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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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장2절)


 

모든 것이 헛수고다.


게이샤를 만나러 눈(雪)의 고장을 다시 찾은 시마무라의 눈(眼)길도...

남동생의 안부를 부탁하던 슬프도록 아름다운 요코의 목소리도...

시마무라를 보기위해 다다미 복도를 숨가쁘게 달리던 고마코의 종종걸음도...


다 헛수고다.


따지고 보면, 세상만사 헛수고 아닌 게 어디 있으랴.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지나간 계절에 대한 예의일지도 모르겠다.

잔설(殘雪)의 흔적이라도 찾듯 서둘러 이 책을 집어들었고, 그 유명한 첫 문장에 숨이 '턱' 막혀왔다.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듯 문장 속을 정처없이 헤매였던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얼추 한나절은 훌쩍 지나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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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인물도 사건도 특별하달 게 없다. 등장인물이라고 해봐야 도쿄에 가정이 있는 중년 남성 시마무라와 한촌(寒村)의 게이샤인 고마코 그리고 스물 살도 채 안된 요코라는 여자가 전부다.


시마무라는 물려받은 재산으로 별다른 직업 없이 직접 보지도 않은 서양무용에 대한 평론이나 쓰면서 하릴없이 지내는 중년 남자다. 온천마을에 휴양차 왔다가 고마코를 만난다. 고마코는 약혼자(유키오)의 병구환을 위해 게이샤로 나섰다는 소문이 있으나 본인은 극구 부인한다. 공연 도중 시마무라의 방을 수시로 찾아올 정도로 그에게 푹 빠져 있다.


한편, 고마코를 만나기위해 두번째로 마을을 찾아오던 시마무라는 우연히 요코와 같은 기차를 타게 된다. 옆자리에 비스듬히 앉은 남자(유키오)를 살뜰히 보살피는 요코의 모습에 시마무라는 처연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 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12쪽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작품은 작가의 체험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실제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34년 군마현과 니키타현 접경 지역에 위치한 에치고 유자와 온천마을의 한 료칸(여관)에 머물렀는데, 당시 마을 게이샤였던 마츠에라는 여인이 이른 새벽 소복히 쌓인 눈을 녹여 목욕물을 준비해놓는 등 지극정성으로 그를 보살폈다고 한다.  작품 속 고마코는 바로 마츠에를 모델로 탄생한 인물이고, 요코는 작가가 창조해낸 인물이다.


그래서였을까.


요코에 대한 묘사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희뿌연한 안개와 같다면, 고마코의 모습은 훨씬 더 생생하며 마치 손에 잡힐 듯 육감적이다. 



여자의 인상은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했다. 발가락 뒤 오목한 곳까지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쪽


한번 마음을 주면 밑바닥까지 전부를 내어주지 않으면 안되는,  

아무리 감추려고해도 눈 위의 붉은 꽃처럼 투명하게 속마음이 비춰지는, 그런 여자다.

 


하지만, 그런 고마코의 사랑이 시마무라에게는 다 부질없는 것으로 보인다.

 

 


온천 여관에서 여자 안마사로부터 게이샤의 신상 이야기를 듣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인데 오히려 뜻밖이기도 했다. 고마코가 약혼자를 위해 게이샤로 나섰다는 얘기도 너무나 상투적인 내용이어서 시마무라는 곧이 받아들일 수 없는 심정이었다. 도덕적인 생각에 맞부딪힌 탓인지도 몰랐다. 그는 이야기를 좀더 깊이 캐물어 보고 싶었으나 안마사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고마코가 아들의 약혼녀, 요코가 아들의 새 애인, 그러나 아들이 얼마 못 가 죽는다면, 시마무라의 머리에는 또다시 헛수고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고마코가 약혼자로서의 약속을 끝까지 지킨 것도, 몸을 팔아서까지 요양시킨 것도 모두 헛수고가 아니고 무엇이랴.

고마코를 만나면 댓바람에 헛수고라고 한방 먹일 생각을 하니, 새삼 시마무라에겐 어쩐지 그녀의 존재가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졌다. -54~55쪽


 

한때는 세상의 전부이지만 지나고나면 아무것도 아닌 마음의 사치일 뿐...

원래, 사랑이란 게 이런 것이지 않던가.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지나고보면 다 부질없는 일장춘몽일 뿐...

원래, 인생이란 게 이런 것이지 않던가.



 

일기 이야기보다 한결 시마무라가 뜻밖의 감동을 얻은 것은, 그녀가 열대여섯 살 무렵부터 읽은 소설을 일일이 기록해 두었고 따라서 잡기장이 벌써 열 권이나 된다는 사실이었다.

 「감상을 써두는 거겠지?」

 「감상 따윈 쓰지 않아요. 제목과 지은이, 그리고 등장인물들 이름과 그들의 관계 정도예요.」

 「그런 걸 기록해 놓은들 무슨 소용 있나?」

 「소용없죠.」

 「헛수고야.」

 「그래요.」 하고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밝게 대답했으나 물끄러미 시마무라를 응시했다.

전혀 헛수고라고 시마무라가 왠지 한번 더 목소리에 힘을 주려는 순간, 눈(雪)이 울릴 듯한 고요가 몸에 스며들어 그만 여자에게 매혹당하고 말았다. 그녀에겐 결코 헛수고일 리가 없다는 것을 그가 알면서도 아예  헛수고라고 못박아 버리자, 뭔가 그녀의 존재가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졌다. -38쪽



 

줄거리도 재미도 별로 없는 소설 한 편을 읽었다고 인생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몇 시간에 걸쳐 낑낑거리며 독후감을 쓴다고 세상이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따지고 보면,

다 부질없는 헛수고일 뿐인데...


왠지 순수하게 느껴진다.

온세상이 흰눈으로 뒤덮인 풍경 앞에 섰을 때처럼, 모든 것이 새하얘졌다.



 

사방의 눈 얼어붙는 소리가 땅속 깊숙이 울릴 듯한 매서운 밤 풍경이었다. 달은 없었다. 거짓말처럼 많은 별은, 올려다보노라니 허무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고 생각될만큼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별무리가 바로 눈앞에 가득 차면서 하늘은 마침내 머언 밤의 색깔로 깊어졌다. 서로 중첩된 국경의 산들은 이제 거의 분간할 수가 없게 되고 대신 저마다의 두께를 잿빛으로 그리며 별 가득한 하늘 한 자락에 무게를 드리우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맑고 차분한 조화를 이루었다. -40쪽



 

시리도록 눈부신 문장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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