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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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기회가 된다면 백석같은 사람과 연애 한번 해보고 죽고 싶다'는  어떤 이의 진담같은 농담을 듣고,  「백석 평전」을 읽었다.  「백석 평전」을 다 읽고나니, 뜬금없이 누군가가 한없이 그리워져서 안도현의  「연어」를 펼쳐 들었다. 



 

그리움, 이라고 일컫기엔 너무나 크고,

기다림, 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넓은 이 보고 싶음.

삶이란 게 견딜 수 없는 것이면서 또한 견뎌내야 하는 거래지만,

이 끝없는 보고 싶음 앞에서는

삶도 무엇도 속수무책일 뿐이다.     - 도현 <연어>  39쪽 -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가 나온지도 벌써 이십 년이 지났건만, 그리움이라고도 기다림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이 간절함은 변함없이 속수무책으로 세월을 삭혀내고 있다.


언제 만나도 좋은 사람 극히 드물듯, 언제 읽어도 좋은 문장 역시 드물다.

결국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좋은 사람이 진짜 좋은 사람인 거고, 진짜 좋은 문장일 뿐이다. 다른 건 없다. 아무것도...


일찍이 안도현의 문장들을 읽어왔고 좋아했지만, 진짜 좋은 문장인 줄은 몰랐었다.

백석의 시들을 읽고 나서야 안도현의 시들이 다시 보였고, 그속엔 분명 월북시인 백석의 모습이 어려 있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의 대표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다.

속절없이 푹푹 눈은 내리고 연인을 향한 시적 화자의 마음도 속수무책 쌓여만 간다. 언뜻보면 사랑에 목매여 세상사 나몰라라 하는 연약한 실패자의 한탄같다.  

속으로 '에잇, 못난 놈'하고 돌아서려는데,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되묻는 목소리에 그만 발목이 잡히고 만다. 


그래, 남들 눈엔 기생과 모던보이의 불장난으로밖에 안 보였겠지만 백석은 자야에게 자야는 백석에게 북풍한설 모진 추위도 견뎌낼 수 있는 뜨거운 연탄과 같은 존재였으리라.

 

 

 

 

 

 

백석은 1912년 평안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고보를 졸업했다. 열 아홉살 때  ‘그 모(母)와 아들’이라는 작품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일찌감치 문학적 감수성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장학금을 받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서울과 함흥 등지에서 각각 신문기자와 영어교사로 재직하였고, 1936년 한정판(100부)으로 시집  『사슴』 을 남긴 후, 해방과 함께 '사라진' 시인이다.



하수상한 그 시절, 사라진 시인이 어디 백석 한명 뿐일까.

이육사가 그러했고, 윤동주도 그러했다. 특히 백석처럼 북국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백석의 시집 <사슴>을 힘겹게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는 밤을 새워 필사를 했을 정도로 백석 시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윤동주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시인들이 백석의 시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으며, 백석은 후대의 많은 시인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서도 신경림과 안도현이야말로 '백석 키즈'로 불릴 정도로 백석의 시풍과 닮아 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 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 




 

한때 무던히도 읊어댔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시를 마음껏 읊을 수 있어서 견뎌낼 수 있었던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가난하지 않다고해서 외롭지 않은 건 아니라는 걸.

가난하지 않다고해서 두렵지 않은 것도 아니며 그리움을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가난하지 않다고해서 사랑을 아는 것도 아니며, 가난하지 않다고해서 모르는 것도 아니다.

가난하지 않아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할 때도 있다는 걸.



백석의 시에는 평안도 사투리와 향토 음식들과 의성어 의태어들이 살아 움직인다.

만약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기교에만 의존했다면 그의 시들은 입안에서만 맴돌다 그쳤을 것이다. 그는 전통과 지방색과 토착어를 자기 시의 바탕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의연한 기개와 도도한 세련미를 놓치지 않았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中-




백석의 시는 이상(李箱)처럼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서구와 일본을 모방한 어쭙잖은 모더니즘이나 탐미주의 시와도 구별되며, 경향적인 카프계열의 시인들과도 다른 길을 찾아 걸어갔다. 이광수를 필두로 김동환, 정인섭, 주요한, 이기영, 박영희, 김문집, 정지용, 김기림, 최재서, 이태준, 백철, 임화, 김억, 김동인, 김기진, 박영희, 함대훈, 이기영, 이석훈, 최정희, 모윤숙, 노천명 등 주변의 많은 문인들이 친일로 돌아섰지만, 그는 그 어떤 노선에도 가담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를 독립투사로 칭송할 순 없어도 북한 정권에 순응한 '빨갱이'로만 보아서도 안된다. 북한에서 그가 러시아 문학작품 번역만에 몰두하고 동화시쪽으로 분야를 바꿔 창작 활동을 이어간 것과 삼수갑산 오지로 숙청당한 후 체제 찬양시들을  쓴 것 등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바다가 물웅덩이에 깊지도 얕지도 않은

집게 네 형제가 살고 있었네


막내 동생 하나를 내어놓은 집게네 세 형제

그 누구나 집게로 태어난 것 부끄러웠네


남들 같이 굳은 껍질쓰고

남들 같이 고운 껍질 쓰고

뽐내며 사는 것이 부러웠네


그래서

맏형은 굳고 굳은

강달소라 껍질 쓰고 강달소라 꼴을 하고 강달소라 짓을 했네


그래서

둘째 동생은 곱고 고운 배꼽조개 껍질 쓰고 배꼽조개 꼴을 하고 배꼽조개 짓을 했네


그래서

셋째 동생은 곱고도 굳은 우렁이 껍질 쓰고 우렁이 꼴을 하고 우렁이 짓을 했네


그러나

막내동생은 아무것도 아니 쓰고 아무 꼴도 아니 하고 아무 짓도 아니 하고

집게로 태어난 것 부끄러워 아니 했네


그런데

어느 하루 밀물이 많이 밀어 물웅덩이 밀물에 잠겨버렸네


이때에 그만이야

강달소라 먹고 사는 이빨 센 오뎅이가 밀물 다라 떠들어 와

강달소라 보더니만 우두둑 우두둑 깨물었네


강달소라 껍질 쓰고 강달소라 꼴을 하고 강달소라 짓을 하던 

맏형 집게는 이렇게 죽고 말았네​


그런데

어느 하루 난데없는 낚시질꾼 주춤주춤 오더니 물웅덩이 기읏했네


이때에 그만이야

망둥이 미끼하는 배꼽조개 보더니만

낚시질꾼 얼른 주워 돌에 놓고 돌로 쳐서

오지끈 오지끈 부서졌네


배꼽조개 껍질 쓰고 배꼽조개 꼴을 하고 배꼽조개 짓을 하던

둘째 동생 집게는 이렇게 죽고 말았네

그런데 

어느 하루 부리 굳은 황새가 진창 묻은 발 씻으러 물웅덩이 찾아왔네


이때에 그만이야

황새가 좋아하는 우렁이 하나 기어가자

황새는 굳은 부리 우렁이 등에 쿡 박고

오싹 바싹 쪼박냈네

우렁이 껍질 쓰고 우렁이 꼴을 하고 우렁이 짓을 하던

셋째 동생 집게는 이렇게 죽고 말았네


그러나

막내동생 아무것도 아니 쓰고 아무 꼴도 아니 하고 아무 짓도 아니 해서

오뎅이가 떠와도 겁 안 나고

낚시질꾼 기읏해도 겁 안 나고

황새가 찾아와도 겁 안 났네

집게로 태어난 것 부끄러워 아니하는

막내동생 집게는 평안하게 잘살았네  

                                                                                     - 백석, 「집게네 네 형제」 -




 

누가 읽어봐도 동화시로써 흠잡을 데 하나 없이 완벽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시속에서도 안도현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물론 그가 백석을 표절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오마주라면 또 모를까.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는 간장이 울컥 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드렸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 안도현  「스며드는 것」 -



이제는 글을 써서 사는 삶보다 글도 쓰며 사는 삶을 살고 있지만, 불쑥불쑥 글만 써도 되는 삶을 꿈꾸곤 한다. 

특히, 시를 그것도 좋아했던 시를 읽을 때면 밀물처럼 멀미가 밀려오곤 한다.

 

아직도 미련이 남았나 보다. 미련이 남았다는 건 그만큼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제는 최선을 다할 자신이 없다.


굳이 내 글을 팔지 않아도 삼시 세끼 거룩한 밥상을 마주할 수 있고, 미래의 어느날 오래된 오늘을 꺼내봤을 때 남루하지 않을 추억 몇 조각 떠올릴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안도현 시인이 백석 시인을 떠올리고, 내가 안도현 시인을 떠올리는 것처럼...



시를 읽으면 삶이 깊어진다!
시를 읽어도 세월은 가고, 시를 읽지 않아도 세월은 간다. 그러나 시를 읽으며 세월을 보낸 사람에 비해 시를 읽지 않고 세월을 보낸 사람은 불행하다. 시 읽기가 새롭고 다양한 세계에 대한 하나의 경험이라면, 시를 읽지 않은 사람의 경험은 얕아서 찰방거리고 추억은 남루할 테니까 말이다.    

                                                             - 안도현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  후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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