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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읽는 여인
브루노니아 배리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 아니 책읽기였다.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과 주제의식이 빛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구성이 책읽기를 심각하게
방해했다.
이야기는 타우너 휘트니라는 본명을 갖고 있던 소피아라는 여자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녀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과거의 일부 기억을
상실하는 증상을 앓고 있다. 이와 같은 그녀의 증상들은 사실 외상성증후군이라 할 수 있겠고 작품의 기본 줄거리가 바로 그녀에게 외상을 입힌
'과거'라 하겠다.
그녀는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리고 부모 복이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빠가 되어서는 안되는, 한마디로 인간이 아닌 인간을 아빠로 두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현명한 할머니와 이모를 두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사실 작품의 줄거리와 주제는 퍽 일반적이고 단순하여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다. 즉, 어린 나이에 친족에게 성적 학대를 받은 여성이
성인이 되어서도 고통을 받다가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자긍심을 되찾고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영화 디렉터로 일한 바 있다는 작가는 작품속에서 영화처럼 영상적 효과를 도모하고 레이스라는 소품을 통해 신비로움과 상상력를
불어넣어 진부한 이야기를 멋스럽게 바뀌어 놓았다. 마치 흔해빠진 음식 재료를 이용하여 독특한 맛을 내는 새로운 요리로 탈바꿈 시키는 것처럼...
하지만 정체 불명의 '퓨전 요리'를 누구나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듯이 상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이야기 전개 방식은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고
심지어는 '기만'당했다는 느낌마저 갖게 만든다.
독자를 굳이 '혼란한 상태로 몰아넣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작가가 영화 속 장면이나 허리우드식 반전을 지나치게 의식한 게 아닌가
싶다. 영화라면 특수효과 등으로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장면을 훨씬 더 잘 표현할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첫단추가 잘못 채워진 듯 싶다.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애매모호하고 잘못 전달되다 보니 그렇지 않아도 구성 자체의 특징으로 혼란스러운 독자의 머리는 등장인물들의 관계도와
가계도를 그리는데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아부어야만 한다.
나는 첫 도입부분에서 주인공 타우너 휘트니가 '휘트니 집안 여자들은 괴짜다.' 등의 내용을 설명하는 단락에서 당연히 부계(父系)쪽이라고
생각했더랬다. 미국 사회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아버지 성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바 할머니를 타우너 휘트니가 자신의
고모할머니라고 했기 때문에 더더욱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더 책장을 넘기자, '에바는 내 할아버지 지지 휘트니의 두 번째
부인이다.' 라는 대목이 나오는가 싶더니, "우리 엄마 메이의 집과 이모 엠마 보인튼의 집 두 채 뿐이다. 엠마 이모는 에바 고모할머니의
딸이고, 우리 엄마 메이와는 이복자매이며, 내 쌍둥이 자매 린들리의 호적상의 어머니이다. (.....) 엠마가 '사고'를 당하기 전, 그러니까
이모와 이모부가 부부로 살았을 때, 엠마와 엠마의 수양딸 린들리는 휴가철에만 섬에서 살았다. 물론 이모부도 포함해서. 이모부인 캘빈 보인튼도
사람으로 친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사람으로 치지 않는다.(p61)" 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성이 같으므로 당연히 지지 휘트니를 친할아버지로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외할아버지였다. 그리고 고모할머니라는 에바가 지지 휘트니의 두번째
부인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럼, 할아버지가 자신의 여동생과 재혼을 했단 말인가? 워낙 막되먹은 괴짜 집안이라고 소개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더랬다. 그래도 고모할머니라는 호칭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고모할머니란 아빠나 엄마의 고모로인 대고모를 고모할머니로 부르기
때문이다. 주인공 타우너 휘트니의 아빠는 등장(?)하지 않고 엄마 메이만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그녀는 부계(父系)가 아닌 모계(母系) 성을
따르고 있으며, 에바는 그녀의 고모할머니가 아니라 외할머니여야 맞다.
참!
그리고 타우너 휘트니의 십대 시절 남자친구인 잭은 린들리의 자살 장면을 타우너와 함께 목격한 것인가 아닌가? 잭과 함께 목격했다고 타우너가
상상한 것이라면 린들리가 죽기 전의 잭의 여자친구는 린들리가 아니라 타우너란 말인가?
이 뿐만이 아니다.
친딸을 성적으로 학대한 인간 아닌 인간으로 나오는 캘빈 보인튼은 클럽의 요트 선수였는데 어떻게 캘빈교의 교주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와 안젤라는 어떻게 만났으며 사랑하는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세일럼이란 도시에선 마녀 사냥이 가능한 걸까?
이 밖에도 앤과 레퍼티의 등장과 역할은 무엇일까?
아, 정말 모르겠다.
상당히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몰입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만약, 다시 읽는다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인건만은 확실해보이는데... 제대로 즐기고 느끼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환타지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다. 이제부터 읽을 책이 환타지 소설의 선두주자라 할만한 톨킨의 <호빗>인데 벌써부터
걱정된다.