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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읽었다. 1993년 작품이니 지금으로부터 무려 20여년 전에 쓰여진 작품이다.
비록 이야기는 80년대초 일본의 거품 경제가 정점을 향해 달려갈 때부터 전개되지만, 작품 속 사건이 발생한 시점은 정확히 1990년도다.
1964년 생인 작가 역시 작품 속 주인공들처럼 80년대에 20대를 보내고 막 서른에 접어든 시기였으리라.
'실체를 잘 바라보기 위해서 적당한 거리를 둬야 한다.' 라는 말이 있다.
자세히 보겠다는 욕심에 실체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오히려 기형적으로 왜곡된 모습만을 보게 된다. 사회 현상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를 알기 위해서는 '거리두기'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뒤를 이어 일본 사회를 실시간으로 그려내는 작가로 유명한
미야베 미유키야말로 현장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현장에 경도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실체를 파악할 줄 아는 지적인 작가라 하겠다.
<화차>는 바로 작가의 '현실 속에서 거리두기를 통한 현실 표현'이란 특징이 처음으로 부각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아내를 자동차 사고로 어이없이 잃은 형사 혼마는 아내의 먼 친척(구리자카 가즈야)으로부터 갑자기 사라져버린 약혼녀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녀의 이름은 세키네 쇼코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세키네 쇼코가 되고 싶었던 신조 교코였다.
세키네 쇼코는 어릴 때부터 행복이라는 걸 느껴 보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옛날의 자신. 지금의 자신이 아닌 무언가가 되기 위해 언제나
초조했던 것이다. 그건 우연히 쇼코가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자라서라든지 성적이 나빠서라고 하는 그런 개별적인 요인에서 파생된 초조함이 아니다.
그건 누구나가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바람이 살아가는 동력이며, 그 초조함이야말로 그가 하나의 개인이라는 증거이다.
세키네 쇼코는 그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그리 현명하지 못한 방법을 선택했다. 그렇게도 바랐던 자신의 모습을 찾는 대신에
그러한 모습을 찾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거울을 산 것이다. -p287
그 철근과 같은 존재 의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그녀는 그런 여자다. 그리고 그런 여자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p128~129
'신조 교코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으면 더 이상 평화로운 인생은 기대할 수 없다' 그녀는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p305
세키네 쇼코와 신조 교코는 결국 '지긋지긋한 현상황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고 싶다'는 동일한 소망 때문에, 하나는 타인에게 목숨을 잃고 또
다른 하나는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다. 그렇지만 둘 다 끝끝내 행복해지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둘다 실패자이자 피해자다.
작가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이들을 이런 상황으로까지 몰고간 사회구조일 것이다. 세키네 쇼코의 개인파산신청을 도와줬던 변호사의 입을
통해 '한번 사채에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구조'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한 점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회구조'에게는 죄를 물을 수 없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영악하고 계산적이며 자기방어적인 사람의 편을 들어주고, 마음씨 착하고 여린 사람은 가차없이 차버리는 그런 곳이다.
순박한 세키네 쇼코가 너무 불쌍해서 가슴이 미어지고....
신조 교코의 집요함과 잔인함에 치가 떨리면서도 한편으론 그녀를 그렇게 만든 이 사회에 화가 난다.
그렇다면, 세키네 쇼코와 신조 교코는 아무런 죄가 없단 말인가?
작가는 범죄의 구성과 방법 그리고 해결 등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치 자세하게 심지어 불필요한 설명까지 덧붙이기를 망설이지 않으면서도 세키네
쇼코와 신조 교코라는 등장인물에 대해서는 철저한 '거리두기'로 일관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들의 인간성이나 성품을 최대한 단순하게
그려냄으로써-혹은 독자의 감정이입을 방해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독자의 판단을 유보시키는 전략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이는 물론 사회구조에 원인과 책임을 묻겠다는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한편으론 모든 범죄를 발생 원인과 동기에만 무기
중심을 둠으로써 소위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범인옹호론을 확산시키는데 일조하는 건 아닌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사실, 사람들은 스스로 상황을 지배하거나 바꿀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에 대한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 세키네
쇼코 및 신조 교코와 같은 입장에 처한 사람들이 모두 그들과 똑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세키네 쇼코와 신조 교코가
불쌍하긴 하되,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에는 지난 2000년도에 처음으로 이 책이 번역 출판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로부터 2~3년 뒤 소위 '카드대란'이 일어났다. 1997년 아시아경제위기로 고꾸라진 경제를 내수소비
신용금융으로 이끌어보겠다는 과욕이 불러온 결과였다. "부자 되세요!"라는 카피문구로 유명한 어느 카드회사의 광고에 온 사회가 매혹된 채, 그
누구도 카드의 위험성을 경고하지 않았더랬다. 그리고 이 책은 그저 그런 책으로 독자들의 관심권 밖에서 맴돌다가 2010년대에 와서야 동명 영화가
제작되면서 새롭게 관심을 받게 된 경우다.
만약,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당시 <화차>라는 책이 출간되던 2000년대 초반 이 책이 전달하는 메시지에 우리가 좀 더 귀를
기울렸더라면 어땠을까?
과거에 얽매여 이웃나라 일본이라면 무조건 손가락질부터 할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타산지석으로 삼았더라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어땠을까?
최소한 '카드대란' 사태 따위는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아무리 일본이 밉고 싫더라도 이 점만은 잊지 말자!
일본은 우리보다 한걸음 아니 두 세걸음 앞서가면서 우리 사회의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걸 말이다.
내가 이 작품을 알게 된 계기는 실제 한국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재조명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오갈 데 없는 '쉼터'에 있는 젊은
여성을 40대 여성이 취업시켜 주겠다면서 데리고 나와서는 약물로 죽이고는 자신과 그녀의 신분을 맞바꿔치기 한 사건이었다. 죽은 여인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사망신고를 한 그녀는 미리 가입해 놓았던 생명보험의 법정수령인을 죽은 여성의 이름으로 바꿔놓은 후 보험금을 받으려다 발각된
사건이었다.
이처럼 보험금을 노린 사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름을 도용하여 그 사람으로 행세하려는 사회 병리적 현상(소위 '리플리 증후군')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은 인터넷의 가상 세계와 소셜네크워크 속에서의 '나'와 현실 세계의 '나'라는 두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현대인에게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