로 만들며, 종말론은 전쟁조차 불사하게 만든다.  


이 세상은 언제나 '나'보다 훨씬 거대하고 유구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내 삶의 의미를 찾지 마라.

내 삶속에 남과 다른 특별한 의미 따위는 없다.

누구에게나 삶, 그 자체가 바로 의미다. 

 

 

 

 

좋은 약은 입에 쓰듯 좋은 책도 쓰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위안을 주는 책이 아니라 이처럼 나를 뒤흔드는 책이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매우 취약한 상태여서 달콤한 목소리로 구원과 행복을 약속하며 다가오는 손길이 있다면, 주저않고 맞잡을 것이므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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