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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맨 부커상 수상작으로, 2012년 국내에 출간된 이후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비롯해서 각종 미디어의 집중 조명을 받았던 작품...
한결같은 극찬과 함께 쏟아지던 예언들(?)....
이중 가장 압권이었던 건, '마지막 반전으로 책을 다 읽은 다음,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된다'는 예언이었다.
그만큼 난 이 작품에 대해서 읽기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에 압도 당하고 말았다.
마지막 책장을 덮자마자 충격에 휩싸인 채, 내가 이해한 결말이 맞는지 확인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을
미처 다 입력하기도 전에 자동 검색 기능으로 완성된 문장 역시,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결말'이었다.
책 한권을 읽은 후 이처럼 누군가와 미치도록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던 적도 처음이다.
일단 밖으로 나가서 걸었다. 걷고 또 걷고...
생각이 멈추면 걸음도 멈추고... 생각이 이어지면 걸음도 다시 이어지고...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걸고 싶은 욕망을 꾹꾹 누르면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작품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작가를 비롯해서 이 작품을 나보다 먼저 읽었던 사람들이 예언(?)한 그대로...
맨 부커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었을 때 150여 페이지밖에 안되는 짧은(?) 작품 길이가 문제가 되자, 줄리언 반스는 '수많은 독자들이 나에게
책을 다 읽자마자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고 말했다. 고로 나는 이 작품이 삼백 페이지짜리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단다.
작가의 예언대로 하기에 앞서 나는 우선 이동진의 빨간책방부터 뒤졌다. 그리고 진작부터 그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단 한편도 들어보지 않았던
'빨책'을 처음으로 들었다.
우선 이동진 기자는 원문 제목을 언급하면서 제목의 한국어 번역을 걸고 넘어갔고, 김중혁 작가는 '반어'라고 되받아쳤다.
그렇지만 영어 원제목을 눈여겨 보지 않았던 나로선, 이 작품의 한국어 제목이 상당히 좋다고 생각했더랬다. 그래서 독후감 제목도 '예감은 종종 틀리지 않고, 기억은 언제나 왜곡된다'로 정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눈치챘을 수도 있지만, 나는 예감을 '예언'으로 해석했다.
이 작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경솔한 예언이 현실이 되면서 불러온 비극으로 인한, 돌이킬 수없는 회한'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이 작품을 읽으면서 단순히 사건만을 쫒는다면 그러니까 사건의 발생 원인과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 여부에만 집중한다면 작품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므로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작품의 줄거리를 두고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라는 따위의 질문일랑은 더 이상 하지 말기로 하자.
'빨책'의 두 남자들은 사춘기 남자애들의 우정을 다룬 앞부분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듯 싶었다. 이동진기자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비유했고,
김중혁 작가는 남자애들이 주고 받는 농담에 포복절도했음을 고백했다.
반면 나는, 40여년의 시차를 두고 펼쳐지는 1부와 2부는 소위 '평행이론'이 완벽하게 작용한 사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부에서 했던 등장인물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는 2부를 불러오는 '기폭제'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역사 수업 시간의 문답들은 작품의 핵심 주제와 이어지며, 롭슨의 자살은 에이드리언의 자살과 놀랍도록 닮아있고,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수천년 동안 천편일률적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거...
1부가 2부를 존재하게 하는 소위 '복선'이라고 한다면, 2부는 시야가 훨씬 확대되어 삶과 인생을 아우른다. 나는 '시간과 세월' 그리고 '나이 듦'에 대한 토니의 독백 부분에서 여러차례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나는 이 작품의 주제를 두개로 나누어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모든 기억은 왜곡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이듦의 의미' 즉 '시간의 의미'와 '시간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하는 문제라 하겠다.
더 정확히 말해 철학자를 고를 수 있는 가짓수가 하나 더 늘었다. 앨릭스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을 읽었다면, 에이드리언은 카뮈와 니체를
읽었다. 나는 조지 오웰과 오더스 헉슬리를 읽었다. 콜린은 보들레르와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 어디까지나 도식화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p22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서 그는 검시관에게 자신의 자살 이유를 설명해놓았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p88
이야기는 세명의 친구 집단에 새로운 전학생이 끼어들면서 시작된다. 문제는 이 전학생이 범상치 않다는 것. 그가 카뮈와 니체를 읽었다는 건,
단순히 똑똑한 걸 너머 '실존'의 의미를 깨닫고 있음을 의미한다. '삶이란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되는 선물'이라는 것이야말로 카뮈 문학의
핵심이자 니체 철학의 시작이지 않은가.
'탄생 은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소멸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소멸' 즉 '자살'
이야말로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하겠다. 독자인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에이드리언의 죽음(혹은 자살)을 일찌감치
예감했더랬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그런가, 과연? 어디에서 읽었나?"
"라그랑주입니다. 타르리크 라그랑주. 프랑스인입니다."
"그런 추측을 할 수도 있겠지. 예를 들어 설명해줄 수 있겠나?"
"롭슨의 자살이 그 예입니다." -p34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가깝다는
것을. -p101
역사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는 역사 선생님(조 헌트)의 질문에 토니가 '역사란 승자의 거짓말일 뿐'이라고 답하자, 선생님은 그건 '패자의
자기변명이기도 하다'고 답한다. 이에, 에이드리언은 위 인용문에서 보듯, '역사란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자기
확신'이라고 답한다. 이 문장이 왜 그렇게 중요하며 여러 사람들에 의해 회자되는지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난 다음 깨닫게 된다.
한가지 재미있는 건, 빨책에서 라그랑주라는 프랑스인은 가공의 인물로, 줄리언 반스의 'Barnes'가 불어로 '마구간'이라는 뜻이
있는데, 마구간을 불어로 '라그랑주'라고 한단다. 그러므로 작품 속의 그 문장은 '줄리언 반스 가라사대~'라고 하겠다. 작가의 '위트'에 미소짓게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40년이 물처럼 흘러간 후,
토니는 역사란 승자의 기록도 패자의 변명도 아닌 살아남은 자의 기억 즉 회고에 가깝다.고 자신이 40년 전에 했던 대답을 수정한다.
이 문장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머물렀다.
내가 왜곡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올라서...
당시에는 끔찍하고 고통스러웠던 일조차도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연유를 이제서야 알 것 같다. 그건 바로 그 기억을
떠올릴때마다 조금씩 기억을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말 전달하기'라는 게임만 보더라도 두 세 사람을 거친 말(이야기)이 어떻게 변형 왜곡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섣불리 '지나간 모든 것들은 아름답다'고 주장하며, 과거에 대한 화해와 용서를 권장하는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p162
젊을 때는 서른 살 넘은 사람들이 모두 중년으로 보이고, 쉰살을 넘은 이들은 골동품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시간은, 유유히 흘러가면서 우리의
생각이 그리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해준다. -p107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과 천양지차인 삶을 허황되게 꿈꾸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게 자기만족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상상력이나
야심의 부족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아마도 사실은, 그렇다, 내가 인생을 살면서 결국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들을 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별종은 못 돼서 그런 것 같다. -p114
살아갈 날이 줄어들수록 헛되이 살고 싶지 않게 된다. 그게 당연한 거 아닌가. 자투리 시간을 아무리 잘 활용한다 해도......여튼, 그건
젊었을 때는 미처 예견하지 못하는 문제 중 하나다. -p120
나도 그랬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내가 십대였을 때, 30살 넘은 선생님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게 재밌어하고 흥분하는 일들에 대해서 그들은 어쩌면 그렇게 무심하고 무덤덤할
수 있는지...? 시간은 너무도 느려터졌고 매순간이 참을 수 없이 따분하고 심심하건만, 그들은 어째서 입만 열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말하는 것인지...? 당시의 나로선 이해불가였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삶은 물처럼 흘러간다는 걸....
느리기만 하던 세월은 마치 구름처럼 흩어져 사라진다는 걸....
처음엔 한없이 친절하기만 하던 시간이 결국은 뒤통수를 친다는 걸...
이십대에는 자신의 목표와 목적이 혼란스럽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도, 인생 자체와, 또 인생에서의 자신의 실존과 장차 가능한 바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후로......그후로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억을 지운다.
-p182
십대와 이십대 초반의 나는, 스스로 마흔쯤 되면 세상의 스승이 되어 있을 줄 알았더랬다.
이렇게 기껏(?) 소설이나 읽고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마음 한켠이 조여들며...
윗니와 아랫니를 앙당물고...
나도 모르게 자꾸만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할 줄은... 미처 몰랐더랬다.
토니도 그랬을 것이다.
아마 미처 몰랐을 것이다.
십대를 막 지난 이십대 초반, 타인을 죽음으로 내몰 만큼, 타인의 삶을 절망 속으로 던져 넣을만큼, 자신이 얼마나 경솔하고 치사하며
유치했었는지를...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난생 처음, 나는 내
온 인생에 대해 한결 총체적인-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후회의 감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살아온 어느 하루도 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젊은 시절 알게 된 친구들을 잃었다. 아내의 사랑을 잃었다. 즐겼던 야망을 저버렸다. 인생이 너무 성가시지 않기를 바랐고 성공을
거두었다. 이 얼마나 옹색한 일인가. -p173
40년이 지난 어느날.
그는 회한에 젖는다. 자신이 지나온 물같은 삶속에 젖는다.
죄책감도 미안감도 아닌,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의 중간 어디쯤에 젖어든다.
이 책은 내용만 놓고 본다면 통속연애소설이고, 플롯과 전개방식만 놓고 보면 반전이 돋보이는 영락없는 추리소설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명작이다.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인간의 마음 속 저 깊은 곳까지 훤히 비추는 절대거울이요, 시간과 세월과 삶과 나이 듦의 의미을
알려주는 절대사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